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과 친구했던 문학기행
하루 종일 비구름을 몰고 다녀 몽상적인 분위기의 연속이었던 문학기행 이었다. 남녘의 산하가 온통 연록의 옷을 벗고 푸르른 녹음으로 변신이 한창인 오월의 셋째 일요일 통영과 거제를 둘러보려고 글밭지기들이 나선 나들이 길이었다. 택일에 마가 끼었던가. 스물에 가까운 일행이 두 대의 미니버스에 나누어 타고 아침 아홉시 무렵 창원을 출발하려는데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시꺼먼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며 끄무레해지는 날씨를 걱정할 때 잽싼 누군가가 일기예보를 검색해 보고나서 열한시 경부터 진종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얘기였다. 불길한 예보가 보기 좋게 빗나가는 행운이 따랐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그렇게 줄기차게 비바람을 몰고 다니던 문학기행은 차라리 환상적이라서 나름대로 인상 깊었다.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창원에서 출발해 한 시간 반쯤 지나서(10시 40분경) 도착한 곳이 통영(통영시 산양읍 산양중앙로 173)에 자리한 박경리 기념관이었다. 님이 이 세상에 오신 해(1926)부터 저승으로 떠나신 해(2008)까지 주요 이력을 사진과 함께 정리해 전시된 내용을 살피며 그분의 족적을 되새겼다.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층 전시실 밖의 마당에 님의 필체를 그대로 살려 오석(烏石)에 새긴 ‘삶’이라는 시였다. 여태까지 몇 차례 발길이 닿았지만 거듭될수록 거대한 태산준령이 장벽처럼 가로막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전의 방문과 달리 단체 일정에 쫓겨 님의 묘소를 참배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려니 몹시 발길이 무거웠다. 서둘러 한 바퀴 돌며 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거제의 청마기념관을 향해 출발할 무렵 무정한 빗줄기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여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예사롭지 않은 빗줄기를 뚫고 정오를 막 지난 시각(12시 12분경)에 청마 유치환의 생가(하방2길 10)와 기념관이 자리한 거제의 둔덕(屯德)골에 도착했다. 그 생가 터는 전형적인 평민의 삶을 웅변했다. 전체적으로 백 평(坪) 안팎의 대지에 단출한 두 채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채는 4칸 집이고, 바깥채는 달랑 한 칸의 방과 헛간이 전부였다. 부엌 앞에는 얕은 두레박 우물이 있고, 안채 뒤쪽과 사립문의 오른편에는 조붓한 채마 밭이 있어 상추나 아욱을 비롯해 시금치 혹은 근대나 파 마늘을 심고 가꾸었지 싶었다. 그의 작품에서 밝혔듯이 생가 터는 님의 8대조부터 살아오신 유서 깊은 곳이란다. 그런데 생가 터의 넓이나 복원된 안채와 바깥채의 규모를 고려할 때 조상들이 대부호이거나 권세가인 토호(土豪)는 아니었지 싶었다. 한편, 생가 옆에 건축된 청마기념관(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5-1)에는 청마의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기념관 마당에 병풍 몇 폭을 펼쳐 세운 듯한 오석에는 낯익은 ‘깃발’, ‘행복’, ‘출생기(出生記)’ 등의 시가 새겨져 있어 반가웠다.
청마의 생가와 기념관을 뒤로하고 뒤돌아 나오다가 둔덕골 초입 언저리의 음식점에 들려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서둘러 점심을 들고 나서 줄기찬 빗줄기와 씨름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생가(거제시 옥포대첩로 743)를 향해 출발했다. 여름 장맛비를 연상시킬 만큼 세차게 내리는 때문일까 아니면 거제도가 섬인 때문일까. 자동차 전용 도로를 비롯한 섬 전체에 해무(海霧)가 낮고 두껍게 드리워져 동서남북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여서 무척 심란했다. 그럼에도 거제의 지리에 밝고 익숙한 글벗의 뛰어난 운전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래된 생가에서 풍기는 기품에서 부잣집의 자태와 아우라가 탐방객들을 푸근하게 품어주었다. 발군의 풍모를 자랑하며 올망졸망한 동네의 이런저런 사연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을 법한 어진 어른의 모습으로 투영되었다. 생가 옆에 붙여 지은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을 관람하며 그분의 공과 사를 비롯하여 우리의 현대사 단면을 되새겨보는 얻음이 쏠쏠했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난 바닷가 절벽에 농사꾼이 사비를 들여 축조한 매미성(거제시 장목면 복항길)이 새로운 관광 명소로 등장했단다. 이 소식이 입소문과 사발통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며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城)을 찾았다. 가파른 절벽을 요술부리듯 이러 저리 돌고 돌며 오르는 길이나 성의 모습이 서양의 그것을 닮아 이색적인 맛과 멋을 자아냈다. 하지만 아직은 미완성으로 규모가 작아 살짝 실망스러웠다. 첫 술에 배부르랴. 앞으로 좀 더 확장하고 다듬어 규모를 키우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더해 탁 트인 바다와 조화를 이룬다면 명실상부한 관광 명소로 거듭 태어나 진솔한 사랑을 받으리라.
매미성을 거쳐 거가대교(巨加大橋)를 찾아 달릴 때 거제는 온통 해무로 뒤 덥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련한 기사인 글벗들이 거리낌 없이 달리고 달려 거가대교를 거쳐 오후 다섯 시를 조금 지나 진해 웅동에 자리한 김달진문학관(창원시 진해구 소사로 59길 13)에 도착했다. 따지고 보면 같은 창원시에 소재하는 문학관임에도 불구하고 초행이었다. 그 문학관의 ‘월하 선생의 생애와 시’라는 꼭지의 마지막에 정리된 내용이다.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며 교사로서 일생을 살아온 월하 김달진. 그는 시대에 편승하여 헛된 명리를 탐하지 않았고, 정의를 앞세워 굳세고 튼튼한 정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 세상에 없는 듯 하지만 있고, 우리 옆에 있는 듯 하지만 없는 자리에서 그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유와 신비여, 오직 그대 하나만을 몸에 지닌 채 인간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나는, 인생의 평안과 조화, 덕과 사랑의 광명을 볼 수가 있다. -김달진, 산거일기_
저녁 여섯시 무렵 출발지인 창원의 문학관으로 회귀해 잠시 숨을 돌리고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 마무리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둥지로 귀소 했다. 집에 도착하니 8시 이전으로 초저녁이었다. 방에 들어와 생각에 잠겼다. 오늘 기행에서 내가 대했던 분들이 남긴 업적이나 족적은 감히 따를 수 없이 높고 커서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박경리님의 토지를 위시한 위대한 작품, 유치환님의 고결한 품격과 주옥같은 작품의 세계가 그렇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참뜻을 일깨우거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고 일갈하며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김영삼 대통령이다. 한편,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했던 밭의 상당 부분이 태풍 매미로 인해서 유실되는 피해를 봤던 농사꾼이 절치부심하면서 반복해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서양의 그것을 빼닮은 성(城)을 쌓은 것이 매미성이란다. 아울러 불교의 높은 뜻을 담아 깨달음을 일러준 김달진 시인 등은 하나같이 넘보기에 벅찰 따름이다. 이런 터수에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하지만 하루 종일 비구름을 앞세우고 휘저으면서 진동한동 설치다가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취해서 흐느적거리다보니 마냥 어지럽고 헷갈려 흐리멍덩하다.
2019년 5월 19일 일요일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교수님
벌써 다 정리하셨군요 생생한 현장들 감사합니다
교수님 문학기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때가 그대로 떠오릅니다. 잘 읽었습니다. 또 함께하길 바랍니다^0^
비가 내려서 기행 하시기에
불편 하셨겠지만 추억 한편 남겨셨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