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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
신 25:11-19
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1-19 / [과잉 공격 금지 규정] 이스라엘의 동족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두들겨 맞는 자기 남편을 돕기 위하여 달려들어 때리는 사람의 생식기 부분을 잡아당기면 12) 여러분은 그 여자의 손목을 잘라 버리십시오.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13) [공정한 상도의] 여러분은 주머니에 크고 작은 두개의 저울추를 숨겨 두고서 물건을 살 때에는 무거운 추를 쓰고 팔 때에는 가벼운 추를 써서 고객들을 속이지 마십시오. 14) 여러분은 집안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말을 만들어 놓고서 곡식을 살 때에는 큰 말을 쓰고 팔 때에는 작은 말을 써서 고객들을 속이지 마십시오. 15) 여러분은 저울추도 모자라거나 넘지 않도록 만들어서 쓰고, 말도 모자라거나 넘지 않도록 만들어서 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서 여러분이 오래 살 것입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동족을 속이는 사람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 17) [아말렉 족속에게 보복하여라] 여러분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 광야를 통과하던 때에 그곳에 사는 아말렉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입힌 고난을 잊지 마십시오. 18) 그들은 여러분이 광야를 여행하느라 지치고 피곤하였을 때에 여러분의 행렬을 뒤쪽에서 공격하여 낙오자들을 모두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여러분이 상속 재산으로 차지하고 사방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벗어나 평안하게 살게 되면 아말렉 족속을 멸망시켜 아무도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사회에서 일어나기 마련인 갈등과 다툼 상황의 처리와 상거래 시의 경제윤리를 다룹니다. 이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지금까지 언급한 율법들의 바탕에는 나 이외의 존재를 내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11-12) 다툼이 났을 때, 경솔하고 천박한 행위를 한 여자를 처벌하는 규정입니다. 자기만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생명을 위협하고, 명예를 짓밟는 모든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과 다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툴 때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어서는 안되며, 상대의 생명과 명예는 보호되어야 합니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13-16) 온전하고 공정한 도량형기로 상거래를 하라는 규정입니다. 풍성한 소출과 소유, 자본이 경제의 기초가 아닙니다. 든든한 경제구조의 기초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정성입니다. 나와 내 권리가 소중한 만큼 너와 너의 권리도 소중합니다. 이 존중 의식에서 나오는 사랑과 신뢰, 공정성 위에 하나님 나라의 기초인 경제구조가 세워져야 합니다. 경제구조와 경제윤리는 물질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참된 신앙의 실천 문제입니다.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17-19)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로서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 행군에 지친 이스라엘 진영의 후미를 기습공격하여 피해를 준 일이 있습니다(창 36:12; 출 17:8-16). 모세는 이 일을 근거로 가나안 정착이 끝나면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는 과거의 원한에 따른 단순 보복 명령이 아닙니다. 약자를 수탈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을 심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심판 명령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죄와 싸워 인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일에 쓰이는 선민 이스라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약 400년 뒤 사울 왕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던(삼상 15장) 이 명령은 히스기야 왕 때 시므온 자손들에 의해 다시 이루어졌다가(대상 4:39-43), 에스더가 왕후로 있을 때 아말렉의 후손이던 하만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에 의하여 멸절당하므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 3:1; 7:9-10; 8:11-13; 9:1-16).
적용: 당신은 지금, 죄와 싸우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어머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세상의 아무것에서라도 나는 기쁨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이 땅에 무엇을 하며 무슨 목적으로 더 머물러야 하겠니?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던 소망은 다 이루었구나. 너도 아는 바와 같이 내가 이 땅 위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고자 함이었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이 소원을 훌륭히 이루어 주셨구나. 이제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속한 행복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이 땅에서 더 이상 더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니?"<생명의 삶에서>
< 설 교 >
하나님의 백성이 잊지 말 것
신 25:17-19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첫 절에서는 "기억하라" 했고 마지막 절에서는 "잊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같은 말을 앞뒤로 한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까? 첫째는 17절에 있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19절에서 보는 대로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명령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명령의 뜻은 무엇입니까?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악영향을 미칠 소지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그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멸하라"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냉혹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함께 섬뜩한 느낌을 가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명령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아말렉이 두고두고 이스라엘에게는 골칫거리가 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실족시키고 위협이 될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는 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를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괴롭힌 첫 번 째 족속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으로부터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르비딤에서첫 전투를 벌여야 했던 상대였습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앞장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기는 했으나,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깃발처럼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서 두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붙들어 올린 채 해가 지도록 전투를 독려해야 했었습니다. 그만큼 아말렉은 싸움을 잘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것처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할 때 늘 배고프고 목마르며 지쳐 뒤로 처진 사람들을 예고 없이 후방에서 공격할 만큼 교활하고 전술에 능하고 기민한 전사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투가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출17:14) 하셨으며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실 것을 맹세하셨던 것입니다(출17:16)
이렇게 아말렉을 진멸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하고 단호한 뜻이었기에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심각한 경과를 초래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예를 훗날 사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후 사무엘을 그에게 보내셔서 르비딤에서 아말렉을 이긴 후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천명하셨던 아말렉 진멸의 뜻을 다시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2-3). 그러자 사울은 백성을 소집하고 병사들을 계수한 후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던 전 지역성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습니다(삼상15:4-7). 사울과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거의 모든 아말렉인들을 칼로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말렉 왕 아각과 그의 가축의 가장 좋은 것들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않았으며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했습니다(삼상15: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하셨고 사무엘은 다시 사울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15:15) 하며 둘러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8-19) 하며 질책했습니다. 사울은 또 다시 사무엘에게 변명하기를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삼상15:20-21) 했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이 답한 말이 이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사울은 그제야 사안의 중함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그의 겉옷자락이 찢어도록 매달려 사태를 돌이켜보려 하였으나(삼상15:24-27)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5:26). 하나님께서는 친히 왕으로 세우신 사울이었지만 그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자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만큼 아말렉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양보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백성이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왕 다리오 1세의 아들인 아하수에로 왕 때에 왕궁이 있는 도성 수산에 모르드게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게는 유다왕국을 멸망시킨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의 왕을 비롯하여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함께 사로잡혀간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모르드게에게는 그의 삼촌의 딸인 에스더가 딸려있었는데 에스더는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한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에스더는 그 미모와 착한 마음씨가 왕의 눈에 띄어 그의 새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바벨론 땅에 남아 살던 유다 백성들이 모두 말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이라고 하는 자를 높이 등용하여 모든 대신 위에 세웠을 때의 일이었습니다(에3:1).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그 하만에게 꿇어 절하였지만 모르드개만은 자기가 유다인임을 밝히며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습니다(에3:2-4).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화가 난 하만은 모르드개 하나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을 다 멸하고자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모르드게의 지혜와 동족을 살리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께 나아간 에스더의 용기로 유다인들은 극적으로 위기를 넘기고 하만이 모르드게를 매달려고 준비했던 나무에 오히려 하만 자신이 매달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게는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자손이었고(에2:5), 그와 함께 온 유다인을 멸절시키려 했던 하만은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에3:1)이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아각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 아말렉 왕입니다. 이렇게 아말렉 족속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에게는 위험스러운 족속이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지킬 각종 규례들을 주시던 끝에 불쑥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저런 하나님의 규례들을 설명하던 자리에서 느닷없이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며 잊지 말라 했겠습니까? 모든 규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살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화를 당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아말렉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서도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아말렉은 깨끗이 사라져 그 흔적조차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아말렉 진멸의 명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아말렉과 같이 진멸해야 할 대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와도 같은 우리의 인생행로 가운데서 힘들고 지치고 배고프고 목말라 할 때 사탄은 어김없이 아말렉처럼 뒤로부터 우리에게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여야 했던 아말렉 왕 아각의 그 좋은 재물들처럼 사탄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넘칩니다. 그것들이 너무나 아깝고 미련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워 우리 가운데 남겨두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겨두는 세상적 탐욕의 대상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버리고 죽여야 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으며, 에베소서 4장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22절) 했고,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25-31절) 했습니다. 또 엡5:3-5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골3:5-9에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서 진멸시켜야 할 우리의 영적 아말렉의 졸병들입니다. 이것들을 우리에게서 진멸시키지 않으면 이것들로 인하여 우리가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들을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실 것입니다.
아말렉이 간교하고 싸움에 능하며 끈질겼던 것보다 훨씬 더 사탄은 강하고 악랄하고 집요합니다. 그 사탄의 유혹과 공격이 어떤 것이며 이에 맞서기 위한 우리의 무장이 어떠해야 할지는 사도 바울이 엡6:10-18에서 잘 보여줍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오래오래 누리기 위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한 사무엘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의 재미와 즐거움, 부귀와 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살려놓았다가는 사울처럼 버림 받을 수 있으며 모르드게와 에스더 때처럼 온 민족이 멸망할 위기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날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을 더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겠느냐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했듯이 그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기억합시다.
아말렉을 기억하라
신 25:17-19 / 피영민 목사
우리말 성경은 ‘너희가’라는 단어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지만, 영어성경은 본문을 ‘기억하라’는 선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는 잊지 말찌니라’라는 말씀으로 종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평안을 누리고 살지라도 아말렉 족속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말렉이 행한 일은 잊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 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삼상15:2).
유대인들이 율법을 해석해 놓은 두 가지 책이 탈무드와 미드라쉬입니다. 미드라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면 꼭 이웃이 와서 도적질을 해가곤 했습니다. 보다 못한 포도원 주인이 개 한 마리를 사서 포도원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웃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여느 때처럼 포도원에서 와서 포도를 훔치다가 그만 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일 년의 시간이 지나서 다시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웃사람이 다시 포도를 훔치러 올 것을 걱정한 포도원 주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포도원 앞에 경고 팻말 하나를 세워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팻말에다가 ‘내 포도를 훔치지 마시오’라고 기록하면 이웃을 도적으로 모는 셈이 되어 곤란하므로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 개가 어떻게 행했는지 기억하시오.’ 그랬더니 그 이웃이 다시는 포도를 훔치러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말렉이 광야에서 너희에게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기억하라.” 기억에는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기억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아말렉은 누구인가
아말렉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창36:12)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말렉이 에서의 손자이므로,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손이 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으로 태어나서 사냥을 좋아하고 활달하여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자권, 즉 영적인 권리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는 육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 결과 장자가 받는 축복도 야곱에게 모두 빼앗겼고 축복을 모두 빼앗긴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저지른 죄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고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에서입니다.
창세기 33장을 보면 야곱과 에서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에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야곱을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노가 손자인 아말렉에게까지 이어져서 아말렉 족속의 마음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가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과 아말렉 족속은 친척이지만 공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설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단지 사람이 안 믿어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알미니안주의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아말렉도 사랑하셨을까? 하나님께서 과연 아말렉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칭찬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을 향한 단 한 마디 구원의 약속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17:14),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17:16)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삼상15:3)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1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아말렉을 결코 사랑하지 아니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아말렉의 사악함
왜 하나님은 아말렉을 그처럼 미워하셨을까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모압과 암몬, 블레셋과 아람도 이스라엘을 대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들을 향해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독 아말렉을 향해서는 ‘진멸’, ‘도말’ 같은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잘 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뿌리 깊은 사악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 아말렉은 사상적으로 사악합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18절).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실제적인 무신론(無神論)자들이었습니다. 실제적인 무신론자란 설령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그 분은 세상과 동떨어진 분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악을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성경은 이런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을 향해 어리석은 자라고 평가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장 시대의 신에 관한 이방 세계의 지배적인 사상은 신은 종류도 많고 숫자도 많다는 다신론(多神論)이었습니다. 한국의 사상도 다신론입니다. 무속신앙에는 삼신할머니, 성황당 신, 귀신, 악신 등 온갖 신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세계의 사상은 대부분이 다신론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이 다신론에 대항해서 유일신론(唯一神論)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이시며 다른 영적인 존재들은 존재할지라도 신이 아니라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아말렉의 사상은 무신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니체와 같은 사상가나 사신(死神) 신학자들은 아말렉의 영적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신론자들보다 더 악합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말렉은 윤리적으로 사악합니다. 하나님이 전혀 두렵지 않기 때문에 담대하게 악을 행합니다. 아마도 아말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셔서 애굽에 열 가지재앙을 내리셨고, 출애굽할 때는 홍해를 갈라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먹여주셨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나라들은 함부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처음 침공한 나라가 아말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서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약점을 틈타 공격하였습니다. 본문 18절 중반부터 보면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노약자들, 연약한 사람들을 뒤에서 비겁하게 공격한 족속이 아말렉입니다. 이처럼 아말렉은 윤리적으로도 매우 사악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말렉은 영적으로 사악했습니다. 아말렉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아말렉은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살고 있던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약 애굽에서 계속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아말렉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아말렉이 그 중간에서 이스라엘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도 기록되어야 하고, 메시야도 그 백성들 가운데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아말렉이 그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상적, 윤리적 사악함보다도 더 사악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즉각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무신론자나 다신론자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그 선택에 대한 결과로 영원한 지옥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공격하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복음운동을 해치고 방해하는 것은 사악함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성품과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일만큼 혹독하게 아말렉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말렉은 사상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영적으로 사악해서 복음운동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3. 아말렉의 공격대상
사실 아말렉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발람은 아말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 24:20).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않고 복음운동을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비록 그 마음에 사악함과 분노가 있다고 할지라도 열국 중에 으뜸가는 나라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운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멸망이라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사울 왕에게 혼나고, 다윗 왕에게 박살이 났으며, 역대상 4장 43절에 기록된 것처럼 히스기야 왕 때에 시므온 자손들에게 세일산에서 도말 당했습니다.
사람이 악할 수도 있고 믿음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운동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어떤 교수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한 여자 성도님이 있었는데, 이 성도님의 남편은 기독교를 몹시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볼 때마다 때리고 핍박하다가, 어느 날에는 성경을 전부 찢어서 화장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만 일주일 뒤에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간혹 이처럼 신앙생활을 잘 하는 아내를 구박하고 때리는 남편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부인이 교회에 와서 남편 잘 되라고 기도하는데 그런 아내를 때리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런 행동들이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악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것은 아말렉이 행한 영적인 사악함처럼 악한 행동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멸망당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했는데, 그 공격대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뒤에 처진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약해서 떨어진 사람, 게을러 처진 사람, 피곤해서 뒤떨어진 사람들을 골라서 뒤에서 공격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악한 영들은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 성도의 정상적인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서 공격합니다.
여러분들은 뒤로 물러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히10:39). 우리의 신앙은 물러나면 안 됩니다. 기도로, 충성으로, 예배로 한 발 더 나가야지 뒤로 물러나면 아말렉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아말렉을 물리치고 신앙에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아말렉은 가정을 공격합니다. 사무엘상 30장에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블레셋으로 피신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왕은 다윗과 그의 추종자 600명에게 시글락이라는 동네를 주어 살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블레셋 왕이 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할 때 다윗을 불러 “네가 이스라엘에서 쫓겨 왔으니 네 고국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속으로는 싫었지만 할 수 없이 600명을 이끌고 고국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다윗은 본래 이스라엘사람이므로 전쟁 중에 자신들을 배반하면 곤란하니까 돌려보내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600명의 군대와 함께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에 돌아와보니 아말렉 족속들이 쳐들어와서 집을 모두 불사르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신하 600명은 그 자리에서 기력이 없도록 울고 다윗을 원망하며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이른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칠 것을 묻고,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대로 다윗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으로 가서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빼앗겼던 양 떼와 소 떼를 찾아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말렉은 성도들이 바쁜 틈을 타서 성도의 가정을 공격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속사상과 세속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을 멀리 하다가 급기야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바쁠지라도 우리가족들의 영혼을 사랑으로 잘 돌봐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고백하고 자녀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직장에서 집에 돌아오니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이 문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울고 있는지 묻자 그 아이는 “아빠. 이건 남자끼리 이야기인 데 나는 도무지 아빠 와이프하고는 잘 지낼 수가 없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를 살살 달래 집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래도 자녀들을 원할까?”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그러나 저 아이하고는 조금 다른 아이가 나왔으면 좋겠군요.”
가정을 소홀히 하면 아말렉의 공격을 받습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가정 문제 전문가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혼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해서 가정 파탄을 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않아 이혼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직장과 교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늘 가족들과 의미 있는 시간들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아말렉은 지역교회를 공격합니다. 에스더서에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시대에 한 아말렉의 후손이 바사에 살고 있던 유대인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시도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은 왕궁의 문지기인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었습니다. 하만의 분노가 얼마나 깊었던지 모르드개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바사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전이 되어 하만과 그 열 아들과 유대인을 대적하려 한 75,000명이 도리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사에 사는 유대인들은 오늘날 지역교회의 모형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아말렉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일에 대해 각각 의견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침례교회는 민주주의의 회중정체를 따르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통과된 의견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따라야 합니
다. 그러나 의견이 다르다거나 내 의견이 통과되지 않았다고 해서 복음운동을 방해하고 교회를 해친다면 그는 아말렉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에게 단 한 치의 긍휼과 자비도 베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 론
우리는 어떻게 아말렉을 이길 수 있을까요?
먼저 기도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전쟁하고 있었을 때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 두 손을 높이 들어 기도했습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 손을 받쳐 들고 기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도를 힘입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말렉이 사상과 가정과 교회를 공격하면 기도를 통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싸우라고 하실 때는 싸우고, 중지하라고 하실 때는 중지해야 합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 두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승리의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열 명의 다른 정탐꾼들이 불신앙적인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좇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후회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민14:43)는 모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다가 결국 아말렉에게 패하게 맙니다. 불순종하면 아말렉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말렉에 맞서 싸워야 이깁니다. 우리는 무신론, 윤리적인 부패, 복음운동의 방해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약자를 노략하며 사회를 파괴하려는 아말렉과는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할 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사회의 안전과 평안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비겁과 비열은 아말렉의 것이요, 용기는 성도들의 것입니다.
영적인 아말렉은 지금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공격합니다. 여러분은 기도와 순종과 말씀을 통해 날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강해 52
신 25:11-19 / 푸른교회
11절 이하는 상대편에게 얻어맞고 있는 자기 남편을 지키기 위해 상대편 남자의 음낭을 잡으면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남성을 모독했다는 겁니다. 남자도 함부로 다른 여성의 몸을 범해서는 안 되지만 여성도 다른 남성의 몸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는 두 종류의 저울추나 됫박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남을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정당하게 사업하고 정직하게 장사하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주머니에 두 개의 저울추를 숨기고 다닙니다. 두 개의 됫박을 감추고 사업을 합니다. 어떻게든 남을 속이려 하고 기망해서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그러나 공정하고 정직하게 양심껏 장사를 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하나님이 땅도 주시고 그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속여 치부하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보시면 범죄입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 두 개의 저울추와 됫박을 숨기고 다니면 안 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드시 정직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17절 이하입니다. 아말렉에 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인 엘리바스가 첩 딤나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아말렉은 잔혹했습니다.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약하고 힘 없는 부족을 약탈하며 악명을 떨치던 족속입니다. 그런데 이 아말렉이 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을 시내산 근처인 르비딤에서 공격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너희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쳤습니까? 이어지는 18절입니다.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아말렉은 이토록 잔혹하고 교활합니다. 오랜 행군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쳐있을 때 뒤에서 치고,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 노약자를 쳤습니다. 전쟁을 해도 이렇게 비열하고 비겁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족속이 아말렉입니다. 보통은 선전포고를 하고 당당하게 마주서서 전쟁을 했는데, 아말렉은 매복하고 가장 취약한 때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그것도 노약자들부터 죽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짓거리를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민족은 하나님이 반드시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이 손보지 않으면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비교가 안 됐습니다. 아말렉은 약탈하며 사는 전사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종살이를 한 오합지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아말렉이 패하고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모세가 높은 산에 올라 손을 들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군대의 전력을 강화시켜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전을 거둡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강해서 아말렉을 제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의 잔혹함과 안하무인을 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말렉을 기억하고 그들이 너희에게 행한 못된 짓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 원주민을 다 처단해야 합니다.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안식을 주실 때라는 것은 가나안 원주민을 다 제압할 때라는 의미입니다.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도 지우라고 합니다. 아말렉도 완전히 제압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말고 반드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 명령과 당부를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실천했습니까? 물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아말렉과의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에게 전달한 말씀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생축을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서 아말렉을 제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에는 순종치 않습니다. 아말렉의 왕 아각과 각종 보물과 짐승을 챙겨 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제물로 쓴다고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척결해서 아말렉이라는 족속을 아예 너희 기억에서 지우라고 했으면 그렇게 했어야 옳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따르는 척 했을뿐 철저하게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항상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후에 이 대목에서 사단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꼼꼼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필요하기에 그렇게 분부하십니다. 하나님은 필요 이상의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사울의 경우에는 아말렉 사람에게 죽습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했다면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텐데 결국 아말렉에게 발목이 잡혀 그들에 의해 희생을 당합니다. 아말렉을 기억하고, 그들의 비열한 행위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잔혹한 짓을 일삼는 그들을 단호히 처단하십시오. 그래야 뒷탈이 없습니다. 적당히 넘어가면 아말렉에 발목 잡힙니다. 사울처럼 아말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철저히 순종하여 복과 은혜를 누릴지언정 화를 당하거나 역풍을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강해 52
신 25:11-19
11절 이하는 상대편에게 얻어맞고 있는 자기 남편을 지키기 위해 상대편 남자의 음낭을 잡으면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남성을 모독했다는 겁니다. 남자도 함부로 다른 여성의 몸을 범해서는 안 되지만 여성도 다른 남성의 몸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는 두 종류의 저울추나 됫박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남을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정당하게 사업하고 정직하게 장사하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주머니에 두 개의 저울추를 숨기고 다닙니다. 두 개의 됫박을 감추고 사업을 합니다. 어떻게든 남을 속이려 하고 기망해서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그러나 공정하고 정직하게 양심껏 장사를 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하나님이 땅도 주시고 그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속여 치부하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보시면 범죄입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 두 개의 저울추와 됫박을 숨기고 다니면 안 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드시 정직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17절 이하입니다. 아말렉에 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인 엘리바스가 첩 딤나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아말렉은 잔혹했습니다.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약하고 힘 없는 부족을 약탈하며 악명을 떨치던 족속입니다. 그런데 이 아말렉이 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을 시내산 근처인 르비딤에서 공격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너희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쳤습니까? 이어지는 18절입니다.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아말렉은 이토록 잔혹하고 교활합니다. 오랜 행군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쳐있을 때 뒤에서 치고,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 노약자를 쳤습니다. 전쟁을 해도 이렇게 비열하고 비겁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족속이 아말렉입니다. 보통은 선전포고를 하고 당당하게 마주서서 전쟁을 했는데, 아말렉은 매복하고 가장 취약한 때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그것도 노약자들부터 죽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짓거리를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민족은 하나님이 반드시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이 손보지 않으면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비교가 안 됐습니다. 아말렉은 약탈하며 사는 전사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종살이를 한 오합지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아말렉이 패하고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모세가 높은 산에 올라 손을 들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군대의 전력을 강화시켜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전을 거둡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강해서 아말렉을 제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의 잔혹함과 안하무인을 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말렉을 기억하고 그들이 너희에게 행한 못된 짓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 원주민을 다 처단해야 합니다.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안식을 주실 때라는 것은 가나안 원주민을 다 제압할 때라는 의미입니다.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도 지우라고 합니다. 아말렉도 완전히 제압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말고 반드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 명령과 당부를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실천했습니까? 물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아말렉과의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에게 전달한 말씀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생축을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서 아말렉을 제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에는 순종치 않습니다. 아말렉의 왕 아각과 각종 보물과 짐승을 챙겨 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제물로 쓴다고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척결해서 아말렉이라는 족속을 아예 너희 기억에서 지우라고 했으면 그렇게 했어야 옳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따르는 척 했을뿐 철저하게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항상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후에 이 대목에서 사단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꼼꼼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필요하기에 그렇게 분부하십니다. 하나님은 필요 이상의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사울의 경우에는 아말렉 사람에게 죽습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했다면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텐데 결국 아말렉에게 발목이 잡혀 그들에 의해 희생을 당합니다. 아말렉을 기억하고, 그들의 비열한 행위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잔혹한 짓을 일삼는 그들을 단호히 처단하십시오. 그래야 뒷탈이 없습니다. 적당히 넘어가면 아말렉에 발목 잡힙니다. 사울처럼 아말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철저히 순종하여 복과 은혜를 누릴지언정 화를 당하거나 역풍을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