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를 맡겨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
성향숙
쉼표를 생각하면 사무실에서 의자가 사라진다
갔다가 쓸쓸히 돌아나온다
그 후엔
푸른 하늘이 보이지 붉은 단풍이 살랑이지
구름처럼 슬픈데 표정 보고 웃는 꽃들
의자의 뒤집힘
온통 너를 보는 눈동자들만 있어
마라톤 도중에 뛰기를 포기한 것 같은
죽음의 밥상 앞에 앉은 것 같은
돌발적 반환점이라 해두자
연못가에 앉아 한숨 푹푹 쉬는 일
자갈을 굴리다 돌아가는 파도를 보는 일
꽃을 보며 헤어진 애인을 떠올리는 일도
모처럼의 휴식 같은
의자의 진실 따윈 생각하지 말자
넓은 유리창 때문에 카페에 가는 건 아니잖아
저마다 다른 이유를 말할 때
너의 쉼표를 생각해 봐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면
햇빛에 흔들리는 물의 심리를 읽을 수 있지
시간을 몰고 와 부서지는 파도의 외침도 헤아릴 수 있을 거야
애인이 떠난 이유도 문득 깨달음으로 오지
그 쉼표 맡겨봐
그다음에 오는 건 느낌표야
완두콩
세상을 알리기 위해 집구석을 뛰쳐나갈 필요는 없어
언니와 나는
한 이불 속에 누워
매일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나란히 누워
천정에 붙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별들이 꽃이 되는
꽃이 구름이 되는
그러다 지루해지면 구름에서 흩어지는 빗방울을 세었어
꿈을 꾸면
이불 속에 푸른 벌판이 펼쳐졌지
푸른 벌판이 하늘과 맞닿아 끝없이 달려 나갔어
십일월의 누런 벌판을 기억하는
태양은 다정한 눈빛으로 입을 맞췄어
어느 날
돌아앉은 아버지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어
벌판은 버석버석 마르고
태양의 자상한 눈빛도 차디차게 식었어
삐걱거리던 대문이 갑자기 확 열리고
우린 튕기듯 쫓겨났어
집구석을 뛰쳐나갈 계획 따윈 필요 없었어
공중에 자유가 날아다닐 리 없지만
우린 공중을 몇 바퀴 휘돌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어
그거 봐, 뭐랬니?
아버지 말씀은 부재일 때 깨닫는 거야
가출하지 않아도 쫓겨날 가엾은 누런 몸뚱이들
―성향숙 시집, 『 쉼표를 맡겨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 』(청색종이 / 2026)
성향숙
경기 화성 출생. 200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200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엄마, 엄마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쉼표를 맡겨 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닫힌 세계를 깨뜨리는 다정한 균열, 성향숙의 시적 정원
성향숙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쉼표를 맡겨 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삶과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한층 깊어진 형태로 집약된 결실이다. 가족과 유년의 기억, 여성의 삶, 사랑과 이별, 상실과 회복, 노년과 죽음, 그리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까지 폭넓은 주제들이 시인의 독창적인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버퍼링, 틱톡, 육각형 인간, 불쾌한 골짜기, 사건의 지평선 같은 동시대의 언어들은 성향숙 시인의 시 안에서 현대의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변모한다.
문학평론가 김지윤은 해설 「에피파니의 자리」에서 이번 시집을 “닫힌 세계에 균열을 내는 시”라고 규정하며, “현실이 얼마나 촘촘하게 닫혀 있는지, 탈출의 언어조차 그 폐쇄성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가능한 정밀하게 대면하며 자신의 언어로 닫힌 벽에 균열을 내는 것”이 성향숙 시인의 시가 택한 방식이라고 평한다.
실제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기제는 ‘닫힌 공간’에 대한 정교한 탐구이다. 「코이의 법칙」의 어항, 「얼음의 제국」의 사각의 고독, 「여름의 속도」의 유리 상자처럼 시집 곳곳에는 폐쇄된 공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공간의 답답함이나 고립 그 자체가 아니다. 시인은 그 비좁고 촘촘한 공간들을 절망의 상징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꿈꾸고 상상하고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미세한 움직임에 주목한다. 닫힌 세계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생의 깊이를 탐색하는 실험실이 되고, 견고한 벽은 결국 균열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는 창이 된다.
이러한 시선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준다.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삶을 지배하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항 속 물고기처럼 갇혀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성향숙 시인의 시는 체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라고 말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답답한가. 어떻게 하면 삶은 다시 움직일 수 있는가. 시인은 거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삶의 작은 균열과 사소한 빛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틈에서 다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특히 표제작 「쉼표를 맡겨 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는 이번 시집 전체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성향숙 시인은 멈춤과 지연의 시간을 실패나 낙오가 아닌 또 다른 생성의 시간으로 바라본다. 김지윤 평론가는 이를 두고 “쉼표에 머무는 시간들이 결국 하나의 의미로 전환되는 과정을 기록”한다고 분석한다.
시인이 말하는 쉼표는 상처가 숙성되는 시간이고, 감정이 의미로 변하는 시간이며, 삶이 다음 문장을 준비하는 숨 고르기의 시간이다. 연못을 오래 바라보는 일, 꽃을 보며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는 일, 파도를 응시하는 일처럼 아무런 생산성도 없어 보이는 행위들이 오히려 존재를 회복시키는 순간이 된다. 시인은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쉼표를 충분히 살아낸 사람에게만 도착하는 느낌표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특징은 풍부한 색채 감각이다. 특히 붉음의 이미지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서적 축을 형성한다. 「석류」의 붉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단풍, 「리스트 컷」의 피는 모두 살아 있다는 감각과 연결된다. 그것은 억압된 삶을 뚫고 터져 나오는 생명의 증거이며, 오랫동안 눌려 있던 감정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색채이다. 반면 검정은 고독과 은폐의 색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붉음을 발견한다. 상처와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소멸하지 않는 생의 의지를 포착하는 것이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깊고 따뜻하다. 「완두콩」, 「원피스」, 「침해」, 「섬집 아기」 등의 작품은 유년의 기억과 가족의 상처를 다루면서도 원망이나 비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성향숙 시인의 시는 아프지만 따뜻하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삶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가 어떻게 삶의 일부가 되어가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향숙 시인의 시는 절망을 희망으로 덮어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와 고독, 상실의 시간을 끝까지 응시하면서 그 안에서 피어나는 미세한 빛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닫힌 세계에 생긴 작은 틈새를 통해 스며드는 햇살처럼 다가온다. 이번 시집은 존재의 고통을 정직하게 기록하면서도, 그 고통이 끝내 삶의 긍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성숙한 시적 성취라 할 만하다.
고요하면서도 강렬하게 삶의 본질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언어는 닫힌 세계를 깨뜨리는 다정한 균열이며, 우리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하는 작은 빛이다. 『쉼표를 맡겨 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는 삶의 어두운 시간을 건너는 이들에게 쉼표 같은 숨결이 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