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발광소녀 (-_-flower-_-a@hanmail.net)
팬카페 : 현실도피 발광소녀 (http://cafe.daum.net/LovelySosu)
< 36 >
그날 새벽이었다. 갑자기 비누와 채린. 그리고 수혁이 스타월드를 찾아온 건.
“혜선씨 안녕하세요?”
그들을 못 본 척 하며 자신의 할 일을 하려던 혜선을 불러 세우는 수혁의 인사에 혜선은 별 수 없
이 수혁을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고, 비누는 어색하게 혜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역
시나 채린은 승리했다는 승리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혜선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그런 모습이 혜선에게 곱게 보일리 없었지만, 혜선은 채린에게 싱긋 웃으며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 혜선에게 처음엔 의문을 가지던 채린이었지만, 혜선이
“약혼 하신다구요? 축하드려요.”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채린도 혜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의 손이 맞닿아지고, 혜선의 손에서 힘
이 쥐어질 지 알고 잠시 긴장했던 채린이 먼저 혜선의 손을 꽈악 쥐어버린다.
그 순간 혜선은 놀란 듯이 채린을 한번 보다가 피식 웃으며 채린의 손을 가볍게 쳐 내 버린다. 그
뒤에 아무 미련도 없이 비누를 한번 스치듯 바라보곤 뒤돌아서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하는 혜선이다.
그 모습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는 비누와, 그런 비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
자고 보채는 채린이다.
“어머. 진짜 사귀는건가?”
“그렇겠지. 기자회견 못 봤어?”
“이야~ 뽐새난다.”
직원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던지 말던지 혜선은 귀를 막아버리고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다.
“중얼 거리지 말고, 일이나 더 챙겨서 하세요.”
남들이 보기엔 강하다, 혹은 까다롭다 싶을 정도로 무심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쏘아보는 혜선이었
다. 그리고 그런 혜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할일을 하는 직원들이었고….
“후..”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며 혜선이 장부 정리를 하며 피식 웃는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던 지윤에게 다가가 털썩 앉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보며 지윤은 싱긋 웃는다.
이제 혜선이 자신의 옆에 오면 왠지 힘이 나는 지윤이었다. 왜냐면 혜선은 알게 모르게 웃겼으니까.
“지용아.”
아까 그 말 취소.
지윤은 자신의 이름을 아주 당당하게 지용이라 부르는 혜선을 보며 살짝 표정을 굳힌다.
“저, 지윤이라구요.”
“내가..필요해?”
“네???”
지윤이 자신의 이름을 바로 잡아 주었지만, 혜선은 그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지윤에게 자신의
할 말만 해 버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리 없는 지윤이었다.
앞 뒤 다 빼먹고 자신이 할 말만 하는 혜선이었는데, 그 말을 대체 어떻게 알아 들을 수 있으리요.
“하... 지윤.. 야. 지윤!!”
“네!!”
피식.
긴장한 듯 높은 톤으로 ‘네!’라고 대답하는 지윤이 웃긴 지 혜선은 짧은 웃음을 흘렸고.
“일 열심히 해. 바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지윤에게 바보라는 말을 내뱉은 혜선은 기지개 한번을 쭈욱 켜곤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지윤 또한 웃어버리고 만다.
..
..
..
그렇게 한시간 가량 일을 했었던가?
혜선이 장부를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비누가 골드스타방에서 조용히 나와선, 장부
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혜선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이미 골드스타방엔 채린이 살짝 취해서 아무곳에나 널부러진 상태. 그것을 놓치지 않고 비누는
몰래 바깥으로 빠져 나온 것이었다.
“야.”
혜선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한대 톡 치며 그녀를 부르는 비누다.
그 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혜선. 그리고 비누임을 확인하자 다시 고개를 내룬다.
“야~”
“뭐. 할 말 있음 해.”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혜선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비누에게 말한다. 그 모습에
비누는 씁쓸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연다.
“…나 믿지?”
“……뭘.”
“그러니까..”
“아. 나한테 고백한거?”
“…….”
비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때 혜선이 고개를 번쩍 들어 비누를 바라본다. 그리고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음과 동시에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어 버린다.
“개자식.”
그리곤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는데, 비누가 혜선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긴다.
“아! 안놔?”
머리카락이 비누의 손가락에 잡힌 혜선이 두피가 땡겨옴에 살짝 고통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고,
“손 잡으면 니가 찍을 것 같아서. 하하. 미안.”
그런 혜선의 표정과 말투에 어색한 웃음과 함께 혜선의 머리카락을 놓는 비누.
자신의 머리카락이 놓아지자 그제야 비누를 바라보는 혜선이다.
“왜 잡았냐?”
“내 말 아직 덜 끝났는데 니가 갔잖아.”
“병신새끼. 니 싸가지는 다 어디다가 다 팔아 치웠길래 지금 이렇게 순한거냐?”
“글쎄. 네 앞에서는 그 싸가지들이 다 도망가나 보다.”
“개소리 집어 치우고, 빨리 방에 들어가서 노시죠? 진.채.린.약.혼.자.님??”
“야. 아냐! 그런거!!!!”
“지랄까지말고, 일 하는데 방해되니까 꺼지라고.”
“야, 그때 내 고배...ㄱ....”
비누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꽈악 막아버리는 혜선. 비누는 말을 다 맺지도 못한 채 혜선의 길게 뻗
은 손에 자신의 입이 봉해져 버렸다. 그런 비누에게 소근소근 말하는 혜선.
“지금 너한테 시선이 몇개나 집중 되 있는 줄 아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비누.
“..말 삼가해. 그리고 니가 하려는 말 잘 알아듣겠으니까, 좀……. 후..”
“…….”
“…나 너 안 좋아해. 이럼 됐지???”
혜선의 말에 갑자기 비누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혜선의 가는 팔목을 뿌리치더니, 그대로 혜선
의 손을 잡고 스타월드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물론 가만히 있을 혜선이 아니다.
발버둥을 치며 나가지 않으려 하지만, 남자의 힘이 여자의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혜선은 바깥으로 끌려 가나 했지만.
“비누야아. 우웨엑..”
비틀비틀 바깥으로 나온 수혁이 비누에게 엉겨붙으며 비누를 잡아채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려던
건 무산되어 버렸다. 아니, 그것 쯤이야 뿌리치고 나갈 수 있다고 치자.
수혁이 비누의 옷에 토사물을 마구 뿌려대어서 더더욱 못나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수
혁이 앵겨 붙을때 혜선의 비누에게서 튕겨져서 멀어졌으니 더 이상 나갈 수도 없었고.
“악. 이자식이 뭐한거야, 지금?”
“헤헤. 토!”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는 수혁을 보며 비누가 더럽다는 듯이 수혁을 떼어놓으려 하고, 수혁은 그
런 비누에게 더 엉겨붙을 뿐이었다.
혜선은 그 상황에 머리를 몇번 뒤로 넘기더니, 지윤에게 다가간다.
“야. 여기 기자들 안 왔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지윤.
혜선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스타월드에서 조금 눈에 돋보이는 곳으로 다가간다. 그리곤 그곳에
털썩 앉아 수혁과 비누를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채린 혼자서 있을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엔 비누의 이름을 부르며 뻗어 있는 채린이 있다.
“류우우~ 류우우~ 헤헤헤. 내남자.”
바보처럼 비누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져있는 채린을 보자 혜선은 부러움보다..
...더러움을 느껴야 했다.
“저 여자 미친거 아냐? 어떻게 안주 위에 쓰러져 있냐?”
혜선은 한숨을 내 쉬며 채린을 바라보다 천천히 다시 몸을 돌린다. 분명 채린에게 할 말이 있어서
다가 왔을 줄 알았건만, 혜선은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채린을 한번 바라 볼 뿐, 다른 것은 하지 않
았다. 다만 안주위에 쓰러져 있는 채린의 긴 머리칼을 한번 쭈욱 당겨본 것 뿐.
“부럽네. 씨바..”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듯 순진한 표정으로 웅얼거리듯 “류~류~”를 외치고 있는 채린을 바라보며
혜선이 정말 부럽다는 톤으로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 하루가 지나갔다. 아니, 그날 새벽이 지나갔다.
..
..
..
“수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 혜선이 스타월드를 한번 바라보며 살짝 윙크를 하고, 그
모습에 지윤의 볼에 빨개졌다. 이상한 여자다.
“너 술먹었냐? 일 하는 도중에?”
“아..아니요.”
“근데 왜 이렇게 볼이 빨개. 오늘 밤엔 우리 이모가 찾아 올 거거든. 에라이. 오늘부터 일찍 문 열
려고 했더니~ 어쨌든 우리 이모 올 땐 그렇게 술 먹지 마라. 너 바로 짤릴 수도 있다? 잘 지내. 지
윤아~”
다른 직원들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면서 지윤에게만 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사라지는 혜선이
었다. 다른 직원에게 말해 봤자 좋아라 할 모습이 눈에 선 했기에 그녀는 말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윤은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기색이다. 그렇지만 혜선에게 어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뭐, 어차피 못 만날 사이는 아니니까…….
..
..
..
“하~ 4월달이라도 쌀쌀하네.”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혜선은 살짝 빨개진 코를 몇번 훔치듯 닦아
내고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아마도 집안엔 누군가가 있는듯..
“이모?!!!!”
쇼파엔 이불을 코까지 덮어쓰고 자고 있는 수정이 보이고, 혜선은 반가운듯 수정을 부르더니 곤
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다시 입을 살포시 겹쳐 앙다문다.
혜선의 얼굴은 지금 싱글벙글.
아무리 혼자가 편했어도, 별로 거리낌 없었어도,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분 좋은 일인 듯 하다.
“잘자. 이모.”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혜선은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이봐.. 그럴거면 수정도 수정의 방에 옮겨주고 가지 그랬니..?
※ ※ ※ ※ ※ ※
“하아.”
스타월드를 벗어나와 자신의 집에 도착한 비누는 수혁의 토사물이 묻은 옷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며 울상을 지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는데. 하~”
취기가 약간 오른 비누는 쓰레기통에 옷을 집어 던지고 욕실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고, 욕실 안
으로 들어가자 마자 샤워기 물을 트는 비누다.
차가운 물이지만, 비누의 몸이 뜨거워서 그런지 하나도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비누.
물을 최대한 세게 틀어 속옷만 입은 몸에다 뿌려댄다.
“23살에 무슨 약혼이야. 씨바....”
아무래도 약혼이란 단어가 타격이 큰 모양이다. 그 차가운 물줄기가 몸을 때리듯 나오는데도
구하고 우울한듯 찬물 샤워를 계속 했으니 말이다.
..
..
..
잠시 뒤, 샤워를 끝마치고 나온 비누는..
“쿨럭쿨럭.”
이란 기침소리와 함께 보일러의 따스한 기운이 은은하게 풍기는 자신의 방의 폭신한 침대에 풀썩
누워 버리고, 아직 다 닦이지도 않은 물기 묻은 몸과, 속옷은 .. 비누의 침대를 조금씩 적셔간다.
이불이라도 포옥 덮지 않았더라면, 이불 하나 베리고 말았을 것을, 비누는 춥다는 이유 하나만으
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포옥 덮어쓴채 콜록이며 눈을 감았으니…….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비누는
“콜록, 콜록”
이란 기침과 함께
“씨바..콜록.. 이..쿨럭.....불 상태가.. 크흠~.. 왜 이모양...쿠훨럭!!! 이야.”
라는 알 수 없는 단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독감인듯.
♬~
전화벨 소리도 귀찮게 비누의 귀를 때리고, 비누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손을 살짝 뻗어 전화
를 받는다.
“누구야..”
착 내려앉은 목소리.
“류~ 나야앙~”
그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톤의 목소리.
“…….”
뚜뚜뚜뚜뚜..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비누다.
안그래도 몸이 아파서 죽겠는데 저 마녀한테 하루를 붙잡혀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못
해 죽을 지경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오늘 하루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로 마음 먹은 비누는.
“형. 나 아프니까.... 콜록.. 내일로..”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날의 촬영을 취소시켜 버린다.
....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일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이 드라마가 어느 드라만지 알고 있지? 비누야 제발 부탁이다. 내
가 데리러 갈게.
라는 매니저의 말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일을 나갈 수 밖에 없는 비누였다.
< 37 >
다음날.
오후부터 수정의 집은 분주했다. 아니, 오전부터라고 해야하나?
이불을 팡팡 털며 수정이 퇴원한 기념으로 대청소를 하는 바람에 몇시간 자지도 못하고 혜선은 인상을
찌푸린채로 일어나야만 했다.
왜냐면 수정이..
“아휴~ 이게 사람방이야~ 돼지방이야?”
라는 되도 않는 말을 하며 혜선의 방의 먼지를 탁탁 털며, 분주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수정의 말대로 혜선의 방이 돼지우리이거나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단지 살짝 더러웠을 뿐이었다. 그치
만 수정의 눈에는 혜선의 방이 꽤나 지저분해 보여 돼지우리를 연상시켰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혜선은 수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대청소에 가담하게 되었다.
“넌 화장실 맡아. 화장실. 알았지?”
“응.”
잠결에 화장실 청소를 맡는다고 말해버린 혜선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집 화장실은 무려 3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혜선은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으며 잠을 탓했다.
바깥에서 수정은 거실을 청소하며 혜선의 그런 모습을 보며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활기찬 혜선의 집이었다.
.. 그리고 혜선이 나가자 수정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했다.
“진호야? ..
.. 그래!..
.... 없어. 호호.
........... 응.응.
...운동 보냈어.
............빨리 와!”
대략 이런 내용의 통화내용. 이런. 수정이 혜선을 바깥으로 보낸 이유는 이거였군.
..
..
..
그녀들이 청소를 다 끝낸 시간은 몇시간이 지난 오후 3시쯤이었다.
“청소 다 했으니까, 난 자러 간다.”
청소를 다 끝내고 나서도 잠이 오는지 혜선은 샤워를 한번 하고 난 뒤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려
했고, 그런 혜선을 수정이 부른다.
“잠깐! 혜선아.”
“왜?”
“잘려구?”
“응.”
“어머. 이 뱃살 좀 봐. 야!! 야!! 운동 좀 해! 운동. 빨리 운동 갔다 와!”
“응??”
어이없게 있지도 않은 똥배 타령을 해가며 자신을 운동 보내려고 하는 수정에 의해 혜선은 잠을 자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지도 않은 운동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만 뜨고선 엘리베이터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혜선. 그러다 복도에서 몇번 다른곳에 부딪힐 뻔 하긴 했지만, 별로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그렇게 혜선은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 도착한 혜선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에이씨. 노숙자 전용인 벤치를 왜 저런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거야!!”
혜선은 벤치를 찾고 있었던 듯, 그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을 보며 중얼중얼 거렸다.
그리고 연인들이 없는 벤치를 찾으려는 듯 여러군데를 발품팔아 돌아다녔고, 몇분 지나지 않아 아주 초
라한, 쓰레기통이 아주 더럽게 흝어져 있는 벤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냄새가 살짝 풍기긴 했지만, 그건 참을 수 있었다. 언젠간 청소부가 와서 청소를 해 주기 때문에……
…가 아니라, 이 벤치가 아니면 다른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 초라하구만.”
이렇게 중얼 거린 혜선은 벤치의 양쪽에 자신의 양팔을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하늘에 떠
있는 햇빛이 강하게 혜선의 눈을 자극했다. 하지만 혜선은 눈을 감지 않고 그 햇빛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몇초 후.
“악. 씨바.”
라는 욕설과 함께 혜선의 눈은 조용히 감겼다.
혜선의 눈이 감김과 동시에 운동을 하러 나왔던 몇몇 사람들은, 파리가 꼬이는 벤치에 비스듬히 걸터앉
은.. 츄리닝을 입은 한 여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동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젊은 처자가 안 됐어. 쯧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고 불쌍한 듯 혜선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혜선을 백수로 봤던 듯 했다. 일자리가 없어 집에서 쫓겨난 백수.
하지만 잠을 자는지 눈을 감았는지 알 수 없는 혜선은 그런 시선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
..
..
할짝 할짝.
꿈틀.
할짝 할짝.
뒤척.
할짝 할짝.
“아, 뭐야!!!”
슬리퍼만 신고 나온 자신의 발을 핥는 느낌에 몇번 뒤척이다가 자꾸만 자신의 발을 핥자 짜증나서 눈을
떠 버렸다. 혜선의 눈은 잠이 온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혜선은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고선, 슬리퍼로 그것을 스으윽 밀어서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흰 강아지 한마리.
아마도 운동을 하다가 주인을 잃은 듯 깨끗해 보이는 강아지였다. 그 이유로 강아지의 목에는 목걸이가
달려 있었으니까.
“난 임자 있는 건 안건드려.”
강아지를 보면서 말 한 건지, 아님 다른 것을 향해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초점을 엉뚱한 곳에 두
고선 이렇게 말을 하는 그녀였다. 그 모습에 개가 “아우우~” 하고 구슬프게 운다.
한 낫 개일진 몰라도 혜선의 심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이다.
“너 주인 있지?”
혜선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 거리는 강아지. 그 모습이 귀여운지 혜선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도 있겠지? 이 벤치에 있으면 알아서 찾아 올 거다.”
혜선은 이렇게 말하며 강아지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집에 좀 들어가 볼까 생각해서였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혜선의 발걸음 뒤로 강아지의 사박사박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 발걸음 소리에 힐끔 뒤를 돌아보았고, 돌아봄과 동시에 강아지는 발걸음을 딱 멈추고 혜선을
올려다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게 아닌가?
“하~ 너 주인 없다구?”
...
“알았어! 내가 데려가 줄게!”
혜선은 이렇게 말하곤 개 주인이 나타날까 싶어 잽싸게 강아지를 든채로 자신의 집을 향해 맹렬한 기세
로 달렸다.
그렇게 아파트 속으로 쏙 들어간 혜선은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 짧은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파트로
오기 전까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혜선은 엘리베이터 문이 빨리 열리길 바라며, 10층에서 문이 열리자 빠른 속도로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
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수정을 부르려던 혜선이었지만, 바로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깔깔깔. 그래서 말이지..”
“근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응.... 느껴지는게..”
수정과 진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고, 그 곳엔 혜선이 서 있었다.
강아지 한마리를 들고서..
“잠이 오는 조카 쫓아 보낸 이유가 이거였어요?”
“…….”
“아이고. 둘이서 노느라 바쁘셨겠어요?”
“…….”
“병원에서 늦게 퇴원하려던 이유도 이거였어요?”
“…….”
“동창이라면서요. 동창이라서 이렇게 몰래 만나는 거예요?”
“…….”
“짜증나. 난 남자여자 같이 있는게 제일 싫어.”
아까전에 공원에서도 남녀가 함께 있어서 짜증이 치밀었던 혜선이었는데 집에 와서도 남녀가 함께 있는
꼴을 봐야했던 혜선은 짜증을 내며 자신의 방문을 쾅 닫았다.
수정은 혜선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큭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왜 웃어?”
수정의 웃음에 진호가 뻘쭘한 표정(아마도 혜선이 쏘아 붙이고 들어갔기 때문인 듯.)으로 물었고, 수정
은 그런 진호에게 머가 걱정이냐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웃기잖아.”
“뭐가?”
“빨간 츄리닝과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 수 없는 하얀강아지. 그리고 질투. 언벨런스 하잖아?”
“풉.. 질투?”
수정의 말에 잠시 혜선의 패션과 강아지가 떠 올렸는지 살짝 웃던 진호가, 갑자기 수정의 ‘질투’라는 말
에 귀와 눈을 번뜩였다.
“응. 쟤 질투가 많은 애거든. 왜.. 저번에 병원에서도 너랑 나랑 있는거 보곤 집으로 휙 돌아갔던 애였잖
아. 이번에도 질투야. 내가 누굴 사귀면 자신한테 분명히 말 해 줄거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인데, 내가
말도 안하고 너랑 같이, 그것도 자신을 운동 보내고 나서 몰래 만났잖아. 그러니까 화가 난거지.”
아. 그런거였군.
이란 표정이 멍청해보이는 진호의 표정위로 떠올랐다.
..
..
잠시 뒤..
거실에서 계속해서 TV를 보던 수정과 진호의 귀에 ‘쿵.’ 이라는 거대한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고개를 돌
려보니 캐리어 하나와 강아지를 품에 안은, 옷을 잘 차려입은 혜선이 보였다.
“어디가?”
“집에 갈거야!”
이 말을 끝으로 혜선은 수정의 집을 빠져 나갔다.
“아 웃겨. 깔깔깔.”
그 모습이 웃긴지 수정은 혜선이 빠져나간지 오래 되어서도 계속 웃어버렸다. 진호는 걱정 된다는 듯 바
깥을 바라보았고…….
..
..
..
여기는 버스터미널.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하~”
혜선의 짧은 한숨소리.
“왜 안된다는 거야!!!!!!!! 강아지도 엄연한 인격체가 있다고! 왜! 왜!”
..
이 상황 설명을 해주겠다. 그러니까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대구로가는 버스표를 끊고서 버스를 탈려고
했는데 그때 버스기사가 혜선의 앞을 막은 것이다.
“강아지를 어딜 데리고 와요!”
라는 말과 함께.
그래서 지금도 그것 때문에 한창 열을 올리는 중.
그러다 혜선이 이렇게 말한다.
“이거 아니면 내가 못 탈 거 같애? 헹~ 거지토사물 냄새나는 꼬물버스를 누가 타고싶대?”
그리고 기사 아저씨가 한마디를 하려고 했던 것 보다 더 일찍 몸을 돌려 발걸음을 움직인다. 그러다 뭔가
가 생각 나는지 폰을 든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저예요. 지혜선. 지금 시간 있어요?!!!!!!”
< 38 >
“아.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네에?”
직원들의 황당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 단 듯 수혁은 회의를 마쳤다는 듯 자료들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분명 다른 직원들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이지만, 수혁은 그런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파일을 정리하며 자리를 뜰 뿐이었다.
“회..회의는??”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질문을 했지만, 수혁은 그 말을 간단히 씹어버린다. 그 질문을 한 직원은
상당히 뻘쭘한지 얼굴을 긁적인다.
그 모습에 수혁에게 왜 갑자기 회의를 관두냐는 질문을 하려던 사람들이 그 질문을 목 깊숙한 곳으로 삼
켜 버린채 하나둘씩 회의장을 떠났다. 물론 수혁이 제일 먼저 떠났지만 말이다.
또각또각.
수혁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다.
“이사님~”
까타롭기로 소문난 지숙이 수혁의 뒤를 따라오며 수혁을 불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지숙임을 확인하자 다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을 하는 수혁
이었다.
‘제길.’ 이라고 조용히 말한채 말이다.
“이사님. 잠깐만요!!”
수혁이 자신을 피하려고 빠른 걸음을 걷는 것는다는 걸 모르는 지숙이 또각또각 발 소리를 크게 내며 자
신 또한 빠른 걸음으로 수혁의 뒤를 쫓았다.
그로써, 뚜벅뚜벅, 또각또각! 이라는 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이사님, 잠깐만요!!”
“네! 왜요!”
지숙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수혁을 부르자, 그제야 걸음을 멈추는 수혁이었다.
심호흡을 후하..후하.. 하고 지숙을 마주하는 수혁.
“말씀하세요.”
“지금 어디 가시는거죠? 회의도 관두고?”
“급한일요.”
“그 급한 일이란게, 회의를 내팽겨 치고 갈 만큼 중요한가요?”
“그다지.”
“그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회의를 취소하고 가신다는 말씀인가요? 정말 이해 안 되는데요?”
수혁이 자신의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녀다. 그 표정을 보는 수혁의 심기도 그
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이 잘 못 한 것이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저한텐 중요할 수도?”
“회사원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타당성있게 지금 그 곳으로 가야 되는 이유를 말 해 보세요!”
“제길. 지금 제 말에 토 다는 이유가 뭡니까? 저한테 감정 있어요? 하. 진짜 미치겠네.”
평소에 고분고분 하게 직원들을 다루었던 수혁이었기에 지숙이 만만하게 보고 쏘아 붙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수혁이 살짝 화가 난 다는 듯 거친 음성으로 지숙에게 말을 내뱉었고, 그 모습에 조금 움츠러든
지숙이다.
“이번 회의...”
“별로 안 중요한 거예요! 이번에 회의 연게 진채린 스캔들 때문에 연 거지, 뭐 다른거 있었나요? 안 그래
도 그 여자가 일 벌여놓은 것 땜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하기 싫은 회의까지 열어서 그 것을 다뤄야 되서
머리 터질 것 같은데, 지금 이렇게 제 앞길에 딴지 놓는게 좋습니까?? 그렇게도 진채린씨의 스캔들에 대
해서 회의가 하고 싶어요? 그럼 혼자서 실컷 하십쇼. 그리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회의 한 거 정리
해서 제출하도록 하세요. 만약에 마음에 안들면 알아서 하세요.”
“그래도 죽어도 잘 못 했단 말은 안하네요?”
“닥치고 일이나 하세요.”
수혁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지숙에게 조용히 말을 내뱉으며 다시 뒤돌아 회사를 빠져 나갔고, 지
숙은 그런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차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취급당해 보긴 처음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자신에게 설설 기어서 수혁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이사라고 해도 자신이 더 오래 회사에 있었고, 그리고 매번 고분고분 하던 수혁의 이미
지를 봐 왔던 지숙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냥 수혁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만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상황에 지숙
은 화가 났다.
“일 안하고 뭐해욧!!!!!!!!!”
되려 다른 직원에게 화풀이를 하는 노.처.녀 지숙이었다.
※ ※ ※ ※ ※
“하. 왜 이렇게 안 오지?”
도롯가의 인도에 아무렇게나 쪼그려 앉아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혜선이 수혁을 기다리며 중
얼거렸다. 금방 올 줄 알았던 수혁이 조금 늦자 지루함을 느낀 혜선이었다.
자신 때문에 지숙이란 여자와 살짝 말다툼을 한 수혁의 상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지금 수혁은 차 안에서 살짝 열을 분출 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야.똥개!!”
어느새 개에게 이름을 지어 준 그녀.
하지만 똥개. 라니.. 아무리 봐도 그 개는 혈통이 있어 보이는데……. 똥개란 이름은 너무 한 듯 싶다.
하지만 그 강아지는 똥개라는 이름이 좋다는 듯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혜선의 손을 핥는다. 쯧쯧. 지
조 없는 강아지 같으니라구. 똥개라는 이름이 그저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꼴이라니…….
“솜사탕!!!!!!!”
“깨엥????”
혜선의 어이없는 명령을 못 알아들은 ‘똥개’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귀여운 소리를 냈다.
“에이. 이런 것도 못하는 똥개 같으니!!”
“깨엥??”
“흰둥이도 할 수 있는 걸 넌 못하다니!!!!!”
여전히 고개를 갸웃 거리는 똥개.
혜선이 말하는 솜사탕이란, 짱구에 나오는 흰둥이가 몸을 둥글둥글 말아 동그랗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
화가 아닌 이상 이 자그마한 강아지가 그런 포즈를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한다. 만약에 이번에도 못하면 여기다가 버려두고 난 그냥 갈거야. 알았지?”
“켕!!!!!!!!!!”
힘찬 똥개의 울음소리.
“솜사탕!!!!!!!!”
“켕!!!!!!”
여전이 우렁찬 똥개의 울음소리.
“에이. 이런 몹쓸견 같으니라고!!!!”
자신의 기대를 저 버리고 짖기만 하는 똥개를 바라보며 우울함에 젖어드는 혜선이었다.
‘그나저나, 수혁은 왜 이렇게 안 오지?’ 란 생각도 잠시, 빵빵- 하고 좋은 차 한대가 혜선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든 혜선.
“왜 이제 왔어요!!”
라고 말하며 생긋 웃으며 캐리어와 강아지를 챙겨서 조수석에 냉큼 올라탄다.
수혁의 차가 등장하자 주변의 사람들은 ‘와~ 멋지다.’라는 말을 남발 하며 기웃 거렸다. 방금 들어간 여
자도 이뻤으니, 차를 몬 사람은 얼마나 잘난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웃 거린 사람들도 많았고
차가 좋아서 그냥 차를 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곧 출발을 해 버리는 수혁의 차였기에 사람들은 아쉬움을 접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도 여전히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혜선이다.
“강아지 이쁘네요? 아, 어디로 가시려고?”
“대구요!”
“헉!”
헛숨을 들이키는 수혁. 대구라니. 대구라면 여기서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혜선은 과연 알고서 저런 천진
난만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일까????
“왜요? 싫어요?”
“아뇨...”
아니라고 말하는 수혁의 표정은 절대 ‘아뇨.’가 아니었다.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혜선이 수혁을 향해 말했다.
“네. 하하... 그런데 그 강아지 참 예쁘네요.”
이을 말이 없어서 처음 했던 말을 또 내뱉은 수혁이었고, 그 말에 혜선은..
“주웠어요.”
비틀.
핸들을 잡고 있는 수혁이 잠시 비틀거리는 듯 해 보이는 건 왜 일까.
“그..그러세요? 그런데 개가 참 눈에 익네요.”
“개가 다 똑같이 생겼죠 뭐.”
“하긴.. 개 이름은 뭐예요?”
“똥개요.”
또 다시 비틀.
“푸하하하..”
수혁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뱉어 버렸다.
“왜 웃어요??”
“아뇨. 아무리 봐도 혜선씨는 너무 웃긴 것 같아서요. 특이하구요.”
“그래요? 하아암~ 전 잠 좀 잘게요.”
“네~ 그러세.. 하하.. 네??”
수혁이 다시 물음을 건냈을 때 혜선은 이미 눈을 감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눕힌 뒤였다. 그리고 귀엔 이
어폰이 꽂혀 있었다.
대략 낭패의 표정을 짓는 수혁이다.
하얀 강아지 ‘똥개’도 주인의 품 안에서 몸을 뱅글 말아 고이 잠이 들었다.
“하아~”
짧은 한숨을 쉬는 수혁.
대구까지 가는 긴 여정을 혼자서 운전을 하면서 가야 한다니. 수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운전을 하는 게 한 두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해져버린 수혁이다.
“아, 이럴게 아니지.”
핸즈프리가 장착 된 수혁의 차. 그래서 수혁은 마음껏 전화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수혁은 어디론
가 전화를 걸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왜.
“비누야? 뭐해?”
-응. 촬영. 할 말.
짤막짤막하게 말을 하는 비누. 촬영 중이니 할 말 있음 짧게 하고 끊어라! 라는 말이 저렇게 짧게 비누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수혁은 익숙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내 옆에 누구 있게~”
-채린.
“네 옆 말고. 내 옆!!”
-직원
“땡!”
-미쳤냐? 장난 할 거면 끊어. 바뻐.
“내 옆에 혜선씨 있어!”
-뭐?!!!!!!!!!!!!!!!!!! 왜?!!!!!!!!!!!!!!!!!!!!!!!!!!!!!!!!!!!!!!!!
바쁘다는 비누가 적극적으로 수혁에게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했다.
“몰라. 혜선씨가 너무너무 외롭다고 날 찾더라구우~”
-뭐? 미친!!!
“하. 넌 그 여자랑 러브 하고, 난 혜선씨랑 러브 할게.”
-돌았지! 미친거지! 니가 정녕 돌은거지!
“그러니까 임마. 원래의 너로 돌아와. 나도 진채린. 그 여자 때문에 머리가 다 깨질 것 같으니까.”
-야!!!!!! 왜!!!
“혜선씨 짐 가방이 아주 그냥 큰데? 둘의 약혼 선언이 꽤 타격이 컸나봐. 지금 공항에 데려다 달라고 한
다? 해외 여행이라도 떠날 건가봐. 앗!! 혜선씨 깬다. 난 이만 끊을게. 넌 촬영 열심히 해.”
자신의 할 말 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 버리는 수혁이다.
그리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큭큭큭.. 웃는다.
“재밌어요?”
“히익!!!!!!!!!!!!!!!!”
큭큭 웃으며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혜선의 음성이 들려온다. 곁눈질로 혜선을 바라보자 눈을 말
똥말똥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다 들었어요?”
“뭐가 그리 웃겨요?”
이어폰을 귀에서 빼는 혜선이다.
쿵쿵짝-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이어폰. 이로써 혜선이 수혁의 통화내용을 듣지 않았단 게 나타난다.
“아, 그냥 뭐 좀 생각한다구요.”
“그렇구나. 그럼 수고해주세요. 전 잠 와서요.”
또 다시 이 말만 마치고 혜선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새벽까지 일 하고 들어왔는데 수정이
대청소를 한다며 혜선을 깨워 일을 시킨 것도 모자라, 운동까지 시켰으니 피곤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곧 혜선은 곯아 떨어졌고, 수혁은 신나는 노래라도 틀어서 지루함을 없애보고자 CD를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틀었다.
※ ※ ※ ※ ※
“제길!!”
통화를 끊은 비누의 심기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다른 그 누구도 비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비누에게로 다가왔다.
“류~ 좀 쉬면서 해.”
바로 진채린이었다. 자기가 촬영하는 것도 아니면서 비누가 촬영 할 때 마다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채린
이 비누는 귀찮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고마워.”
라고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어 마시는 비누였다.
“아까 누구 전화였어?”
“알 것 없어.”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채린에게 가시돋힌 말을 내뱉는 비누였다.
비누는 지금 생각 하고 있었다. 촬영이 언제 끝날까? 그리고 촬영이 끝나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 표를 끊
어 혜선을 쫓아갈까? 아니면 ..... 지금 도망칠까?
머릿속이 복잡한 비누였다.
“아잉. 류도 참~”
“촬영시작합시다.”
누군가의 이 말로 채린이 다시 떨어졌고, 비누는 다시 촬영에 임했다.
“형. 괜찮아요?”
“뭐가?”
“형. 저 여자 싫어하잖아요.”
“아냐~”
“아니긴요~ 얼굴 보면 다 나와 있는데.”
“아냐. 임마. 촬영이나 하자.”
자신에게 다가와 살갑게 구는 행운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비누가 웃음 짓는다. 행운을 보며 이름만
큼이나 기분이 좋은 비누였다.
생긴 것도 자신과 정 반대로 생겨선, 하는 짓도 정 반대였으니까.
“형. 힘내자구요!”
“그래! 힘내자! 화이팅!”
“화이팅!”
행운과 비누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 39 >
“엄마아~!!!!!!!!!”
휴게소에 들려 잠에서 깬 혜선이 ‘평리동’을 말했고, 수혁은 어렵게 어렵게 평리동으로 찾아 갈 수 있었
다. 그리고 평리동에 도착했을 때 다시 혜선을 깨워 자세한 주소를 물었고 그때 혜선이 길 안내를 해서
혜선의 집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혜선의 집은 그냥 주택. 주택가가 많이 모여있는 평범한 곳이었다.
“엄마아~ 딸 왔어!”
초인종을 쉴 세 없이, 띵동띵동 누르며 방정맞게 행동하는 혜선을 보며 수혁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매
번 차가운 모습, 혹은 냉정한 모습만 봐와서 그런 듯 싶었다.
“어라? 놀러 갔나?”
띵똥띵똥, 또 다시 마구 울려대는 초인종. 그리고 그 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고 그와 덧
붙여 이런 목소리도 집 안에서 흘러 들어왔다.
“아주 그냥 또 장난한 새끼면 뒤질 줄 알어!!!!!!!”
아마도 요즘에 장난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있나 보다. 혜선의 엄마 소정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보면 말
이다.
소정의 욕이 섞인 말에 수혁이 어설프게 웃었고, 그런 수혁을 보며 혜선도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그들은 서로 뻘쭘한 공기 속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앞에 등장한 혜선의 엄마 소
정이었다.
“어머. 왠일이래?”
혜선을 오랜만에 본 말 치곤 꽤 무미건조했다. 몇시간 만에 본 사이처럼.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소정이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마도 수혁을 찬찬히 뜯어 보는 중 인 듯 싶다.
아마도 자신의 사위로 착각 하는 듯한 소정의 눈 움직임이다.
“저 남자는....”
“아. 나 데려다 준 사람.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뵈어요~ 앗 따거!!!”
수혁에게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 서려던 혜선의 등을 쎄게 한번 내려치는 손. 그 손의 움직임과 마
찰로 인해 혜선의 입엔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손은 소정의 손 이었다. 자신의 딸을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리고 장차 사위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소정이었기
에 그냥 돌려보내긴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싸가지 없는 발언을 한 자신의 딸의 등을 한대 내려
친 것이고.
“얘는~ 호호. 차라도 한 잔 마시다 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 그리고……. 비누한테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네?”
수혁의 뒷 말은 그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왜냐면 수혁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기에…….
당연히 수혁의 말을 못 들은 소정이 수혁에게 되물었고 그런 물음에 수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음
지으며,
“아뇨. 하하. 그럼 혜선씨 푹 쉬다 오세요. 그럼 어머님도 안녕히 계세요~”
“아. 네에. 이렇게 보내면 안되는데. 호호.. 아. 어머님?”
“그럼.”
간단한 인사와 함께 차에 올라타는 수혁의 모습을 보며 소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그리
고 수혁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소정은 혜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남자 누구야?”
“아는 사람이라니까. 별로 안 친하지만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왜 나보고 어머님이라고 해?”
“아, 그럼 아줌마라고 하냐!!!!!!!”
혜선은 소정의 추궁이 듣기 싫은지 소리를 빽 지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몇달만에 오는 집인지 혜선은
감회가 남달랐다. 오고 싶었지만 오고 싶지 않은 곳. 그리고 많이 그리웠던 고향에 온 기분도 상큼했다.
“밥은 먹었어?”
“응. 아빠는 있어?”
“아니. 너같으면.. 해외에 가 있는데 있겠니?”
“아, 맞다.”
몇달만에 아빠가 해외로 나가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린 혜선이었다. 그리고 곧 소정도 외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대구에 신경을 끄고 귀를 덮어두었다고 해도 자신의 가족사를 모를리가 없
었기에, 이번 기회에 잘 내려왔단 생각을 하는 혜선이었다.
“언제 올라 갈꺼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소정이 물었다.
“내일.”
“뭐?”
몇일 푹 쉬고, 아니 일주일 푹 쉬고 갈 줄 알았건만, 혜선의 대답은 냉담했다. 아니, 단호했다.
“엄마 곧 떠나는데?”
“응. 그래서 오늘 온 거야. 마지막으로 엄마 보려고.”
“진짜?”
“구라.”
“오랜만에 몇대 맞아 볼까?”
혜선이 웃고, 그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 소정까지 웃어 버린다.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웃어본지가 몇달인가. 이렇게 얼굴 본지가 몇달만인가.
그리고 이렇게 ..
“배고파. 밥 줘.”
다정스레, 아니 무뚝뚝하지만 무언가의 정이 느껴지는 말을 해 보고, 들은지가 몇달만인가.
소정과 혜선은 사소한 것에 엄청나게 큰 행복을 느끼는 듯 했다.
..
..
..
“엄마.”
“응?”
“나 친구들 좀 보러 갔다 올게.”
“조심히.. 조심히 다녀와!”
“응~”
쾅.
대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혜선. 친구들을 보지 않은게 몇일 지났더라?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하지만, 친구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혜선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아마도 지금 친구들은 .....
“아. 학교에 있을수도 있구나.”
일순간 우울해 지는 혜선이었다.
자신의 조그마한 가방에 있는 폰을 꺼내드는 혜선. 그리고 자신의 친구 중 한명에게 전화를 걸려는 듯
번호를 누르려고 하고, 그렇게 혜선은 집을 점차 벗어나 육교로 향하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러던 순간 친구를 만날 수 있단 생각에 한껏 부풀어 올라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로 걸음을 옮기던 혜
선의 발걸음이 멈추고 들고 있던 폰은 혜선의 손에서 멀어져 버린다.
턱. 촤르르르르르륵.
땅바닥에 추락해 버린 폰들은 베터리가 분리 된 채로 육교 계단을 세차게 돈다.
혜선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 폰들을 챙긴 채 계단을 내려 서려고 한다. 아뿔사. 애초부터 집에서 나올
때 부터 선글라스 혹은 색안경을 끼고 왔어야 했다. 요즘들어 안경 같은 걸 쓰지 않았기에 오늘도 여전
히 맨얼굴로 바깥으로 나온게 잘 못 된 일이었다. 만약 안경만 있었어도 혜선이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혜선이 이렇게 당황하지 않고, 혜선을 발견한 그 누군가도 성난 눈빛을 하지 않았어도 됐
고 말이다.
그리고 혜선은 돌아서 내려가려는 것 자체가 잘 못 된 것이었다. 위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올라갔
으면 못 알아 봤을 수도 있는데, 그만 내려가려다가 다른 누군가와 마주친 것이다.
분명 혜선이 피하려고 하던, 위에서 내려오던 사람과 만나려는 듯 손까지 흔들며 혜선의 뒤에 선 사람에
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하... 이게 누구야?”
빈정되듯 누군가 입을 열었고, 그 소리에 혜선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만다.
“사람 죽이고 홀연히 사라진 살인자년 아냐?”
예전같으면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혜선에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혜선도 고개
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저 사람은....... 예전 용이가 죽었을 때, 그때 얽혔던 사람 중 한명인 송이라는 여자였다. 그리고 위쪽에
서 내려오는 사람은 용이의 베스트였던 단우고.
혜선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떨군 채 있었고, 그런 혜선을 여전히 차갑고 표독스럽게 바
라보는 송이였다. 하지만 단우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나타났냐는 표정. 왜 한번도 연락이 없었냐는 표정. 미치도록 그리웠다
는 표정. 정말..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는 복잡하고도 벅차오르는 표정이었다.
“…….”
“…….”
“…….”
한동안 그들 사이에선 침묵이 일관했다. 육교 계단 한가운데에, 중간에 선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
쪽에서 올라오던 여자는 무서운 표정으로 그 여자를 노려보고 있고, 위 쪽에 선 남자는 중간에 있는 여
자를 애타게 바라본다.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하게 굴러 갔다.
“지...혜선.”
그 침묵을 깬 건 단우였다.
“…….”
“지혜선. 지혜선. 지혜선 맞지!!!”
“…….”
단우의 지금 심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벅차오른 상태였다. 누구나 잡고 하하하, 하고 웃고 싶을 정
도. 용이와 베스트인 것과 동시에 혜선과도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던 단우였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
이었다.
“혜선.. 지혜선. 야... 지혜선.”
훤칠하게 잘 생긴 단우의 눈엔 금세 눈물이 고여버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싫은지 하늘을 올
려다 보며 눈물을 삼키는 단우였다.
그리고 송이는 하도 째려보느라 눈에서 눈물이 살짝씩 고이고 있는 상태다.
“응. 응. 단우야.”
언제나 차가웠던 혜선이, 예전같으면 ‘뭐, 이새꺄. 고만 쳐불러. 귀 간지러워.’ 라고 대답했었을 혜선이
정상적인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목소리가 잔뜩 잠긴 채로.
혜선도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반가운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단우. 단우는 용이 죽기 무섭게 연락
이 끊겨버렸었다. 아니, 혜선이 일방적으로 피해다녔었다. 단우를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단우를 보면 ... 서로 슬플테니까.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단우가 혜선을 와락 끌어 안는다. 이미 단우의 눈에선 눈물이 소멸된지 오래였
다.
“꺄아악!!!!!!!”
그런 단우를 보며 송이가 미친듯이 괴성을 지른다. 육교를 오르던 사람들은 그런 송이의 발광이 무서운
지 송이의 주변을 둥그렇게 경계삼아 다가가지 않은 채 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보고 싶었다. 임마.”
“...나도 보고 싶었다. 이 새꺄.”
송이의 괴성이 들리지 않는지 단우가 혜선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 인사에 혜선도 인사를 건넸다.
“꺄아아아악!!!!!!!”
여전히 송이는 알 수 없는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천천히 혜선에게서 떨어지는 단우. 그리고 혜선에게서 떨어져 어깨동무를 취한다. 그리고 천천히 육교
를 내려가 송이에게 다가가고, 그 것을 허용치 않겠다는 건지 송이는 날카롭게 잔뜩 선 날카로운 손톱으
로 그들을 할퀸다.
“다가오지마. 다가오지마. 꺄아아아아아악...”
용이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괴로웠던 건 아마도 송이였으리라.
것보다... 단우랑 둘이서 왜 만나려고 했던 걸까?
“우리 사겨.”
혜선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단우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
“뭐???”
“... 송아. 이리와. 괜찮아. 괜찮아.”
단우가 혜선에게서 멀어진 채, 마구 손을 휘젓는 송이를 꼬옥 끌어 안는다. 그러자 언제 발광을 떨었냐
는듯 송이가 잠잠해 진다.
“…재수없는 년. 재수없는 년. 어디라고 왔어. 어디라고 단우와 끌어안아!!!!!”
괴성은 단순히 두려움만은 아니었나 보다. 단우가 혜선을 끌어 안았을 때 터져나왔던 비명이니까, 아마
도, 둘이서 떨어지라는 의미가 더 컷나 보다.
“송아. 혜선이 내 친구야. 그러지마.”
“그러기 전에 네 친구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야.”
“야!!!!!!!”
송이의 무차별적인 발언에 단우가 송이를 다그치듯 소리쳤고, 그 소리에 조금 움찔거리는 송이는 곧 아
무렇지도 않게 혜선을 노려보며 입을 오물 거린다. ‘살.인.자’ 라고.
그리고 그런 송이의 입모양을 보고 피식 웃는 혜선.
그들을 등지고 걸음을 띤다.
“만나서 반가웠다. 이단우.”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아니,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친구 중 하나인 단우를 어이없게 만나
어이없게 헤어지는 혜선이었지만, 오늘의 만남은 뜻깊었다.
....왜냐면..
자신을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거니까.
< 40 >
“하아. 벌써 사월달인가?”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세는게 취미가 되어버린 비누였다. 이제 곧 지나면 촬
영도 다 끝나간다. 요즘 막바지 촬영에 살짝 바빠진 비누였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비누는 절때 달력을 놓지 않았다.
비누가 보고 있는 자그마한 달력엔 빨간 볼펜으로 엑스표가 되어있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잖아..?”
비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그마한 달력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혜선이 대구로 내려간지도 벌써 몇주일 째였다. 수혁에게 혜선이 떠난 다는 말을 듣고 수혁에게 어디로
갔는지 물어도 수혁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렇다고 수정에게 가서 혜선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만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애꿎은 달력만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비누는 혜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니까.
“비누씨, 마지막 촬영 들어갑니다.”
“네에~”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누군가의 그 말로 인해 비누의 표정이 확 바꼈다. 역시 일과 감정은 비누에게 별
개의 감정 인 듯 하다.
누군가 비누에게 일과 사랑 중 무엇을 선택 할거냐고 묻는다면 비누는 당연히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일.’ 이라고.
사랑이 밥 먹여 주는게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채린과의 약혼설도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무리 궁금하고 아무리 찾고 싶고 아무리 보고 싶어도 일단은 일이 우선이다. 비누에게는.
“꺄~~~ 류비누! 류비누!”
마지막 촬영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공항이라서 사람들도 많았고.
그래서인지 비누는 골이 띵 하게 아파왔다. 너무 말소리가 울려서.
“오늘 찍을 장면은 공항에서 여자 주인공을 붙잡는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비누는 팬들을 향해 미소 한번 지어주고 머리를 살짝 긁었다.
※ ※ ※ ※ ※
“엄마. 밥 잘 챙겨 먹고, 가끔씩 전화하고. 알았지?”
“그래. 우리 이쁜 딸도 잘 지내고. 알았지?”
“응. 잘 다녀와~”
“...그래.”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소정은 겨우겨우 한발짝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느세 혜선의 눈엔 자신
의 엄마의 뒷모습이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다.
그때서야 혜선은 뒤를 돌아 걸었고, 혜선의 눈동자엔 자그마하게나마 눈물이 맺혔다. 외국으로 엄마를
보내는게 그리 쉬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과 대구는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지만
외국은 그게 아니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몇일만 있다가 서울로 내려가려던 혜선도(당연히 하루만 있다 가겠다는 말은 농담이었다) 몇주
일씩이나 머문거였고. 단지 자신의 엄마인 소정과 하루라도 더 있기 위해서…….
물론 그 기간동안 자신들의 친구들과는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나봤자 가슴만 아플거고, 괜히
가슴이 뜨끔거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 할 것이니, 만나나 만나지 않나 매한가지였다.
“아. 이제 어쩐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하나?”
눈을 살짝 찡그리며 혜선은 이제 어깨를 살짝 덮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어깨에 걸그적 거리는게 귀찮
아서 한 행동이었다.
혜선은 귀찮은지 의자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모한테 전화나 걸어 볼까?”
라고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전부터 그곳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갑자기 사람
들이 더 늘어났고 혜선은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 궁금했지만 그곳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우선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싫었고 그곳에 가서 치일 생각을 하니 더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치만 궁금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앉아 있던 의자에 발을 올리고 까치발로 그곳을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우와! 연예인이다.”
까치발로 그 곳을 바라보던 혜선은 곧 흥미가 떨어졌는지 시선을 돌리고 공항을 터벅터벅 빠져나간다.
공항 바깥으로 나가자 마자 쏟아지는 햇빛에 혜선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택시 한대가 혜선의 앞에 멈춰 서고, 버스 타고 가기도 귀찮았던 혜선은 ‘신월 아파트 앞이요.’ 라고 말
하고 택시 안에서 엠피를 들으며 도착 할 때 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발 집에 이모가 있길 바라는 혜선이었다. 택시비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
..
..
“… 입니다.”
“네에? 그렇게나 많이 나와요?”
“에~ 별로 안 막혀서 얼마 안 나온거예요.”
혜선은 집에 전화를 하려다가, 혹시나 수정이 자고 있을 수도 있을 듯 해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우기 싫
어 십만원이 훨씬 넘는 돈을 눈물을 머금고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수고하세요.”
입을 앙 다물고 택시기사에게 어설픈 웃음을 보이곤 집으로 향한다.
※ ※ ※ ※ ※ ※
공항을 두리번 거리며 한 여자를 찾고 있는 비누.
사람들을 헤쳐가며 머리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 급박한 표정과 함께 이
마엔 땀 한방울을 흘려주는 센스를 보여주며 바쁘게 움직인다.
“컷!!!”
다른 이들이 봤을 땐 비누가 촬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그래서 감독이 비누가 너무 시간을
끌며 여 주인공에게 다가가지 않자, 잠시 중단하자고 신호를 주었지만 그래도 비누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두리번 거린다.
“뭐 하는거야!”
감독이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를 비누에게 쏟아 내고, 그제서야 비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왔을리가 없지. 여기에 있을리가 없지. 수혁이가 그랬잖아. 혜선이가 떠났다고…….’
비누는 천천히 높은곳에서 내려와 다시 촬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비누가 본게 혜선이 맞다면? 그렇다면 비누는 일을 포기하고 혜선을 쫓아갔을까? 과연?
지금 비누의 상태라면 ‘NO’다. 촬영이 우선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혜선을 발견했을때 혜선을 보내
진 않을 것이다. 혜선을 큰소리로 불러 자신의 옆에 놓고 못 가게 할 거니까.
오랜시간동안 자신을 그립게 한 죄로…….
혜선이 니가 무슨 권리로 이러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난 후, 인사를 한 뒤 비누는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내일 7시부터 쫑파티 할 거니까, 스윙스로들 모이세요~”
급히 인사를 하고 빠져나가려는 비누의 귀에 스윙스로 모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비누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그곳을 빠져 나왔다.
다른 이들은 그렇게 빠져나가는 비누를 가만히 놓아 두었다. 붙잡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몇달 같이 일 해 보면서 느낀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진채린이랑 난 스캔들은 거짓인거 같다.’
이것이었다.
매번 진채린이 비누를 찾아오면 비누는 채린을 피하기 바빴고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채린만 비누를 죽자살자 쫓아다니는 것 처럼 그들의 눈에 비쳐졌다.
하지만 오늘도 비누는 늦.었.다.
“류~”
번쩍번쩍 빛이 나야 된다고 할까? 공항에 비누를 보러 왔음에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언제나 화
려하게 입고 오는 채린이었다. 누가 갑자기 뜬 연예인이 아니랄까봐 주위 시선을 너무나도 의식했다.
하지만 팬들은 그런 채린을 보고도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채린누나가 저런 놈이랑 사귄다고? 허우~ 아깝다. 아까워. 내가 더 낳은데.”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 거렸다. 이런 소리가 들릴때마다 비누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져. 이자식아!!!!!!!!!!!!!’
하지만 이렇게 소리치진 못했다. 왜냐면,
“그냥 있어. 저쪽 기획사에서도 진채린의 더 이상의 스캔들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라고 기획사에서 말했기에..
하지만 비누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간 꼭 ........ 언젠간 꼭 ...
※ ※ ※ ※ ※ ※
“이모, 나 왔어~”
집에 들어간 혜선은 끈적한 분위기가 묻어 나는 집 안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어두운 분위기는 다 뭐야!!!!!!!!!”
대 낮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의 커튼이란 커튼은 다 쳐서 빛이 들어올 구멍
하나 만들어 놓지 않고 불도 다 끈 상태에 촛불 세개만 켜 놓은 상태라니.
혜선은 기가 차서 바로 불을 켰고, 그 순간 불을 킨 것을 후회 해야만 했다.
“혜..혜선아?”
“혜선...씨?????”
수정과 진호가 함께 있었기에.
수정이 일 때문에 밤에 분위기를 내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내자는 건가?
“훗.” 혜선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다시 불을 꺼 주었다.
“아~ 피곤해. 방음 처리 다 되 있을텐데, 난 잠이나 자야겠다. 내가 여기서 친구가 없어서 나가지는 못
하겠구요..... 아, 아니다. 내가 다시 나가 주지 뭐. 나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후후후..”
이렇게 말을 마친 혜선은 짐가방을 현관에 놓아둔채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혜선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하~ 이모가 잘 되게 해 주려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진짜 어딜 가냐????”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10분 정도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폰을 꺼내드는 혜선이
다. 그리고 단축번호를 눌러 수혁에게 전화를 건다.
-여.....
“수혁??”
수혁의 말이 끊맺기도 전에 혜선이 수혁을 부른다.
-네. 누구...?
“저, 혜선이예요.”
-아!! 혜선씨!!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 하나요? 음.. 나 심심해요.”
-에에???
“대구에서 지금 내려왔는데요, 집에 못 들어가고 쪼그려 앉아 있다구요. 서울에서 친구도 없고. 친구라
고 해봐야 당신밖에 없다고!!”
-푸하하. 집 앞에 나와 있어요. 곧 데리러 갈 테니까.
“네네~ 저 배도 고프니까 빨리 와야 해요.”
-네에~
혜선은 전화를 끊고 기분 좋은 미소로 아파트 복도에 서서 수혁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아파트 입구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수혁의 차가 오면 곧장 내려가려고 말이다.
글쓴이 : 발광소녀 (-_-flower-_-a@hanmail.net)
팬카페 : 현실도피 발광소녀 (http://cafe.daum.net/LovelySosu)
팬카페엔 완결낫답니다'ㅇ'!
카페 게시글
하이틴 로맨스소설
[ 중편 ]
스캔들 <36~40>
발광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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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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