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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로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개장 4주년을 맞는다. 2002 월드컵 개막식을 가짐으로써 세계인에게 그 멋진 모습을 보인 상암월드컵 경기장은 그러나 건설되기까지 숱한 난관을 거쳐야 했다. 상암경기장 건설에 큰 역할을 한 당시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나 경기장 건설의 뒷얘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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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6월 월드컵 유치후 김영삼 정부는 상암동에 경기장 건설을 결정했다.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상암경기장 건설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 인수위원회는 모든 정부 예산을 축소 내지 동결시켰다.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수위는 상암동 경기장 건설을 백지화하여 “서울에 경기장을 짓지않는다”고 결론을 내고 있었다. 대신 잠실운동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거나 동대문 운동장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때 김대중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고, 신낙균 신임 문광부 장관이 부임하여 서울 경기장 건설 문제를 총괄하게 된다.
신 장관은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비로소 상암경기장 문제를 알게 됐다고 했다. 짓느냐, 마느냐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신 장관은 주무부처인 체육국에 의견을 물었다. 그곳에서는 “짓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예산 때문에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짓는 것이 좋다면 그렇게 밀어보겠다고 하니까 그 부서 분들이 당에서 나온 사람이라 눈치가 없다는 뉘앙스를 주더라구요. 분위기를 봐서는 안될 게 뻔한데 뭐하러 그걸 거론하느냐, 이런 거죠.”
신 장관은 일단 관계 수석과 상의한 후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김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 수석회의에서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수석회의에서는 “IMF에 막대한 예산을 어떻게 쓰느냐”며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안짓는 것으로 결론 냈다.
“당시 정부의 모든 예산은 동결되었어요. 그런데 우리 문광부만은 예산을 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경기가 얼어붙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영화계, 출판계, 공연분야 등 기업의 문화단체 후원이 없어져서 다들 아우성이었어요. 축구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장관이라는 내 입장에서는 모든 분야를 보아야 하므로 상암경기장 건설은 나도 그만 손을 뗄 생각이었죠.”
그런데 신 장관은 그러지 못했다. 정몽준 회장 때문이었다.
"아유, 말 마세요. 어찌나 내가 정 회장에게 시달렸는지...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중에는 약속시간을 정하지도 않고 불쑥불쑥 찾아와요. 밖에 행사가 있어 나가려고 보면 정 회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고 그랬어요. 나는 정 회장이 성격이 유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꼭 이뤄내야 하는 성격이란 걸 그때 알았어요. 아마 정 회장이 나한테 조금만 허술한 틈을 보였다면 나도 상암경기장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중에 알고보니, 나만 찾아다닌 게 아니라 각 분야 사람을 찾아다니며 서울에 월드컵 경기장을 꼭 지어야한다고 설득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때 모 체육계 인사는 잠실운동장을 놀리면서 유지비만 매년 몇 억 들어가는데 새로 경기장 지을 게 뭐 있느냐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
정 회장의 집요한 설득을 받으면서, 신 장관도 처음 대통령에게 경기장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수석회의에서는 잠실 경기장을 수리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함부로 다시 거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신 장관은 경기장을 꼭 지어야 하는 근거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 무슨 일로 헬기를 타고 잠실운동장 경기장 위를 지나가게 됐어요. 그때 자세히 보니까 잠실운동장은 지붕이 생명이더라구요. 독특한 지붕이 있음으로 해서 잠실운동장의 특색이 있고, 그것이 서울 올림픽의 기념 조형물이 되는 것인데 그걸 헐어서 고친다는 것은 기념물을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때 신 장관은 하나 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이면 한국이 IMF를 극복할지도 모르는데(물론 당시로서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때 제대로 된 경기장에서 개막식을 해야 한국이 IMF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을 내외에 선포하는 것이 되리라는 점이다.
이때 인천 문학경기장을 개막식장으로 사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서울에서도 가깝고, 추가 비용을 들이면 개막식 경기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종필 총리에게 보고하자 좋은 의견이라고 해요. 그래서 관계 장관과 정 회장 등 축구인을 불러 회의를 했는데 정 회장이 무척 실망했어요. 저는 정 회장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반드시 서울에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지만 인천은 인천만을 대표한다는 거지요.”
정 회장 등 축구인들의 반대로 결정이 보류됐고 나중에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성이나 서울과 거리상 불편함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천 문학 경기장도 검토 대상에서 탈락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신 장관은 2002년에 세계에 대해 한국의 위상을 보이려면 반드시 상암경기장을 지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으나 대통령 주변사람들의 견제로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골절상을 입었다가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신 장관은 영부인을 위로한다는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들 몰래 그날 저녁 청와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영부인을 만난 후 대통령 면담을 청했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은 자료를 보여드리며 한 시간 정도 말씀드렸지요. 요점은 지금을 보지말고 2002년을 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IMF를 극복하고 2002 월드컵을 허름한 곳에서 치르면 그게 말이 되느냐...김 대통령은 이해가 빠른 분입니다. 알았다고 하더군요.”
이튿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 뉴스시간에 상암경기장을 짓는다는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고 월요일 정식으로 발표가 있었다.
한편의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 장관은 상암경기장은 결국 정 회장의 고집으로 지은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신 장관은 현재 새천년민주당 수석 부대표를 맡은 정치인으로 바쁘고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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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IMF의 원조를 받았지만 아직도 IMF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하면 한국의 경제적저력은 높게 평가해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우리나라만세 같은 생각으로 쓴거 아닙니다.)
근데...이거 나온지 꽤 된 기산데 -_-;; 더구나...완전 정몽준 만세~스러운 기사다보니 쩜 -_-
1년에 한번씩 나오는 상암뒷얘기 정몽준 만세 장학생 출처의 기사.
진짜 뒷이야기라면 상암철거촌 주민들을 어떤 방법으로 다 쫓아냈는가에 대한 이야기 아닐지..-_-
다들 지네 공이지-_-; 건설반대 외치던 엠비씨, LG랑 연계해서 뚝섬에 돔야구장 짓고 월드컵때만 축구할때 쓰려고 했던 움직임등 별의별 얘기들이 마구 떠오르는구만-_-;상암구장 지으라고 시위하던 얘기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