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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 제도와 계대 결혼
신 25:1-10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신 25:1-10 / [태형의 한계] 사람들 사이에 싸움거리가 생겨서 법정으로 오거든 여러분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악인에게는 유죄를 선고하십시오. 2) 만일 악인에게 태형을 내리게 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그의 죄에 해당된 만큼 채찍을 때리게 하십시오. 3)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40대 이상을 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죄인이지만 여러분의 동족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까지 손상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4) [가축 보호 규정] 타작마당에서 탈곡기의 멍에를 메고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곡식을 마음대로 먹으면서 일을 하게 하십시오. 5) [시형제 결혼 규정] 만일 두 형제가 한 집에 살다가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때 그의 아내는 집에서 나가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동생의 의무입니다. 6) 그래서 그가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아들로 삼아 형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7) 그러나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절하면 그 과부는 성문 앞의 광장으로 가서 장로들에게 `나의 시동생은 나와 결혼하여 자기의 죽은 형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잇도록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8) 그러면 장로들이 그 동생을 불러다가 물어 볼 것입니다. 만일 그래도 그가 계속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절하면 9) 그 형수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시동생에게로 가서 그의 신을 한짝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의 가문을 이어 주지 않는 자는 누구나 이런 수치를 당한다' 하고 망신을 주어야 합니다. 10) 그 뒤부터는 그의 집안이 온 이스라엘에서 `신발을 벗긴 자의 집안' 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실천 범위가 사회적 약자를 넘어 배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법한 대상인 범법자와 동물, 죽은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경계를 확인합니다.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1-3) 고대 이스라엘의 형벌에는 사형과 체형, 벌금형이 있었고, 체형에는 매를 때리는 태형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대로 형벌을 가하는 보복형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중 태형을 가하는 방법에 관한 규정입니다. 태형의 집행은 생명 유지와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인 40대 이하로 제한됩니다(고후 11:24). 형벌의 목적이 처벌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다시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범법자를 여전히 형제로 대우하는 이 규정의 바탕은 범법자 역시 잠깐 빗나갔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한 지체라는 공동체 인식입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4)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탈곡 작업에 소가 동원되었는데, 탈곡 작업 도중 소가 곡식 낟알을 주워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고전 9:9). 이스라엘이 이루어야 하는 공동체는 짐승도 포함합니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5-10) 이전부터 있던 계대 결혼이 율법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창 38:11). 이 규정은 남편과 사별한 여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그녀에게 남편을 붙여 줌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지위로 전락해 버린 그녀의 생활을 보장하려는 사회적인 조치입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지 않고 계승하게 하려는 신앙적인 조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 율법 조항은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 의지를 계시합니다(룻 4:10; 마 1:1-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인간 구원의 약속이 율법 조항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창 12:2).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관념이나 허공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일상이라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적용: 내 신앙의 범위는 어디까지 미치고 있습니까? 내 신앙은 나의 일상과 생활이라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까?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성실하게 자기 삶을 개척 세계적인 [자동차 왕]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헨리 포드입니다. 포드는 거부가 된 다음에도 옛날 농사꾼의 아들로 뛰놀며 자란 농촌에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집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포드는 웃으며 “나는 집을 짓기보다는 가정을 만들기 원하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방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장작을 패 불을 지펴라. 두 배로 따뜻해진다.”
< 설 교 >
공의로운 삶을 위한 3대 규례
신명기 25:1-4 / 이한규 목사
1. 공의를 따라 재판하라
재판할 때 의와 불의가 뒤바뀐 판결이 생기지 않도록 재판장은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정죄하라고 했다(1절).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때가 많다. 첫인상과 외모가 좋으면 소개받을 때나 취직할 때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외모가 부족하고 장애가 있어도 의와 선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최고의 미남미녀다. 외모가 좋으면 심지어는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도 덕을 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나 재물 등으로 재판의 공의가 실종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민심이 이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의의 상실’이다. 공의의 상실을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게 하는 것은 ‘재판에서의 공의의 상실’이다. 힘은 공의를 조작할 수 있고 특히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조작과 음해를 쉽게 시도할 수 있다. 그런 조작과 음해에서 자신을 공의로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언론인과 종교인이 공의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공의의 최후 보루인 재판관이 공의를 잘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공의를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 책임만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힘에 의해 조작된 여론에 의해 바른 판단을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법 지식을 많이 가진 재판관조차 바른 판단을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지 않고 최대한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줄 알고 내리려는 마음을 가진 재판관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사회에 주신 실제적인 큰 축복 중의 하나다. 그런 사회적인 축복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공의를 따라 바르게 재판하라는 규례를 주셨다.
2. 기본 인권을 존중하라
태형을 집행할 때는 4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했다(2-3절). 후대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할 때 40대에서 한 대를 뺀 39대까지만 때렸다. 착오로 40대 이상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태형을 집행할 때 3가닥으로 된 채찍을 사용했기에 14번을 때리면 40대를 초과해 42대를 때린 셈이 되기에 13번을 때려 총 39대까지만 때렸다. 그 태형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5번 당했다(고후 11:24).
4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려 불구로 만들거나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40대 이상 형벌을 가할 정도로 중죄를 범하면 처형시켜야 했다. 40대 이상을 때리면 형제를 경시하는 것이 된다는 규례는 너무 심하게 매질해 흉측한 불구가 되지 말게 하란 뜻이다. 이 규례는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을 내려 정의를 세우려고 하더라도 타인의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규례다. 범죄자도 기본 인권은 보호하라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다.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등장했을 때 많은 지성인들과 언론인들이 나치에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일부라도 교회가 나치에 저항하면서 인권과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기독교회를 존경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나아가는 교회는 인권 존중을 선도해야 한다. 그러면 사회는 조금이라도 새로워지고 역사는 더디더라도 전진할 것이다. 성도에게 사람을 존중하는 삶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 이전에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3. 일꾼을 먹고살게 해주라
곡식을 타작할 때 인정 없는 주인은 소가 곡식 단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웠는데 그렇게 인정 없게 굴지 말고 소도 일하면서 곡식 단을 먹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4절). 짐승이라도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암시다. 예수님이 전도자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 10:10)고 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전 9:9-14; 딤전 5:18)고 한 것도 본문의 원리에 근거했다.
왜 이런 말씀이 있게 되었는가? 당시에 몇몇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은혜로 하는 것이지 무슨 사례가 필요한가? 사역자는 배가 고파야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영성이 깊어져!”라고 하면서 풀타임(full time)으로 일하는 사역자의 필요에 무관심했다. 그런 태도는 리더를 존경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를 존경하면 목회자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리더에게 정당한 대가를 기쁘게 드리는 것은 리더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표시 중의 하나다.
기본적으로 일한 만큼 먹고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 일만 시키지 말라. 일도 시키고 누리게 해주면서 일꾼을 정당하게 대우해주라. 최소한 일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해주라. 더 나아가 기업가는 일꾼에게 정당한 것 이상의 대우를 해줌으로 행복을 선사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 구절이나 명령을 율법적으로 꼼꼼하게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누군가에게 대우 이상의 대접을 해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임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지향해야 할 가치
신 25:1-19 / 양민국 목사
1.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살필 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의 사람들이 지향해야 하는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들이 지켜야 할 규례들 그리고 신약에서 은사에 대한 가르침 등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불어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이 무엇인지 알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더불어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모두가 함께 잘되는 삶이고 서로가 서로의 연약함을 보충해 줌으로 함께 온전함에 이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불완전한 우리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예들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이야 말로 모두가 함께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사느냐 실패의 삶을 사느냐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지향하며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룻이 실패한 시어머니를 떠났다면 룻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룻과 시어머니가 그토록 복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만일 요나단이 무기를 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라고 말했을 때 그 소년이 요나단에게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14:7)”라고 말하며 요나단을 따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사르밧 과부가 자신과 아들이 먹을 수 있는 한 끼 분의 음식을 선지자 엘리야와 나누지 않았더라면 삼년 육 개월 간의 기근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여기 룻과 소년 그리고 사르밧 과부는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삶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웃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성경에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잃어버림으로 넘어진 예들도 있다. 만일 애굽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살고자 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이스라엘의 형통함을 시기함으로 또는 그들의 번성함에 대하여 위협을 느낌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이스라엘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 애굽은 모든 장자의 죽음을 맛보아야 했고 또한 애굽이 그토록 자랑하던 군사들을 홍해바다에 수장해야 했다. 이처럼 애굽이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행한 바로 그 일이 자신들을 넘어지게 한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예를 앗수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모든 민족이 자신들 앞에 굴복하고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독단에 빠졌다. 그래서 전쟁을 하여 한 나라를 정복했을 때 조공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고 정복한 민족의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한 나라에 이민족을 이주시켜 통혼하도록 하는 잔인한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와 같은 사악하고 잔인한 정책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그들이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고자 했더라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우리는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수많은 예들을 찾는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종종 정치나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도박과 유흥을 위하여 많은 돈을 탕진한 소식들을 듣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 돈을 더불어 사는 일에 사용했더라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이와 같은 노력들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복된 삶을 살게 되어 사회 전체가 보다 더 밝아졌을 것이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기 보다는 불안을 가져다주는 정치인들이 서로에 대해 헐뜻기 보다는 잘한 것을 격려해 주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준다면 나라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이처럼 더불어 사는 삶은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격려해 주고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줌으로 함께 온전함에 이르는 삶이고 또한 함께 복된 삶을 사는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더불어 사는 삶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가 더불어 사는 삶에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무엇보다 먼저 더불어 살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더불어 사는 문화란 어떤 것인지 말해 준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공의에 기초한 문화, 다른 하나는 배려가 있는 분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규례들이 있는 문화다.
더불어 사는 삶은 공의에 기초한 문화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이다. 여기 공의에 기초한 문화란 단순하게 말하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를 말한다. 1절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우리의 경험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못할 때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는 이미 이런 문화가 붕괴되었다. 교회에서조차 이런 문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옳은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을 옳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의 사회가 이처럼 혼란스러운 것이다. 언제나 말해 온 것처럼 우리만이라도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용기를 갖자. 내가 좋아 하지 않는 사람 또는 공동체일지라도 옳은 일을 하면 그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이고 또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는 선호하는 공동체가 그른 일을 할 때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이와 같은 용기는 지식에 근거하여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정말 무엇이 옳은지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규례들이 정착한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할 수 있는 삶이다. 넒은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규례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율법 또는 규례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이정표가 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언제나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본문에서도 재판에 대한 규례(25:1-3), 수고한 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어야 한다는 규례(25:4), 수혼(嫂婚)에 대한 규례(25:5-12), 상거래(商去來)에서 지켜야 할 규례, 아멜렉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규례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가치로 인도해 주고 또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규례들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이정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더불어 살 수 있는 규례들이 문화로 정착되어 있을 때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은 배려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란다.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섬김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섬김이란 그 말 자체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보다 더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이 이웃들에 대하여 세워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문화가 정착될 때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율법들 가운데 최상위 법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사랑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섬김 또는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형수와 결혼하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녀를 낳지 못하고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주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율법 중의 최상위 법인 사랑에서 볼 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님과 바라새인들과의 논쟁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주님은 모든 법들 가운데 최상위 법인 사랑에 따라 행하였다. 이것이 때로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거슬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점에 있어서 주님과 논쟁한 것이다. 여기 배려가 정착된 문화란 이처럼 사랑의 법을 최상위 법으로 알고 실천하는 문화를 말한다.
토양은 중요하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토양이 나쁘면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다(마13:1-9). 삶의 토양은 문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는 더불어 사는 삶인데 이를 위하여 공의에 기초한 문화, 문제해결을 위한 규례들이 정착된 문화 그리고 배려가 정착된 문화가 요청된다. 우리에게 거대한 사회를 개혁하라고 말한다면 또는 나라의 문화 자체를 바꾸라고 말한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변화 시킬 수 있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의 문화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 나갈 때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를 통하여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탐욕에 이끌려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불어 사는 삶의 기치를 실현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무너진 곳들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