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평등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님은 우리를 평화롭게 하신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를뿐더러(요한 14,27) 세상은 우리에게서 그 신적인 평화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로마 8,35).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면 몰라도 그것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그분을 부인할 수 없다. 순교자들이 그것을 증언한다.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고요나 억압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를 이른다고 한다. 자신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다른 이에게 아쉬움이나 오해가 없다면 서로 말다툼하거나 뒷담화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 공동체는 언제나 평화롭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실 곳에 미리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어느 집이든 들어 가면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라고 이르셨다(루카 10,5). 그것은 영혼 없는 인사말이 아니라 그들이 스승 예수님에게 받은 선물을 전해주는 것이다. 파견받은 그들은 이리 떼 속에 양처럼 아주 약한 모습으로 그곳에 들어갔고,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을 지킬 아무런 무기를 들지 않아야
했으며, 오직 그곳만을 마음에 두어야 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시고 그곳에 가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만 생각해야 했다. 스승 예수님이 그들의 투신과 평화의 근원이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물로 받았다. 그것은 죽음도 깰 수 없는 평화다. 신앙의 선조들은 그 평화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향을 떠나 척박한 곳에 가서 살았고, 평화롭게 목숨을 내놓았다. 그들이 얼마나 평화로웠으면 처형하는 이들이 두려워하며 떨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당당함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증언이었다. 감성적으로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한마음이 된 교우 공동체에 속한 소속감이었을 거다. 그들은 모두 안정되고 익숙한 고향을 떠날 정도로 그 삶에 매료되었다. 그들을 그렇게 매료시킨 것이 평등이었다. 지금 여기서 당장 죽어도 괜찮을 만큼 좋은 것이고, 이미 그들은 하늘나라에 와 있는 거 같았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온전하다. 하느님 앞에 있는 영혼은 모두 살아 있고 온전해져서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다. 그러니 평화롭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한 분과 선생님 한 분만 계시고 모두 형제자매다. 그런 세상을 그리워한다. 이는 상상이나 몽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하느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 어디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서로 사귀고 돕고 또 있는 힘을 다해 이해하고 인내하면서. 왜? 하느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외아들까지 내어놓으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생면부지 사람들이 만나서 사귀고, 아무런 바람 없이 어린이들처럼 생활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인내하지 못한 걸 죄라고 고백한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건 죄라고 알고 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지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하느님을 믿어서 평화를 누린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안에서 거저 받은 평화를 나눈다. 예수님 품 안에서, 교회 안에서 배운 대로 한다. 그런 마음만 있다면 평화의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9).”
예수님, 옛날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등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이 있고, 드러나지 않는 계층이 있습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해드릴 테니(루카 3,5)’ 저희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세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그 그윽한 평화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지혜를 전해주시고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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