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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계절의 좋은 시>
식물의 힘
⸺김나영, 「원정」
성향숙, 「마리코 아오키는 서점에 갈 때마다 배변 욕구가 생긴다」
안차애, 「경복궁」
서 안 나(徐安那)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과 오노 요꼬는 신혼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텔드담 호텔 침대에서 반전시위를 했다. 존 레넌과 오노 요꼬의 반전 시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개성적인 반전 시위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은 유리창이 넓어 햇살이 잘 드는 호텔 침대에서 종일 지내는 것으로 반전시위를 대신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침대에서 평화롭게 앉아 식사하며,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잔잔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다. 침대 위에는 기타가 있었고, 침대 머리맡 근처에는 싱싱한 꽃이 가득 담긴 두 개의 꽃바구니가 있었다. 그들은 침대 위에 기타와 꽃바구니를 놓아두고, 손에는 흰색의 장미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사진을 찍은 꽃은 상징성을 갖는다. 그 두 송이 꽃과 기타가 상징하는 미와 음악의 힘은 총과 칼보다 더 강하며, 이 강함에는 연약함으로 전쟁의 폭력성을 잠재우는 자연 혹은 식물이 지니는 수동적 역동성이 내재해 있다.
신혼의 존 레넌과 오노 요꼬가 하루종일 침대에서 벌인 반전 시위
현대시에서도 식물은 즐겨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식물이 소재로 등장하는 빈도수가 높은 이유 역시 우리 일상에 밀착되어있으며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유약하거나 성질이 소심하고 온순한 수동적인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이때 식물의 이미지는, 동물성이 지니는 공격성이나 폭력성에 대립하는 의미망을 세세하게 거느리고 있다.
이번 계절의 시를 읽으면서 식물의 힘에 주목하는 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 편의 시에 등장하는 식물은 인간에 의해 훼손되거나 절단되기보다, 오히려 존 레넌과 오노 요꼬의 꽃처럼 상처 입고 파편화한 이 비루한 세계를 봉합하는 대상으로 거듭 나고 있다.
톱니처럼 생긴 꽃, 민들레가 맞물려서피어나고맞물려서피어난다
꽃이 꽃을 길어올린다 대기에 미세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아무 곳 아무 데로 전투적으로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 석유 한 방울 사용하지 않고
인조석과 활주로를 가볍게 넘는다 총 칼 없이 미사일 없이 드론 없이 국경과 바다를 건너
방글라데시 로힝야족 난민들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발아를 기다린다 시리아 홈스 주택가 주인 잃은 신발 안에도 뿌리를 내리고 상처 난 대지를 꽃으로 봉합한다
꽃으로라도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저렇게 비폭력적인 이데올로기도 없다
민들레 씨앗 안에는 엎질러지기를 소망하는 초록물감이 수십억 톤
23.5° 기운 민들레씨가 지구의 자전속도에 따라 지구촌 어디든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
-김나영, 「원정」, 계간 『문예바다』 , 2018년 여름호
김나영 시인의 시에서는 식물이 지닌 역동적 수동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식물이 지닌 무궁무진한 힘을 상상력을 통해 변용하고 확장하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민들레꽃은 유기적인 식물이 비유기적인 금속성의 사물로 변용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식물에서 기계적인 특성이 있는 대상으로 확장하는 시인의 매운 눈을 마주하게 된다. 금속성의 질감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을 장착은 민들레꽃은 무동력이다. 이는 대상을 낯설게 보기이며, 개성적인 상상력이 시의 전면에 깔려 있어 독자에게 시 읽는 맛을 선사한다.
김나영 시인의 「원정」에서 주인공은 “민들레꽃”이다. 그런데 시에 등장하는 “민들레꽃”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꽃과는 다르다. 민들레꽃은 비행기가 드론과 같은 기계처럼 어디든지 비행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와 자본으로 고립된 공간을 봉합하는 대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시의 1연은 민들레꽃의 외형적 묘사에 집중하여 민들레꽃의 외양에서 “톱니”라는 기계적인 상상력을 포착하고 있다. “민들레꽃”과 “톱니”의 유사성을 통한 시적 장치를 통해 “톱니처럼 생긴 꽃, 민들레가 맞물려서피어나고맞물려서피어난다”라는 민들레의 꽃잎 모양에 주목하고 있다. “맞물려서피어나고맞물려서피어난다”라는 진술방식에는 띄어쓰기를 생략하여 민들레꽃이 서로 맞물려 힘으로 집약하는 과정을 센스있게 드러내고 있다.
작품 안에서 내가 만난 민들레의 형상이 “톱니”를 닮아있다는 시적 장치를 통해 기계적인 대상으로 변용되어 “민들레 꽃”은 식물과 금속성의 이질적인 세계의 이동과 변용을 가능케 한다. 민들레꽃의 여행은 자유스럽다. 무동력으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다. 그리고 민들레의 내부는 온통 초록 물감이 가득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시는 절정을 맞이한다. 이와같이 민들레와 기계적 속성이 결합한 대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서로 맞물리며 피어난 민들레꽃의 씨앗은 도시의 “인조석”과 “활주로”를 넘어 날아가고 있다. “꽃이 꽃을 길어올”리면서 “대기에 미세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전투적으로 번 져 간 다 번 져 간 다 석유 한 방울 사용하지 않고”. 무동력이란 인간이 늘 꿈꿔왔던 것이 아닌가. 바람으로 혹은 곤충으로 이용하여 왔다.
민들레꽃의 비행의 목적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민들레 씨앗이 가 닿는 곳은 모두 아프고 상처가 많은 곳이다. “방글라데시 로힝야족 난민들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발아를 기다리거나”, “시리아 홈스 주택가 주인 잃은 신발 안에도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난민”과 “홈리스”의 가난한 영토에 도착한 민들레 씨앗은 또 내년에 야무지게 초록의 잎사귀와 노란 민들레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렇기에 “민들레 씨앗 안에는 엎질러지기를 소망하는 초록물감이 수십억 톤”이 담겨 있다. 민들레꽃은 “상처 난 대지를 꽃으로 봉합”하고 있다. 민들레꽃은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비폭력의 지점으로 나아가 평화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가장 연약한 것을 우리는 식물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민들레꽃 안에 내재한 강한 힘을 발견하고 있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민들레꽃이 지닌 고정관념을 산산이 부수고 시인만의 민들레꽃을 탄생시키고 있다. 지금도 “ 23.5° 기운 민들레 씨앗”이 “지구의 자전속도에 따라 지구촌 어디든 번 져”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하나의 우주가 버티고 있다.
서점의 책들은 날것이다
책들이 풀처럼 일어선다
나는 낯선 글자들에 민감하다
신선한 제목들 앞에선 야생의 짐승으로 돌변한다
눈에 띄는 대로 뺐다 도로 끼웠다
날것의 글자들은 날것인 채로
서점의 시간은 풋것을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의 원형 식탁
중심은 비어 있고
마리코 아오키가 은밀한 체위를 꿈꾸듯
절름발이 늑대가 있는 동물원에도 경건한 목례를 표하며
상상은 식물성일까?
하루를 꺼내 들고 백 년의 변기에 앉으면
부지런히 시간을 세는 초침을 이해하고
정착지를 잃은 상상들을 외롭지 않게 다독였다
끈질기게 씹어 삼킨 살코기를 생각한다
관념이 풍기는 따위의 고소한 맛에 대해
한 권의 들소를 해독하는데 천만 평 초원이 필요하다
원형 식탁의 즐거운 추억일지라도
초원은 침묵으로 배설될 것이다
-성향숙, 「마리코 아오키는 서점에 갈 때마다 배변 욕구가 생긴다」, 《포지션》2018년 가을호
상상은 식물성일까?
성향숙 시인의 시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도발적이다. 성향숙 시인의 시는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서점이라는 일상으 공간을 낯선 공간으로 뒤틀고 있다. 시의 제목에 거론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배변 욕구가 생긴다는 “마리코 아오키”는 누구인가? 이는 “마리코 아오키 현상”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85년 4월 일본에서 발행된 ‘책의 잡지’(本の雑誌) 40호 독자 투서란에 투고한 독자의 엽서가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서점에 가면 왠지 변의를 느낍니다. 이유가 뭔가요?”(아오키 마리코·회사원)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공론 끝에 매체와 잡지들이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중 하나가 책을 인쇄할 때 사용하는 잉크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인간의 뇌에 영향을 줬으리라는 설과, 서점의 수만 권의 서적 중 나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야만 한다는 초조한 심정 때문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이러한 “마리코 아오키 현상을 배경으로 삼아 시가 전개되고 있다.
시에서 빛나는 부분은 “서점의 책들은 날것이다”라는 시의 1연이다. 서점에 진열된 책이 “날 것”이며, “풀처럼 일어”서고 있는 상황은 이채롭다. 서점이나 도서관이 삽시간에 날카로운 풀로 가득 찬 환상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풀처럼 살아있는 “날 것”으로 치환되면서, 책은 죽어있는 박물학적 서적이나 죽은 글자들이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날것으로의 생명성을 획득하고 있다. 책이 나와 호흡하는 대상으로 변용되어 “칼처럼 날 선 풀잎”과 같은 식물의 얼굴을 전면으로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낯선 글자들에 민감” 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책이 날것”이라는 표현은 중의적이라 할 수 있다. “책=날것”이란 은유는 곧 이중적 의미를 통해 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작동하고 있다. 시의 제목인 “마리코 아오키 현상”이 책의 잉크 냄새가 생리 욕구를 자극하는 원인이라면, 또 하나의 원인은 서점에서의 책을 고르는 나의 태도에 있다. 내가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독서하는 행위가 “풋것을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의 원형 식탁”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신선한 제목들 앞에선 야생의 짐승으로 돌변” 하여 “눈에 띄는 대로 뺐다 도로 끼”우면서 “날것의 글자들은 날 것인 채로” 맹렬하게 “들소”처럼 책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 것인 책을 탐하던 “채식주의자의 원형 식탁”의 “중심은 비어 있”을 뿐이다. 비어 있는 원형 식탁의 빈 중심에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나의 깨달음은 곧 삶의 유한성에 관한 사유로 나아가고 있다. “하루를 꺼내 들고 백 년의 변기에 앉으면”, “부지런히 시간을 세는 초침을 이해 하”게 되고, “정착지를 잃은 상상들을 외롭지 않게 다독”일 수 있게 된다. 내가 풀처럼 날카로운 날 것인 책을 맹렬하게 삼킨 탓에 나는 결국 침묵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침묵은 곧 책이 지닌 “날 것”의 식물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정착지를 잃은 ” 타자를 내 안에 들이는 일이다.
나는 붉은 물이어서 따뜻하고 멀다
나는 검은 불이어서 중심보다 깊다
퍼져있기 위해 모으거나
무겁게 쏟아지려고 자꾸 달아난다
무너진 변방의 사이, 그 샛길까지 닿으려고
나의 거처에는 사방이 문이다
심화心火
내가 가로지를 혈맥은 지도에 없다
내가 닿아야할 거점은 지명이 없다
북두칠성처럼 짚어보는 혈 자리의 배치
기립 근처럼 서 있는 삼태성의 응시
별빛은 흐르는 것이어서
나의 밤에는 눈꺼풀이 없다
다시, 무너진 곳을 말해다오
맨 이마로 그곳을 메우리라
적매화빛 선혈은 사이 돌로 괴리라
나는 변방보다 멀어서 어둡거나 검다
나는 중심이 아니라서 북편보다 아득하다
-안차애, 「경복궁:심장은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 신명神明의 집이다『동의보감 내경편」, 계간 『시작』 2018년 여름호 발표』
안차애 시인의 시 「경복궁」을 읽는다. 나에게 경복궁의 이미지는 오래된 목조건물의 아늑하고 낮은 향기와 붉은 단청이 칠해진 배흘림기둥, 잔잔하게 지붕과 서까래에 녹아있는 초록의 문양 등으로 다가온다. 고궁에서는 사람의 냄새보다 나무와 풀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사람은 사라지고 대신 목조 건물이 남아 화려하고 융성했던 옛 왕조의 권력을 말해준다. 그래서 늦가을의 고궁은 사라진 왕조의 몰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극적인 비애미를 품기 마련이다.
안차애의 “경복궁”은 의인화한 경복궁과 경복궁의 건축 의도, 동의보감의 구절을 하나로 엮는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로 의인화한 경복궁의 내면 풍경과 진술에 있다. 경복궁이 과거 찬란했던 왕족이 거처했던 곳이며, 왕족의 권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면, 시에 등장하는 경복궁은 이와는 다르다. 폐쇄되고 일방향적으로 왕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과거의 궁궐이 아닌 파격적이며 가변적인 궁궐이다.
“나는 붉은 물이어서 따뜻하고 멀다/ 나는 검은 불이어서 중심보다 깊다”에서 경복궁은 붉은 물과 검은 불”로 변용되고 있다. 붉은 물과 검은 불은 무언가를 침수시키거나 익사시키는 부패한 권력의 표상이 아니다. 매몰과 침잠, 상대를 태우는 소멸이나 소진의 폭력적인 속성이 아닌, 물은 따스하여 (중심에서) 멀고, 검은 불은 중심보다 깊다.
경복궁의 속성은 “퍼져있기 위해 모으거나/ 무겁게 쏟아지려고 자꾸 달아”나고, “무너진 변방의 사이, 그 샛길까지 닿으려고/ 나의 거처에는 사방이 문이”달린 가변적 존재이다. 물과 불로 변용된 경복궁이 사방이 문인 거처로 선택하는 “도주”의 방식은 응집이 아닌 해체와 일탈에 가깝다. 권력자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중심을 폐기하려는 경복궁의 태도는 종국에는 “무너진 변방의 사이”와 “샛길”에 닿으려는 의지를 피력하는 대상이다. 이때 사방이 문으로 열린 구조를 지닌 경복궁은 “-는 -여서 -하다”라는 진술 방식을 통해 원심화하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과 불로 변용되는 “경복궁”은 기존의 경복궁과는 전연 다른 대상으로 개성을 선취하고 있다. 이러한 댓구의 방식은 권위적이고 위협적인 경복궁 대신 무너진 변방을 향해 나아가고 소통하려는 의지의 대상으로 포착하고 있다.
시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사잇돌로 괴는 것은 식물인 “적매화빛 선혈”이며, 경복궁은 무너짐 마저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조로 건축된 경복궁이 낡아가는 것은 곧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이 균열을 연기시키는 “적매화빛 선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물어지는 건물의 균열을 봉합하고 치유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식물인 꽃이다. 이때 “다시, 무너진 곳을 말해다오/ 맨 이마로 그곳을 메우리라/ 적매화빛 선혈은 사이 돌로 괴리라”라는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매화는 봄에 피는 꽃이며, 꽃의 선혈은 곧 낙화를 의미한다. 낙화는 또한 열매의 시작이다. 적매화의 선혈을 사이 돌을 괸다는 것은, 경복궁이 목조로 건축된 건물임을 떠올릴 때, 죽음의 중단과 아울러 부활의 조건으로 볼 수 있다.
경복궁은 다분히 자연의 우주적인 섭리와 이치를 이용하여 지어진 왕궁이다. 이렇듯 경복궁은 사방이 문으로 트여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무너진 곳으로 찾아가는 의지라 할 수 있다. 곧 외부와의 소통이 가능한 것은 “무너진 변방의 사이, 그 샛길까지 닿으려고/ 나의 거처에는 사방이 문이다”라는 진술이 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식물이 지니는 수동성은 곧 역동성에서 발현한다. 이 역동적 수동성은 자연에 내재한 식물의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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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徐安那)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 시 신인상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발달사』,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전집 1․2』, 『전숙희 수필선집』엮음,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서쪽>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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