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의 절망선에 관한 철학적 배경에 관하여...
바보새
저도 쉐퍼의 책을 읽었는데, 아주 오래 전이라 쉐퍼가 어떤 뜻으로 절망선이라는 표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의 짧고 미천한 지식을 동원해보면,
서구의 근대는 인식론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인식론에서 출발하는 것과도 같은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인식론에 있어서 <신인식>은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식은 당연한 형이상학적 가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가 밝아오면서 과학의 혁혁한 발전은 기존의 <신중심적 지식 체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대표적 사건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입니다. 이는 나중에 갈릴레오에 의해 종교재판까지 나아가게 되고 결국 교회(로만 처치를 포함해서)는 그 권위를 상당부분 실추하게 됩니다.
이런 인식론 혹은 지식론의 세계사적 변화는 철학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영국의 경험론이나 대륙의 합리론은 모두 인식론 곧 지식론의 거대한 체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시는데로 합리론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신부였습니다. 미적분학을 개발한 것으로도 알려져있지요 발표는 데카르트가 먼저 했지만, 현대적 의미의 미적분학에 대해 보다 완전한 형태는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이었습니다. 케플러의 우주론과 뉴톤의 발견등은 르네상스적 세계관의 변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는대로 데카르트는 cogito ego sum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지식 체계의 근간이 아니라 인간의 회의가 지식체계의 근간이 된 것이지요.
조나단 에즈워즈에게 있어서 로크의 영향이 매우 심대했다는 사실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에즈워즈가 상당히 결정론적 예정론을 가지게 된 배경도 영국의 경험주의자 로크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대륙의 합리론이 도저히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자기 존재로부터의 출발이라면 영국의 경험론은 인간의 지식의 출발점을 경험이라고 보았습니다. tabula Rasa라고 해서 인간의 마음을 백지 상태로 가정하고 거기에 경험에 의해서 지식이 쌓인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에 오면 특별한 성찰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성찰은 칸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합리론과 경험론을 수렴하는 독일관념론을 배태시키게 됩니다. 흄의 <인간오성론>에 의하면, 불이 나는 사건을 fact1일라고 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fact2라고 할 때, 사람들은 fact2, 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거기에 fact1, 즉,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경험에 의해서 우리에게 생기는 지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흄의 성찰에 의하면, fact1과 fact2는 경험되지만 불과 연기의 인과관계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인과율은 인간의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마음의 산물이라고 본 것이지요.
이 흄의 놀라운 성찰은 칸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어떻게 물자체(Ding An Sich)로부터 인간의 지식이 가능한가를 묻는데 선천적(a priori)인 것과 후천적인 것(a posteriori) 사이에 경험이전에 존재하면서 경험을 가능케하는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비로서 인식되는 선험적인 것(Tra- nszendentale) 것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오성의 여러 범주들을 말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이런 구분은 사실 스콜라 철학자들이 이미 다 해둔 구분이며 스콜라 정통주의 개혁신학자들이 이미 섭렵한 테크니컬 텀입니다. 아무튼 그리고 이는 흄의 경험 이전에 인간 오성의 영역으로 부터 비롯된 인과율에 대한 지식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칸트를 우리가 이해하려 할 때, 기본적으로 근대 인식론이 가진 기본적 구조 즉, 세상(신과 물질)은 인간의 마음에 어떻게 알려지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물자체 즉, 신을 제외한 물질 세계는 바로 인간 오성의 범주에 의해서 인간의 오성과 이성에 알려진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칸트 철학의 기본적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테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에서 진리의 기초를 정초해서 신존재증명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외연을 확장했던 것과는 달리 칸트는 인간의 순수이성을 비판해 볼 때, 인간의 이성의 범주에 신 존재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흔히 칸트의 견해를 불가지론이라고 합니다. 다만 인간의 여러 윤리적 요소를 볼 때,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해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신을 윤리적으로 요청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에 비해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 자체를 형이상학적 가정이라고 보고 이는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칸트의 철학 구조에서 물자체라는 개념은 흄의 인간오성에 관한 성찰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 속에 지식을 성립하는 것은 오성임으로 물자체를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는 내용이 없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를 분쇄하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습니다. 즉, 헤겔에게 있어서 객관이란 <물 자체 = 인간이 인식한 지식>이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의 정신현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칸트식의 형이상학적 가정 즉, 물자체로서 자연과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으로서 신존재를 다 분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 현상이 표상하는 바 인식이 바로 인간 지식과 세계의 실체라 규정합니다. 그래서 이를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라이브한 설명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즉자와 대자가 서로 상호교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자는 의식의 주체를 가리키고 대자는 의식의 대상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정신 현상들이 서로 교섭하다가 하나의 즉자가 생기게 되고 그 즉자는 다시 대자를, 이런 과정을 반복을 통해서 시대정신(Zeit Geist)이 출현한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이 인식 가능한 지식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 현상으로서 세계라 규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헤겔 자신은 자신의 철학이 그리스도교 교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학파를 헤겔 우파라 하고 헤겔 철학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구현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학파라 하고 이를 노년 헤겔파라 합니다. 이에 비해 헤겔 좌파는 즉자 대자 투쟁에서 보듯이 맑스적 계급투쟁의 사상적 단초가 헤겔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급진적 헤겔파라고도 하고 청년 헤겔파라고도 부릅니다.
쉐퍼가 왜 절망점이라 불렀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헤겔에 와서는 자연으로서 물질 세계와 초자연으로서 신존재는 인간 의식의 대상으로서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이를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만 보고 이를 증명할 인간 이성 내에 단초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식 주체로서 인간에게 인식되는 의식대상으로서 세계를 지식의 기초로 삼습니다. 이는 바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대륙이 이런 학풍이었다면 영미는 언어분석철학이 발달합니다.(대표적인 학자가 비트겐슈타인인데 오스트리아 사람이니 영미라 하기도 어렵군요, 그렇지만 일반적 추세는 그러합니다.) 이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인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인데요. 처음에 언어분석철학자들은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 대응을 이룰 것이라 보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이론인 그림이론이 바로 이런 사상입니다(지금 라이브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전문적으로는 그렇게 보긴 어렵습니다). 마치 언어란 세상을 사진기로 찍어서 담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끝났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돌아와서 책을 하나 쓰고 전기 이론을 다 뒤집습니다. 언어는 그림이 아니라 '사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참된 의미는 사용법에 달렸다는 것이지요. 케빈 벤후져의 해석학은 이런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언어와 세계의 일대일 대응이란 객관의 개념이 상호주관성의 개념으로 대치되는 시점입니다. 언어는 결코 사적일 수 없고 언어는 공적이며 그것은 사용법이기 때문에 개관은 상호가 서로 인정하는 주관성이란 개념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바로 포스트 모던의 사상적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엄밀한 철학적 논의와 논리 전개는 다 스킵하고 간략히만 다루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라며....
첫댓글 역시 바보새 목사님 ~
저야 뭐 무식해서 이 내용을 다 이해할수 없지만,,,, ㅋ,,,
1, 문예부흥 ( 르네상스 ) 이후 이성으로 초월을 이해하려했다, = 박영선 목사 강의에서 들은 기억이 남 )
2, 이성과 과학의 발달로 초월을 과학현상 으로 설명함,
3, 종교를 ( 초월을 ) 개인의 사적 영역 으로 ( 개인의 신념으로 ) 취급함,
4, 이러한 사상이 종교 ( 기독교 ) 를 여러 가치 중의 하나로 ( 다원주의 ) 전락시킴,,,
이러한 저의 이해가 문제 있습니까 ?
헤겔의 절망선에 관한 아랫글의 설명에서 쉐퍼가 '절망선'이라고 불렀던 것은
헤겔 이전의 철학에서는 '정립'과 '반정립'만 존재 했는데(그래서 진리와 거짓의 분명한 구별의 있었는데), 헤겔의 변증법 이후 '지양'의 단계에서 제3의 방법이 도출되는 바람에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문이 열렸다는 데서 절망선이라고 부르는 듯 합니다.
이런 좋은 토론이 이미 지나가 버렸네요.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는 '통일된 진리관'이 상실되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