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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墨子/BC 480~BC 390)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 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 절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묵자의 이름은 적인데, 전국 초기의 노나라 사람이다. 묵자는 처음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유학을 포기하고 유가와 대립되는 묵가 학파를 창립하였다. 묵가는 아주 엄하고 강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고, 조직의 영수는 '거자'라고 하였다. 묵자는 묵자와 그의 제자. 그리고 그 제자의 제자들이 지은 책으로서 모두 53편의 글이 남아 있다. [한서, 예문지]의 기록에 의하면 묵자에는 71편이 있었다. 그러나 송조 이후로 산일된 것이 적지 않다. 묵자학설의 주요한 정신은 "세상에 유리한 것은 흥성시키고 세상에 유해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興天下之利, 除天下之害)"는 것이다. 그의 중심 사상은 '겸애(兼愛)'이다. 묵자는 실용적인 것을 숭상하고 번거로운 형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묵자는 언행이 일치된 실천가였다. 묵자는 언사가 질박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논리성이 풍부하다. 묵자는 평생 실천을 중시하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문장을 좋아하고 그 쓰임새를 잊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서민적인 언어로 논리를 설파하였다. 묵자의 문장은 구체적인 이로써, 작은 것으로부터 큰 데로, 가까운 것으로부터 먼 데로 한층 또 한층 추리를 전개하여 도리를 해명하도록 씌어졌다. 변론문으로서의 묵자는 논리성이 강하나 문장은 소박한 바 억지로 화려하게 수식한 흠집이 없다. 묵자가 인식론과 논리학적인 면에서 거둔 성과와 기여는 아주 크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피지배층의 지배자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입니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묵자는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묵자는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 맹자보다 조금 앞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묵자는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묵자의 사상이 지배층에게 반가운 사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묵자의 성이 본래 묵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묵(墨)'자에는 검다는 뜻이 있고, 또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그가 묵형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주장합니다. 묵형이란 죄인의 얼굴에 죄명을 먹으로 떠 넣는 형벌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조선 시대에도 도둑질을 하면 얼굴에 '도(盜)'자를 문신처럼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나라에서는 지배층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피지배층에만 형벌을 가했습니다. 그렇다면 묵자는 형벌로 다스려지는 하층민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노동자를 블루 칼라라고 부르듯이, 피부가 검다는 것은 그가 노동을 하는 계층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무튼 묵자는 피지배 계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묵자의 주장 속에 먹줄 같은 노동 도구들이 비유로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또한 그의 사상을 따른 그룹이 대부분 하층 무사 집단이나 기술자 집단이었던 점도 묵자의 출신 계층을 짐작하게 합니다. 공자가 전설적 제왕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높였습니다. 이 점도 묵자가 기술과 효용을 중시했음을 보여줍니다.
묵자도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곧 공자를 배격하고 새로운 주장을 세웠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묵자의 사상은 일관되게 피지배 계층을 옹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피지배 계층의 엄청난 호응을 받아 공자 이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맹자가 "세상에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가득 찼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당시 묵자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한비자, 순자, 장자 같은 책에서도 '유묵'이라고 하여 유가와 묵가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많은 도구들을 개발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3년 동안 공들여 만든 정교한 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 '하루 걸려 만든 수레보다 쓸모가 없구나'하고 개탄했습니다. 묵자는 그런 점에서 철저한 공리주의자였습니다. 묵자가 만든 도구 가운데는 전쟁 무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였습니다. 묵자가 만든 방어용 무기들은 약소국 제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송나라의 대부 벼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묵자의 사사을 볼 수 있는 책이 <묵자>입니다. <묵자>는 본래 71편이었다고 하는데 18편이 없어져서 오늘날에는 53편만 남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이 쓴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합니다. 대화체로 된 글도 있고 논문 형태의 글도 있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방어 위주의 병법이 11편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것과 6편이 논리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논리학적 내용이 담긴 6편을 묶어 '묵변'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묵자>에는 수준 높은 고대 과학 기술의 성과가 들어 있습니다. 도구 제작에 관련된 기하학, 빛의 굴절 등에 대한 광학적 분석 등도 보입니다.
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을 펼쳐 보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부국 강병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 이후 중앙 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묵자 사상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서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초점을 맞추어 활발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1. 생애와 시대배경
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적(翟)이다. 생존연대는 확실하지 못하나 대체로 기원전 479-381년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초기 周나라 때의 전통적인 제도 예악과 문물을 동경하여 논리적으로 이들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려고 힘썼던 반면, 묵자는 그 제도 등의 타당성과 효용성에 회의를 품고 이들을 좀 더 유용한 것으로 대치시키려고 하였다.
주대 봉건체제하에서 왕 제후 대부들은 각각 자기의 군사적 전문가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周末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이 군사전문가들은 각기 흩어져 사용자에게 봉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을 士, 또는 武士라고 했다. 묵자와 그 제자들도 무사출신이었다.
2. 興利
묵자의 중심사상은 天下의 이익을 일으키는데 있었다(興天下之利). 이익(利)이란 사회의 이익을 가리키므로 그 기원문제는 바로 '어떻게 사회생활을 개선할 것인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묵자 학설에서 제일 중요한 맥락은 功利主義였다. 공리주의의 관념으로부터 非樂 非功說이 나왔고, 권위주의적(?) 관념으로부터 天志 尙同說이 나왔다. 그러나 이 두 가닥의 주요 맥락은 모두 兼愛說 중에 모여지게 되었다.
3. 兼愛
묵자는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혼란의 근원을 살펴야 한다고 여겼다. 묵자는 원인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즉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아끼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섬기지 않고, 가족과 국가가 서로를 아끼지 않는 데에 혼란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묵자는 이의 해소를 위해 '兼相愛'說을 주장하였다. 겸애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묵자는 인간충돌의 근본원인을 서로 사랑하지 않음(不相愛)을 '서로 겸하여 사랑함'(兼相愛)으로 직접 전환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兼愛는 묵학의 대표개념으로 이해되어 진다.
겸애를 주장하는 것은 혼란을 평정하고 인정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애의 목적은 다분히 실용적이다. 그러므로 겸애의 주장은 반드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주장으로 제출된 것이었다. 겸애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묵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用而不可, 雖我亦將非之 <兼愛上>
사용해 보고 안되는 것이면 비록 나라도 역시 그것을 그르다고 여기겠다.
즉 사용해보고 안 된면 포기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를 거둘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런 실효적 관점에서 묵자의 공리주의적 사상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4. 天志
묵자는 혼란을 평정하기 위해 두가지 길을 택했는데 하나는 '겸애'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혼란의 평정'을 위해 天志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天志가 '겸애'를 요구하는 것이며 天志는 묵자가 승인하는 가치의 근원이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天之意不欲大國之攻小國也, 大家之亂小家也. <天志中>
하늘의 뜻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거나, 큰 집안이 작은 집을 혼란
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즉 혼란은 하늘이 원치않는 것이니 혼란을 평정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합치된다는 뜻이다. 또한 묵자는 治亂의 문제를 義와 합쳐서 말하였다.
天下有義則治, 無義則亂. <天志中>
천하가 의로우면 안정되고, 의롭지 못하면 혼란된다.
이와 같이 天志는 최고의 권위척도이며 가치규범이었다. 또 義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義에 합치되는 것을 天志에 합치되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묵자는 天과 天子를 연결시켜 말하였다.
天子有善, 天能賞之, 天子有過, 天能罰之. <天志上>
천자가 선하면 하늘은 상을 줄 수 있고, 천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하늘이 그를 벌할 수 있다.
5. 묵자의 정치사상
묵자는 위로 천지에 통하고, 아래로 만민의 권위에까지 미치는 계열을 건립하고자 하여 마침내 尙同說을 갖게 되었다. 이 尙同說에 대한 논의는 갈라져 있다. 이는 상동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이 尙同說을 가지고 묵자의 사상이 권위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묵자가 언로를 중시한 점을 들면서 묵자를 권위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묵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주1)
묵자에 있어 국가는 필요에 의해 출현했다. 이는 묵자가 홉스와 같이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古者民始生 未有刑政之時 天下之亂 若禽獸然生於無正長. 是故選擇 天下之賢可者立以爲天子 <尙同上>
옛날 법과 질서가 없었을 때는 통치자가 없었기 때문에 금수와 같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어진 자를 선출하여 천자로 삼았다.
즉 누구나가 자신의 利害를 가지고 있으므로 천하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현명한 자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고 정치권력을 건립하여 만민을 관리 단속케 했다는 것이다.
총괄컨대 혼란을 평정하고 안정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 사상을 통일하는 방법은, 즉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윗 사람과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尙同思想의 主旨이다.
또한 묵자는 통치자 선출에 있어 신분의 차별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군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선출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왕은 모든 제후, 경대부 등 정치지도자를 어진 자면 빈부귀천의 차별없이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 묵자의 문화관
묵자의 문화관은 非攻, 非儒, 非樂의 3非論이다. 하나씩 다뤄보면, 비공이란 것은 겸애와 연관되는 것으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의임을 설득함으로써 이뤄진다. 묵자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했고, 정벌이 소수의 국가에 유리할망정 천하에 해로우면 正道가 아니라고 말했다. 총괄적으로 묵자는 전쟁과 정벌은 의에 옳지 않고, 利에도 소득이 없어 천하의 커다란 해로움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군자는 천하를 위해 이익을 일으켜야 하므로 非攻은 묵자의 학설 중 가장 중요한 주장이다.
묵학은 유학을 大敵으로 여겼다. 묵학은 유학의 예문을 허위라고 비웃었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생산에 힘쓰지 않는다고 비꼬았다.(주2)또한 창의성보다는 옛것을 지키는 데만 치중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공자가 권모술수를 몰래 사용하여 다른 나라를 어지럽혔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비판은 유가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은 <非樂>편을 보면 잘 나타난다. 묵자는 천하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관직에 있는 자는 이런 쓸데없는 일(음악을 즐기는 것)을 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民有三患, 飢者不得食, 寒者不得衣, 勞者不得息, 三者民 之巨患也. 然卽當爲之撞巨鐘, 擊嗚鼓, 彈琴瑟, 吹笙芋, 而揚干, 民衣食之財將 安可得乎? <非樂上>
백성에겐 세가지 근심이 있다. 굶주림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추위에 떠는 자가 입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피로한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백성들의 커다란 근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큰 종을 두드리고 북을 치며, 거문고를 뜯고, 우와 생을 불면서,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을 추어야 한다면, 백성들의 입고 먹을 재물은 앞으로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묵자가 음악을 비난한 것은 음악이 일을 전폐하기에 충분하고 천하에 아무 이익이 없다고 깊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문화관은 순전히 공리주의 및 실용주의 입장을 대변함을 알 수 있다.
7. 儒家思想과의 비교
유가와 묵자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묵자가 말하는 兼愛와 유가가 말하는 交別은 차이가 난다. 묵자가 말하는 兼愛는 유가에서 논의되는 交別보다 훨씬 확장된 의미이다. 단순하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 친족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기초로한 공동체사회를 묵자는 주장하고 있다.즉 단순한 보살핌이 아니라 겸애가 행해지는 대동세계를 바랬다.
묵자는 유가와 다르게 鬼의 존재를 인정했다. 유가는 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중시하는 모순을 범한 반면, 묵가는 鬼와 神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낭비로 생각하고 부정했다. 즉 鬼에 대한 인정은 백성들이 겸애의 도를 실행하기 위해 여러가지 종교적 정치적인 제재를 도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묵자는 공맹을 비판하기를 "그대들은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울리는 종과 다를바 없다"고 했다. 즉 군자는 팔짱을 끼고 있는 종(鍾)과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스스로 울릴 수 있는 종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8. 결론
묵자가 말한 利의 개념은 귀족생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나타낸다. 귀족의 비생산적인 생활에 대해 묵자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그런 생활들이 사회의 낭비라고 생각한데 있지, 결코 反貴族의 관념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다. 묵자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는 바로 利를 증진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묵자는 節用을 주장한다. 즉 재화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한 과시소비(過示消費)를 버리고 節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시소비를 묵자는 노동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묵자는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모두가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 것 같다. 그런 인간의 공동체는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이 가능할 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조금씩 절용하는 정신 속에서 가능하다고 묵자는 보았다. 이런 묵자의 사고는 오늘날과 같은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이 된다.
墨子 - 약자를 지키는 방패
(1) 피지배층의 대변자
墨子는 성1)이 墨이고, 이름이 翟이다. 묵자는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다.
묵자의 사상은 힘있는 諸侯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출신성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富國强兵策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秦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이후 중앙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2) 강철 같은 조직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거자라 불렸는데 거자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구성원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었다. 집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고, 하급 무사나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집단적 결속을 통해 자신들 이 처한 예속적 지위를 벗어나려 했다. 그들은 금욕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켰으며 오로지 남을 위해 일해야 했으며 ,규율을 어겼을때는 조직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았다.
묵가 집단은 단순한 군인이나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조직의 동지들이었다.
(3)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집단을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은 兼愛와 交理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2).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묵자는 따져 보는 기준으로 세가지3)를 제시했는데 이 기준들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판정의 토대를 두고 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왔고,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즉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천자를 삼으면, 천자는 온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뜻은 하늘의 뜻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은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있었고 이로인해 集團主義 라는 비판을 받았다.
(4) 유가 비판
묵자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그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가의 葬禮意識에 대한 비판이다. 묵자는 유가의 장례의식을 産業不進과 人口減少 등의 이유로 비판하였다.
둘째, 유가의 惡을 비판하였다. 경제적 낭비와 시간적 낭비를 비판하였다.
셋째, 運命論을 비판하였다. 여러가지 중에서도 묵자는 특히 신분제를 반대하고 人才의 차별에 대해 비판하였다.
넷째, 묵자는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5) 反戰平和論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利己心에서 초래했다. 이기심은 본직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인 사랑 때문에 생긴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서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고, 방어를 위한 무기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6) 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다.
하지만 묵자 철학은 지배층의 소외와 통일의 기운으로 인해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마침내는 소멸되었다.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 없었다. 그것은 공격전쟁을 야기하고 공격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묵자 집단이 소멸된 내부적 요인인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요인은 혁명이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즉, 묵가 집단의 생명력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지는 데 있었다. 하지만 혼란이 종식되고 지 배 집단의 강화는 혼란의 종식으로 인해 혁명이론이 없어진 묵가 집단을 소멸의 길로 걷게 하였다.
[출처]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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