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3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작은 서울이었던 나주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 이어도의 한라산이 보인다는 금성산을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서울의 삼각산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금성산을 등에 지고 남쪽은 영산강에 맞닿은” 나주읍의 지세가 한양과 닮았다고 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주를 일컬어 작은 서울이라는 뜻의 소경(小京)이라 부른다고 말하였다.
나주관아나주 고을 관아는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거점으로 부르게 된 지명이다.
자료에 따르면, 1011년 이전부터 이 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거란이 쳐들어왔을 적에는 이 산성으로 고려의 현종이 피난을 와서 머물렀다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사묘」조에는 금성산신을 모신 이 산의 다섯 개 사당에서 봄가을로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옛 사당이 빈 산 속에 있는데
봄바람에 초목 향기 아름답도다.
안개구름은 웅장한 기운을 보태고
우레와 비는 위엄을 돕는다.
장구와 북은 1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돼지 다리는 그해의 풍년 들기를 비는도다.
늙은이들은 취해서 부축을 받아 돌아가는데
흰 술이 제상에 흥건하도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본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은전라도 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하나의 믿음과 복을 비는 풍습을 위와 같이 읊었다. 농민군이 나주성을 공격해오기 전 민종렬을 중심으로 한 수성군은 금성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고 한다.
금성산 아래 율정점(栗亭店)은 다산 정약용의 발길이 스쳐간 곳이다. 그는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형 손암 정약전과 함께 유배 길에 올랐다. 11월 21일 나주율정점 삼거리에 도착하여 11월 22일 차가운 아침에 율정 삼거리 주막에서 손암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헤어지며 두 형제는 피눈물을 흘렸다. 이 헤어짐이 두 형제에게는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고, 그때 다산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띠로 이은 가게 집 새벽 등잔불의 푸르스름함이 꺼지려 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기만 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할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만 터지는구나······.
처음 약전은 흑산도로 들어갈 때 본 섬의 입구인 우이도에서 살다가 본 섬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뒤 1814년에 다산의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찾아오리라 믿고 다시 우이도로 나가 3년을 살았지만 끝끝내 오지 않는 동생을 그리다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말도 있다. 한편 약전은 강진으로 간 다산과 달리 학문에 몰두하지 못하고 섬 주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보냈던 모양이다.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며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고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 주기를 원하였다.
정약용이 정약전의 묘지명인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 쓴 글이다. 그러나 정약전도 나름대로 학문에 정진해서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몇 편의 글을 남겼는데, 그중의 하나가 조선시대의 소나무 정책에 대해 쓴 『송정사의(松政私議)』다.
대체로 나라 전체로 보면 전 국토를 10으로 볼 때 산지가 6~7이다. 산은 또 모두 소나무가 자라기에 알맞다. 그럼에도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재목 구하기가 어렵다. 위로는 기둥 열 개짜리 집과 배 몇 척 만들 때도 관리가 변괴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서 천여 리, 가깝게는 수백 리가 넘는 거리를 강물에 띄우고 육지에서 끌어와야만 비로소 일을 마칠 수 있다. 아래로는 관재(棺材) 하나 값이 400~500냥이다. 이것은 그래도 큰 도회지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고, 궁벽한 산골은 부자가 상을 당해도 시신을 넣는 데 열흘이 걸리기도 하고 평민은 태반이 초장(草葬)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본 기억으로는 20년 전에 비해 나무 값이 서너 배 올랐다. 20년을 지나면 반드시 오늘날의 서너 배로 오를 것이다. ······
만약 위급한 전쟁이 발생한다면 수백 척 전함을 만들 목재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그 뿐만 아니다. 수백 년 태평시대가 이어져 백성이 평안히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서는 번듯한 집이 없고, 죽어서는 몸을 누일 관재가 없다······.
10에 6~7을 차지하는 산이 있고, 산은 또 소나무가 자라기에 알맞은데, 소나무의 귀함이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찍이 그 이유를 조용히 따져보고서 대략 그 세 가지 요인을 요인을 찾아냈다. 단, 위에서 말한 가옥과 배, 수레나 관재에 쓸 재목은 여기에 포함하지 않았다.
첫째는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저절로 자라는 나무를 꺾어 땔나무로 쓰는 것이요, 셋째는 화전민이 불태우는 일이다. 이 세 가지 환난을 제거한다면, 도끼를 들고 날마다 숲에 들어가 나무를 한다 해도 재목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을 지경일 것이다.
정약전이 생각한 송금(松禁) 정책에 대한 대안은 벌채를 금지하지 말고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자는 것으로, 오늘날의 식목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마다 소나무를 기를 수 있다면 준엄한 법과 무거운 형벌이 기다리는 소나무를 무엇 때문에 힘들여 훔치려고 들겠는가. 개인 소유의 산으로 묵혀두어 황폐하게 된 것은 나무를 길러 스스로 사용하게 하고, 봉산(封山)으로 나무 심기를 그만두어 버려진 것은 나무를 길러서 스스로 사용하게 허락한다. 그리고 몇십 길의 산으로 나무가 없는 경우는 그 주인에게 죄를 가한다. 그와 다르게 천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서 초가집의 기둥과 들보감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른 자에게는 품계를 주고 포상을 한다. ······
무릇 주인 없는 산을 찾아서 한 마을에서 힘을 합쳐 가지고 1년이나 2년 동안 소나무를 길러 울창하게 숲을 이루어놓았으면 나무의 크기에 따라 그 마을에 대해 1년이나 2년 동안 세금을 감면해준다. ······ 이런 정책을 시행한 지 수십 년이 지나면 온 나라 산은 숲을 이루게 될 것이며, 공산의 나무를 백성이 범하는 일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나무 정책에 대해서 논한 그는 1816년 6월 6일 흑산도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1807년 강진에 있던 다산은 형 약전이 흑산도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간 꽃잎 같다오.
한편 나주의 남평은 조선 중기에 동인의 영수였으나 기축옥사로 멸문지화를 입은 동암(東巖) 이발과 고려 무인정권 시대에 중서문하 판병부사를 지낸 문극겸의 고향이다. 이발의 시 속에서 “고장의 풍속은 순박하다”라고 한 남평은 하나의 면이 되고 말았다.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는 나주 반남 고분군이 있는데, 그 고분군의 주인공을 마한의 부족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漢朝)’에 “마한은(삼한 중의 하나)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에 접해 있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왜는 현재의 나주 일대에 근거해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에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섰던 강력한 정치 집단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5세기쯤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주 반남 고분군은 한반도 내에서는 그와 같은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 일본의 천황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들과 흡사하다.
복암리 고분군이 있는 나주시 회진면으로 유배되어 왔던 정도전의 『소재동기(消災洞記)』를 보면 이 지역이 잘 소개되어 있다.
도전이 소재동 황연의 집에 세 들어 있었다. 그 동리는 곧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居平)의 땅인데, 소재라는 절이 있어 동리 이름도 소재동이라 한다. 동리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인데, 동북쪽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와 고개가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 남쪽에는 들판이 펀펀한데 숲 속으로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 초가집 10여 호가 있으니 바로 회진현이다. 산수가 유명한데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여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나주의 진산이다. 또 월출산은 맑고 빼어나 우뚝하여 동북쪽을 막아섰는데 영암군과의 경계다. 금강(錦江, 영산강)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소재동은 바다까지 수십 리나 된다. 산의 남기(嵐氣)와 바다의 장기(瘴氣)는 사람의 살에 닿으면 병이 무시로 발생한다. 아침저녁 어둠과 밝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는 것이 또한 구경할 만하다. 마을 안에 다른 초목은 없고 오직 누런 띠와 긴 대(竹)가 소나무나 녹나무에 섞여 있다.
민가에서 문과 울타리는 가끔 대로 나무를 대용하니, 그 소쇄(蕭洒)하고 청한(淸寒)한 것은 멀리 온 사람으로도 또한 즐겨 안거(安居)할 만하다. ······ 나는 겨울에 갖옷 한 벌, 여름에 갈옷 한 벌로써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기거동작에 구속되지 않았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그리하여 두세 학자들과 강론하다가는 개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는데, 피곤하면 휴식하고 흥이 나면 걷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리저리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느라고 돌아갈 줄 몰랐다. 어떤 때는 농사꾼이나 시골 늙은이를 만나 싸리 포기를 깔고 앉아서 서로 위로하기를 오랜 친구처럼 하였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영산강이 그 무렵엔 금강이라고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
영산강영산강은 나주와 영산포에서 제법 큰 강이 되어 서쪽으로 무안, 목포로 흘러간다. 이 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든다.
영산강은 이곳 나주와 영산포에서 제법 큰 강이 되어 서쪽으로 무안, 목포로 흘러간다. 이 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장성군, 광주직할시, 나주, 함평, 무안, 영암군 등지를 흘러 서해로 흘러드는데 길이 138킬로미터, 유역 면적 2,798제곱킬로미터다.
목은 이색이 “금성에 춘색이 일러서 강 언덕에 매화가 지려 하는도다”라고 노래하였고, “바다에 가깝고 산으로 둘러싸인 옛 금주(錦州), 앞마을 곳곳에 어주(魚舟, 자그마한 낚싯배)를 내놓았구나. 한때는 장사꾼이 오월(吳越, 중국) 지방과 통했었거니, 사람들은 물고기와 새우를 얻어 주루(酒樓)로 들어가도다”라고 윤진이 노래한 나주에 영산강이 흐른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도참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민간에 돌아다니는 유일한 비기(秘記)로 풍수(風水)와 도참을 결부시켜 새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鄭鑑錄)』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과거에는 『정감록』에 현혹되어 10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백양사와 백암산 일대는 난리도 피해간다는 명당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