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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말 따로 글 따로 ‘성지聖旨’는 춤췄다
색다르게 본 여말선초 공식 외교 이면
대조선 외교는 명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에 해당하는 1368년부터 1449년까지, 명나라 초기 네 명의 황제들의 말과 글을 통해 조-명 외교의 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당시는 양국의 왕조가 교체되면서 철령위 설치, 만산군 처리, 만주 여진의 관할 등 굵직한 과제가 산적해 있던 시기다. 해서 후대에 비해 양국 간에 활발하게 사신이 오갔지만 그 이면엔 황제 개인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압력이 가해지곤 했다. 고려시대사와 전근대 국제관계사를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말과 글, 전달 통로에 따라 명 황제의 메시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주목해, 명 조정에 있어 외교는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였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낸다.
👨🏫 저자 소개
정동훈
2016년 서울대학교에서 〈고려시대 외교문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시대사,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공부하고 있다. 2018년부터 서울교육대학에서 예비 초등교사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를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 목차
책을 내면서
서장
1장 홍무제의 말은 어떻게 고려에 전달되었나
1. 홍무제의 말과 한중관계
2. 조서: 황제 명의의 최고 권위 문서
3. 수조: 황제가 손수 쓴 조서
4. 자문: 황제의 말을 인용한 관문서
5. 선유성지: 황제의 발언록
6. 구선: 구두 메시지
7. 황제의 말을 제도에 가둘 수 있을까?
2장 영락제의 말과 글은 어떻게 달랐을까
1. 영락제 재위 기간의 조선-명 관계
2. 건문·영락 연간 황제의 명령이 전달되는 경로
3. 글로 옮긴 영락제의 말
4. 글로 옮기지 않은 황제의 말
5. 황제의 명령에 응하는 조선의 태도
6. 조선-명 관계의 두 층위
3장 선덕제의 말을 명나라 기록은 어떻게 조작했을까
1. 성군? 아니면 암군?
2. 홍희제의 말과 글
3. 선덕제의 글: 칙서에 담긴 공적인 외교
4. 선덕제의 말: 구두 메시지에 담긴 사적 외교
5. 서울과 북경에 남아있는 정반대의 기록
6. 서울과 북경에서 바라본 선덕제의 두 얼굴
4장 정통제의 등극과 반전
1. 조선-명 관계는 언제 안정되었나?
2. 외교의 전면에 선 황제와 환관들
3. 외교 현장에서 황제의 퇴장
4. 대조선 외교는 황제의 개인 비즈니스
맺음말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 책 속으로
명나라 제3대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재위 1402~1424), 영락제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재위 1425~1435)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문서로 남기는 것을 꺼렸다. 자신의 명령이 썩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비난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p.18
『세종실록』에는 선덕제가 조선에 “사냥개와 매를 당장 잡아서 보내라”고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은 같은 문서를 두고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 일화는 선덕제의 근검한 품성, 오랑캐들까지 사랑하는 인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두고두고 기억되었다. 거짓말로 지은 집이다
--- p.22
황제 명의의 문서는 명령 대상과 내용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천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직군職群의 사람들, 때로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 대체로 전자를 조詔, 후자를 칙勅(?)이라 하였다
--- p.38
황제가 스스로 찬술한 조서도 여럿 있었다. 당시의 용어로는 이를 수조手詔라고 하였다
--- p.43
고려가 자신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공공연히 큰소리치고 있다. 가장 의례적이고 ‘외교적인’ 언설을 담는 외교문서 …… 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비정상적인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p.47
자문이란 명나라 2품 이상 고위 관부 사이에서 사용했던 평행문서인데, 외국의 군주와 주고받는 외교문서의 서식으로도 쓰였다
--- p.49
『고려사』에 여러 편 실려 있는, 일반적인 한문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백화체의 선유성지가 그것이다. 선유성지란 …… 황제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 적은 어록, 녹취록인데, 그것을 별도의 가공 없이 고려에 전달한 것이다
--- p.57
황제의 의사가 …… 구두 메시지로 전달되는 경로를 …… 사료에서는 이를 ‘구선口宣’이라고 표현하였다
--- p.66
그의 재위 기간 22년 동안 명 조정에서는 조선에 총 40번의 사신을 파견하여 연평균 1.8회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명 대 전체 연평균 0.6회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조선 태종 대 거의 전 시기와 세종 초년에 걸쳐 있는데, 그 기간에 조선에서 명에 파견한 사신도 연평균 7.6회에 이르러 전체 평균 4.6회보다 훨씬 빈번하였다
--- p.84
황엄黃儼이 총 11차례, 해수海壽와 한첩목아韓帖木兒가 각각 7차례, 기원奇原과 정승鄭昇이 각각 3차례 등 몇몇 환관들은 반복해서 조선을 찾으며 황제의 입 구실을 하였다. 이들 환관 사신들은 공식적인 의례의 장에서 황제 명의의 조서나 칙서를 전달하는 외에도, 연회 자리에서, 혹은 국왕을 따로 면담한 자리에서 황제의 내밀한 요구를 내놓았다
--- p.92
황엄이 구두로 성지를 선포하였다. “작년에 너희가 여기로 보낸 여자들은 뚱뚱한 건 뚱뚱하고, 피부가 안 좋은 건 안 좋고, 키가 작은 건 작아서 모두 별로 예쁘지 않다. 다만 너희 국왕이 공경하는 마음이 무거운 것을 보아 비妃로 봉할 것은 비로 봉하고, 미인으로 봉할 것은 미인으로 봉하고, 소용昭容으로 봉할 것은 소용으로 봉하여 모두 봉하였다. 왕은 지금 찾아놓은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이라도 다시 보내라.”
--- p.108
황제는 그런 처녀를 더 데려오라면서 또다시 황엄을 서울로 보냈다. …… 이때 명측에서, 조선에서 공식적인 명목으로 내세운 약재 구입 요청에 대해서는 역시 예부 명의의 자문을 통해 답변을 내리고, 실제 이유였던 공녀 건에 대해서는 사신 황엄의 입을 통해 또다시 보내라는 뜻을 전하였다. …… “조관들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p.111
구두로 전달된 성지 가운데는 황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품, 혹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성을 보내라는 요구였고, 이외에도 화자를 보내오라거나, 불경을 필사할 종이, 부처님 사리 등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 황제의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에 환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심부름꾼이었다
--- p.112
환관 사신들은 …… 명 궁정에 보낼 처녀를 선발하는 데 관여하며 국왕이 직접 심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길 요구하기도 했고, 동불상이나 부처의 사리를 걷어가기 위해 전국을 헤집고 다니기도 하였다. 심지어 황엄은 불상을 가지고 와서는 국왕에게 절하기를 요구하여 태종을 진노하게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조선 조정에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 그것을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사적으로 매매하여 이문을 남기려고도 했다
--- p.113
황제가 원민생에게 말하였다. “……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이나 곤쟁이젓, 문어 같은 것을 좀 가지고 와라. ……” 내관 해수가 황제 곁에 서 있다가 원민생에게 말하였다. “처녀 두 명을 바치라.” 황제가 기뻐하면서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울러 스무 살 이상 서른 살 이하로 음식 잘하고 술 잘 빚는 시비 대여섯도 뽑아서 보내라.”
--- p.126
세종은 “지금 칙서의 말이 고아를 놀리는 것 같다.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었는가!”라며 분개하기도 하고, 이례적으로 선덕제를 가리켜 ‘멍청한 임금[不明之君]’이라고 욕하는가 하면, 당시 명의 정치 상황을 두고 환관들이 득세하고 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 p.138
선덕제가 보낸 칙서 가운데에는 국가적 사안에 관한 내용도 많이 담겨 있었다. 말이나 소를 무역할 것을 제의한다든지, 여진에 잡혀갔다 도망쳐 온 중국인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등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 조선과 여진 양쪽이 모두 명나라에 호소하며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선덕제는 양쪽 모두에게 화해할 것을 권유하는 점잖은 내용의 문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 p.147
선덕제는 거침이 없었다. ……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여자를 뽑아서 보내달라고도 했는데, 심지어는 그녀들에게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히게 하라는, 아주 자질구레한 요청을 담기도 했다
--- p.148
선덕 원년(1426, 세종 8) 3월에 서울에 온 사신 윤봉은 …… 칙서 전달을 마친 직후 새 황제의 첫 번째 성지를 전하였다. “너는 조선국에 가서 왕에게 말해 나이 어린 여자를 뽑아다가 내년 봄에 데리고 오라고 하라”, “밥을 잘 짓는 여종을 가려 뽑아서 진헌하라”는 것이었다. …… 상복도 벗기 전에 새 황제가 조선의 공녀를 탐하다니, 명 조정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할 법도 했으나 그럴 걱정은 없었다. 황제의 명령은 밖으로 새나갈 일 없는 ‘밀지密旨’였다
--- p.151
이때 사신 창성이 제시한 요구 목록에는 어린 화자 8명, 가무를 할 줄 아는 여자아이 5명, 디저트를 만들 줄 아는 성인 여자 20명 외에도 소주, 잣술[松子酒], 석등잔, 큰 개 50마리, 각종 매에다 여러 종류의 해물과 젓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p.152
변계량이 …… 내관들이 구두로 전한 말에 따라 매와 개, 처녀 등을 바칠 때에도 문서상에는 모두 성지에 따른 것이라고 적시한다면 이러한 요구를 공공연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 p.158
영락~선덕 연간을 종합하면 중앙정부에서 서울에 파견된 사신 49회 가운데 46회, 94퍼센트의 사신단에 환관이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 p.187
세종은 그해 10월, 당시 서울에 와있던 사신 윤봉에게 …… 당시 명 조정에서 한창 추진 중이던 소 무역을 중단시켜 달라는 조선의 청원을 윤봉의 입을 빌려 황제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세종이 “무엇으로써 그를 달래야겠는가?”라고 물은 데 대해 황희가 답한 대로, 윤봉에게 은밀히 마포 70필을 건넸다. 윤봉은 자신이 돌아가서 조선에 소가 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해보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 p.190
정통제는 즉위 조서와 함께 내린 칙서에서 과거 부황이 사람과 물건을 요구했던 것을 일체 중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그다음 달에는 과거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9명, 창가비唱歌婢 7명, 집찬비執饌婢 37명 등을 모두 돌려보냈다
--- p.204
🖋 출판사 서평
눈 가리고 아웅, 명 황제의 두 얼굴
황제의 말은 글과 달랐다. 조서, 칙서, 선유성지 등 황제 메시지의 형식을 설명하면서 홍무제가 직접 쓴 수조手詔에는 고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정벌에 나서겠다고 거친 협박을 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반면 뒤를 이은 영락제나 선덕제는 환관들을 통해 사냥개, 매 등은 물론 “전에 보낸 공녀들이 별로 예쁘지 않으니 새로 뽑아 보내라”든가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을 보내라”, 심지어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힌 여자를 보내라” 등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메시지를 슬며시 건네기도 했다. 문서에 남기고 싶지 않거나 외정의 원로들은 물론 내정의 어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요구사항들을 말로 전달한 것이다.
약한 자의 설움, 조선의 속앓이
황제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태종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서도 명에 보낼 미녀 선발 심사에 임해야 했고, 세종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심사장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에 세종은 선덕제를 “멍청한 임금”이라 비난하는가 하면 환관들의 구두 요구에 응하되 이를 문서화해 보고하려는 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내밀한 외교 이면은 전말을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에 파악할 수 있거니와 지은이는 선덕제가 “사냥개와 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명측 기록을 두고 “당장 잡아서 보내라”는 조선 측 기록을 바탕으로, 선덕제를 성군聖君으로 묘사한 중국 역사책의 평가는 거짓말로 지은 집이라 비판한다.
눈뜨고 못 볼 환관 사신들의 호가호위
황제들의 은밀한 요구를 전달하는 통로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었다. 황제들과 가까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기도 했고, 보안 유지에 편했으며 조선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영락~선덕 연간에 조선에 온 사신단의 90% 이상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유교적 체면이나 염치와 거리가 있었던 이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뇌물을 요구하고, 이를 쌓아둘 창고를 지어달라 청하고, 친척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후안무치에 치를 떨면서도 세자가 명 황제를 찾아 인사하는 조현 준비나 부담스러운 소 무역 경감에 활용하는 등 조-명 외교관계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이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황제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요동치던 조-명 관계는 1435년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 7살의 정통제가 즉위 후 조선에서 보냈던 여종 등 50여 명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안정기에 접어든다. 환관 대신 조관이, 말 대신 글이 외교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은 그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며 황제들의 속내와 이를 감추려 했던 명나라 지식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황제의 글과 함께 야비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말을 그대로 적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 그리고 눈 밝은 한 연구자의 노고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