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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첫 소산
신 26:1-1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 26:1-11 / [맏물을 바치며 아뢰는 고백]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실 땅에 들어가 여러분이 그 땅을 차지하고 편안히 살게 되면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서 거두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시는 그곳으로 가십시오. 3) 여러분은 그때 거기서 봉직하는 제사장 앞으로 나아가 `여호와께서 우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시면서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우리가 들어왔다는 것을 우리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보고합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4) 그러면 제사장이 여러분의 손에서 곡식 광주리를 받아다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제단 앞에 놓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이때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처럼 신앙고백을 하십시오. `우리의 조상은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 야곱인데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몇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그의 후손들은 거기서 크고 강한 민족으로 번창하였습니다. 6) 그때에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압제하며 괴롭혔는데 특별히 우리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7) 그래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짓밟히며 강제 노동을 당하는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다 굽어 살피셨습니다. 8) 주께서 온갖 이적과 기사를 베풀어 애굽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 주시고 우리들에게는 강한 손과 팔을 뻗쳐 애굽 땅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를 바로 이 거룩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고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농사지어 거둔 첫 열매를 여기에 바칩니다.' 그러고는 곡식 광주리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놓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십시오. 11) 그러고 나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나누어 먹으며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족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레위 사람과 외국인들도 여러분의 기쁨을 같이 누리게 하십시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첫 소산물을 거두게 되었을 때 드려야 할 봉헌과 신앙고백입니다.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정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이 곳에서 누리게 되는 모든 풍요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맏물 봉헌과 신앙고백(1-3)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서의 첫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그들이 그 땅을 완전하게 소유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맏물은 첫 열매와 제일 좋은 것을 뜻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소산물을 거두게 되면 때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진 성소에 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물 봉헌과 제단 앞에서의 신앙고백(4-9) 이스라엘 백성은 첫 소산물의 예물을 광주리에 담아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고,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의 제단 앞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자는 제사장과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의 조상을 아람 사람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들이 아람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아람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으로서 육체적 신고, 정신적 고통, 인권적 압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을 강하고 큰 민족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 땅의 첫 소출과 더불어 감사함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 경배(10-11) 첫 수확물로 신앙고백을 한 후, 예배자는 그 맏물을 제단 앞에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는 헌신과 복종의 표시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행위입니다. 예배자는 약속의 땅에서 새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감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축제를 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삶을 축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 당신에게 주신 은혜를 고백해 봅시다.
해질 무렵, 길을 거닐던 이리가 자기의 긴 그림자를 보고 탄복하면서 “아니, 내가 이처럼 덩치가 크다니. 그런데도 난 사자를 두려워했잖아. 이것 보라구. 내 몸의 길이가 3m도 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리는 “왕이 되어야지. 그래야 모든 동물을 다스리지. 물론 사자도 내 밑으로 오게 해야지.”라고 으스대며 만나는 동물들에게 횡포를 부렸습니다. 얼마 후 사자를 만난 이리는 거만하게 굴다 단번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 설 교 >
그리스도인의 추석
신 26:10-15 / 문기태 목사
우리 무속신화에 이런게 있습니다. 해도 달도 없는 까막나라 임금님이 나라 안을 밝히고자 사나운 개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가서 해와 달을 훔쳐오도록시켰습니다. 가서 해를 무니 너무 뜨겁고 달을 무니 너무 차가워 물어 오지 못했습니다. 까막나라 임금은 포기하지를 않고 기회만 있으면 개를 시켜 해와 달을 물어오도록 하는데 그 개에 물렸을때 물린 부위만큼이 일식과 월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까막나라 임금은 연중 가장 밝고 둥근 중추날 밤의 달을 물어오도록 시켰답니다.
해를 찬양하고 숭앙하는 문화권을 아폴로 문화권이라 하고 달을 찬양하고 친근감을 갖는 문화권을 다이애나 문화권이라 합니다. 고위도지방에 위치하여 태양열에 굶주리는 한대 지방이 대체로 아풀로 문화권에 속합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해보다는 달을 좋아하여 일년 열두 달 명절 아닌 보름날은 없습니다. 그 보름중의 보름이 팔월 보름인 추석입니다. 그런데 추석은 동양 권 중에서도 신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나라 때인 서기 838년에 일본 승려 원인이 중국에 가다 표류해 장보고가 경영하는 절간 적산원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일기를 써 남겼습니다. 그해 8월 15일자 일기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사원에서는 떡과 과일을 차리고 8월 보름을 쇠었다. 이 명절은 아무나 쇠는 것은 아니고 유독 신라만이 쇠는 이유는 신라와 발해가 싸웠을 때 전승을 기원 하는데서 비롯됐다고 노승들이 말했다. 여러 가지 음식과 풍악 가무로 밤을 지새우는데 사흘을 계속하다 멎었다. 이 적산원 에서는 고국을 그리며 이 명절을 즐긴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명절이 중국 세시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게 상식인데 추석만은 우리가 인근나라에 영향을 미친 명절로 생각됩니다.
우리전래의 전통 8월 보름의 한가위를 신앙인의 자세로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요?
추석과 추수감사절은 첫 열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현한다는 데의 공통점은 지니고 있습니다. 추석은 햅쌀로 술과 떡을 빚고 갖가지 음식과 오색 과일을 갖추어 조상에 차례(茶禮)를 지내고 산소에 찾아가 성묘를 합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한 일에서부터 비롯합니다. 한국배달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추석을 한가위로 지켰습니다. 한가위에는 새로 익은 곡식과 과일로 제사를 겸하여 감사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세계교회들의 감사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감사절에 연유하면서 자기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알맞게 지킵니다. 따라서 우리도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고 접목하여서 성경 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기독교정신에 맞는 명절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추석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겁게 예배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10)
이스라엘백성들은 맥추 절과 수장 절을 성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 절기를 가지고 축제를 벌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본래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자유만 있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힘을 길러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을 차지하게 도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간 히브리민족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첫 소산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져와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 볼 때 감사한 것뿐입니다. 이적과 기사를 일으켜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기후를 주장하셔서 풍년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이 남아돕니다. 이때 잘못하면 망합니다. 교만해지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우상숭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너희는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를 하라."라고 하십니다.
금년에는 유난히 많은 지체들이 일찍 고향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멀리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예배를 잊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가 됩니다. 부득이한 경우 고향에 가서라도 예배를 잊지 않고 드렸으면 합니다. 추석의 본래 의미가 한 해의 풍년을 인하여 하늘과 조상 님께 감사하고 가족과 이웃들과 기쁨의 잔치를 하며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까? 옛 사람들이야 풍요롭게 되고 평안한 것이 하늘과 조상의 덕이라고 알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조상의 음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바로 알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의 대상을 조상에서 하나님으로 바꾸어 바르게 감사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창대교회 목사였던 김종태 목사가 전북 익산으로 사역 지를 옮겼습니다. 신은 교회로 옮겨 농촌목회로 사역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추석날 교회에 모여 추석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추석예배에는 도시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다 돌아와 예배당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추석날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교회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추석의 기분에 들 떠 하나님을 잊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로지 조상님께 제사를 드리느냐? 마느냐? 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 우리를 풍성하게 복 주신 하나님을 정작 잊고 추석을 보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추석을 보내십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석이 되지 못한다면 추석은 의미가 없습니다.
몇 년 전 독일의 한 마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주민들은 끼니를 잇지 못해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비교적 살림이 넉넉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노부부는 어린이들을 굶게 해서는 안 된다 고 생각했습니다. 부부는 아침마다 마을 입구에서 어린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빵을 하나씩만 가져가렴”
어린이들은 더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아무도 노부부에게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는 항상 맨 마지막에 남은 작은 빵을 가져갔습니다. 소녀는 빵을 손에 들고 매일 노부부에게 공손한 인사를 올렸습니다.“감사합니다” 노부부는 소녀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빵 속에서 금화와 메모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감사할 줄 아는 너를 위해 마련한 작은 선물이란다”
감사는 사랑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불평은 불평을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해 농사를 지어 얻은 농산물을 수확하였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감격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감격을 안고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의미 있는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추석날 아침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고 특별한 감사를 나누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2. 추석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11)
그런데 모두가 즐거워하고 잔치를 벌이는 때에도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오히려 추석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가족들이 만나 하나님께 받은 복을 자랑하고 잔치를 벌이지만 홀로 버려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레위 인과 그들 중에 우거 하는 객입니다.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방인은 외국에서 들어와 유대인들의 일이나 거들어 주면서 사는 사람이기에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레위 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나님께서 땅을 분배해 주실 때 따로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모두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신이 나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즐거워 할 일도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만 즐거워하지 말고 이런 사람들도 조금은 즐거울 수 있도록 받은 풍성한 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 고아와 과부들과도 나눔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주심을 맛볼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추석은 즐거운 잔치가 있어서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거운 날입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더 외로울 것입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들은 더 초라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나온 사람들은 더 쓸쓸할 것입니다. 이런 이들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추석 같은 명절이 여인들에게는 하나도 즐겁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음식준비하고 치우고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모두 여인들의 몫이라서 그렇습니다. 모두가 즐거워야지 한쪽에서는 일만 실컷 하고 몸살나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서로 짐을 나누어짐으로 온 가족이 즐거운 명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배려하면 함께 즐거운 명절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명절이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서 싸움만 대판 벌이고 굳은 표정으로 흩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중 에는 종교가 달라서 다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즐거운 명절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주님도 모든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다투지 않도록 지혜롭게 대하여야 합니다. 즐겁게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신앙을 논쟁거리로 삼지 않도록 불필요한 논쟁은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교회를 비난하는 공격이 쏟아져도 여유를 가지고 웃으면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며 가볍게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논쟁은 백해 무익입니다.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기회를 타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에게 전도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논쟁이 아닌 복음을 제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여 도전하십시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주님의 명령은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거하심으로 가는 곳마다 천국의 즐거움이 확산되고 금년 추석에 여러분의 가정에 내리는 즐거움이 여러분을 통하여 넘쳐 나기를 축원합니다.
3. 추석은 더 큰복을 기대하며 소망가운데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14-15)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슴에 청종 하여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우리와 이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하고 크게 기대하고 복을 간구 하라고 말입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복을 간구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소홀히 하면서 항상 나의 요구만을 앞세운다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내가 마땅히 할 일을 감당하고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난 후에 복을 간구 하는 것이 합당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감사를 표현하며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복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즐거워하고 난 후에 은총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당연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고 베푼 후에 은혜를 바라는 것이 주님 앞에 떳떳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와 현제에 주신 복을 인하여 기뻐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내려 주실 복을 소망하며 기뻐하는 것을 주님은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은 믿음과도 직결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큰복을 주실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복을 소망함으로 주님께 자신을 더 맞추는 삶을 사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 주실 것을 기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말슴을 잊지 않고 준행 하려는 몸부림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십니다. 시키신 일을 해야할 일을 최선을 다해 마쳤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그리고 저의 가정과 기업에 복을 내려 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연경씨가 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프로포즈]라는 꽁트집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아기를 출산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묻습니다. "당신이 아기를 낳으면 무슨 선물을 해 주면 좋을까? " 아내는 아기를 낳는 순간 장미꽃을 꺽어 다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갑자기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합니다. 급히 산부인과로 달려가서 새벽 두 세 시경에 아기를 낳습니다. 그 순간 남편은 아내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장미꽃을 가지러 갑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문을 연 꽃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들이 세 들어 있는 동네 어떤 집 담 밖으로 장미꽃이 나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밤에 가시에 찔려 가며 장미를 꺾었습니다. 그 장미꽃을 들고 가며 남편은 찡한 감동을 느낍니다. '아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만약 아내가 아이를 낳는 날 코트를 사달라거나 보석반지를 사달라고 했으면 내 형편에 도저히 할 수 없었을 텐데,
새벽이든 밤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서 꺾기만 하면 되는 것을 요구하다니 아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추석은 모두에게 좋은 날입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서 좋습니다. 은혜를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고 모두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좋은 복을 많이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더 큰복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추석 명절에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들을 순종하며 아름답게 보내고 믿음이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신명기 26:10~15 / 김광찬 목사(제자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러한 분을 경배하는 것이다.(worship)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동이다.그래서 예배자는 경외함으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예배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진실함(요4:24)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예배하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주의 종을 통하여 주어지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감사와 결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영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예배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다.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시작되며 그 분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어려운 이웃에게 관대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될 수 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그래서 예배는 우리의 삶 자체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는 그분을 가장 사랑하며,온전히 신뢰하며,주신 명령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며,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하며 정확한 예배를 드려야하고 삶의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이래야 한다 고 모세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 예는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농사를 지어 추수물을 얻었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경배를 말한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1~4)그 때 그들은 '맏물'(첫 열매)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를 말로 표현한다.여기에 그치지않고 그 추수물의 일부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예배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도 바라보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만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받으신다.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다.그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그분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 주신다.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푸신 관대함에 감사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돌보라고 명하신 어려운 이웃에게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예수님도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신다.'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5~46)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어떤 예배를 드릴까를 알아보고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자.
1.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10)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셨다.그리고 그 땅에 복을 주셔서 풍족한 열매를 거두었다.이를 감사하기 위해 추수자는 추수물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그러면서 말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1~4) 이는 그들을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분은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는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주신다.그리고 그 감사를 바라신다.너무나 쉽다.그런데도 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예배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그리고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신다.(예배에 임재)여기에 그치지않고 그의 종을 통해 말씀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그럴 때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감사와 결단으로 하나님의 영과 교제를 하는 것이다.예배는 참과 온전한 영으로써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
성공적인 예배의 모범이 느 8:1~12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그 곳을 보면 성도와 종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 노력할 때 그들에게 큰 은혜가 임한다.그래서그들은 회개하며 결단을 다지고 그것을 삶에 적용한다.'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느8:6~12)
2. 예배는 관대하라 명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11~14)
1)예배는 관대하게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11)
여기에서도 역시 동일한 원칙이다.하나님이 먼저 주신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그리고는 우리의 감사가 이루어진다.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부가적인 감사의 대상이 주어져 있다.('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즉 힘든 이웃과 관대함으로 즐기라는 것이다.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멋대로 즐기거나,자기만 위해 사용하지 말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사용하라 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어려운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야고보는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 위해 사는 자들에게 엄하게 책망한다.'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2) 십일조 예물을 통해 관대함을 나타내라(12~14)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12~14)
소산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부가적으로 말로 하나님께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이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나 요점은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기 위해 내가 다른 곳에 쓸 필요가 있었지만 쓰지 않고 그 명령에 따랐다는 것이다.
3.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 자에게 임하는 복(15)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찌니라'(15)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신다.복은 우리들의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선물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면서 형식적이며,복이나 받고자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말한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사66:2~3)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의 도리
신 26:8-11 / 송기정 목사
시편115편에 시인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면서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115:12-1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시요 방패이십니다 (시115:9-11). 이것은 모세가 그의 평생에 체험한 바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도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우리들에게도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셨으며 복의 복을 더해 주신 줄 믿습니다. 신명기26:8-11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내용과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의 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로서의 도리를 감당하는 사람은 결코 배은망덕하지 않고 보은보답 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복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보은 구원의 복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의 구원, 그것은 결코 인위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을 때 애굽 사람이 그들을 학대하며 괴롭히며 그들에게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을지라도 그들로서는 애굽 사람의 학대와 괴롭힘과 중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출3:7,9,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만 보내신 것이 아니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출3:8)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그 백성에게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경배할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의 도리,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지난 목요일(2018.11.8.) 건축헌금 1억 원을 전달하고 돌아온 원산도 구치교회 재무부장 최수희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서리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지난 6년 동안 기적 속에 살았고, 기적 속에 사역하였노라고 하는 황선필 목사님이 전해 준 최수희 권사님 또한 기적의 체험자입니다. 최권사님은 금년 1월에 사순절을 맞아 40일 작정기도 카드에 3가지 기도 제목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금식을 하며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기도 제목 하나는 얼마 전 정기 건강검진을 통해 간에 큰 돌이 있어 큰 병원에 가서 돌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건강 문제였습니다. 기도 제목 또 하나는 수원에서 괜찮은 회사를 다니던 사위가 더 좋은 회사로 스카욷 되어 직장을 옮기려다가 무직자가 되어 2달 정도 온 가족의 근심이 가득해졌다는 취직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도 제목은 맹지인 교회 진입로 확보를 위한 진입로 매입 문제였습니다.
사위의 직장 문제는 40일 작정 저녁 금식기도를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이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먼저 연락이 와 연봉을 그대로 받기로 하고 다음 날부터 출근하게 됨으로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권사님의 건강 문제는 40일 금식기도가 끝난 후 수술을 받으려고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간에 있던 큰 돌맹이가 이미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진입로 문제도 7-8번이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교회에 팔지 않겠노라고 고집했던 땅 주인의 마음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최권사님의 따님이 부동산 주인을 만나 5천만 원 땅 값을 3천8백만 원으로 싸게 협상하였으며, 그 중 천만 원을 헌금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10월21일 주일에 정동교회에서 1억 원 건축헌금을 지원키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권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모아 천5백만 원 헌금을 더 드렸다고 합니다. 실은 구치교회 황선필 목사님과 교인들은 새벽마다 1억 원 건축헌금 지원을 받고자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오직 정동교회 한 교회에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하나님께서 그 편지를 받은 하루 밤 만에 우리 교회 권사님 내외분을 통해 정확하게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시편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경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을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구원의 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과 더불어 소산의 복도 주십니다. 소산의 복을 소득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께서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소유와 소산과 소득, 그것은 결코 자의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을 때 애굽 사람이 그들을 학대하며 괴롭히며 그들에게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하였지만, 학대와 괴롭힘과 중노동을 당하는 그들에게 애굽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애굽은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은 그들에게 피눈물과 피땀이 흐르는 땅이었을 뿐입니다. 애굽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순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체험한 하나님은 그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알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이 당하는 학대와 괴롭힘과 중노동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려가사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그 백성에게 너와 네 집에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의 도리, 그것은 곧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는 사랑의 분배입니다.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 는 책을 낸 박운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고위 경제 관료로 공직을 마친 후에 대기업의 CEO로도 활동한 장로님은 65세에 필리핀에 쉬러 갔다가 그곳에서 가장 가난한 망얀족에게 선교하는 선교사님을 만난 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네가 가라.” “망얀족에게 네가 직접 가거라.”
민도로 섬 망얀족은 필리핀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린 부족입니다. 외부와 접촉을 하지 않고 동족들끼리 결혼하며, 글을 모르는 사람이 90%가 넘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영양실조로 대부분 사람들이 일찍 죽어 갑니다.
신학 공부도 선교사 훈련도 받은 적이 없지만 박 장로님은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여 망얀족에게 갔습니다. 그들에게 길을 닦고 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가르쳐, 연간 평균 4천 가마의 벼를 수확하여 그 십일조 4백 가마로 개척교회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망얀족의 마을 12곳에 교회를 세우고, 물과 전기를 확보하고, 산속에 도로를 내고, 다리를 놓고, 학교와 기숙사를 짓는 등 새마을 사업을 펼치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외부인에게 배타적이었던 망얀족이 변화되었고, 자녀들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그들의 삶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박운서 장로님의 행복한 간증입니다. “저는 40여 년간 공직에 열정을 쏟았으니, 은퇴 후에는 여생을 즐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저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필리핀 오지의 헐벗은 이들에게 ‘네가 직접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칼 같았고, 나이 65세에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주님만 바라보며 결단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은 현직에서의 화려했던 시절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은혜의 삶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멘!
더 아름답고 빛나는 은혜(카리스)의 삶, 그것은 더 아름답고 빛나는 선물과 축복의 삶, 더 아름답고 빛나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뜻합니다. 이를 일찍이 체험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9:8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여러분에게 능히 넘치게 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 즐거워함으로 더 아름답고 빛나는 은혜의 삶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근래에 연로하신 부모님의 9노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어느 분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그동안 얼마나 복을 많이 받고 살아 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받은 복을 세어 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경배하며,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사람들과 나눔으로 함께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치며 하나님께 복을 받은 성도답게 살아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현재적 하늘나라
신 26:7-9, 마 5:1-8 / 이성희 목사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며 천국의 대 헌장입니다. 산상보훈이 복으로 시작되는 것은 시내산의 율법이 축복과 저주인 것과 대조가 됩니다. 팔복 가운데 첫째와 마지막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팔복 가운데 다른 복은 시제가 미래이지만 천국의 복은 현재형입니다. 하늘 나라는 미래의 얘기가 아니라 이미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미래에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1. 하늘나라는 현재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뜻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보고 있고 마음에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공간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우리 마음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음의 질서입니다. 하늘나라가 마음에 없는 사람은 불안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하늘나라도 마음에 있습니다.
2. 하늘나라는 현재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뜻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그 가운데 와 있습니다. 로마서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평강과 희락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고 하면 내 마음이 지옥입니다. 타인이 천국이면 내 마음이 천국이며 우리의 모임이 천국입니다.
3.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의 소유입니다.
성경은 불의한 자, 음란한 자, 도적이나 탐하는 자, 술취하는 자, 토색하는 자 등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늘나라가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미래에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공동체에 하늘나라가 임재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살면 세상도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도 소유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현재적 복을 누립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신 26:7~11 / 김광일 목사
노예제도를 종식하기 위하여 미국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에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으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국가 금식 기도일을 선포했습니다. 1차는 1861년 9월 26일, 2차는 1863년 4월 30일, 3차는 1864년 8월 4일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 금식 기도일을 선포했습니다. 특히 2차 국가 금식 기도일은 남북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링컨은 금식기도일 선포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지금 이 나라를 황폐케 하는 남북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교만한 죄로 인해 받게 된 형벌이요,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국가 개혁을 달성하라는 하나님의 채찍질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분노하신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국가적 죄를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평상시의 업무를 중단하고, 한마음이 되어 예배당과 각자의 집에서, 이 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날로 지킵시다. 국민이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받을 것이며, 이 백성 전체의 죄가 용서받고, 지금 분열되어 고통당하는 이 나라가 평화와 화합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2차 국가 금식기도일이 끝나고 2개월 뒤 최대 격전이었던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남북전쟁 사상 가장 많은 군인이 참가했고 최대 규모로 사상자를 냈습니다. 명장 리 장군이 이끌던 남군은 수도 워싱턴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했습니다. 만약 이 전투에서 패하면 북군은 수도를 뺏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이 최대의 위기 가운데 2차 금식 기도일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군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는 급격하게 전환되었고 남북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후 게티즈버그 전쟁터를 찾아간 링컨 대통령은 전몰자를 추모하는 연설에서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국가의 운명이 바뀌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숨쉬는 순간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를 찬양합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일 보네 주님 앞에 이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시네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앞에 이몸을 맡길 때 힘주시네 위로함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인생의 어려운 순간 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또한 천지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그 앞에 모든 것을 아뢰라는 가르침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현장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였던 모습은 과연 어떠했습니까?
본문 7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기의 ‘부르짖었더니’는 히브리 원어로 ‘니츠아크’인데 ‘천둥같은 큰 소리를 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 가운데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던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의를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모세는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증거합니까?
첫째로 고통을 보시리라
2001년에 북한 회령에서 한 형제가 북한 선교단체에 보내온 편지의 내용입니다. 당시 북한 회령에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그 지역에 새끼줄을 치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전염병에 걸리면 감금당한 채 죽을 날 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옷과 이불은 불태우고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끌어다가 묻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으로부터 전도를 받은 한 형제의 식구가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그들은 감금된 채 끓일 도구가 없어 물만 마시면서 발열과 오한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살려 주세요.” 며칠째 버려진 상태에서 의식이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그순간 흰옷을 입은 예수님이 네 식구가 누워 있는 방에 서 계셨습니다. 생시와도 같고 꿈과도 같았습니다. 그때 싸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그들을 믿게 한 중국 조선족 형제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기도해주고 먹을 것과 약을 내놓았습니다. “이 약은 남쪽에서 온 것이요 남쪽 예수 믿는 형제들이 보내온 것인데 먹기만 하면 무조건 살아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약을 먹고 반 시간 정도 지나고 나니 펄펄 끓던 열이 내리고 정신이 들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그렇게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기의 ‘보시고’는 원어로 ‘와야르’인데 ‘하나님의 눈이 인생을 굽어 살피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겉모습만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인생 안에 내재된 문제를 살펴보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심신의 괴로운 상태를 굽어 살펴 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눈길은 가장 낮은 곳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음성을 들으시고 고통의 순간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의 귀는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연약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처지에 있다면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헤아리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인도하여 내시리라
로렌 커닝햄 (Loren Cunningham)의 ‘벼랑 끝에 서는 용기(Daring to live on the edge)’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67년 에비와 레오나 두 선교사에게 성령께서 알바니아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바니아는 무신론 국가였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을 산채로 통에 가두어 바다에 던져버릴 정도였습니다. 알바니아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3년을 부르짖으며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나 선교사가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한 여인의 얼굴과 자신이 알바니아에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에비와 레오나 선교사는 알바니아어로 된 복음서를 몸에 테이프로 감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호텔종업원이 나오는데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여자였습니다. 레오나는 여자에게 “마르크스, 레닌 NO, 지저스 YES”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복음서를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라며 복음서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어 기도하던 에비와 레오나 선교사에게 알바니아의 여인을 통해 복음의 씨가 뿌려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기의 ‘인도하여 내시고’는 원어로 ‘와요치에누’인데 ‘밖으로 나가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된 상태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당신에게 향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과 뚜렷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구별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히나님은 이스라열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죽은 자가 살아나며 비참한 처지에 있던 자가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모든 복을 주시리라
대성그룹의 창업자 해강(海崗) 김수근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소년은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석탄회사에 취직해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힘들게 사는 것이 너무 고달파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연탄더미 위에서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시커먼 연탄가루로 얼굴과 온몸이 뒤범벅이 되기까지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그를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무릎 꿇고 비벼대던 그 땅을 주셔서 연탄공장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후 1968년에 그는 대성산업을 설립하여 다른 에너지인 석유에도 손을 뻗쳤습니다. 연탄에서 시작해 석탄, 나아가 LPG와 석유까지 각 가정에 공급하는 국내 최초의 종합에너지 기업인 대성산업을 설립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김수근 회장의 딸 김정주 교수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대하도록 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큰일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응답하시며 모든 복을 주십니다. 부탁을 들어주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여기의 ‘주신 모든 복’은 원어로 ‘나탄 핫토브’인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고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셨습니다. 복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십니다.
구원의 은혜는 무조건적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복은 다릅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행함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면 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부르짖기만 하면 모든 복을 주십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설교하지 말라는 영국 국교회의 명령을 어기고 설교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크리스천과 소망입니다. 두 사람이 천국을 가던 중에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붙들렸지만 기도를 통해 빠져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밤중에 두 사람은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날이 샐 때까지 기도는 계속되었다. 동이 틀 무렵 크리스천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가 바보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데 악취 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니! 내 가슴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지 않는가? 그 열쇠는 의심의 성에 있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다고 했는데...크리스천은 가슴에서 열쇠를 꺼내었다. 열쇠를 넣어 돌리자 자물쇠 고리가 빠지면서 문이 열렸다.” 크리스찬과 소망이 거인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보시고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길을 보이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어 모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1)
신명기 26 : 5-11 / 정언용 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두 가지의 약속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축복하여서 복의 근원으로 삼아 그를 통해 아주 창대한 민족을 이루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손이 번성할 것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창세기 12: 7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는 축복을 주실 것이며, 동시에 그 민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아브라함에게 땅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축복해 주셨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최고의 축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정착해서 살아야 할 땅이 없어서 이곳 저곳을 떠도는 떠돌이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상은 유리 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유리 하는 민족] 다시 말하면 [떠돌이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마치 사당패들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떠돌아다니면서 유랑하는 민족으로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땅을 준다고 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지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동안 집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살다가 처음 집을 마련할 때의 기분과 같을 것입니다.
집없는 서러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집없이 내내 월세로 살고, 전세로 살다가, 처음 집을 샀을 때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날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날개를 양어깨에 단 것 같은 기분이지 않습니까? 집이 없다가 자기 집을 가지면 어떻습니까? 방바닥이 뚫어지도록 쓸고 닦지 않습니까? 창문 유리를 먼저 하나 없이 청소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신랑 얼굴이 해님처럼 빛나지 않던가요? 아마 평생 동안 그런 기분으로 산다면 부부간에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3-4개월 지나면 그 기분은 금새 없어지고, 또 다시 30평, 40평 아파트를 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한 축복을 해주신 것은 마치 집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집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한 평의 땅도 구할 길 없어서 아브라함 자신도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막벨라의 동굴 하나를 사서 거기에 자신의 아내를 장사지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정착할 땅이 주어진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얻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얻기까지 인내와 끈기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곧 바로 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창세기 15: 13절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땅을 주시는데 그냥 덥석! 내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너희 민족이 많은 고난을 받은 후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400년 동안 애굽이라는 나라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에야 이 약속을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대한 축복을 해주셨으면 선물을 주듯이 그냥 바로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고난을 당한 후에야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장장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난을 당한 후에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의 축복을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난을 당한 후에야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도록 축복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는 고난을 당한 후에야 축복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냥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귀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까? 고생 끝에 무엇인가를 얻어야 귀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의 축복이 몇 시간 혹은 몇 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가치는 매우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쉽게 땅을 얻게 되면 그때에는 사람이 교만해져서 이스라엘 민족들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얻게 되었다는 교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고생을 하면서 오랜 기간동안 인내하면서 어떤 결과를 얻게 될 때 그 가치는 배나 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26장 10절과 11절에는 바로 400년 후에 땅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00년의 종살이를 하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400년 전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셨던 약속을 성취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첫 맏물을 거두어다가 광주리에 담아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셨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400년이 넘은 긴 기간동안 당했던 고난의 언덕을 넘어와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너무나 조급합니다. 당장에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인스턴트 식품에 익숙해져서 그렇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조급증에 걸려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3분 라면이 끓듯이 바로 응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축복의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을 통과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축복의 진가를 알게 되고, 그래야 축복의 가치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는 사업을 하다가 시기를 잘못 만나고, 때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기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자 마자 바로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자 마자 바로 성공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고 연단을 당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실패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요단강을 건너가도록 하십니다. 실패했던 경험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 실패를 교훈의 발판으로 삼아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크게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실패를 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 꿈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에게 고난이 있은 후에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만한 그룻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을 누릴 만한 그릇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자녀들이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된 입장에서는 그저 안스럽지요. 왜 내 자녀가 저런 어려움을 당해야하는가? 저런 어려움이 없으면 좋을 텐데! 하는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모든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들아! 딸아!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성숙해지는 거란다. 고난을 통해서 인생을 승리하는 법을 배우는 거란다]하고 고난 중에 있는 자녀를 격려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수고없이 거저 하나님의 축복만을 탐내면서 살려고 합니다. 내 인격, 내 신앙, 내 삶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그룻을 준비된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 인격의 성숙함을 갖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연단 받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축복을 누릴 만한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땅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모습이 제대로 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은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먹었는데, 이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지 않느냐? 왜 우리를 이 광야로 이끌어 내서 죽이려는 것이냐? 차라리 애굽에 있었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광야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거침없는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땅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주체성이 없습니다. 뚜렷한 주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린단 말입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준다고 한들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그 땅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룻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을 성취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 없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때로 축복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고난은 때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때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으로 가나안 땅의 축복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에서 425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하게 하시며, 그것도 모자라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당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담아낼 수 있는 그룻을 준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왜 이렇게 더디냐? 고 한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는 고난의 가시밭길만 놓여 있느냐? 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내 앞길에는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놓여 있느냐? 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달리 생각하면 바로 그 고난이, 바로 그 가시밭 길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만 준비되면 축복을 누리는 것은 잠깐 동안에 이루어집니다.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잠깐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어릴 때 비가 오면 그 빗물을 커다란 양동이에 받아서 썼습니다.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서 집안에 있는 모든 그릇을 다 처마 밑에 놓게 됩니다. 그 그룻 가운데에는 큰 그룻도 있고, 적은 그릇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적은 그룻은 아주 짦은 시간에 채워지고 맙니다. 그릇이 적으면 적은 양의 물 밖에는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큰 그룻은 물을 담는데 한참 걸립니다. 적은 그룻이 넘칠 때에도 여전히 큰 그룻은 물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물을 받아도 작은 그룻에는 많은 물을 담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물통으로 물을 받으면 적은 시간에도 많은 양을 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룻에 있습니다. 물을 담아 낼 수 있는 그룻이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신앙이나 인격이나 삶의 모습은 간장그룻 정도의 크기밖에는 안되는데, 욕심은 너무나 큽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꼭 우유나 담을 수 있는 컵 크기밖에는 안되는데, 거기에 무슨 바닷물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축복을 달라고 간구하십니까? 문제는 내 그룻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한 크기의 그룻이 준비되어 있으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그룻이 얼마나 크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과 신앙의 그룻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담아낸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그룻을 보니까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낼 그룻이 아닌데 어떻게 그들에게 축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말고 내 그룻됨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만한 그룻이 준비되었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의 그룻, 믿음의 그룻,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400년 애굽의 종살이와 광야 40년의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땅입니까? 얼마나 힘들게 얻은 땅입니까? 얼마나 인내하면서 참아 내면서 얻은 땅입니까? 오늘 본문 9절에서는 그 땅을 가리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얼마나 듣기에 좋은 말입니까? 그 말만 들어도 풍요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 말만 들어도 축복의 땅으로 느껴집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만 들어도 물이 흐르고,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먹을 것이 넘쳐 나고, 곡식이 넘쳐 나서 창고마다 가득치 있는 광경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과연 우리가 머릿 속에 상상하는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와 축복의 땅]이었습니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척박한 땅이요, 쓸모 없는 땅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는데, 나중에 지질에 변동이 생겨서 쓸모 없는 땅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처음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질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땅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에 주었던 땅이나, 오늘날의 땅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보신 분들은 그 땅이 어떤 땅인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쓸모없는 땅입니다. 거기다가 아주 적은 땅입니다. 크기로 보아도 보잘 것 없는 땅입니다. 이 땅은 도저히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 땅을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척박한 땅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 3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을 오늘날까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를 계속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꿈을 오늘날도 계속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분명히 척박한 땅이요, 쓸모없는 땅이요, 보잘것 없는 땅임에 분명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도 그 땅을 쓸모있는땅, 기름진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꿈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꿈을 잊지 앉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꿈은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 가나안 땅을 가르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요, 쓸모없는 땅이요, 보잘 것 없는 땅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믿고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에 손에 잡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은 아니지만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젖과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그 척박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2002년을 맞이하는 첫주일 신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의 축복과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여러분의 인생에 주신 신앙의 꿈은 무엇이고 인생의 꿈은 무엇입니까? [목사님! 뭐 복잡한 세상 닥치는 대로 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꿈이 있는 사람의 꿈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꿈이 있으면 꿈대로 됩니다.
이스라엘은 땅에 대한 꿈이 있으니까 500년이 지난 다음에도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내 신앙에 대한 꿈이 있고, 인생에 대한 꿈이 있고, 가정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대로 다 이루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꿈이 있으면 그 꿈대로 교회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문제는 내 꿈에 대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룻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칼을 들려주면 그것은 무기가 됩니다. 그것으로 사고를 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칼을 주려면 청소년 이상은 되어야 칼을 주어도 사고가 나지 않고 그 칼을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2002년 신년 예배를 드리면서 우선 나에게 과연 꿈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꿈이 없으면 꿈을 그리세요. 큰 꿈을 그리세요.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신앙을 꿈을 그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꿈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있는지, 신앙적으로 믿음적으로 야곱처럼 꿈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 있는지! 또한 인격적으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성숙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부족하지 않은지를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 꿈을 붙들고 끝까지 씨름하는 자들의 꿈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는 신앙과 믿음과 인격의 그룻만 준비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릇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릇만 준비되면 하나님의 축복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될른지 모르지만 인내하고 참는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감사함으로 축복받는 삶을 살자
신 26:1-11 / 이명식 목사
1. 맥추 감사절
지금의 미국 땅이 신대륙으로 불리던 때 그곳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첫 발을 디딘 영국의 청교도들은 모두 102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의 첫 해를 보내면서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에 걸려서 44명이 죽고, 58명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금의 미국을 건설해나갔습니다. 어떻게 했겠습니까?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청교도들의 생존 이유로 그들이 감사했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동료들은 죽어가고, 자신도 춥고 배고픔으로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음으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를 통해 미국이 세워졌고, 오늘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환경을 보고 절망하고 낙심했더라면 그들은 모두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도 많이 있지만,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에 한 가지는 조그만 일에도 항상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Thank-you!(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사회학자 스탠디는 “요즘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감사 불감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 ; 1662~1714)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서울에 소속된 119구급대가 무려 29만2천 번 이상 출동을 해서 21만2천 명 이상을 구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된 사람들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100명중에 3명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감사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은 점점 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작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감사를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한 유언의 말씀으로,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하여 첫 열매를 거두게 되면,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물을 드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대케 하고, 번성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년에 두 번 농사를 짓는데, 첫 수확은 늦봄 5~6월경에 밀과 보리의 곡식을 거두었고, 가을 수확은 9~11월에 포도, 무화과, 감람나무 열매 등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일 년의 첫 열매인 밀과 보리를 거두면, 그 첫 열매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던 절기가 바로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입니다.
1. 소산의 맏물로 여호와께 경배하라
오늘 본문은 그 맥추절에 행할 네 가지 명령과 고백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요’ - 2절
모세는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셨으므로, 그 농사의 맏물, 토지소산의 제일 좋은 첫 열매를 제물로 바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하시고, 앞으로 더 번창하게 하기 위해서, 또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것이므로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잠언 3장 9~10절 말씀에도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모두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의 선수들은 지난 월드컵에서 폴란드를 꺾고 첫 승을 거두었을 때를 제일 기쁘고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첫 번째가 가장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귀하고, 보람되고, 가장 기쁜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과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림으로 인해 온전한 신앙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더 크고 많은 물질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시고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 8~9절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야곱의 자손들 약 7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약 400년 동안에 민족이 번창하고 창대케 되어서 애굽을 탈출할 때에는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연단과 시험을 통해서 가장 좋은 땅, 가나안 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만해서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열심히 애를 써서 잘되고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1절 말씀에도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시 23:1~2)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시 107:30),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사 48:15)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평안과 기쁨을 얻습니다.(사 55:12)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여 주십니다.
사람은 혼자 살수 없는, 즉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인도를 받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합니다.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좋은 만남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친구나, 스승을 잘못 만나서 바르지 못한 길로 가거나,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좋은 만남을 못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과거의 잘못된 것들도 청산해 주시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시는 삶이 축복받은 삶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3)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 10절
역대상 16장 29절 말씀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를 주시고(대하 20:18, 22),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대상 21:26), 인생에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고(느 12:43),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잠 3:9~10)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기회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기회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하루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아주 행복하게 식사를 한 뒤 기분이 너무 좋아 요리사에게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요리사는 겸손하게 자신에게 신선한 야채를 제공해준 야채장수의 공이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야채장수를 불러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야채장수도 겸손하게 자신이 제공한 신선한 야채를 재배한 농사꾼의 공이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왕은 농사꾼을 불러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사꾼은 자신의 농작물에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셔서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 돌리는 것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11절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잠언 17장 22절 말씀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신문에 성인병을 막으려면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음식도 고루 섭취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웃고, 항상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슈페리어 사장 김성열 장로(새빛교회)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군대 생활 중에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뜨겁게 하였는데, 제대 후 그 동료 중 한명이 목사님이 되어서 그 친구를 도와서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아 결혼해서 처음으로 타게 된 곗돈을 개척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 헌금으로 중곡동에 25평짜리 상가를 얻어서 ‘새빛교회’가 시작되었고, 첫날부터 날마다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형들과 함께 옷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당시 패션은 프랑스와 일본이 최고였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한국의 패션도 번창케 해주실 것이고, 한국이 잘 살게 되어 골프가 많이 보급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최고로 좋은 골프웨어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80년대 최초로 슈페리어라는 이름으로 골프웨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옷을 국내 최초로 백화점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형이 은퇴를 하자 사장으로 취임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예배와 직원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더 잘되어 1995년 “슈페리어 오픈 대회”를 단독으로 개최하고, 무명선수 세 명을 선발해서 후원을 했는데, 그중 한명이 최경주 선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더하여 주셔서 현재는 연간 매출 천억 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하남시에 큰 교회를 건축 중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사업이 잘되어서 성전건축을 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동안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든 소산의 맏물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서,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얻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라
신명기 26: 1-11 / 안창국 목사
오늘은 우리 새비전교회가 개척된 후 첫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사실 앞으로 우리 새비전교회가 맞이하게 될 수많은 추수감사주일에 비하면 오늘이 가장 조촐할 것입니다. 성도수도 얼마 되지 아니하고, 그다지 호화스러운 별도의 행사나 프로그램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음식이 준비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어젯밤 늦게까지 제 아내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만 다 준비해 놓고 보아도 노력한 것에 비해서 보잘것없더라고요. 나물하고 떡이나 하나 더 올라갈 정도이니까 그렇게 크게 준비한 음식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의 추수감사절이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 경건의 시간(Q.T.)을 가지면서 신명기 말씀을 묵상하는데 “아, 이 말씀은 우리 교회의 첫 추수감사주일에 주시는 말씀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감사는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난 다음에 주시는 은혜가 있을 때 더 빛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려울 때에 주시는 은혜가 더 값져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음식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감사가 넘쳐서 먹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겨울이 다가오면 군고구마 수레를 끌고 군고구마를 구워 팔았습니다. 아침부터 오후 1시까지는 신학교 출판부에서 일을 하고 오후 1시쯤부터는 군고구마 수레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여 지금의 대전 구도심, 삼성생명 빌딩 앞으로 가서 밤 12나 새벽 1시까지 군고구마를 팔았습니다. 밤늦게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언 몸을 녹이면서 냄비에 라면 두 개, 그리고 계란 하나를 탁 풀어서 끓인 다음 신 김치와 함께 먹던 때가 있었습니다. 매일 그러한 식사가 계속되었습니다. 혼자서 장사를 해본 분은 알겠지만 점심 식사할 시간이나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배고프면 군고구마 하나를 까서 먹고는 했는데 그것도 금방 질려서 못먹겠더라구요. 그렇게 거의 굶다가 집에 와서 먹는 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 라면 한 그릇을 두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을 앞에 주고 있더라도 그 때의 그 감사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원래 1620년, 영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청도교들이 영국 국교도들에 의해 핍박을 받자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102명이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길고 긴 항해 중에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절반 정도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생명을 구해주신 하나님,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도 문제였습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통나무로 오두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그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그들이 플리머스(Plymouth)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얼마 정도의 옥수수를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Day, 즉 추수감사절이 되면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작년에 영국 런던에 갔을 때도 보니까 크리스마스 절기를 앞두고도 칠면조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더라구요. 저도 칠면조 고기를 먹어봤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칠면조는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닭고기보다 훨씬 못합니다. 다른 분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같습니다. 미국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들 역시 칠면조보다는 닭고기가 훨씬 맛이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추수감사절만 되면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까? 그들의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딘 조상들이 칠면조 요리를 해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다는 겁니다. 이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집을 주시고, 척ㅈ박한 상황 속에서도 옥수수와 칠면조 고기를 먹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상황, 바로 거기에서 고통 중에서도 눈물로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날과 같은 추수감사절을 처음 지키게 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건너갔던 청교도들의 상황과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막 개척을 시작하여 막 한 해가 다되어 첫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의 모습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막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물론 아직 그들은 완전히 그 땅을 정복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의 긴 여정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강대한 적들로 인해 고통당하였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염려도 있었습니다. 광야의 추위와 한낮의 더위에 시달렸습니다. 그러한 여정을 마치고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밟는 그들의 감격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땅을 일구고 첫 농사를 지은 후에 첫 소산물을 얻었을 때의 감격이란 어느 정도였을까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땅에 첫 이주한 청교도들의 감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려 40면 이라는 긴 세월 끝에 안착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감격 속에서 첫 소산물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다시 말한다면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저는 작년, 그러니까 정확하게 일년 전인 2000년 11월 셋째 주에 전에 섬기던 울릉도 현포교회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마치고 점심 식사 후, 송별예배를 일찍 드린 후에 그날 곧바로 이사 나왔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이 대전 유성구 전민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기거할 집이 없더라구요. 미리 계약하여 들어가기로 한 집은 새롭게 건축되는 집이었는데 계약과는 달리 그때까지도 아직 집이 준공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삿짐도 공사하는 집에 부려놓고 대전에 살고 있는 큰 형님 댁에서 며칠을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지금 이 예배실을 들어왔는데 얼마나 황량한지, 6개월 이상을 비어있는 상태였기에 무엇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일단 예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들은 정리하였습니다. 버릴 것만 건축물 폐기물 차량인 1.5톤 트럭으로 하나 가득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고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얼마 후에 새로운 집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꾸미고 2001년 1월 첫 주일. 1월 7일이었는데 제 아내와 나, 그리고 우리 하람이와 예종이, 이렇게 네 명이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말 썰렁했지요. 그리고 그 주간 토요일인 2001년 1월 13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150여 명이 와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1월 둘째 주일이 되었는데 서로 자매지간인 박미진 자매와 박진우 자매가 예배에 참석했고 박미진 자매가 첫 등록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의 새비전교회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마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개척한 청교도들이나, 40년의 긴 세월을 광야를 헤매다가 약속의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되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번 첫 추수감사절이 더욱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고 참으로 의미 있는 첫 감사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교회로서는 첫 추수감사주일이기에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첫 소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격 속에서 우리는 이 첫 추수감사절을 통해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오늘날 왜 감사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줄로 아니까 진정한 감사가 없지요. 그렇기에 감사는 오히려 풍족할 때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풍족함을 누렸을 때 감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7,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까지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고, 이 땅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도 보면 “주께서 내게 주신”이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도 역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비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계획하셨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새비전공동체의 고백인 것입니다.
2. 그렇기에 기쁨으로 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반응이어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47, 48절을 볼까요?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우리가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58절 말씀 이후에 나오는 저주의 말씀은 듣기에도 끔찍한 말씀들입니다.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불평, 불만하면 당할 고통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감사에 인색합니다. 불평과 불만만 이야기하려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의 목록을 열거해 보십시오. 찬송가 489장에도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세어보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한 것을 돌이켜 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기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올 한 해 우리 새비전교회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것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밤새는 줄을 모를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금만 어려우면 불평하고,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의 목록들을 열거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나열해 가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3. 첫 소산을 드리십시오.
여러분, 첫 소산의 감격이 얼마나 큰지 아시지요? 첫 아들, 첫 이삭, 첫 작품…. 아무튼 첫 것은 대부분 매우 감격이 큽니다. 저도 둘째 아들인 예종이를 날 때에도 감격스러웠지만 첫째 아들인 하람이를 낳았을 때는 정말 감동이 되더라구요. 교회진흥원에 취직을 해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감동이 되더라구요. 아무튼 처음 경험하는 것, 첫 것은 감동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미국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청교도들이 그 첫 소산물을 손에 들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하나님은 그 감격스러운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첫 소산물을 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감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감격스러운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여기 앉아있는 저를 포함하여 여러분들이 우리 새비전교회의 첫 소산이더라구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첫 추수감사주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새비전교회의 첫 소산인 현재의 우리 교회 성도들, 우리 새비전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하나님게서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게 사용되는 자들이 다 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들이 새비전 공동체의 훌륭한 일꾼들로 세워져서 하나님 앞에 견고하게 서서 사역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저는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첫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 앞에 드릴 첫 소산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 새비전교회의 첫 소산물입니다. 하나님이 하셨기에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이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해마다 이를 감사하여 추수감사절을 지키듯이 우리도 매년 이때를 기억하며 첫 소산의 기쁨으로 감사했던 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복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소산의 맏물로 여호와께 경배하라
설교개요
A. 소산의 맏물과 맥추절에 대하여
1. 소산의 맏물, 맥추 감사절
2. 본문 배경 설명
B. 소산의 맏물로 여호와께 경배하라
1.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요
- 소산의 맏물을 드리라, 첫 것, 예물(신 26:1~4)
2. 여호와께서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인도(신 26:5~9)
3.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라, 예배(신 26:10)
4.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즐거워하라, 기쁨(신 26:11)
C.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동안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신 26:16~19)
A. 소산의 맏물과 맥추절에 대하여
1. 소산의 맏물, 맥추 감사절
<가이드 포스트>라는 잡지에 실린 “Pay Pilgrims Dance”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대륙에 첫 발을 디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102명이었던 그 청교도들은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에 걸려서 44명이 죽고, 58명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적응하면서 지금의 미국을 건설해나갔습니다.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 사회학자가 미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청교도들의 생존의 이유로 그들이 감사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동료들은 죽었고, 자신도 춥고 배고픔으로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음으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를 통해 미국이 세워졌고, 오늘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환경을 보고 절망하고 낙심했더라면 그들은 모두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알아야합니다. 미국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이 많이 있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한 가지 배울 것은 조그만 일에도 항상 감사한다는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비켜주었을 때에도 항상 “Thank-you!(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감사하는 습관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번성케 하며, 크게 역사하는 힘을 베풀어 줍니다.
사회학자 스탠디는 “요즘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감사 불감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 ; 1662~1714)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점점 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미국의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 대통령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칼 힐티(Karl Hilty ; 1833~1909)는 그의 저서 『행복론』에서 “감사하는 사람은 젊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잃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에 빠지고, 불행해지고, 병들고, 파멸의 인생을 살고 있는 원인은 감사의 결핍입니다.
식구들이 감사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선생님께 감사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감사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합니다. 또,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감사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승진을 거듭하고, 성공합니다. 감사는 우리 삶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서울소방방재본부에 소속된 119구급대가 무려 29만2천 번 이상 출동을 해서 21만2천 명 이상을 구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된 사람들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100명중에 3명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감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 불평과 원망만 자꾸 커져갑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주님께 항상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감사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가정, 학교, 직장에서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러분에게 성공이 없었고, 행복이 없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작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삶,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한 유언의 말씀으로,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하여 첫 열매를 거두게 되면,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물을 드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대케 하고, 번창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년에 두 번 농사를 짓는데, 첫 수확은 늦봄 5~6월경에 밀과 보리의 곡식을 거두었고, 가을 수확은 9~11월에 포도, 무화과, 감람나무 열매 등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일 년의 첫 열매인 밀과 보리를 거두면, 그 첫 열매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던 절기가 바로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성회를 베풀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온 백성들이 즐거운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창대케 하시고, 축복하시고,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여 절기를 지키고, 첫 열매를 바치고, 하나님을 섬기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풍족하고 창대케 해주시고, 뛰어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자녀를 삼아주시고,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리도록 항상 함께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소산의 맏물로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B. 소산의 맏물로 여호와께 경배하라
1.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요 - 소산의 맏물을 드리라, 첫 것, 예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신 26:1~4)
모세는 마지막 유언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셨으므로, 그 농사의 맏물, 토지소산의 제일 좋은 첫 열매를 제물로 바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하시고, 앞으로 더 번창하게 하기 위해서, 또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것이므로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6장 16~17절 말씀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언 3장 9~10절 말씀에도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왜 축복을 받지 못합니까? 나에게는 왜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목사님께서 “교회 나와서 축복받지 못하는 것이 기적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기적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모두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의 선수들은 지난 월드컵에서 폴란드를 꺾고 첫 승을 거두었을 때를 제일 기쁘고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첫 번째가 가장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귀하고, 보람되고, 가장 기쁜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과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림으로 인해 온전한 신앙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최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직장을 다니다가 실직을 해서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장로님은 자신이 일을 하지 않는 동안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빌딩 안에 있는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얻게 되었는데 주일에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약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기도해서 얻은 가게인데, 주일날에도 일을 해야 한다고 하니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주일에 가게를 열어서 생긴 수입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또 주일날 수입도 모두 하나님께 드리니 그 액수가 십의 이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셔서 가게의 매상이 점점 더 올라가고 번창하더니 큰 가게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질도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더 크고 많은 물질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탐심과 욕심을 버리고,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고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인도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야곱의 자손들 약 7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약 400년 동안에 민족이 번창하고 창대케 되어서 애굽을 탈출할 때에는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연단과 시험을 통해서 가장 좋은 땅, 가나안 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만해서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열심히 애를 써서 잘되고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시편 23편 1~2절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사야 58장 11절 말씀에도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멋대로 살아서 마치 양이 목자를 저버리고 들판에서 혼자 배회하다가 짐승을 만나거나 골짜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은 신세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시 23:1~2)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시 107:30),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사 48:15)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평안과 기쁨을 얻습니다.(사 55:12)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시고 그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죽었다 할지라도 천국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사람은 혼자 살수 없는, 즉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인도를 받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합니다.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좋은 만남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친구나, 스승을 잘못 만나서 바르지 못한 길로 가거나,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좋은 만남을 못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게 하시고, 번창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시며, 풍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다 청산해 주시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다. 36년 동안의 일제의 압박에서 보호하여 주셨고,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또 6·25 전쟁으로 공산당이 낙동강까지 쳐들어 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다시 보호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키고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 학자가 한국경제는 아무리 연구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망할 듯 망할 듯 하면서도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도 엄청난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 현상은 경제학의 원리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와도 한국경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은 중국, 일본 등 동남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움직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문진에서 이용식 집사님이 국수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마음에 다가와 이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입에 상관없이 한 달에 십일조 30만 원과 선교헌금 30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더욱 채워주셔서 수입이 300만 원이 넘어가게 해 주시더니 재산이 10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00평의 땅을 샀는데, 그 곳에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인터체인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그 땅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식당에 온 손님이 주유소를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 땅에 믿음으로 주유소와 콘도식의 숙박시설을 짓고, 더 엄청난 재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렸더니 축복해 주셨습니다’라고 간증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시는 삶이 축복받은 삶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3.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라, 예배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신 26:10)
모세 시대에는 농사를 지어서 맏물, 첫 소산의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도 예수님께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2절 말씀에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과 마음과 정성과 물질을 다해서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대상 16장 29절 말씀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스가랴 14장 16절~2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 첫째,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열국 사람을 치는 재앙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벌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절기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를 주시고(대하 20:18, 22),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대상 21:26), 인생에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고(느 12:43),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잠 3:9~10)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기회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기회입니다. 설교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하루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아주 행복하게 식사를 한 뒤 기분이 너무 좋아 요리사에게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요리사는 겸손하게 자신에게 신선한 야채를 제공해준 야채장수의 공이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야채장수를 불러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야채장수도 겸손하게 자신이 제공한 신선한 야채를 재배한 농사꾼의 공이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왕은 농사꾼을 불러 상급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사꾼은 자신의 농작물에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셔서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퇴계원교회의 견종대 집사님은 허리가 너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병원 검사 결과, ‘디스크’라고 했는데 수술을 해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강남금식기도원으로 가서 7일 작정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고, 하루에 5번 씩 드리는 예배에 모두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그렇게 금식 나흘 째 되는 날, 병을 고쳐주시면 수술비를 건축헌금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래서 500만 원 건축헌금 작정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허리의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더니 디스크가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건축헌금을 해야 하는데 당장 어디서 500만 원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적금을 들고 있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적금을 해약해서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치료비대신 건축헌금을 드렸더니 성령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기도로 해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즐거워하라, 기쁨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1)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즐겁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혼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잠언 17장 22절 말씀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주시는데, 기쁨과 웃음을 통해 고쳐주십니다.
일본 오사카의 이타미라는 병원원장이 20세에서 62세의 환자들을 둘로 나누어 한 쪽은 웃고 즐기게 하고, 한 쪽은 가만히 있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웃고 즐긴 환자들에게 병을 억제하는 세포가 신속하게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타미 원장은 연구결과를 “최고의 항암제는 바로 웃음이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즐겁게 사는 사람은 병이 잘 걸리지 않습니다.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쁘고 즐겁게 삶으로 건강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굴이 웃으면 위도 웃고, 얼굴을 찡그리면 위도 찡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자꾸 찡그리는 사람은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근심은 그 근심하는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오장육부가 병들게 됩니다.
중앙일보에는 성인병을 막으려면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음식도 고루 섭취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웃고, 항상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많은 재물, 높은 지식,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슈페리어 사장 김성열 장로님(새빛교회)의 간증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군대 생활 중에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제대 후에도 ‘신우회’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한명이 목사님이 되어서 그 친구를 도와서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아 결혼해서 처음으로 타게 된 곗돈을 개척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 헌금으로 중곡동에 25평짜리 상가를 얻어서 ‘새빛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없는데 처음부터 날마다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형들과 함께 옷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당시 패션은 프랑스와 일본이 최고였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한국의 패션도 번창케 해주실 것이고, 한국이 잘 살게 되어 골프가 많이 보급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최고로 좋은 골프웨어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80년대 최초로 슈페리어라는 이름으로 골프웨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옷을 국내 최초로 백화점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형이 은퇴를 하자 사장으로 취임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예배와 직원예배를 드렸습니다. 전 직원이 예배를 드리니 직원들끼리 하나로 뭉치게 되고, 직원들의 고민이나 문제를 아버지같이 돌보아주니 예수님을 믿지 않던 직원들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더 잘되어 1995년 “슈페리어 오픈 대회”를 단독으로 개최하고, 무명선수 세 명을 선발해서 후원을 했는데, 그중 한명이 최경주 선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더하여 주셔서 1992년에는 대통령 ‘상업포장’ 수상, 1994년 노동부장관 표창 수상, 1995년 국세청장 표창 수상, 1998년 대통령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습니다. 현재는 연간 매출 천억 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하남시에 큰 교회를 건축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꿈입니다’ 하고 간증을 하고, 앞으로도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사업이 잘되어서 성전건축을 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동안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6~19)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크게 번창하고 창대하게 하시고,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주시고,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든 소산의 맏물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서,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얻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토지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라
신 16:1-11 / 이필재 목사
신명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거의 끝내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 맞은편으로 왔을 때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선포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늘 말씀은 추수감사에 대한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두 가지 유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구약 성경에 나타나있는 추수 감사 규례이고, 또 하나는 청교도 추수감사의 유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농사를 지으며 추수 때가 되면 제일 먼저 수확되는 첫 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제사장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토지소산 맏물을 드리면서 말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 앞에서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이렇게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착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먹을 양식이 생겼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이라는 신앙적 고백이 추수감사 규례로 오늘 말씀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정착 후에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그래서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좀 간사한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감사 생활은 가난했을 때 더 잘 합니다. 통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풍성하여질수록 하나님께는 인색해집니다. 이상합니다. 한국 교회는 옛날에 비하면 요즘에 대단히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30~4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농촌교회들은 그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다녔고 동네에서 좀 부자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했던 교회들은 추수감사절을 1년에 2번을 지켰습니다. 가을 추수 때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여름 보리 추수 때 맥추감사절이라고 해서 지켰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먹을 것 없던 시절에 이 감사절을 2번 지켰다면 지금은 일 년에 4~5번, 아니면 매달 감사절을 늘려야 하는데 줄었습니다. 지금은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또, 과거에는 이 감사절을 어떻게 지켰느냐 하면 집사님이라든가 권사님이라든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한주일 먼저 감사절 예물을 평신도보다 먼저 드립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직분자들이 이렇게 본을 보였으니 이것을 보시고 교인들은 따라서 감사절을 잘 지키시오!” 그런 교육적 효과를 바라고 먼저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드린 내용을 다 보이고 “보십시오.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이렇게 드렸으니 여러분들도 이렇게 재직들의 본을 받아서 감사절을 지킵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교회 철학은 분명합니다. 최대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아니하는 수준의 목회를 철학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잘하는 것인가? 서구의 교인들이 그렇게 하다가 다 몰락했습니다.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시면 바깥에나 안에나 십자가는 어디서나 눈에 띄게 저렇게 걸어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자존심도 죽이고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죽지 않고 삽니다. 이것을 패러독스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따르면 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인색하게 살고 풍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보시면 매우 거추장스러운 추수감사예배가 규례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농사지은 토지소산의 맏물을 거두어서 광주리에 담아와야 됩니다. 제사장 앞에 갖다놓고 서야 됩니다. 제사장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말해야 됩니다. “당신의 하나님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광주리를 받아서 여호와의 방 앞에 갖다놓을 것이요”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출애굽 과정을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과거 가장 고난스러웠던 때를 말하면서 오늘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말하고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의무적으로 반 강제적으로 그렇게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청교도의 추수감사 역사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다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통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계 모든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발전했고 지금도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헨리 8세가 왕이 되었을 때 결혼 문제가 로마 교황청과 마찰을 가져왔습니다. 헨리 8세는 사실 왕이 될 수 없는데 형이 일찍 죽는 바람에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형이 죽자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메리라는 딸을 낳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것을 한탄하다가 궁녀인 앤 볼레인과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것도 또 못마땅해서 사실상 6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교회가 “헨리왕의 결혼은 불법이다. 낳은 아이는 다 사생아다.” 왕실과 교회가 마찰이 생겼습니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의 신앙 노선과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이때 독자적인 교회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회라고 하는 Anglican Communion입니다. 그래서 이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영국 안에서 이 국교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실이 도대체 뭐하는 거냐?” 그중에 대표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입니다. 이때부터 칼빈 신학을 따르는 청교도들은 왕실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는데 헨리로부터 메리여왕, 엘리자베스, 제임스1세, 찰스1세로 연결되는 권력에 의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스미스필드(Smithfield)라고 하는 성지에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는데 지도자 288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나라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계속되는 국교주의의 박해 때문에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간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미국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필그림파더스’라고 하는데,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가면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이곳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순례자들의 도착 지점이다. 굶주림과 추위, 황무지와 싸우며 많은 개척자들이 죽었는데 인디언들에게 사망자의 수를 알리지 않기 위해 한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새 나라의 기초를 세웠고 이 땅을 찾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심었다. 이 바위를 본 자마다 순례자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서 살도록 헌신하는 결심이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의 신앙은 훌륭했던가? 청교도 신앙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는 개신교 신자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교도는 칼빈 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배 모범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하나는 말씀선포입니다. “예배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의식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성직자들이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니까 “이게 뭔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하라! 그래서 회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매주일 강단에서 예배의 절반 정도는 강단 메시지로 설교 말씀을 알아듣게 하라!” 이것이 청교도 예배의 모범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가 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원이란 뭐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무효다.” 그때만 해도 인간의 공로를 많이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고행주의, 금욕주의, 수도원이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다 무효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이고, 개신교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류와 삶에 대한 정의를 뚜렷하게 세 가지로 실천했습니다. 그 첫째가 근로정신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되는가? 일하기 위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할 일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고 그 맡겨진 일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나는 그것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인간의 삶을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의 철학을 널리 보급했습니다. 보십시오. 청교도의 신학을 따르는 나라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다 잘 삽니다. 세상을 다녀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잘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합니다. 일을 신성시 하는 국민 철학! 이것이 바로 청교도 유산입니다.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매일 매일 신성한 노동 속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 저같이 목사가 된 사람을 성직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짓는 사람은 뭡니까? 개신교 신학에서 좁은 의미의 성직자는 목사, 신부 같은 사람을 의미하고 넓은 의미의 성직자는 죄가 되지 아니하는 모든 일에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일이요, 장사를 해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학 사상에 하나님의 복이 들어갔기 때문에 서구 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잘 살게 되었습니다. 신학의 기초는 자기의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죄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배로 남겼더니 주인이 “네가 남긴 열매를 네가 가져라!” 그에게 다 도로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것만 가지고 왔을 때 아마 우리 상식으로는 자비로운 주님이라면 “야! 너는 하나 밖에 없구나! 그거나 먹고 살아라!” 이래야 될 거 아닙니까? 뺏었습니다. “내놔라! 많은 자에게 주어라!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러면 나는 어떡합니까?”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이 주님의 수학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이 다 하는 것을 너는 왜 안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느냐? 너희 교회는 내가 줄만큼 주었는데 그것밖에 할 수 없었느냐? 내가 너를 줄 만큼 주었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오늘의 서구 사회를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일본이 왜 우리나라보다 조금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구 문명을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입니다.
둘째로, 이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순례자(pilgrim)로 정의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5절에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 성경 전체에 순례자 신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합니다. “너는 너의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가 됩니다. 순례자들의 삶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세상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필요에 따라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나그네 신학을 기초로 합니다. 이것이 순례자입니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또 어디로 나를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하는 그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에 내 머리를 어디다 묻을지 모르면서 끝없이 끝없이 가는 이것이 바로 서구 사회 개척정신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자 정신의 유산은 개척 정신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쉬지 않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을 보세요. 이 세상은 더 갈 곳이 없어졌을 때 달나라를 정복했습니다. 화성까지 지금 인간의 손이 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진행이 됩니다. 저는 휴스턴에서 살았습니다. 달나라에 갔다 온 유품들이 거기 다 있습니다. 국가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들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미지의 세계에 인간의 손이 닿는 곳이라면 우리는 순례자로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순례자 신학의 개척 정신으로 연결되어 미국 사회가 그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온 해가 1620년이요, 추수감사예배 드린 것이 1621년인데 그때부터 계산해도 386년 밖에 되지 아니한 나라가 지구를 움직여가는 국가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삶의 철학입니다. 성경에 기초한 순례자요 근로정신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온 세계에 가장 훌륭한 삶의 철학으로 보급이 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삶의 경건성입니다. 이것은 나를 중심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바울 신학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사실 그 땅으로 떠날 때 성공하려고 찾아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 간 사람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어떻게 훌륭하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서 떠난 것입니다. 많이 죽었습니다. 바울 신학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행동한 사람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백성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삽니다. 죽고자 하면 삽니다. 청교도 추수감사절 열매에 뚜렷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했다는 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시급성 때문에 그 땅을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훌륭한 신앙의 터전 건설 하나를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함께 얻는 열매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가장 고난스러운 시간에 가장 큰 감사를 풍성히 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감사도 마음의 여유가 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먹고 살기도 힘든데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무슨 감사를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청교도들 위치와 똑같은 사람은 우리 갈보리 교회에 한명도 없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주어진 식량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감자와 옥수수입니다. 1620년에 와서 야생동물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 이듬해인 1621년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 년 만에 그 황무지에서 무슨 생활 여건이 좋아졌겠습니까?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추수감사를 풍성하게 드렸다는 점이 축복을 받아서 온 세계 추수감사절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청교도들이 공헌한 놀라운 역사 중 하나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유럽을 관광해보시면 왕실 옆이나 맞은편에 성당이 있습니다. 권력과 교회가 함께 갔습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이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패했다.” 권력을 깨버린 것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우리 신앙을 지켜나가자.” 청교도들이 종교 분리의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에 의해 개신교가 온 세계에서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운을 찾아서 일평생 헤매고 삽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4H클럽’이라는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시골에서 주로 많이 했습니다. 저도 경기도 광주에서 ‘4H클럽’에 굉장히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년들이 신나게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4H클럽’ 깃발이 네잎 클로버입니다. 그래서 노래도 있습니다. “네 잎 다리 클로버의 우리 깃발은 순결스런 청춘들의 행운의 표정 지덕노체 네 향기를 담뿍 싣고서 살기 좋은 우리농촌 우리 힘으로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 반주 없이도 제가 부를 정도입니다. 사실 제가 이 활동을 하도 잘해서 박정희 대통령한테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네 잎 클로버의 뜻이 행운입니다. 클로버는 전부 세 잎입니다. 어쩌다가 수천 개 가운데 하나 네 잎 클로버를 찾은 사람에겐 행운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루 종일 찾아보아도 네 잎 클로버 한 개를 못 찾습니다. 그래서 행운 찾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잎 클로버는 무슨 뜻인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행운을 찾기 위하여 행복을 하루 종일 짓밟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을 생각해서 20세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은 두 여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였고, 또 한 명은 일본의 왕세자비 마사코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에 가장 큰 행운을 잡은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강대국이요 경제대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왕이 되고 자기 아들도 또 왕이 됩니다. 몇 년 하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자자손손 다 왕이 되는 자리에 그 두 여인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이애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로 죽었는데 왜 그랬을까? 행복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마사코는 지금 극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행운은 소유했는데 행복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 감사절에 우리가 ‘감사는 그 다이애나 같은 여자나 마사코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감사를 하고 감사헌금을 내?’ 그렇게 생각하시면 평생 불행하게 삽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사도 바울을 볼 때 바울은 감사의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가족도 없습니다. 소유도 없습니다. 매 맞고 배고프고 헐벗고 감옥에 가고 쫓겨나고…. 바울서신을 읽어보세요.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래서 그러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사는 그 하나를 로마가 이기지 못했습니다. 로마가 꺾였습니다. 세계 기독교 중심지인 로마의 가장 복판 바티칸 광장에 가보세요. 사도 바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행복을 밟고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을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풍성하여질수록 인색해 갑니다. 하나님 앞의 헌금 생활도 퍼센트로 따지자면 가난할 때 제일 많이 드렸고 풍성하여질수록 점점 더 줄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어디 교회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해서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왜 이 감사절이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왜 지키는가 영적 의미를 옛날 구약의 추수 감사 규례의 역사와 청교도의 감사절 유래 역사를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오늘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는 과연 감사 생활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회개하고 더 훌륭한 감사 생활을 하는 풍부한 영적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첫 열매의 봉헌규례
신 26:1-11 / 피영민 목사
신명기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요단강 동편 모압평야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성장한 신세대를 위해 임종에 다다른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교육하는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는 모세가 광야 40년을 회고하는 내용(신1~4:43)이며, 두 번째 설교는 율법을 재교육하는 내용(신4:44~26)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설교는 복과 저주에 대한 경고와 선택과 약속, 그리고 모세의 최후 행적으로 27장부터 마지막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두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결론 부분에서는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세는 두 번째 설교의 결론부분에서부터 물질 봉헌에 관한 두 가지 말씀을 선포합니다. 첫째는 가나안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첫 열매를 거두게 되면 그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제사장 앞으로 가지고 나오고, 제사장은 그 열매를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실로나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첫 열매의 봉헌규례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12절에 있습니다.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이것은 십일조 규례입니다. 이처럼 신명기26장의 전반부에는 첫 열매의 봉헌 규례가, 후반부에는 십일조 규례가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서 다른 백성들이 십분의 일을 정기적으로 드리는 정규 십일조(민18:21-24)입니다. 둘째는 유대인의 7대 절기 예배에 필요한 경비와 성소를 보수하는데 드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절기 십일조(신12:5-19)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신명기 26장 12절에 기록된 구제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삼 년에 한 번씩, 레위인이나 고아나 과부등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목적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이 구제 십일조는 ‘제 삼의 십일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두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첫 열매의 봉헌과 구제 십일조와 같이 물질적인 이야기를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신명기를 해석하는 주석가들은 모세가 신명기 26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열매를 봉헌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십일조는 이웃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웃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은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를 봉헌할 때는 고백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3절). 또한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9절). 이처럼 첫 열매를 드릴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엉뚱한 땅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가나안 땅에 잘 도착했음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사실을 모르셔서 그 사실을 입술로 고백하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거저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기 때문에 첫 열매가 없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를 짓고 정착했기 때문에 첫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첫 열매의 봉헌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와 있다는 증거를 보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상은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에는 이 사상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가나안 땅은 기름진 땅이요, 이스라엘은 그 땅에 심겨진 포도나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기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이 들포도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벌이 임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된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서 5장 1-2절이 이 사실을 잘 표현해줍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5:1-2).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로 포도원의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을이 되면 꽃이 많이 핍니다. 가을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꽃은 코스모스입니다. 그런데 저는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코스모스는 가을 한 철 잠깐 피어서 한들거리다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지고 마는구나’ 생각이 듭니다. 코스모스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면에 메밀꽃은 꽃도 예쁘지만 무엇보다 메밀이란 열매를 맺습니다. 밤꽃도 마찬가지입니다. 밤꽃이 피면 밤이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저는 코스모스보다는 메밀꽃을 좋아합니다. 코스모스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열매를 맺어 봉헌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창세기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만약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삶에 만족하여 후손을 낳지 않고 자신들만 잘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태의 열매를 맺고 인류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결혼을 하여 후손을 갖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도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땅과 하늘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씨를 심고 나무가 자라며 열매 맺고 수확하는 과정이 계속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영적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구원받고 성령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을 받았으면 그 증거를 드러내야 합니다. 구원은 끝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성령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하나님께 증거로 봉헌해야 합니다.
2. 좋은 영성이 맺는 두 종류의 열매
최근 인기 있는 한국 영화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가문’ 시리즈입니다. ‘가문의 영광’, ‘가문의 위기’, 그리고 최근작인 ‘가문의 부활’입니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용인즉슨 조폭 집단이 사시미칼을 버리고 김치 재벌로 부활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버스에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이 영화의 광고 카피를 보면 약간은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썰어! 담궈! 묻어!’라는 김치 재벌의 3대 표어가 마치 조직폭력배들의 무서운 행동을 연상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정말 그와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BTK Killer’라는 살인범의 사건입니다. BTK의 B는 ‘Bind(묶다)’, T는 ‘torture(고문하다. 때리다)’, K는 ‘Kill(죽이다)’의 약자입니다. 묶고 때리는 방법으로 1970년부터 사람을 열 명이나 죽인 살인범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데니스 레이더(Dennis Rader)라는 이름을 가진 6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 도시의 공무원이었고, 보이스카웃의 대장이었으며, 교회에서는 운영위원회의 의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0년 동안 교회의 회원이었던 데니스 레이더와 그의 아내는 교회의 지도력을 모두 장악하고 사람들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평소에 교만하고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그의 불온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워낙 오랫동안 지도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도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주 나쁜 삶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영성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열매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열매가 나쁘면 그의 영성은 나쁜 것이고, 열매가 좋으면 그의 영성은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 의의 열매, 입술의 열매, 행위의 열매, 거룩함의 열매, 태의 열매 등 많은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두 종류로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격적인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받기 이전과는 달라진 인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고 성령 받은 열매를 요구하시면 변화된 인격의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합니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격을 배우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는 삶의 변화를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전에는 거짓말쟁이였는데 이제는 제 입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전에는 간음을 하던 바람둥이였는데 이제는 정절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전에는 게으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새벽기도까지 나오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전에는 남을 괴롭히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격적인 열매들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빛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5:9).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 또한 로마서에서는 거룩함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광야를 방황하지 않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으므로 어떻게 하면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며 거룩한 인격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인지를 몸부림치며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열매 외에 또 다른 열매는 사역적인 열매입니다. 전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헌신의 열매, 의로운 일에서 나오는 열매를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11)고 기도합니다. 의로운 행위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또한 잠언에는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고 기록되었습니다. 의인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전도의 열매를 얼마나 맺으셨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고도 지금까지 전도의 열매를 한 명도 맺지 못했다면 이 가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열매 맺는 원리
우리가 이와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는 열매 맺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이며, 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15장에 나타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첫째로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씨가 동일하더라도 어느 땅에 뿌리느냐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지만,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마13:23). 씨를 좋은 땅에다 뿌린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날마다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듣고 읽는 것으로만 끝나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깨달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한 절이라도 깨달으면 구원을 받고 삶에 큰 변화가 오게 됩니다. 제가 교수로 근무하는 동안 가르쳤던 학생들도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열심히 가르쳐 봐도 듣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는 학생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면에 깨닫는 학생의 말과 설교와 삶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도 ‘이 정도는 나도 다 알지’하는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겸손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한 심령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15장에 나타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과 늘 붙어살아야 합니다. 심령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예수님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열매 맺는 인생의 최고 비결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명한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누구든지 매일 아침 15분만 기도하면 인생에서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매일 아침 15분씩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이처럼 세계적인 부흥을 이루게 된 원인은 새벽기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은 제자훈련의 일환으로 새벽기도를 대신하여 큐티(Quiet Time)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큐티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그만 두고 큐티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차라리 큐티를 그만 두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말씀 듣고 부르짖고 기도하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루에 15분 이상 기도하셔서 예수님께 더욱 붙어사십시오. 그러면 실패하던 인생이 성공으로 변화되고, 열매 없는 인생이 열매 맺는 생애로 변화될 줄을 믿습니다.
결 론
에베소서 5장 11절은 우리 성도들에게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두움은 성도들로 하여금 열매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열매를 맺어도 거짓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을 바라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요15:8). 반면에 열매 없는 가지에 대해서는 무서운 경고를 주십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요 15:2).
가을은 만물이 열매를 맺는 계절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향해 “너는 열매를 얼마나 맺었느냐? 네가 가나안 땅에 와 있다면 열매를 맺고 첫 열매를 봉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깨달으시고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인격의 열매, 사역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이 가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감사 어떻습니까?
신명기 26:1-11 / 최지승 목사
오늘 본문은 광야생활을 마치고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 중 감사제사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가 기록된 여호수아서 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밀보리를 추수하는 시기여서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무교병을 만들고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광야에서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이 무려 40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땅의 열매였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처럼 내렸던 만나도 특별한 양식이었지만 땅에서 거둔 곡식과 과일, 채소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이 그 새로운 맛을 즐기며 얼마나 감동했을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40여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먹었던 하늘의 양식 만나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던 것처럼 밀보리 추수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둔 땅의 열매 역시 씨뿌리고 가꾸는 수고도 하지 않고 거저 받은 양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열매를 먹은 그 다음날 만나가 그쳤으니 단 하루도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하늘과 땅의 양식을 공급하여 먹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습니다.
하지만 기적의 양식을 먹으며 생존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복에 겨워 불평을 쏟아냈던 백성입니다. 광야생활이 1년 쯤 되었을 때 하늘의 만나는 더이상 신비한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먹는 만나가 지루하다고 불평하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며 울었습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먹고 싶은데 이 광야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만나 뿐이니 우리의 정력이 쇠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침마다 내린 만나 가루가 전부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내내 똑같은 단일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구워보고 삶아보아야 맛도 모양도 솔직히 거기서 거기 아니었겠습니까? 불평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본래 채식을 즐기는 사람이라 이제껏 살아오면서 고기가 댕긴다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눈 앞에 고기가 있으면 맛있게 먹습니다- 어떤 분들은 수시로 고기가 댕기고 하루라도 고기를 먹지 않으면 기운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체질이 다르니 고기를 달라 우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올만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메마른 광야에서 생선과 채소와 향신료를 내놓으라며 울었으니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징징거리며 우는 사람들 덕에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메추라기를 한 달 동안 싫컷 먹었지만 불평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 고기를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하나님이 보내신 큰 재앙으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민11장).
기적이 일상화되면 기적이 더이상 기적으로 여기지지 않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비하고 특별한 기적을 체험한 백성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유대인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던 3년여 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신비한 기적들을 목격했고 직접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르며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또 다른 표적을 끝없이 보여달라 했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했다고 모두 믿는 것도 아니고 모두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믿고 기적을 체험하면 더 크게 감사하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신명기 26장의 감사고백은 아직은 광야에 있지만 곧 가나안으로 들어갈 백성들에게 모세가 전한 말씀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으로 우리의 감사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감사는 스스로 생각해 낸 감사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직접 가르쳐 주신 감사였습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지도해주신 것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옆구리 찔러 절받기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이스라엘 백성이 어련히 알아서 감사를 드릴텐데 생색을 내듯 옆구리를 찔러가며 감사를 받으셔야만 했습니까? 감사라는 것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야 하는데 꼭 그런 식으로 가르쳐서 감사를 받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이라 하나님이 옆구리를 찔러대지 않으시면 스스로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매일마다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게 될 때 하나님을 금방 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거저 얻은 가나안의 열매들을 먹고 마시며 편안하게 지낼 때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의로와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진멸당해도 마땅하지만 자기들은 택함을 받은 백성이니 이 정도 혜택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목이 곧은 백성임을 하나님은 잘 아셨습니다. 비록 옆구리 찔러 절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칠 것은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사람노릇 제대로 할 것이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감사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발적으로 드린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감사의 고백이며 구체적인 실천사항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힘들여 개척한 땅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여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고백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조상은 본래 유리방황하는 유목민이었는데 애굽으로 내려가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 괴롭게 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고통과 압제로부터 우리를 건지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이 모든 일에 감사드리며 주께서 내게 주신 이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의 첫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년에 세 차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감사제사를 드렸던 것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이런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의 절기가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할 조건입니다. 감사절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여 너무 바쁘게 살다가 감사드릴 기회를 잊고 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어버이날이라는 것이 있어 비록 불효자들이지만 그래도 일년에 한 번은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을걷이를 끝내고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은 한 해를 정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비록 옆구리 찔러 절받기가 될지라도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앞에 경배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를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복받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영국 격언에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찬 곳이고,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삶에 짖눌려 늘 허덕이며 고달프게 사느라 감사할 여유가 없는 것은 참으로 지옥 같은 삶이지만 세상 재미에 푹 빠져 감사를 잊고 사는 것 역시 지옥생활입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마음이 천국을 소유한 마음이며 그 사람이 곧 천국시민입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 보는 것” 이라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희노애락애오욕’ (喜怒哀樂愛惡慾) 이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정서들입니다. 하지만 감사는 저절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하는 가장 고급스럽고 성숙한 선택적 감정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깨닫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성숙한 마음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1) 했던 바울은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 ‘육체의 가시가 내게서 떠나가게 해달라’ 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감사로 받았습니다. 건강의 연약함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욱 사모하고 겸손하게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은혜임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도리어 기뻐하며 ‘내가 약할 때 곧 강하게 되었으니 나는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글에 이런 감사가 있었습니다. 흑인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찰리 스미스가 130세로 1831년에 플로리다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보낸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 같았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과 학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무려 20번 이상 넘기며 그렇게 130년간 모진 고생을 해온 스미스 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흑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130년간 언제나 제 옆에 계셔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 어떻습니까? 이런 감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던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거장들만 할 수 있는 감사인 줄 알았더니 130년을 노예로 살았던 한 무명의 사람으로부터도 나올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감사할 일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기대했던 일이 잘 풀리고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터져나올 수 있는 그런 감사 말입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직장생활과 학교생활에 싫증이 납니까? 맨날 똑같이 하루 세끼 밥하고 애들 뒤치닥거리하고 집안일 하느라 지쳤습니까? 삶이 너무 단조롭고 변화가 없어 재미가 없고 따분하여 감사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화끈한 이벤트도 만들고 긴장과 스릴을 경험하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면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분 혹시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 많이 감사하기 위해 지금보다 스릴이 배나 넘치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내 인생 속에 자주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용기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너무 부러워하지 않기 바랍니다. 지루한 듯 하지만 매일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이 복입니다. 오늘 하루를 건강하게 살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사하게 돌아오고 가족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평안히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단조롭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평안함이지만 바로 그것을 얻으려고 조그만 고무보트에 가족을 태우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며 또 산을 넘는 난민들이 유럽 땅을 향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걱정없이 예배드리는 이 날에 지구촌 곳곳에서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옥에 갇히고 매를 맞으며 총에 맞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공짜로 얻은 것처럼 아무 감흥이 없이 소중함도 모르고 자유와 평안을 즐기고 있는 이 시간에 끔찍한 사고와 사건, 전쟁과 테러의 공포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는 질병과 사투를 벌이며 오늘 하루 생명이 더 연장받았음을 감사하며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안할 때,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갈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고난의 때 역경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의 고백을 가르쳐 주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린아이를 돌보시듯 품에 안아 바다를 건너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으며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먹을 양식을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약속대로 주신 그 땅에서 땀흘리며 일하고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먹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고르게 내려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 성숙한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앉아서 편하게 먹는 것으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고생과 수고를 통해 얻은 땀과 눈물의 열매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백성으로 자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은 광야의 백성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하라 하시며 오늘 본문의 감사고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감사 어떻습니까? 벌써 10년 넘게 추수감사절 때마다 부르는 감사찬송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라는 찬송시를 지은 사람은 스웨덴 사람 스톰이라는 분입니다. 본래는 스웨덴어로 지은 네 절로 된 시였고 1891년에 스웨덴의 구세군 회보에 처음 실린 찬송시였는데 1933년에 백스트롬이라는 분이 영어가사로 번안하여 오늘의 유명한 곡으로 재탄생했다고 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우리가 부르는 세 절의 가사도 은혜롭지만 스웨덴어로 된 네 절의 가사도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마침 어느 분이 스웨덴어 가사를 번역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은 것이 있어 소개합니다.
지금 있는 것 주께 감사, 주님 가져가신 것도 감사
지나간 시간도 감사, 지금 이 시간도 감사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 감사, 울적하고 쓸쓸한 가을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내 가슴의 평안을 감사
주께서 드러 내신 것 감사, 나 다 알지 못한 것 감사
응답하신 기도 감사, 받지 못한 것도 감사
영생의 비밀 감사, 궁핍할 때 주심도 감사
측량할 수 없는 은혜 감사, 가족 구원해 주신 보혈 감사
내 삶에 푸른 하늘 감사, 비 뿌리는 구름 주심도 감사
주님 주신 밝음 감사, 마찬가지 어둠도 감사
시험과 고난도 감사, 변치않는 은혜 감사
다가오는 내일 감사, 실패 닥쳐도 소망 감사
장미꽃 어우러진 환한 길 감사, 장미의 가시도 감사
갈 천국 남은 길 감사, 영원히 안전한 집 감사
고난의 십자가 사랑 감사, 천국 복락 소망 감사
불 같은 시련도 감사, 모든 것 영원토록 감사
노랫말 속에 나오는 서른 두 번의 감사는 모든 상황 속에서 주께 감사하는 고백입니다. 이런 감사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의 감사이길 바랍니다.
여행하는 사람
신 26:1-11, 계 14:1-5, 요 14:1-7 / 인명진 목사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쉘은 인간을 Homo Viator라고 했습니다. 여행하는 인간, 낯선 곳을 끊임없이 떠도는 인간,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도상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인간을 동물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특징을 생각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동물과 비교했을 때 인간의 특징은 여행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따라 이동하지만 인간은 먹이와 상관없이 이동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행이라고 부리고 있지요. 이런 인간의 특징을 Homo Viator라 이름 붙인 것이지요. 낯선 곳과 새로움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본능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더운 여름에 사서 고생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행하면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여행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목적은 머물러 있는 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움을 발견하고, 좋은 기억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들고,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 때 새로웠던 도전을, 좋은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인생을 다시 사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나 땅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끊임없는 새로움을 이끌어내고 좋은 기억을 많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올 초에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은 마지막 책인 “담론”에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이지 창조 공간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계의 역사도 그러했습니다. 로마의 역사도 변방의 새로움이 늘 유입되어 중심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중국도 몽골과 만주족의 변방의 새로움이 끊임없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변방의 새로움이 중심부를 파고들어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의미를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의미가 살아서 꿈틀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세계 역사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움이 유입되지 않는 중심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삶을 지치게 만듭니다. 여행은 나의 중심부를 벗어나서 변방으로 나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생의 의미를 다시 찾고 인생을 다시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납니다.
저는 잠언을 여행자의 눈으로 한 번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니라.” 이 지혜는 책상 앞에서, 책 속에서 발견한 지혜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길 위에서, 새로움이 꿈틀거리는 여행 중에 발견한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다 더 근원적으로 성서 전체를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제 눈에 펼쳐졌습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떠도는 인간, 낯선 곳을 끊임없이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태생적으로 여행의 DNA가 있는 존재요, 길 위의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심부를 버리고 변방을 향해 나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소위 우리가 믿음의 원조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역사의 중심부였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변방을 향해 나갔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떠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한 번에 정착하지 못하고 열 두 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얼마나 처절한 나그네였는가 하면 자신의 아내가 사라가 죽었는데 매장할 무덤이 없어서 겨우 막벨라 굴 하나를 사서 겨우 아내를 묻었습니다.
정든 땅, 태어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삭도 흉년 때문에 블레셋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형의 얼굴을 피해 바딴 아람에서 20년 동안 나그네로 떠돌았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은 한 평생을 여행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죽고 난 뒤 400년이 지나서야 유골로 약속의 땅에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족장 모두가 여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의 말씀은 자신들의 조상을 소개하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나그네였고, 여행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라틴말로 Homo Viator라고 하니까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중심부를 버리고 변방을 떠도는 것이 나의 현실이 될 때는 달라지지요. 낭만은 고사하고 어디 하나 발붙일 곳이 없는 나그네의 서러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많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다가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열두 번이나 이사하는 여정 속에서 재산이 늘어나 조카 롯과 함께 지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노른자 땅을 양보하고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다섯 왕이 쳐들어와 중심부를 차지했던 조카 롯의 재산을 약탈하고 조카 롯까지 잡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병을 거느리고 단까지 올라가서 그들이 약탈해갔던 모든 것을 되찾기도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이 멸하려는 계획을 알고 피 맺히는 중보적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소명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의 유통시키는 사람이 되라 복의 근원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여행하는 사람의 지혜요 생존의 법칙이라고 말입니다.
반대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를 떠도는 주제에 복을 유통시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너무도 기가 막힌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유랑하는 사람이 자기 먹고 살기도 바쁘고,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텐데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고, 이 약속을 몸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믿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이니라.” 나는 너의 주인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선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며 사는 내 인생을 어디에 붙들어 맬 것인지, 흔들리는 내 인생을 어디에 단단히 고정시킬 것인지, 기준이 수시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준 삼을 것인지 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생을 붙들어 메었고, 하나님께 인생을 고정시켰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전에는 본토에 자기의 근본을 붙들어 놓았습니다. 전에는 친척의 관계에 인생을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전에는 아비의 집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나니까 나의 근본, 본향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경험, 판단, 재주, 인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굳게 우리를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모험입니다. 믿음은 낯선 세계를 향해 여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순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만 가지 어려움을 무릎 쓰고 천성을 향해 여행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다른 믿음의 조상 다윗도 유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중심부에 있다가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사위로 이스라엘 중심부에 있다가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13년 동안 지명수배자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13년의 유랑세월 동안, 이 13년의 변방의 세월 동안 다윗은 실제적인 믿음의 집이 지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실제적인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돌며 사는 내 인생을 어디에 붙들어 맬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표류하는 내 인생을 어디에 단단히 고정시킬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믿음은 본토에 머물러 있으면서 땅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의 관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비의 집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주인 삼고 변방을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구약성경은 바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 신명기는 유명한 역사적 신앙고백, Historical Credo 불리는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종으로 살던 세월을 끝내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다시 광야에서 40년 유랑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드리면서 “내 조상은 방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백한 것입니다.
이 본문은 470년 만에 돌아온 약속의 땅에서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주 역사적인 자리입니다. 얼마나 그 감격이 대단했겠습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이 나그네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겠다고 조상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내 조상은 방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백한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여행자의 정체성에 대해 말한 것이라면 계시록의 말씀은 하나님을 주인 삼고 인생을 여행했던 사람이 쓴 기행문 혹은 여행후기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난 201년 터키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기독교신문사로부터 여행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떠났습니다. 기행문 혹은 여행후기란 미처 다 하지 못한 남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행을 통해 얻은 교훈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여행사에서 여행후기를 홈페이지에 올리면 상품권도 준다고 합니다.
계시록 말씀은 먼 여행을 마친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 그냥 통 털어 십사만사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단들은 이 숫자를 영적으로 해석한다하여 십사만사천 명이 차면 주님이 재림한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이 숫자 안에 들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십사만사천 명은 완전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뜻하는 12지파에 완전수 1만 2천을 곱한 숫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가 십사만사천입니다.
이제 그들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여행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의 여정은 어떠했으며,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일까요? 십사만사천 명은 그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행에 대한 흥분과 기대가 넘쳐흘렀습니다. 마음껏 즐기고 먹고 마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처럼 맛 집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겠지요. 노을 지는 석양 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차 한잔 기울이는 모습도 그려보았겠지요.
그런데 여행하는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고, 비싼 것을 먹으면서 기사와 비서를 거느리고 아주 편하게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여행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낭 하나에 몸을 맡기고 이슬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낭만도 넘쳐났습니다. 가다 보면 경치 좋은 곳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만났습니다. 때로는 풍광 좋은 언덕에 서서 노래와 춤으로 여행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 이상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끼리 결혼도 했습니다. 여행 도중에 아기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들을 사람들은 가족이라 부르면서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 재미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에 늘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줄서서 기다리는데 새치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의 것을 슬쩍하기도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자기 아내는 보지 않고 눈길이 보내는 남자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곳곳에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취하여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천태만상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여행이 처음 기대한 것처럼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그 즐거움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즐거움으로 여겨지지 않고 지루함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함께 여행을 하는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파트너를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준비한 여행비가 떨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불편했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울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출발지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여행은 앞으로 가는 것만 허용될 뿐, 되돌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울면서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었습니다. 골인 지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울면서라도 가야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위험천만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여행에 참여했는가를 후회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이니 더 즐기면서 하고 싶은 일이나 실컷 해 보자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중간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행자 모두가 동일한 지점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곳곳에 갈림길이 나타나고,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 지점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 한 모퉁이에서 여행자들에게 길을 안내 해주는 이상한 한분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던 사람들은 길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생전에 처음 들어보는 말씀을 전하는 이분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이때 신비로운 그분은 “나는 예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깊은 눈길로 나그네를 바라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따라오면 그 증거로 도장을 찍어준다고 했습니다. 아예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마에 도장을 찍어 준다고 했습니다. 이마에 찍힌 도장이 있어야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는 처음엔 혹시나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대부분이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여행자도 처음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뭔가 달랐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자는 예수님을 여행의 주인 삼겠다고 결심하고 그 때부터 그는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분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상한 길로만 가는 것 같았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중에서 좁은 길을 선택했고, 한참 우회해서 가야 하는 먼 길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광야로, 때로는 깊은 골짜기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묵묵히 어디든지 따랐습니다. 그 분은 자상하셔서 쓰러지면 일으켜 주고, 힘들면 안아 주셨습니다. 그 분께 물었습니다.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이마의 도장은 언제 찍어 줍니까?” 자신이 길이라 말씀하셨던 바로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날 따르다 보면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마에 도장이 찍힐 것이다. 그 도장의 이름은 믿음이다.” 내가 길이라는 그분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감격했습니다. 그 동안의 여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곳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사람은 의외로 적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길 위에서 만난 예수님을 따라 여행한 성도의 기행문입니다. 이 기행문은 노래로 마칩니다.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십사만 사천 밖에는 이 노래를 베울 자가 없더라.”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이 무더운 여름 나의 본토, 나의 중심부를 뒤로 하고 새로움이 살아 숨 쉬는 변방으로 여행하십시오. 여행의 백미는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 입니다. 누구와 함께 인생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요새이신 주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한 여행이 내 인생의 최고의 여행이었다고 새 노래로 기행문을 마감하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열매를 드리면서
신명기 26:1-11 / 김영규 목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1-3)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3-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26:11)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추수와 관련된 감사의 절기는 성경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34:22, 출23:16) 일 년 중 처음으로 거두는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드리는 것부터, 수확을 완료하고 저장하는 것까지 절기로 지켰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집입니다. 광야 생활 40년이 끝나고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설교집입니다. 신명기 1장에서 4장까지는 광야 여정을 요약합니다. 5장에서 26장까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반복합니다. 28장에서 30장까지는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실 축복과, 거역하는 자에게 내려질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핵심적인 부분은 5장에서 2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5: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신6: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신12: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신19: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신26:1) 여기 반복하여 강조한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차지할 땅에서”라는 문구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땅에서 지킬 규례라는 점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규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시민법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법이 아니라 땅의 법입니다. 천국 법이 아니라 지상 나라의 법입니다. 천국에서는 굳이 이런 법이 필요 없습니다. 천국에는 우상숭배가 없습니다. 살인이나 간음이 없습니다. 도적질이나 각종 분쟁이 없습니다. 굳이 처벌법이 있을 필요가 없고, 재판법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법은 어디까지나 가나안 땅에 거주하기 위한 법령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 헌법과 각종 법을 지키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법을 지켰습니다.
물론 이 법령의 기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그 내용이 이 법령의 기반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앙과 삶의 법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규례는 매매법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은 땅의 소득을 하나님께 바치는 농사나 목축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삶으로 표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 법령의 결론부에 재물을 다루는 법이 들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재물을 잘 다루어야 영적인 경건 생활이 제대로 됩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재물을 제대로 다루어야 됩니다.
물질생활은 신앙생활의 지표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다 알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요즘 충만한 상태인지 빌빌하는 상태인지? 그러나 한 가지만 관찰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마치 낚시꾼이 찌만 바라보듯이! 낚시꾼은 물속에서 물고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찌만 보면 금방 압니다. 아하, 물고기가 많구나! 혹은, 물고기가 움직이지 않는구나!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굳이 신앙이 어떤지 살펴보시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만 관찰하면 됩니다. 제사 법전인 레위기 마지막에 십일조의 규례로 맺는 것이나, 신명기 법전의 결론부에서 맏물과 십일조의 규례를 강조한 것은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모든 삶은 재물을 어떻게 쓰는지 보면 안다! 거기에 따라 너희의 신앙과 삶이 좌우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성경도 마찬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거두절미하고 중요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 몸을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영적 예배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다! 몸은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굳이 영혼을 살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 영적 상태가 나타납니다. 몸이 성전에 가는지, 술집에 가는지? 몸을 좋은 일에 쓰는지, 음란에 쓰는지? 지금 몸이 어디에 있는지만 살피면 영적 상태는 금방 진단이 나옵니다.
추수감사절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행사가 아닙니다. 연중 물질생활을 바로 했는지 평가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을 평가해 보세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재물을 쓸 것인지 올바른 방향을 결정하세요.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 전체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축복 된 삶이 될 수도 있고, 저주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규칙을 하나님의 법은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백과 함께 드리는 예물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드릴 첫 수확의 예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이 매년 연례적인 첫 수확물인지, 아니면 가나안 정착 후에 생전 처음(for the first time)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지?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유목민입니다. 농경지도 없고, 정착지도 없었습니다. 그런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첫 농사를 지었습니다. 생전 농사를 짓지 않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얼마나 엉성했을까요? 원주민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면서 대충 했을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실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첫 수확은 직업을 바꾸고 나서 평생의 첫 소득이었습니다.
여기 맏물이란 단어는 “tyviare”(레쉬트)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시간의 시작점, 위치상의 시발점, 질서상의 첫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작물 중에 처음 익은 것이며, 가장 소중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무화과 열매가 처음 익었으면 그 가지에 리본을 묶어 표시를 해 뒀다가 수확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예물은 내 소득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합니다. 소득의 찌꺼기를 드리는 게 아닙니다. 소득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맏물을 드리는 정신입니다.
맏물을 드릴 때에 꼭 따르는 절차(process)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차는 삶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3)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5-10)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들이 지금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둔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하셨던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자신들을 인도하셔서 가나안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첫 수확물은 그 증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에 대하여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이 한 해도 하나님 자녀로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축복,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었습니다.(3절) 창세기 후반부에 보면 야곱 집안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이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야곱 가족은 7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 동안에 장정만 60만 명에 이르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4절)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로 노예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정착지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5-10절) 바로 이 고백을 하면서 맏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함께 즐거워하라
맏물을 드리는 또 한 가지 절차는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1) 제물은 하나님께 드렸는데 기쁨은 이웃과 함께 나눕니다. 우리의 재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물론,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십일조를 사용하는 세 가지 용도가 나옵니다. 첫째는 레위인의 생활비를 위한 십일조입니다.(신18:21,24) 둘째는 가족의 경건과 화합을 위한 십일조입니다.(신14:22-26) 셋째는 이웃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입니다.(신14:28-29, 26:12-15) 첫 번째 십일조는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소득이 있을 때마다 드렸습니다. 두 번째 십일조는 가족을 위한 것으로 첫 번째 십일조를 드린 것과 별도로 매년 드렸습니다. 세 번째 십일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십일조와 별도로 이웃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상 소득의 10분의 2를 매년 드렸으며, 3년에 한 번씩은 10분의 3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른 재정집행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기쁨을 나눌 세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물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우선 돌봐야 될 가족입니다. 셋째는 이웃입니다. 이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재정 집행입니다.
그러면 이제 올바른 재물 사용의 결과를 봅시다.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8-19)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집입니다. 5장에서 26장까지 중요한 계명을 기록했습니다. 27장에는 온 백성이 가나안 땅의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모여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승복하겠노라고 “아멘!” 소리로 외치라고 합니다. 28장에는 구체적인 축복(1-14절)과 징벌의 내용(15-68절)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28장 내용의 특징이 있습니다. 순종할 시의 축복(1-14절)보다 불순종 시의 징벌(15-68절)이 4 배가량 더 많습니다. 그만큼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뜻입니다. 땅에서 잘 살려면 이 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 내용(1-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2-6)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7-14)
1절은 하나님 법을 따를 때의 축복의 대 주제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리라! 2절에서 6절까지는 축복의 범위입니다. 집안과 일터, 자녀와 생축, 토지소산, 생활 영역 전부입니다. 7절에서 14절까지는 민족적인 축복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를 때에, 공동체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계명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따라야 될 법입니다. 재물에 대한 규례가 그렇습니다. 가족 공동체가 함께 실천할 때에 가족 공동체가 복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지위를 주십니다. 머리가 되고 위에 있습니다. 공동체를 번영케 하십니다. 꾸어주되 꾸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이란 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야말로 “성민”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특별히 보호하시는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때의 결과입니다.
신명기는 구약 법전입니다. 그렇다고 소멸된 법일까요? 구약은 보다 외면적이고 可見的이고, 물질적인 축복이 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계시의 과정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 부득이 눈에 보이는 축복을 사용하셨습니다. 신약은 보다 영적입니다. 영혼, 내세, 영적 은사와 축복에 치중합니다. 그렇다고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육체 생활 물질생활은 지리멸렬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요?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생활을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천국 가는 날까지 지상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육체를 돌봐야 하고, 물질생활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축복에 대한 원리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영적 생활은 물질생활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영적 삶이 육체를 지배하고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죄악 된 성향과 마귀의 유혹 아래 있습니다. 물질을 통해 영적 시험을 당합니다. 무수하게 많이! 마귀는 재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수 많은 계명의 결론부에 재물 사용법을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취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으리라!(마6:21)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경건 생활도 제대로 합니다. 재물을 제대로 사용해야 지상에서 사는 동안 축복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의 열매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