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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며칠 병원 신세 지다 보니 글을 제때에 이어 올리지 못한 점 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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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휴전담판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며 사이사이에 세력을 과시하는 전투도 끊이지 않았다. 아래 상감령 전투와 한반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금성전투에 대해 조금만 소개 한다.
1. 상감령전역( 1952년10월14일부터 11월25일까지)
《1950.6.25 –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다》를 마무리 하기전에 “상감령전역”(중국에서는 이렇게 칭함)에 대해 소개하고저 한다. 남한은 이를 “저격능선전투(Sniper Ridge)”라고 칭하며 남한군 승리로 말하며 철원에 기념비도 있다고 한다. 사실 남한측은 전투범위를 “저격능선”에 국한시켰고 중국측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전투를 포괄시킨, 보다 광범위한 범위를 말한다. 이러니 의견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래 소개하는 “상감령전역”은 중국측의 자료를 위주로 정리한 것이기에 중국측 감정색채가 보여질 때도 있을 수 있다.(최대한 걸러내려 노력 했지만^^) 이에 양해를 구한다. (아쉬운 점은 유엔군이나 남한측의 사진을 구하지 못해 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감령전역(Battle of triangle Hill)은 미 제9군이 발동한 것으로 유엔군의 “김화공세(Operation Showdown)의 일부로서 43일간 3.7k㎡ 밖에 안되는 공간에서 치고박고 하면서 230만발의 포탄을 퍼 부었고 양측 합쳐 4만여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전투의 치열함과 전투장면의 비장함은 전례에 없었으며 미국도 잊을 수 없는 전투로 기억하고 있으므로 미국군사학원교과서의 중국전례에 유일하게 “상감령전역”을 수록 하였다.
“상감령전역”은 크게 3개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단계는 고지 지면 쟁탈전이다.
1952년4월, 팽덕회는 중국군총부에서 군이상 장교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 제15군단을 중부전선으로 투입하여 오성산, 두류봉, 서방산 일대의 방어를 맏도록 한다. 회의 후 팽덕회는 15군군장 친지워이(秦基伟)에게 “누가 오성산을 잃으면 누가 조선역사에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두부종양을 치료하고저 중국으로 돌아 간다. 그러므로 중국군은 오성산에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오성산(해발1062)은 철원에 있는 산으로서 김화이북 5km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오성산과 남대천 사이에 상감령과 하감령 2개의 고개가 있다. 그 사이에 산줄기가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서쪽에는 598고지가 있고 동쪽에는 538고지가 있다. 이 두 고지가 바로 상감령전투에서 양측이 필사적으로 다투던 고지들이다. 상감령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중국군 고위군관회의를 상감령이란 마을에서 한적이 있다. 이 인연으로 오성산의 598, 538 고지전을 “상감령전역’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마을은 전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오성산 상감령지역 전경 - 598고지, 538고지.
598고지의 중국군 병사들
598고지의 진지에 있는 중국군의 지휘소
10월14일 미군과 남한군은 대구경 화포 320문, 탱크47대, 전투기와 폭격기 50여대로 중국군 15군의 30km 방어선을 공격을 개시한다. 그 중 598고지와 538고지에는 화포 300문, 탱크27대, 비행기 40대로 화력을 집중하여 1초에 6발의 포탄이 떨어질 정도로 맹공격을 한다.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갱도에 은폐한 중국군은 배 탄것 마냥 대지가 흔들렸고 상하치가 부딛치면서 혀를 씹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어는 충격파로 17세나는 어린 병사가 즉사하기도 했으며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1시간 후 포격이 멈추었다. 미군은 고지에 생명체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허나 고지수색에 나선 미군병사들이 살아있는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모격한다.
1952년10월14일 유엔군은 7개영(대대)의 병력으로 대포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한다.
598고지 11호 초소를 지키던 9련(중대)1반(소대)은 경험부족으로 단번에 병력을 전부투입 되였다가 1명만 살아 남고 전멸한다. 이 광경을 본 2호진지의 8련장은 두 개 반을 지원 보낸다. 허나 중도에서 적의 포격에 다 죽고 부상한 5명만 살아 돌아 온다. 11시경, 2호진지와 7호진지는 유엔군이 점령한다.
538고지는 남한군 제 2사단 32연대 한개 대대가 공격한다. 7시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12시경, 남한군이 고지를 점령한다. 오후 2시경, 중국군 제1련은 20여명만 남아 갱도안으로 은신한다. 538고지의 전투에서 중국군은 40만발의 탄알과 만여개의 수류탄과 수뢰를 써버렸다. 장시간의 강도 높은 사격으로 인해 무기 파손 또한 놀라울 정도이다. 과열로 파손된 무기는 기관총 10정, 자동소총 62자루, 보총 90자루.
사진은 중국군 15군소속 1련 병사들이 진지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모습이다.
16일, 미군은 계속 공격을 늦추지 않는다. 중국군 45사단은 15개련대를 전투에 투입한다. 친지워이는 제15군을 주력으로 명하고 매련대에 수류탄 8천개, 3개월분 비품 등을 공급한다. 그 외 인력을 조직하여 갱도에 탄약과 식품,식수공급을 적극 추진한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진다. 598고지에 30분만에 7 - 8만발의 포탄이 쏟아 졌다.
17일, 치열한 전투는 계속 된다. 헌데 미군과 남한군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처럼 맹열한 포격에 중국군이 어떻게 살아 남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한국군 제2사단 정보참모 중령 한명과 정찰병 몇명이 고지를 탐색하여 지원군이 갱도에 은폐하여 미군의 포화를 피해감을 알게 된다.
중국군이 포화의 엄호를 받으며 538고지를 향해 반격하고 있다.
한편 중국군 135퇀(연대) 6련(중대)은 6호진지와 5호진지를 점령하였으나 병사가 16명만 남아 더는 진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사단장 추이짼궁(崔建功)은 “0호진지를 탈환 못하면 날이 밝으면 이를 발판으로 적들이 반공격할 것이므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0호진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런데 0호진지의 미군은 4개의 토치카에 은폐하여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6련장은 또 3명의 병사를 폭파조로 파견하지만 모두 전사한다. 이 때 2대대참모장 짱광성(張廣生)을 수행하던 대대통신병 황찌광(黄继光)과 6련통신병 우산양(吴三羊), 쇼우떵량(肖登良이 출전신청한다. 짱광성은 즉시 3인을 폭파조로 묶어 황찌광을 반장으로 임명하고 토치카 폭파명령을 내린다. 황찌광은 아무말 없이 두 전사를 데리고 갱도를 뛰쳐 나간다.셋은 토치카 2개를 폭파하지만 우산양이 사망하고 황찌광만 남게 된다.그는 이미7곳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기관총의 사각지대까지 기여가 뒤를 향해 손을 흔든다. 짱광성이 눈치재고 “황찌광이 기관총구를 막으려 한다!”고 외치는 순간 황찌광이 몸을 일으키더니 기관총을 덮쳐 가슴으로 총구를 막는다.
15군단이 진지를 수복한지 1시간여만에 날이 밝는다. 이렇게 중국군은 상감령598고지와 538고지는모두 수복한다.
20일 이른 아침, 미군은 B -26폭격기 30여대로 상감령지역에 맹폭격을 가하며 동시에 300여문 대포로 포격한 후 3개 대대병력으로 번갈아 가며 공격한다.
7주야의 격전에서 중국군은 사상자가 3500여명이고 유엔군은 사상자가 7천여명이다.
여기서 황찌광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 (왜냐하면 황찌광은 중국인이 다 아는 인물이고 교과서에도 나온다.) 황찌광은 중국군 제 45사단 135퇀(연대) 9련의 통신병으로서 1952년10월19일 598고지전투중 사망한다. 중국은 그에게 특등공을 기입해 주었고 “특급영웅”칭호를 수여 하였으며 북한도 그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영웅”이라는 칭호와 금성훈장, 1급국기훈장 등 영예를 주었다.
사진은 황찌광이 가슴으로 총구를 막는 장면을 그린 그림.
전투의 두번째 단계는 갱도전투단계이다.
598고지에는 3개의 큰 갱도와 8개의 작은 갱도 그리고 30여개의 방포동굴이 있다. 8련이 있는 1호갱도는 주갱도이다. 갱도는 F형태로 되여 있는데 그 길이는무려 80m이고 높이는 1.5m이며 너비는 1.2m이다. 좌우로 갈림길이 있고 위에는 35m 두께의 석회암이다.
사진은 중국군 1호갱도 내부 통신병의 모습이다.
미군이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발밑에는 여전히 중국군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므로 갱도를 제거하는 것이 미군의 주요 과제로 떠오른다. 이렇게 이 후 20일간의 전투는 갱도가 초점이 된다.
22일 미군은 갱도입구를 향해 무반동포로 사격하고 폭파약과 수류탄을 던지고 또한 P - 51비행기로 저공사격을 한다. 하지만 밤만 되면 중국군은 갱도에서 나와 토치카를 폭파 하거나 미군초소를 습격하거나 를 반복하여 조용한 날이 없었다.
중국군 3인조 습격조가 갱도내에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허나 날이 갈 수록 먹을 것과 마실것, 그리고 탄약과 약품이 떨어진 중국군은 위기에 봉착한다. 비록 가능한 인력을 다 동원하여 물품을 갱도로 보내지만 90%가 중도에서 소멸된다. 이는 갱도내 전투병사들의 사망 수를 초과한다.
28일 밤, 1호갱도에서 무 3자루 받는다. 허나 무는 계속 먹으면 부작용이 많아 사과를 보내 줄 것을 제의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친지우이군장은 자신과 군부 그리고 각 사단 간부들의 개인돈으로 사과를 사 모은다. 그리고는 사과광주리에 운송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하고 누가 사과 한 광주리를 갱도까지 운송하면 2등공을 기입해 준다고 발표한다. 허나 미군의 봉쇄가 너무 엄하여 사과로 2등공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포화를 무릅쓰고 고지에 보급품을 나르는 중국군 병사들
돌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천금보다 귀한 것이다.
동원된 운송대오에 현지 백성들이 태반이다
제3단계 결정적 반격
10월30일 12시, 15군은 대구경 대포 133문과 120mm 박격포 30문으로 598고지를 향해 4시간가량 포격을 가한다. 22시 로켓포 24문이 배치되면서 미군의 포격을 잠재운다. 이는 중국군이 역사상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의 포전이였다. 미군이 상감령에서 사상된 70%가 중국군의 포격에 의한것이라고 한다.
10월30일 밤 10시 중국군이 로켓포를 발사하는 장면이다.
갱도속에 있던 중국군 병사들과 공격해 온 부대와 만나는 장면
11월25일은 상감령전투가 사실상 끝이 난다.
상감령전역은 1952년10월14일부터 11월25일까지 43일간 양측은 3.7k㎡밖에 안되는 땅에서 중국군은 4.3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유엔군은 미군, 남한군, 콜롬비아군 등 6만여명이 투입되였다.
상감령전역에서 중국군이 물자 투입상황을 보면 각종 물자 1.6만톤, 그 중 탄약 5514톤(평균 하루 128톤 소모), 포탄 40만발. 전선운수인원 8500여명, 총 동원된 민공 6만여명.
상감령전역 사상인원 수:
중국측 주장 - 유엔군 사상 25498명, 중국군 사상 15600명(사망 7100명, 부상8500명).
미군측 주장 – 중국군 사상 19000명, 유엔군 사상 9000명.
상감령전투는 사실상 담판중 진행된 힘 겨루기이며 과시용이다. 허나 3.7k㎡의 자존심을 위해 양측이 도합 4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가?
2. 금성전투(1953년7월13일부터 7월27일)
1953년5월13일 중국군은 하계공세를 발동한다
제20병단의 각 부대와 제9병단의 제24군은 화포 1천여 문에 의한 7 내지 28분간의 공격준비 사격 후에 맹렬한 돌격을 전개하였으며 1시간 내에 적의 전선진지를 모두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적군 4000여명 살상한다.
중국군은 측면과 뒤로부터 유엔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동해안선에 10km에 달하는 방어 공사를 구축하였다.
중국군 포병의 해안 방어선
중국군 병사들 해안 경계중
중국군 제46군 병사들 평촌 남산을 공격할 제갈량회의를 하고 있다.
1953년5월13일부터 26일까지 1차공격이 있었는데 이때 병력을 보면 죽국군 135만, 북한군 45만, 북,중측은 합이 180만명이 있었고 유엔군 120만(그 중 남한군 16개 보병사단 64만명이 포함됨.) 이때 양측이 투입된 병력은 엄청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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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6월12일부터 14일까지 중국군 제 67군 200사단이 북한강 서북쪽 좌수동 남산에서 고지탈환전을 벌였다.
1953년7월13일, 금성전투 시작에 앞서 결의 다지는 중국군 탱크부대 병사들.
금성전투에서 중국군이 로켓포 발사하는 장면
금성전투에서 포화의 엄호를 받으며 고지를 공격하는 중국군 병사들.
중국군 제 68군 203사단 607연대 정찰소대가 부소대장 양위차이(楊育才)의 인솔하에 미군고문을 호송하는 남한군으로 변장하여 남한군 수도사단 제1연대(백호부대) 지휘부를 습격하는데 성공한다.
14일, 양위차이가 거느린 정찰소대는 백호연대 지휘소를 마비시킬 목적으로 13명의 최소 인원(중국군 병사11명, 북한군 연락병 2명 - 김대주, 한담년 - )으로 구성되였다. 그 날 저녁 그들이 남한군의 봉쇄선을 지날 즈음 대오 뒤에 남한군 병사가 따라 오는것을 발견하고 한담년이 슬그머니 다가가 나한군 병사의 총부터 낚아 챈다. 원애 이 남한군 병사는 도주중 변장한 중국군을 남한군으로 알고 따라 붙은 것이였다. 양위차이는 이 남한군 병사의 입에서 오늘 저녁 암호는 "구름"과 "없음"임을 알아 내고 상대의 삼엄한 경계망을 3차례 뚫고 들어가 수도사단 1연대 즉 백호부대본부에 침투한다.
백호부대본부에서는 바야흐로 작전회의가 열리는 참이었다. 정찰소대의 기습으로 연대지휘부는 와해됐고 연대장 이하 54명이 사살되고 19명이 생포됐다. 중국군이 연대지휘부의 통신망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남한군 정예부대인 백호연대를 쉽사리 궤멸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이어 중국군은 야음을 틈타 철수하려던 적을 가로막아 백호부대 후방에 있던 포병대대본부와 차를 타고 지원 나왔던 기갑연대 2대대본부를 섬멸시키는 한편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을 사살했다.
그외 중국군 68군 204사단은 남한군 수도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을 생포했다.
아래 남한의《한국전쟁 전투사》에서 이번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기로 한다.
"1연대장 최세인 대령은 연대 CP의 경계를 위하여 연대의 경비소대를 제외한 본부 및 근무중대 병력을 약 1킬로미터 북쪽의 교량을 지키도록 출동시키고 기갑 제2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이곳을 목표로 밀물처럼 남하하던 중공군(6열종대로 남하한 중공군)은 본부 및 근무중대가 배치되어 있는 저지선을 통과하여 일부 병력은 연대CP 바로 앞에 이는 419고지를 점령하고 일부 병력은 연대 CP의 뒷산으로 숨어들어가 CP를 완전히 포위했다.
04:00을 기하여 이 중공군의 일단은 동시 다발적으로 1연대 CP의 여러 곳을 일제히 기습하였다. 정문 보초가 쓰러지고 수송부의 차량이 불붙고 탄약고가 폭발하는 등 일시에 연대CP는 수라장으로 돌변하였다. 1연대 CP와 같이 위치한 제10포병대대 CP도 동시에 기습을 받았다. 사방에서 피리와 나팔 소리가 나고 박격포탄이 터졌다. 몇 분 내에 중공군이 연대 상황실과 포병10대대 사격지휘본부로 달려들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전개로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을 비롯한 연대장 최세인 대령과 부연대장 김성환 중령 및 S3김형욱 소령 등 연대지휘부 요원들은 일단 이 포위망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연대CP의 남쪽 산록을 거슬러 오른 이들은 비오는 어두운 밤에 방향을 못 잡고 헤매던 중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실종(포로 당함)되고 연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은 미군 포병진지가 있는 간진현 부근으로 빠져나왔다.
한편 동시에 피습을 받은 포병 제10대대의 지휘부 요원들은 피습 직후 탈출 중 중공군의 사격을 받아 분산되었으며 이때 대대장 김천근 중령과 부대대장 겸 S3인 김종오 소령이 전사하였다. 이렇듯 10대대지휘부 요원이 활로를 찾아 헤매고 있는 동안에 월봉리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포대들은 포대장들의 기민한 판단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사단 사령부 부근에 무사히 집결하였다.
기갑 제3대대는 8중대의 일부 병력이 정찰에 나서고 후속 7중대가 막 도착하여 병력이 차량에서 하차하려는 순간, 주변 능선에 대기중인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다. 이때가 1연대CP가 피습을 당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 이 기습사격으로 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였다. 이때 옆에 있던 7중대의 무반동총반원 서성찬 일등병 등 3명은 연대장의 시체를 후송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그들마저 모두 전사하거나 다치는 바람에 연대장의 시체는 하풍동 부근의 이름 없는 산골에 묻히고 말았다. 7중대는 중대장 강상섭 대위가 실종되고 소대장 전원이 죽거나 다쳤다.
뒤이어 당도한 대대장 박기순 중령은 S2인 서성인 중위에게 7중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 후 기갑 2대대의 잔류병력은 남쪽의 산 속으로 남하하였으며 일출 후인 08:00에 약 3킬로미터 후방의 119번 도로 우측에 있는 462고지(6사단 지역)에서 겨우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국전쟁전투사 금성전투》P125 - 127
참고로 당시 수도사단은 남한군의 최정예부대로서 금성전투전에는 전패한적이 없었다. 이 부대는 현재 맹호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진에서 제1연대(맹호부대)장 최세언 모자의 백호머리 도안을 볼 수 있다.
양위차이가 노획한 남한군 백호부대 군기가 현재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다.
남한군 백호부대 지휘부를 습격한 공으로 양위차이(외쪽으로부터 3번째)와 정찰소대가 표창받고 있다.
금성전투에서 중국군이 살상하거나 포로한 유엔군과 남한군은 78000여명이다.
사진은 중국군에게 포로된 남한군 병사들이다.
전투 마치고 돌아 온 중국군을 현지백성들이 환영하고 있다.
1957년7월27일 북,중과 남,유엔군 양측은 판문점에서 정전협의서에 싸인하면서 이 잔인한 전쟁은 한단락 짓게 된다.
판문점의 모습
판문점에서 각국 대표들이 정전협의서에 싸인하는 회의장
중국,북한,미국 연락조의 부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의정서 원본사진.
1953년7월27일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이 정전협의서와 보충협의서에 싸인 한다.
1953년7월28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팽덕회가 정전협의서와 보충협의서에 싸인 한다.
1953년7월27일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가 정전협의서와 보충협의서에 싸인 한다.
중문, 영문, 한문 3개국어로 작성된 정전협의서
부록 1
병력투입:
한반도전쟁에서 북,중과 남,유엔군 양측이 투입한 총 병력은 300만명이다.
남한군,유엔군 - 120만명(남한군 64만명 포함.) 전쟁초기보댜 2.5배 중가.
북한군,중국군 - 188만명(북한군 45만, 중국군 130만) 전쟁초기보다 3.5 배 증가.
사상자:
1. 중국군 전투사상자 36만명, 비전투사상자 41만명. 북한군 전투사상자 26만명.
북한,중국 사장자 총 100만명.
2. 미군 한반도전쟁기념비에 적은 사상자 통계를 보면
유엔군 2256523명, 미군 172847명,총 2429370명이라 적혀 있다.
전사자 - 미군: 54246명, 유엔군: 628833명 합계: 683079명
실종자 - 미군: 8177명,유엔군: 470267명 합계: 478444명
포 로 - 미군: 7140명, 유엔군: 92970명 합계: 100110명
부 상 - 미군: 103284명, 유엔군: 1064453명 합계: 1167737명
이 통계는 정확한 수자가 아닐 수가 많다. 그러니 님들께서 참고 하시기 바란다.
기타 참전국가의 살상자수는 생략하기로 한다.
부록 2:
한반도전쟁 대사표
1950년
6월25일. 북한군 3.8선 이남을 공격, 한반도전쟁 발발.
6월28일. 북한군 서울 점령.
7월5일. 유엔군 전쟁에 개입.
9월15일. 유엔군 인천상륙.
9월28일. 유엔군 서울 수복.
9월30일. 유엔군 3.8선 넘어 북진.
10월2일. 중공중앙정치국회의 결의 - 파병결정.
10월19일. 유엔군 평양 점령.
10월19일 밤. 중국군 비밀리 압록강 도강, 참전.
10월25일 – 31일. 중국군 1차전역 발동.
10월31일 – 11월2일. 중국군 청천강 점령.
11월25일 – 12월9일. 중국군 2차전역 발동.
12월5일. 중국군 평양 점령.
12월15일. 유엔군 3.8선 이남으로 퇴각.
12월31일 – 1951년1월5일, 중국군 제3차전역 발동.
1951년
1월4일 중국군 서울점령.
1월25일 – 4월21일 중국군 제4차전역 발동
3월14일 주국군과 북한군 서울에서 철수.
3월15일 유엔군 서울 점령.
4월11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에서 해임, 리지웨이 부임.
4월22일 – 6월10일 중국군 제5차전역 발동.
6월23일 소련부외장 정전건의.
7월10일 남,미와 북,중 양측이 개성에서 담판 시작.
8월18일 – 9월18일 중국군 여름공세 발동.
8월22일 담판중단.
8월29일 – 10월22일 중국군 가을공세 발동.
10월15일 유엔군 다시 상신링”공격
10월25일 정전단판 회복.
1952년
5월12일 리제웨이 해임, 클라크가 유엔총사령관으로 취임.
10월8일 정전담판 중단.
10월14일 유엔군 금화공세 발동.
10월14일 – 11월25일 상감령전역.
1953년
5월13일 중국군 여름공세 발동.
7월13일 중국군 금성전투 발동.
7월19일 판문점에서 양측대표 모든 문제에 합의 봄.
7월27일, 정전협정에 싸인 함, 한반도 전쟁은 휴전으로 들어 감.
1958년
2월19일 중국과 북한은 중국군(일명: “중국인민지원군”)이 전부 북한에서 철수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2월20일 “중국인민지원군총부”에서 중국군이 1958년 년말전으로 북한을 철수한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첫 철수부대는 3월15일 중국으로 돌아 갔다.
10월22일 중국군 총부가 사령관 양융(杨勇 – 상장)과 정위 왕핑(王平 – 상장)이 이끌고 전부 중국으로 돌아 갔다.
10월26일 중국군 공보: “중국인민지원군은 이미 전부 조선에서 철수 하였다.”
이로 부터 전쟁은 휴전기에 들어 가고 60여년의 냉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2013년5월11일 북한정부가 정전협정을 전면 부인한다는 성명을 발표 한다. 이로 부터 판문점에서 체결했던 정전협의서는 법적 효력을 잃은? 역사자료로만 남게 되였다. 동시에 이 날부터 한반도는 전쟁상태에 들어 간 것이다.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한반도는 지금 전쟁중이다!
- 끝 -
그동안 저의 글을 읽어 주신 님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취선님에게 많은걸 배우고 있습니다.
좋은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한반도 지형이 무덤자리라 하더만 마이도 뒈졌네.그럼 뭐하나.후손들이 비실비실하면서도 맘은 작은 돼지놈들이니.운도 더럽게 없어요.맥아더 의견이 받아들여 중국에 핵을 던졌더라면 일성이가 그래도 공산화를 하든지 유엔이 만주에서 중공군을 박살이라도 내었다면 좃만한 나라에 남는 건 비굴함과 패배의식만 쌓였을 뿐 ,몇 백만 뒈질 때 ,왜놈 몇 천 만은 배때지가 불러지고 강국으로 거듭나니 이런 모순 역사.우리도 베트남 전쟁으로 그 혜택을 누리니 고마움은 잊지 말아야 하지만 절대 잊지 않아야 하는 건 인간사 상대의 피를 먹고 사는 것이다.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신도 곧 악마요,사람도 악이 지나쳐야 선이 일어날 것이라 본다.
가우리의범님은 세상에 불만이 너무 많은 것 같네요. 바로 앉아 세상을 보면 비뚤게 보이던 것들이 모두 바로 보일 겁니다. 역사는 그냥 기억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책속에 잠드는 겁니다. 사람이 과거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은 밤 되세요.
영어로 동족상잔을 이렇게 치욕스레 표현하네요...
"dog eat dog." (개가 개를 잡아 먹는다) 즉 개싸움이란말이지요.ㅠㅠㅠ...
글 잘 읽었습니다. 취중산이 쓴 조선전쟁도 얼마전에 읽었는데 참 감명 깊었습니다. 우리민족이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는데 이제 남과 북도 힘이 많이 생겼으니 전쟁의 상혼을 경험 삼아 민족평화통일로 가야하겠지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7.4 남북공동성명에서처럼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수백년 민족앞의 번영을 바라봐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