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교과과정에서 제정분리된 것으로 명시된 사회는 삼한(三韓) 사회입니다. 부여는 제정분리사회는 아니었지요. 흉년이 들면 왕을 내쫓거나 죽이기도 했다는 것은 왕권이 약했다(고대국가=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일단 중고교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것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중학생 내지 고교생이시라면, 고조선은 제정일치 사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여의 경우는 교과과정에서도 명확하게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없어서 약간 불확실한데, 이런 경우 시험 문제로 출제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삼한 사회가 제정분리였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으니, 이건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죠.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답변은 어디까지나 교과과정 내에 한정되는 답변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질문하신게 아니라면, 그 때 다른 답변을 드리지요.
아 그러셨군요. 학계의 통설은 교과서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고조선의 제정일치 -> 제정분리 -> 고대국가 왕권 하의 종교'라는 등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소도 관련 이야기는 삼한 사회의 특수한 한 형태일 뿐, 이것을 한국사의 일반적 도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농님께서는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의 구절을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이해하고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위거가 죽자 제가들은 적자가 없으므로 얼자인 마여를 왕으로 추대하였죠. 따라서 마여를 추대한 주축은 제가들이고 그 수장은 우가(牛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가의 조카인 위거(位居)는 중국과 통하였고 왕기가 고구려를 침략하기위하여 부여에 왔을 때 위나라에 양식을 제공합니다. 이 때 우가를 비롯한 제가들과 왕인 마여는 고구려 편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우가의 형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우가가 되지 못했음으로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왕기의 부여 방문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부 (우가)부자(父子)를 죽이고....) 즉 제가들의 수장을 제거한 것이죠. 이 때 등장하는 대목이 "부여의 옛 풍습에..."의 구절입니다. 결국 위거는 마여를 죽였는데, 마여를 제거할 (즉, 반란을 일으킨) 적절한 이유가 없으므로 옛 풍습을 들어 정당화하였고, 위나라는 위거와 내통하였으므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위거가 제시힌 이유를 마여 사망의 이유로 사서에 남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위 구절이 부여가 왕권이 약했다는 증거로 사용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吉·凶을 점친다."는 후한서의 대목을 제정일치라고 보아야하나요? 그 외에는 왕이 제사를 주관하는 대목이 없고, 왕을 뽑을 때도 (마여의 즉위 시) 제가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제정일치니 제정분리를 논해야할 필요가 없을것 같은데요....
첫댓글 교과과정에서 제정분리된 것으로 명시된 사회는 삼한(三韓) 사회입니다. 부여는 제정분리사회는 아니었지요. 흉년이 들면 왕을 내쫓거나 죽이기도 했다는 것은 왕권이 약했다(고대국가=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일단 중고교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것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교과과정외에서는 어떻게보고있는지 혹시아시나요?^^: 고조선과 부여가 제정일치라는문장에대해 틀렸다는문장이있어서 질문남겼거든요~ 고조선은 제정일치가맞는데 부여에대해선 좀 이해가안되어서요
관세음보살님이 중학생 내지 고교생이시라면, 고조선은 제정일치 사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여의 경우는 교과과정에서도 명확하게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없어서 약간 불확실한데, 이런 경우 시험 문제로 출제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삼한 사회가 제정분리였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으니, 이건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죠.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답변은 어디까지나 교과과정 내에 한정되는 답변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질문하신게 아니라면, 그 때 다른 답변을 드리지요.
물론 고등학생은아닙니다^^; 고교 과정을 물어본것은아니구요^^ 학계에서의 반응이 궁금해서 질문한것입니다^^; 삼한사회가 제정분리인것은 알고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학계의 통설은 교과서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고조선의 제정일치 -> 제정분리 -> 고대국가 왕권 하의 종교'라는 등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소도 관련 이야기는 삼한 사회의 특수한 한 형태일 뿐, 이것을 한국사의 일반적 도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역시 소도는 삼한사회의 특수성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답변감사합니다^^
역시 이부분은 뭐라고 딱 집어서 연결하기엔 아직 부족한점이 많은듯해보입니다..
신농님께서는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의 구절을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이해하고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위거가 죽자 제가들은 적자가 없으므로 얼자인 마여를 왕으로 추대하였죠. 따라서 마여를 추대한 주축은 제가들이고 그 수장은 우가(牛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가의 조카인 위거(位居)는 중국과 통하였고 왕기가 고구려를 침략하기위하여 부여에 왔을 때 위나라에 양식을 제공합니다. 이 때 우가를 비롯한 제가들과 왕인 마여는 고구려 편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우가의 형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우가가 되지 못했음으로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왕기의 부여 방문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부 (우가)부자(父子)를 죽이고....) 즉 제가들의 수장을 제거한 것이죠. 이 때 등장하는 대목이 "부여의 옛 풍습에..."의 구절입니다. 결국 위거는 마여를 죽였는데, 마여를 제거할 (즉, 반란을 일으킨) 적절한 이유가 없으므로 옛 풍습을 들어 정당화하였고, 위나라는 위거와 내통하였으므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위거가 제시힌 이유를 마여 사망의 이유로 사서에 남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위 구절이 부여가 왕권이 약했다는 증거로 사용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청골님 그럼 제정일치로보아야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님이 적으신글보니 왕권이강했다는것같은데.. 그럼 제정일치이로봐야하는건지요?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吉·凶을 점친다."는 후한서의 대목을 제정일치라고 보아야하나요? 그 외에는 왕이 제사를 주관하는 대목이 없고, 왕을 뽑을 때도 (마여의 즉위 시) 제가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제정일치니 제정분리를 논해야할 필요가 없을것 같은데요....
그럼그냥연맹왕국으로만 알고있으면되는거죠?제가 부여족엔 초보라서그렇습니다 ^^;
청골님/그래서 제가 '일단 중고교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것에 의하면...'이라는 문장을 덧붙인건데... 저도 학계의 저 통상적인 주장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일단 교과과정은 통설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답변을 드린 겁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부여가 제정일치사회인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입니다.
삼한사회에 대하여 위지동이전에서 전하는 제정분리는 정치적 미성숙의 단계로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으로 해석되어야 할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반적으로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단계가 진일보된 단계로 보여지나 동아시아에서 이런 등식이 반듯이 성립되는지는 의문시 됩니다.
답변감사합니다 부여에대해선 아직 연구가 더필요한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