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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21세기 최전선의 사상가 애나 칭의 대표작 『세계 끝의 버섯』!
국내 처음 소개되는 인류학의 기념비적인 작품.
“우리가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이 책이 필요하다”
생태적이고 경제적인 붕괴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죽지 않는 존재, 그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버섯’이 안내하는 불안정한 생존과 이상한 신세계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의 상황, 안전성에 대한 약속이 부재하는 삶을 탐구하기 위해 버섯과 함께 떠난 여행 이야기. 『세계 끝의 버섯』은 우리 시대의 가장 이상한 상품사슬의 하나를 따라 자본주의의 예상치 못한 구석을 탐험한다. 한편에 일본의 미식가, 자본주의적 기업가, 다른 한편에서 라오스, 캄보디아의 정글 투사와 백인 참전 용사, 중국 윈난성 소수민족의 염소 목동, 핀란드의 자연 가이드 등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이의 밴쿠버에서는 시간제로 호출되어 송이버섯을 분류하는 동남아시아 이민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캐스케이드 산맥 숲 여기저기에서 활기 넘치는 독특한 경매 현장과 도쿄의 경매 시장으로 이어지는 송이버섯 무역의 다양한 세계를 목격하게 된다.
송이버섯을 둘러싼 이 동료들이 우리를 곰팡이 생태와 숲의 역사로 안내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대량으로 파괴한 시대에 공존과 동거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나무 숲과 산림 산업, 송이버섯 채집인의 역사와 현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는 송이버섯, 풍경, 전쟁, 자유, 자본주의 사이에 기묘하게 얽힌 이야기가 소설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채집, 임업을 비롯해 균류학과 DNA 연구, 존 케이지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송이버섯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버섯인데, 북반구 전역에 걸쳐 인간이 교란한 숲에서만 자라며, 인공적으로 재배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송이버섯은 언제나 관계 속에 있고, 그래서 특정 장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송이버섯은 나무와 공생하는 특별한 능력을 통해 척박한 곳에서 숲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놀라운 점은 송이버섯을 둘러싼 이 다양한 이야기들이 단순한 버섯 이야기를 훨씬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송이버섯을 통해 우리 시대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 저자 소개
애나 로웬하웁트 칭
인류학자.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크루스캠퍼스 교수. 글로벌 자본주의를 주로 인간 사회의 정치경제적 행위로 분석하던 학계에 환경, 생태, 풍경, 다종민족지와 같은 생태인류학적이고 포스트휴머니즘적인 관점으로 이론적 지평을 넓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다.
『다이아몬드 여왕의 세계에서』로 1994년에 해리 벤다 상을, 『마찰: 글로벌 연결에 관한 민족지』로 2005년에 미국민족지학회가 수여하는 시니어북 상을 수상했다. 2007년부터 ‘마쓰타케 월드 리서치 그룹’을 조직해 송이버섯의 다종적 결합 및 송이버섯을 둘러싼 상품사슬을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다. 2013년부터 5년간 덴마크국립연구재단에서 후원하는 오르후스대학교 닐스 보어 교수직을 수여받았고, 동 대학의 세계적인 인류세연구센터 소장으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을 포괄하는 초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목차
서로 얽히게 하는 것들
프롤로그: 가을 향기
1부 남은 것은 무엇인가?
1. 알아차림의 기술 | 2. 협력으로서의 오염 | 3. 규모에 따른 문제
인터루드: 냄새 맡기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
4. 가장자리를 작업하기 | 5. 오리건주의 오픈티켓 | 6. 전쟁 이야기
7.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두 종류의 아시아계 미국인
8. 달러화와 엔화 사이에서 | 9. 선물에서 상품으로, 그리고 그 반대로
10. 구제 리듬: 교란되고 있는 비즈니스
인터루드: 추적하기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 의도치 않은 디자인
11. 숲의 삶 | 12. 역사 | 13. 부활 | 14. 뜻밖의 기쁨 | 15. 폐허
16. 번역으로서의 과학 | 17. 날아다니는 포자
인터루드: 춤추기
4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18. 송이버섯 운동가: 곰팡이의 활동을 기다리며 | 19. 일상적인 자산
20. 끝맺음에 반대하며: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포자가 만든 자취. 더 멀리 나아가는 버섯의 도전
[해제] 다종의 세계 만들기와 알아차림의 기술 ?노고운
찾아보기
📖 책 속으로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됐을 때, 폭탄 맞은 풍경 속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다고 한다. 원자폭탄을 손에 넣은 것은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꿈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꿈은 무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갑자기 우리는 인간이 의도했든 아니든 지구의 거주 적합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오염, 대멸종, 기후변화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러한 인식은 더욱 커졌다. 현재의 불안정성 중 그 절반은 지구의 숙명에 관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에 의한 교란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지속가능성이 이야기되고는 있지만, 우리가 다종의 후손들에게 거주할 만한 환경을 물려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 p.24
20세기 기준으로 ‘일자리’라 여겨졌던 것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게다가 직업이 있든 없든, 우리 모두 환경파괴로 죽게 될 것만 같았다. 우리는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붕괴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진보에 관한 이야기도, 붕괴에 관한 이야기도 어떻게 하면 협력적 생존을 생각할 수 있을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쯤에서 버섯 채집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버섯 채집이 우리를 구원해주진 않겠지만, 우리에게 상상의 문을 열어줄지 모른다.
--- p.49
국가의 유효성과 자연 풍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파괴를 고려할 때,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기획 바깥에 있던 것들이 오늘날 왜 살아남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다루기 힘든 가장자리의 것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엔인과 송이버섯이 오리건주에서 함께 모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이 모든 것의 방향을 뒤집어,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 p.51
송이버섯 덕택에 숙주 나무는 비옥한 부엽토가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그 대가로 곰팡이는 나무에게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이 변형적인 상리공생 때문에 인간의 송이버섯 재배는 불가능했다. 일본의 연구기관들이 송이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수백만 엔을 들여 노력해왔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송이버섯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환경 조건에 저항한다.
--- p.85
인간은 불확정성으로 버섯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미국인 작곡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짧은 퍼포먼스 곡들로 이루어진 〈불확정성〉이라는 시리즈에는 버섯과의 마주침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케이지는 야생 버섯을 찾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마주칠 때 발생하는 모든 가능성과 놀라움을 포함해 마주침이 일어나는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 p.95
오가와 박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 중부로 오기 오래전에 사찰 건설과 철기를 생산하는 대장간의 연료로 쓰려고 숲을 베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송이버섯이 자라는, 인간에 의해 교란된 탁 트인 소나무 숲을 가꿨는데, 이는 그러한 숲이 일본에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8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숲을 베었다. 소나무 숲은 그런 산림 벌채 이후에 갑자기 생겨났고, 그와 함께 송이버섯도 나타났다. 한국인들은 송이버섯 냄새를 맡았고 그러면서 고국을 생각했다. 그것이 첫 번째 노스탤지어이고 송이버섯을 향한 첫사랑이다. 일본의 새로운 귀족들이 오늘날 유명한 가을 향기를 처음 찬양한 것은 한국을 향한 갈망에서였다고 오가와 박사는 이야기했다. 해외로 이민을 간 일본인이 송이버섯에 집착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였다.
--- p.101-102
송이버섯 채집은 도시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지만, 도시는 아니다. 채집 또한 노동이 아니다. ‘일’조차도 아니다. 라오계 채집인 사이는 ‘일’이란 자신의 상사가 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송이버섯 채집은 ‘찾는 행위’다. 자신의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금의 재산을 찾는 행위다.
--- p.127
선별 작업은 하나의 예술이다! 선별하는 일은 눈을 사로잡는, 다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팔을 재빠르게 움직이는 불 쇼와 같다. 백인들은 저글링 하듯이 한다. 반면에 또 다른 뛰어난 구매인인 라오인 여성들의 선별 작업은 궁중 라오 댄스처럼 보인다. 훌륭한 선별자란 버섯을 만지기만 해도 그 버섯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다. … 훌륭한 구매인은 느낌으로 안다. 또한 그들은 버섯의 출처를 냄새로 알아낼 수 있다. 숙주 나무, 채집한 지역, 로도덴드론과 같이 크기와 모양에 영향을 주는 다른 식물들의 유무 등을 냄새로 맞추는 것이다. 모두가 훌륭한 구매인의 선별 과정을 즐겁게 지켜본다. 그것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대중 공연이다. 때때로 채집인은 선별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이 찾은 최상의 버섯이나 최고 수입(특히 100달러짜리 지폐일 때)도 사진으로 찍는다. 그 사진들은 버섯 추적을 기념하는 트로피다.
--- p.154-155
상품화에 대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르면 사물은 교환 대상이 되기 위해 그것들이 속했던 삶의 세계와 분리된다. 이 과정을 나는 ‘소외’라 부르는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의 잠재적 속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채집인과 버섯의 관계에 소외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은 오리건주의 송이버섯 채집에서 관찰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다. … 채집된 버섯은 팔릴 때조차 돈을 자본으로 전환시킬 준비를 마친 소외된 상품이 되지 않고 사냥의 트로피가 된다. 채집인은 자부심에 가득 차서 자신이 딴 버섯을 자랑한다.
--- p.225
무엇이 교란인지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관점의 문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개미집을 무너뜨리는 교란은 인간의 도시를 날려버리는 교란과 크게 다르다. 개미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관점은 생물종 다양하다. 로절린드 쇼는 어떻게 남성과 여성, 도시인과 시골 주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방글라데시의 홍수를 서로 다르게 개념화하는지 보여준다. 이는 그들이 수위 상승에서 받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위 상승이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홍수로 변하는 시점은 각 집단마다 다르다. 교란을 산정하는 단일 기준은 불가능하다. 교란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되는 문제다.
--- p.286
식물의 역사적 힘에 감화되기를 원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소나무에서부터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소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나무 중 하나다. 불도저로 숲을 관통해 길을 냈다면 소나무가 베인 부분에서는 새싹이 자라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경작지를 버리고 떠났다면 소나무가 첫 번째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화산이 분출하거나 빙하가 움직일 때 또는 바람과 바다가 모래 퇴적을 일으킬 때, 소나무는 처음으로 그곳에 뿌리를 내릴 곳을 찾는 식물 중 하나일 것이다.
--- p.297
채집인들에게는 송이버섯 숲을 알아차리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즉, 그들이 버섯의 생명선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숲에 존재하는 것은 춤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들은 감각, 움직임, 방향 설정을 통해 생명선을 추구한다. 이 춤은 숲 지식의 한 형태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문서화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채집인이 춤을 추지만 모든 춤이 비슷한 모습은 아니다. 각각의 춤은 이질적인 미학과 지향점을 담고 있는 공동의 역사들에 따라 각기 모양을 갖춘다. 이러한 춤을 소개하기 위해 나는 오리건주 숲으로 다시 들어간다.
--- p.429
우리는 시각을 너무 많이 믿는다. 나는 땅을 쳐다보고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치맨이 손을 더듬어 찾아낸 것처럼, 그곳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보 없이도 헤쳐 나가려면 우리의 손을 이용해 충분히 느껴야 한다.
--- p.488
🖋 출판사 서평
폭탄 맞은 풍경 속의 송이버섯
자본주의적 파괴와 다종의 풍경 속에서 협력적 생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됐을 때, 폭탄 맞은 풍경 속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다고 한다. 체르노빌의 원전 사고로 핵폭발이 일어난 이후에도 바지런하고 탄력 있는 균류가 가장 먼저 등장했다고 한다.
로키산맥의 한 지류인 캐스케이드산맥 여기저기 황폐한 숲에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곳의 풍경은 현대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 세계의 황폐한 상태를 잘 보여준다. 우리 인간이 만든 폐허에서는 무엇이 살아남는가? 저자가 탐구한 바에 따르면, 송이버섯은 불안정성을 다루는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버섯을 채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동남아시아의 정치적 난민, 미국의 백인 참전용사, 남미의 이주민 등은 자의든 타의든 떠돌이 가난한 삶을 사는 경향이 있다. ‘송이버섯 열병’을 앓는 프레카리아트의 이 버섯 채집인들은 정규직을 구하지 못했거나 원하지 않거나 자연의 탁 트인 공간에 혼자 있는 ‘자유’를 선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본주의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송이버섯 무역을 매개로 어느 정도는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있다. 그들은 저자가 주변자본주의적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를 형성하지만 여전히 시스템의 일부다.
전례 없이 불안정한 시대,
돈을 벌고 있는 순간에도 불안정한 우리 시대의 삶과 버섯의 생태가 주는 메시지
『세계 끝의 버섯』은 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의 경험이 일상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탐구한다. 저자는 우리 시대를 불안정성으로 정의한다. 이 불안정성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서조차 더는 사람들에게 안정된 직업도, 매달 생계 걱정 없이 자녀를 교육하고 키울 수 있는 안정감도, 아플 때 치료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도 보장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물은 언제든 필요에 따라 버려질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이 소외됨에 따라 “풍경은 단순화되고, 단순화된 풍경은 자산 생산 후 유기된 공간, 즉 폐허로 변한다.”(30쪽) 오늘날 세계의 풍경에는 ??이런 종류의 폐허가 도처에 흩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야기의 끝인가? 기존의 서사에서는 이러한 장소에 죽음의 선고를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도 활기가 넘칠 수 있다! 버려진 자연 풍경, 산업 풍경은 때때로 새로운 다종과 다문화의 삶을 낳는다. 도처에 폐허로 방기된 이곳에서 우리는 생명을 찾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생존이란 무엇인가?
생존이란 항상 다른 존재와 싸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생존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겠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붕괴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진보에 관한 이야기도, 붕괴에 관한 이야기도 어떻게 하면 협력적 생존을 생각할 수 있을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쯤에서 버섯 채집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버섯 채집이 우리를 구원해주진 않겠지만, 우리에게 상상의 문을 열어줄지 모른다”(49쪽)라고 말한다.
저자는 불안정한 시대에 협력해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 바로 호기심이라 말한다. 그리고 송이버섯이 우리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이버섯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취하고, 훔치고, 선물하고, 파는 인간과 일종의 공생적 파트너 관계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것인 줄만 알았던 통제된 세계가 실패했을 때, 통제받지 않는 버섯의 삶이 선물이자 길잡이가 되어준다. 어쩌면 저자는 송이버섯을 오늘날 인간에 의해 황폐화된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내야 할 생존과 지혜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불안정한 생존을 통해 비로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불안정성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이다”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송이버섯은 자본 축적이 일어나기 힘든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가장 변두리에 존재한다. 물론 변두리라고 해서 결코 자본주의의 바깥인 것은 아니다. 송이버섯은 그렇게 숲속 깊숙이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어 그 존재를 찾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적 폐허, 즉 세상의 종말을 암시할 수도 있다. 지구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추출해 축적하려는 인간의 탐욕으로 종국에 이르고 마는 위기 상황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애나 칭은 송이버섯이라는 이 작은 유기체를 실타래 삼아 자본주의적 파괴와 다종의 풍경 속에서 어떻게 협력적 생존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가 엉망으로 만든 이 세계에
아직 무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복잡한 교차점에서 일궈낸
시적이면서 놀랍도록 풍부한 탐구
사실 이 책을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저자가 “다채로운 모임”이라는 말로 요약한 20여 개의 이야기들이 “비 온 뒤 쑥쑥 올라오는 버섯”(8쪽)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아마존의 어떤 리뷰는 이 책을 두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매혹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세계 끝의 버섯』은 무미건조한 사회과학 논문이 아니다. “우리가 엉망으로 만든 이 세계에 아직 무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8쪽)라고 물으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시적인 표현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미묘한 묘사 때문에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깔끔한 결론은 없으며, 일련의 예리한 관찰, 분석, 설명이 있을 뿐이다. 미시와 거시, 개인과 사회, 즉 송이버섯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숲의 바닥을 느끼는 사람, 버섯 경매의 에너지, 다국적 공급망의 예상치 못한 연결에 대한 놀라운 설명이 가득 차 있다. 저자가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그리고 소나무 숲의 땅을 훑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토양 생물과의 엄청난 연결을 느끼는 대목에서는 인간 이외의 존재(식물, 동물, 흙 등등)가 우리의 존재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독자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저자와 똑같이 독자 역시 송이버섯 채집의 속도에 발 맞춰 냄새를 맡고, 무언가를 만지고, 찾고, 걷는 감각을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이 세계를 발견하는 ‘알아차림의 기술’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말로 옮긴 노고운 교수는 2017년 한국문화인류학회 학술대회 초청으로 애나 칭과 함께 ‘생태’에 관한 주제를 발표한 바 있다. 역자는 저자 특유의 산문체가 지닌 자연스러움을 우리말로 잘 살려내고 있으며, 원서의 정확한 의미 전달과 풍부한 뉘앙스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정말로 독창적이다. … 이 책은 매우 희귀한 송이버섯의 상업과 생태를 탈산업 이후의 생존과 환경 재생에 대한 현대의 멋진 우화로 바꾸어놓았다. ―『가디언』
애나 칭은 모험적인 이야기를 엮는다. … 교차하는 문화와 자연의 회복력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설명은 현대성과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퍼블리셔 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