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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사랑
동물행동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어미새가 새끼를 낳는(알을 까는) 마릿수는
자신이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끼의 수보다 1마리나 2마리 정도를 더 낳는다고 한다.
이것은 최대한의 번식을 기대하는 자연의 법칙으로서 1마리나 2마리 정도의 희생을 예상하더라도
요행히 다 살아남는 대박을 기대한 설정이리라.
어떤 종류의 새는 30초마다 벌레를 잡아서 새끼들의 입에다 넣어주어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원(?)을 초과한 상태인 새끼들에게 어미는
가장 입을 크게 벌리고 큰소리로 짹짹거리는 놈에게만 집중적으로 먹이를 준다고 한다.
순서대로 먹이를 주어서 모든 새끼를 골고루 길러야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인 것이다.
한 두 마리는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튼튼한 놈부터 확실하게 키워서 번식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 자연계의 법칙인 것이다.
가난했던 5~60년대에 8남매나 9남매로 태어났던 이 땅의 자식들은
정원초과상태의 새새끼들과 흡사하였다.
제 먹을 복은 타고난다는 논리아래 생기는 대로 낳았던 부모들의 무지는
엄밀하게 따지면 양육한계를 넘어 새끼를 낳는 어미새의 그것에 닿아있다.
실제로 8남매나 9남매가 끝까지 다 살아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형제 중 한 두 명은 일찍 죽기 예사였고 설령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끝까지 공부하여 잘 사는> 형제는 그 중의 일부분이기 마련이었다.
내 경우에도 바로 위의 누이가 6.25 와중에 죽었으므로 살아있다면 7남매였다.
아버지 형제가 다섯이었고 따라서 4촌들은 와글와글이었다.
할머니는 와글거리는 손주떼를 향해 엄한 군기를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내 기억에 남아있는 할머니는 <무서운 어른>으로만 존재한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른다.
친구 황군에겐 할아버지 할머니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존재로 기억된다고 하였다.
외동이나 다름없는, 금쪽같은 손주가 사달라는대로 다 사주었기 때문이었다.
남지에도 없는 것을 사 내라며 마당에 뒹굴면
마산까지 가서라도 사다주었다 한다. 실로 부러운 추억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더구나 외할머니의 사랑.......그것은 유전적 근친도가 보장하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들을 두지 못한 외할머니의 한 같은 것에 부닥쳐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다.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저자)에 의하면
친손주보다 외손주가 더 유전적 근친도가 확실하므로
외할머니의 사랑은 오히려 친할머니보다 더 진한 법이라 하였거늘.
며느리가 낳은 손주는 자식의 씨가 아닐 확률은 있어도
외손주는 비록 사위의 친자가 아닐지라도 딸의 혈육임에는 틀림없다는 논리때문이란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8남매나 9남매로 태어났던 이 땅의 자식들에겐
조부모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할머니 혹은 외할머니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인생은 매우 탄탄해 보인다.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내가 아는 어떤 선생님의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 이야기이다.
좀 길지만 읽어보시면 콧등 깨나 시큰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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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매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딸 하나를 데리고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시고 상해로 만주로 떠돌아 다니셨다는 것 밖에 모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모습은 파고다 공원에서
백범 김구를 옹위하듯 하고 여러 분이 찍은 사진 한 장 뿐이다.
외할머니는 죽으나 사나 베틀에 매여 있었고,
바람처럼 다녀가는 남편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고도 않으시고
딸 하나와 시어머니 봉양에 앞니가 몽그라지도록 베만 짜셨다 한다.
할머니는 그때의 가난이나 고생은 잘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서 그랬을까. 고생한 기억은 쉬 잊혀져서 그랬을까.
딸을 시집보낼 때 쌌던 봉개에는 어느 구석에 무얼 넣고, 또 무얼 넣고,
고기는 어찌해서 넣고, 엿 당세기는 어땠고 하나 빠짐없이
지금 막 다시 싸듯 또르르 꿰고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젊은 당시 얘기는 억세게 배가 고팠다는 것 밖에 말 안하셨다.
딸의 혼사가 정해지고 얼마 안 있어 외할아버지는 대구 어느 곳에서 숨을 거두셨고,
굳은 몸으로 집에 들르셨다가 땅으로 돌아가셨다.
계실 때도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지 않으신 분이었지만
돌아가신 뒤는 집안이 더욱 곤궁해졌으리라.
그래도 억척이신 외할머니는 대구 도매상에서 내의 등속을 떼어다가
장날이면 전을 벌이고, 변함없이 베를 짜는 것으로 웬만큼은 가계를 꾸릴 수 있었다.
딸을 출가시키고 홀로 계시던 외할머니는
외손자를 낳았다는 소식에 좋아서, 좋아서 부엌에 갔다가, 빨래거리를 쥐었다 놓았다 정신이 없더란다.
젖을 떼고 제법 이 말 저 말로 어른들의 귀여운 노리개가 될 때부터 나는 외할매 손에서 자랐다.
너댓 살 때 일이 기억난다.
장날이면 할매는 일찍부터 받아둔 빗물에 머리를 감으시고
아주깨(아주까리) 기름을 발라 참빗으로 긴 머리채를
한 올도 빠짐없이 정성껏 빗어 내리신다.
몇 번이고 빗어 내린 머리를 노끈으로 볼끈 묶고,
묶은 끈을 오그당한 이빨로 앙문 채 쪽을 져 비녀를 찌르고 나면
햇빛에 반짝거리는 머릿결을 난 꼭 한 번씩 쓰다듬어 보았다.
“아이구, 내 강생이. 오늘은 할매하고 장에 가재이. 햇살 달거든 읍내 가재이.”
아, 그 겨울 햇살이 들판에 가득한데
서리가 녹아 꼽꼽해진 땅을 밟고 난 할매를 따라 나섰다.
까치의 날렵한 날갯짓도 좋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서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도 신났고,
누런 코를 빼물고 신명나게 노는 애들도 즐거웠다.
시오리가 넘는 읍내 길을 할매는 장보퉁이를 이고 걸으셨다.
장터 귀서리에 전을 펴면 어느 덧 해는 중천에 있고,
색색깔의 내의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내의는 색색의 줄무늬가 쪼록쪼록하고 어른들의 나이롱 잠옷도 줄무늬였다.
나는 꼭 햇살이 빚어낸 무지개가 어른거리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포근한 햇발에 나는 뒤굴뒤굴 옷 위에 누워 버린다.
“아이고, 이 북살할 놈. 팔 옷에다가 이래 누우면 우짜노.”
“할매, 한 번만 더 구불고 안 구부께.”
연해 할매는 손자가 살가워서 엉뎅이를 토닥거리며
“아이고, 내 강생이. 옥골선풍이다. 이 귓데기는 영판 저거 외할배구나.”하신다.
장터를 돌아다니며 보는 풍경은 온통 잔치요 경이였다.
무엇 하나 정지된 것이 없었다.
온 읍내가 살아서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국밥집의 이글거리는 가마솥, 건어물을 파는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
담뱃대. 은장도. 찝게칼. 망건. 안경 주머니 등속을 파는 할아버지의 모습,
대장간에서 쇠를 치는 깡마른 아저씨의 불끈거리는 팔뚝,
그리고 온통 왁자한 사람, 사람들의 소리가 그렇게 신명날 수가 없었다.
해가 뉘엿해지면 장보퉁이를 챙겨 큰 것은 짐꾼에게 맡기고 작은 것은 할매가 인다.
꺼먼 복면에 어깨에 빗겨 찬 칼이 내 어깨를 들썩이게 하던 딱지를
보물처럼 싸쥐고 할매를 따라 일어선다.
간갈치 한 손, 김 한 톳 사서 들고 장터를 빠져나오면
이미 땅거미기 지기 시작하여 대기는 회빛으로 썰렁한 바람이 가득하다.
언 땅을 밟고 가노라면 고무신은 삐죽삐죽 벗겨지고,
같이 가던 장꾼들도 이리저리 흩어지고 나면 해는 꼴깍 저물어 효자 비각이 으스스해진다.
“할매, 춥다. 업어도.”
“내 강생이가 얼매나 춥겠노. 오냐, 업혀라.”
장보퉁이를 이고도 나를 업은 채 할매는 잘도 걸으셨다.
“석아, 할매 팔이 아파 우짜꼬.”
“할매, 조금만 가다가 내리께.”
할매의 포근한 등에서 조속조속 졸다가 깜북 잠이 들었다 깨면 어느 덧 동네 어귀에 들어서곤 했다.
깜깜한 방에 호롱불을 켜고, 군불을 지피고,
오랜만에 맛보는 갈치 반찬으로 늦은 시간 조손이 머리 맞대고 저녁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문득 할매의 골패인 얼굴을 보면 웬지 서글퍼지곤 했다.
할매가 돌아누운 채 잠이 들면 그 막막한 어둠과 집안 구석구석 배인
허무의 냄새(--그때의 냄새를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가 눈물 나도록 서글펐다.
할매가 혼자 장에 간 날에는 그 허무의 냄새는 참으로 진하게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무도 없는 빈 집, 마당 구석 두엄더미를 헤치고 있는 닭 몇 마리,
앙상한 감나무, 먼지 낀 장독대, 휑한 부엌, 마루 끝의 햇살..........
모두가 말이 없다. 텅 빈 정적이요, 허무다.
가마솥에 앉혀둔 고구마 몇 뿌리 내어다가 목 막히고 먹고 나도
정적은 그대로고 가끔 지나는 소달구지의 요롱소리도 정적이다.
할매는 언제 올란공.
동구가 내다뵈는 짚단 속에 파묻혀 할매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저쪽 하늘로부터 멍석을 말 듯 가갈가갈 떼지어오는 갈가마귀.
목고개가 아프도록 까만 무리의 갈가마귀를 바라보노라면 웬지 눈물이 났다.
“휘우야! 휘우야! 내 좆 물고 가거라”
동네 청년들이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누렇고 깡마른 얼굴로
갈가마귀에게 지르는 소리를 나는 뜻도 모르고 그렇게 들었다.
코를 닦아 뻣뻣해진 소매로 눈물을 닦고, 꼬챙이로 땅바닥에 내 이름도 써보고,
1.2.3.4 도 써 보고, 언 손을 호호 녹이다가 까맣게 때 낀 손을 부끄러워하며
시간을 보내도 할매는 오지 않았다.
“저 사람이 울 할맨가..........” 하고 보면 아랫말로 내려가고,
“저 사람이 할매제..............” 싶으면 감골 골짝으로 올라가고 끝내는
“할매야............” 소리 한 번 내어보면 그만 목이 메어 목젖이 따갑게 내려앉곤 했다.
그럴 때 느끼던 그 아픔이 고독이었을까, 허무였을까. .......
나는 커서 그것을 막연히 허무의 냄새로 명명해 버렸다.
나이가 좀 들고부터는 할머니가 곧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석아, 너는 커서 누하고 살래?”
“할매하고.”
“아이다. 할매는 네가 크면 저기 북망산에 가 있을 게다.
너는 니 각시하고 살아야지...... 나무관셈.......... .”
“할매, 할매 아프면 내가 부산 큰 병원에 데려다 줄게.
내가 배도 사다줄게(내가 앓아누웠을 때 깎아준 배맛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나는 할매하고만 살 거다. ”
나는 할매만 살릴 수 있다면 저기 제일 무서운 공동묘지에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절대 안 된다. 안 되고말고.
할매와 나는 하나가 되어갔다. 나도 애늙은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할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할매가 없는 공간은 내게 완전한 정적이요 허무였다.
어쩌면 할매의 모습이 바로 허무였는지 모른다.
국민 학교에 들 무렵 할매와 떨어져 부산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매는 읍내가 내다보이는 고갯길까지 따라 나왔다.
당산나무 아래서 나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데리고 가는 엄마나 할매도, 나도 울었다.
“고마 가거라, 차 늦을라.”
할매가 먼저 돌아섰다. 내가 여기를 떠나면 할매는 혼자 남는데............
할매 혼자 그 빈 집에서 누하고 살꼬. 간혹 소쿠리 장수도 자고 가고
먼 친척 할매도 와서 자고 가긴 하지만 할매 혼자 우째 살겠노....... .
돌아다보니 할매는 우리를 보고 계셨다. 돌아 돌아보며 부산으로 왔다.
할매가 떡 해 이고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학교를 파하자말자 뒤고 안 보고 달려와서 할매 무릎에 엎어진다.
“할매 이박(이야기)하나 해 주까. 하교서 비았다(배웠다).”
“온냐. 내 새끼........... .”
“할매.언제 촌에 갈거고?”
“와? 할매 있으니 귀찮나?”“아니다, 아니다. 더 많이 있다가 가라꼬.”
학교에서 달려와 보면 할매가 없다. 어디 갔노. 가셨단다.
아, 그때의 슬픔이란. 오늘 안 간다고 안 그랬나.
엄마에게 패악을 부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염없이 울었다.
간혹 엄마도 내 옆에 누워 같이 울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다음 날로 곧 할매한테 갔다.
떨어진 감을 소금물에 담가 삭혀두고 난수밭(텃밭)에 옥수수도 심어 두고,
닭 한 마리 고아 먹일 거라고 지나는 장수에게 건 삼 몇 뿌리도 사 두고,
미숫가루도 해 두고, 오직 할매는 이 방학을 위해 아마 봄부터 준비를 하셨을 게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들떠서 집으로 왔는데 할머니가 와 계셨다.
난 수학여행을 포기했다.
사흘을 여행 갔다 오면 할매하고 있을 시간이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방학도 아닌 때 온종일 할매하고 있는 게 얼마나 큰 횡재인데 여행을 가.
나이가 들면서는 친구들하고 있기가 좋아서 차츰 할매와 있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다가도 비가 오거나 찬바람이 많은 날은 할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칠흑의 밤에 혼자 누워 빗소리를 듣고 계실 할매는 고독이다.
절망이다. 허무다. 할매는 언제나 답장을 해 주셨다.
난 그 편지를 읽지 못했다. 줄줄이 달아 쓴 내간체 글씨를 읽어낼 수 없었다.
엄마가 읽어준다. 또 운다. 외할머니는 문장가였다.
옛 사람들의 상투적인 문구는 전혀 없다.
“셕아 보아라”로 시작되는 글을 늘 새로웠다.
동네 혼사가 있으면 안사돈끼리 주고받는 사돈지를 할매가 늘 대필해 주었다.
그런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개다리소반에 한지를 올려두고 내게 먹을 갈라고 하셨다.
내가 군에 있을 때다.
훈련병 시절엔 주소를 암호로 쓴다.
내 있던 소대의 주소는 ‘지리산 중대 낙타 소대’였다.
물론 제일 먼저 할머니께 편지를 썼다. 답이 왔다.
“아이고, 옥골선풍 내 손자야. 니가 지리산에 있다 하니 그기 무슨 일고.
낙타를 타고 다닌다니 그런 일도 다 있나.............. .”
이때쯤엔 나도 할머니의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온 소대원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우리 집은 가세가 펴일 날이 없었다.
내가 제대를 할 즈음에는 더욱 난감했다.
할머니 연세가 이젠 너무 많으신 데도 집으로 모실 형편도 안 되고
그래도 같이 있자면 사위와 한 방 거처를 하면 서로가 불편해서 안 된다고
할매는 끝내 시골집을 지키겠다고 하셨다.
내가 졸업을 하고 교편을 잡자 형편이 그나마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결혼도 했다. 할매 말대로 각시하고 사는 게 마음 아팠다.
여동생도 교편을 잡았다. 아내도 보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층 독채를 전세 낼 정도가 되었다. 이제 곧 할머니를 모실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루는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고향에 계시는 큰아버지께서 다급한 걸음으로 오셨다.
그것도 택시를 대절 내어 달려 오셨으니.............. .
“석아, 차 타거라. 너희 외조모가 별세하셨지 싶다.”
절벽으로 내던지는 말씀이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정신이 아뜩하다.
온 몸에 빈틈없이 꽂히는 탱자가시, 목이 탁 멕혔다. 혀가 굳었다. 할매, 할매.............. .
차가 부산을 벗어날 즈음에야 정신을 조금 수습했다.
엄마는 온 몸이 굳은 채 말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 정성을 다해 비는 일뿐이었다.
“하느님, 내가 우리 할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느님은 알 겁니다.
외할매에게 바친 사랑이 하나도 진정 아닌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내가 할머님을 모실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거두어 가신다면 이건 너무하신 일입니다.
너무나 너무하신 일입니다. 천보 만보 향보해서 임종이라도 지켜보게 해 주이소.
아니, 아니 단 하룻밤이라도 내 옆에 계실 수 있도록 해주이소. 빕니다. 빕니다. 빕니다.”
손을 모아 쥐고 일념으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살려 주이소.......... .”
할매는 까무룩한 부엌에 저녁밥을 해 들고 마루로 나오다가 그만 모로 쓰러지신 것이다.
누구하나 보는 이 없는 집에서 축담에 쓰러져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
마침 앞 집 신반 댁이,
“못골댁이 밥이나 해 묵나 우짜노,”
하고 들어서다가 할머니가 넘어져 계신 것을 발견하고
“아이구, 동네 사람들아. 못골댁이 죽는다. 아이구, 이 삼(사람)들아..... .”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약국에 연락하고 수족을 주무르고 해도 입술은 새파래져 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우짜노, 부산 있는 딸네 집에 연락을 해얄낀데. 누구 모르나....... .”
“딸네 집은 몰라도 사가가 저 건네 안 있나. 거기라도 연락해라.”
“동식이가 오토바이 타고 좀 갔다 오너라.”
약국에서 약사가 왔지만(그 근동에는 병원이 없었다) 눈 한 번 뒤집어 보고
고개 쩔래쩔래 흔들고는 주사 한 대 주고 가버렸다.
“내가 동식이 연락을 받고 바로 읍에 나와 택시로 왔거마는 졸도 하신지가 대 여섯 시간 지났으니.......... .
임종이라도 봐야 할 텐데.... .”
택시 안은 깊디깊은 바다 속이다. 자꾸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할매와 타박타박 걸어서 읍내 장에 가던 길, 할매 등에 업혀 조속조속 졸며 가던 길,
할매와 헤어지며 울며 울며 뒤돌아보던 당산 나무..............
덜컹거리던 차가 동네 어귀로 들어설 때 그냥 거기서 멎었으면 싶었다.
이 일을 우짜꼬, 동네 사람들이 마당 밖에까지 오게오게 모여 서 있었다.
“아이고, 못골댁아, 그렇기 귀한 위손자(외손자) 온다. 끌끌, 천하에 없는 위손자 온다.”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 마루를 보니,
아! 이게 웬 일인가. 이게 생신가 꿈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할머니가, 할머니가 마루에 오도마니 앉아 계시지 않은가.
이불을 내어 싸 덮고, 신반댁이 홍시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할매, 이기 우얀 일고............ .”
할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숨 쉬고 계시지 않은가.
손도 따뜻하고, 눈도 껌벅거리고, 입도 달삭이지 않은가.
“동네 어르신들,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난 넙죽넙죽 절을 해대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
“쯧쯧, ......... 저만한 외손자 없지 그리.
세상에 친손자라도 저럴라? 못골댁이 인자 한 없다. 외손자 왔으니 한없다.”
뒤에 안 얘기지만 동식이 그 사람이 큰댁으로 연락하러 간 뒤
동네가 왁자하자 어울댁(동식이란 사람이 어울댁 큰 아들이었다) 사랑에 와 있던 바깥손님이
뭐냐고 물었단다.
우리 동네 불쌍한 노인이 오늘 밤 명 끊는가 보오,
고혈압으로 자빠졌다는데........... .
어허 그 안됐다. 바깥사람이면 내가 침이라도 찔러 볼 텐데........ .
안사람이면 어떻소, 한 번 찔러 보지요.
할머니의 머리와 인중을 대침으로 땄단다. 피가 나더란다.
됐소. 살겠소. 사람을 영 죽일 뻔했구만.
얼마 안 있어 할매의 새파랗던 입술이 돌아오고 눈도 떴단다.
기적이었다.
(그 노인을 찾아 인사도 드릴 경황도 없이, 다음 날 일찍 떠나 버리셨단다.
그 분 앞에 축복 있기를............... .)
다음 날 앰뷸런스를 불러 할머니를 모시고 부산으로 왔다.
가재도구래야 별 것도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께 이것저것 주어 버리고
생전에 아끼던 고리짝 한 짝 챙겨서 아주 그 집을 떠나왔다.
모실려면 이렇게 쉽게 모실 것을 이래저래 재다가 이 꼴을 당하고야 말았구나.
엄마는 또 하염없는 눈물이다.
할머니의 한 쪽 수족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중풍이었다. 말도 잘 못 알아 들으셨다.
답답하여 앙가슴에 돌이 들어앉았다.
그 맑은 정신으로 “아이구, 내 새끼. 옥골선풍 내 새끼” 하는 말이 듣고 싶었다.
경북 영천 읍내에 중풍에 용한 의원이 있다고 했다.
일요일 새벽에 목욕탕에 가서 일부러 찬물만으로 목욕을 했다.
“하느님예, 제가 지금 목욕재계합니다.
오로지 우리 외할매 살릴 일념으로 오늘 약을 지으러 갑니다. 약 효험 있도록 도와 주이소.”
버스를 타고도 옆 자리에 눈 한 번 안 돌리고 똑 바로 곧추 앉아 눈을 감았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기도가 약에 배이도록 조심조심 영천으로 갔다.
한의원도 아닌 약재상 비슷한 곳이었다.
그래도 방안에 약장 서랍이 가득했다.
노인에게 정성으로 절을 올렸다.
저희 외할매가 이러이러해서 누워 계십니다. 목욕재계하고 찾아왔습니다.
외할매를 좀 살려 주이소.
그 어른은 신통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요새 젊은이가 아니구만요. 내 약 지어 드리리다.”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지극정성 효손을 본 것만도 약값 했다고 했다.
“황계를 넣어서 달여 드리시오.”
닭집에 가서도 정갈히 잡아 달라고 했다.
약할 닭은 피가 튀면 안 된다고 아낙은 남편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엄마, 약을 짓기는 내가 지었지만, 다리기는 엄마가 다려라. 지극 정성으로 달여 보자.”
약을 드신지 한 달이 지났을까.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서서히 풀려가던 수족이 이제 변소 출입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농담도 곧잘 받아주시게 된 것이다.
이리저리 돈을 변통하여 우리도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할머니가 마음 놓고 계실 방이 마련되었다.
방 세 칸짜리 아파트도 우리에겐 호강이다.
다 자는 밤 나 혼자 거실에 나와 앉아 행복에 겨웠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저 방에 자고 외할매 저 방에 건강하게 계시고
아내와 아이들 저 방에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너른 거실에 척 하니 앉았으니
이 이상 뭘 바라겠노. 축복이다. 축복이다. 원도 한도 없다.
일요일이면 해운대도 가고 동물원도 가고 할매 손을 잡고 훨훨 나는 기분으로 데이트를 했다.
“할마시 요새는 팔에 힘이 얼매나 있노 보자.”
“북살할 놈. 할매를 보고 할마시라 칸다요............ . 온냐, 이 놈. 팔씨름 한 번 해보자.”
이미 기력을 잃은 할매 팔목을 잡으며 가슴 메이기도 했다.
할매와 나는 세상에 더 없는 좋은 친구로 살았다. 그것이 3년 동안이었다.
결국 할머닌 다시 쓰러졌다.
말문을 닫은 사흘 동안 행여 한 번이라도 날 알아보실까 잠시도 손을 놓지 않고 지냈다.
입가가 마르면 물수건으로 입술을 닦아 드리며 그 오그당한 이빨을 다시 보았다.
얼굴의 주름 한 올, 손톱 밑의 때 하나까지도 빼지 않고 쓰다듬어 가슴에 새겼다.
살뜰히 살뜰히 할매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더 이상 기적을 바랄 순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이별을 할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했다.
할매는 허공에 대고 자꾸 머리카락 줍는 시늉을 했다.
무슨 헛것이 보였을까.
끝내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나를 떠나 조용히 숨결을 푸셨다. 5월 24일 아침이었다.
할머니의 속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정갈히 몸을 닦고 생전에 손수 지어 두었던 명주 수의로 고이 쌌다.
회심곡 염불 소리는 할매의 소리였다.
나를 안아 주여 잠재우셨듯, 나를 업고 시오리 읍내 길을 걸어 오셨듯
이제 할매가 나의 아이가 되어 품에 있었다.
할매야, 울 할매야.
보리가 누렇게 이글거리는 산모롱이를 돌아 초라한 상여가 바람 속에 놓였다.
타오르듯 번쩍이는 보리밭에는 할매의 냄새가 물씬물씬 했다.
파란 하늘 아래로 점점이 보이는 외갓댁 동네가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하관 시간 되었다. 준비해라.”
“그런데 장모님이 시집 올 때 갖고 오신 사성단자가 빠졌는데 관위에 놓으면 될지요.......”
“어허, 사성을 손에 쥐고 가야지,
그걸 빠뜨리면 되나. 지금이라도 관을 열어라. 괜찮다. 손에 쥐어 드려야지.”
아........ 나는 또 한 번 할매를 볼 수 있었다.
할매가 나를 한 번 더 보시려고 사성을 놓고 떠나셨구나.
바람은 솔잎 사이로 은은한 소리를 내고 엄마의 곡성은 아득한데,
할매는 보리밭 같은 명주 수의에 싸여 5월의 쏟아지는 햇살아래 부끄러이 다시 온 몸을 드러내었다.
“할매, 할매........... 인제는 진짜 마지막인 갑다. 할매야, 잘 가재이.”
할매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석아, 그렇게 엎어지는 게 아니다. 일어나거라.”
청석돌을 파낸 무덤자리로 할매는 묻히었다.
아이고 울 할매야. 돌덩이가 목구멍을 가로 막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할매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아니다.
이제 완전히 나에게로 녹아들었다.
할매를 묻고 내려오니 보리도 새롭게 일렁이고 하늘도 더욱 푸르렀다.
무심결에 보리대궁이 꺾어 삐삐 소리를 내어 보았다.
할매는 다 알 것 같았다.
죽으나 사나 내 사랑이란걸 다 알았다.
할매. 뒤에 오꾸마.
불현듯 내 몸이 하늘로 훨훨 나는 것 같았다.
출처 : 글쓴이 : 김부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