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 끝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幸福한 삶🎋🎎🎋梁南石印🎋🙏
흙먼지 가득한 신작로 가장자리.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이름 모를 잡초 하나가 살겠다고 고개를 내밀었다.
햇볕이 따갑다고 투정할 수도 없었으며
비가 오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농부가 말수레에 버겁게 짐을 얹고
지나가는 말발굽에 밟혀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살아내야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 잡초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른다.
내 삶은 그리 만만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다.
육신도 영혼도 생채기로 덧칠된 채
어둡고 습한 터널을 지나왔다.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주저앉으란 유혹과 실갱이할 때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는 양심만큼은 끝내 붙잡았다.
잘 살아왔노라고 말해도 내 분신조차 갸우뚱해도
양심에 흠집 없이 살아냈노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숱한 유혹의 손길 붙잡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옳은 방향을 찾으려고 애쓰며 걸어왔노라고.
청춘 시절에는 국화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봄부터 목 놓아 우는 소쩍새의 울음도
내 삶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쩍, 소쩍.
두견새도 두견, 두견.
딱따구리는 나무 몸통을 쪼아대며 박수를 치고
고목 아래 고인 물웅덩이에 유영하던 올챙이는
성채가 되기를 거부한 채 꼬리를 흔든다.
변태(變態) 거듭한 끝에 엄마 개구리가
올챙이를 향해 애타게 개굴개굴 목이 터지도록 성화이다.
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마치 내 귀에는 옳다, 옳다로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게 세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 도화꽃 흐드러지게 핀 무릉도원을 지나기도 했으나
이내 빛 한 점 스미지 않는 긴 암흑의 터널도 지나야 했다.
파란만장한 질곡의 삶.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견디며 살 만큼 살아냈으니
이제는 별다른 여한은 가지지 않겠다.
언젠가 육신이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갈 몸뚱이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자연을 갉아먹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자연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
생이 다하고 고요히 잠들고 나면
그간 욕심으로 뭉뚱그려진 이 몸뚱이를
이름 모를 균류와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다시 자연의 무엇인가의 생을 이어주는
에너지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자연에 진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일 게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부터 다시 떠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니까.
같은 점 하나를 놓고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전혀 낯설거나 다른 모습으로 보이거나 읽힌다.
좋은 점을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고
나쁜 점만 찾는 사람에게는 웬일인지 나쁜 것만 눈에 밟힌다.
세상이 달라서가 아니다.
팩트가 달라서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는가에 따라
사전적 진실의 의미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필요한가 보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단정하는 순간
나는 편견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시공을 초월해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접해야만
그곳에서 빌려온 지식도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숙성되어
나만의 지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다양성을 말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다름을 틀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말을 만들어 보았다.
자기모순.
자 :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다가 큰 성과를 얻으면
기 : 기뻐하면서 다 일관성있게 행한 자신의 공으로
모 :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다가 반대의 상황 경우엔
.......이번에는 이전과 다른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순 : 순박한 사람들을 꼬득여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며
.......自己矛盾(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의 말은 일관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기회에 따라 말을 바꾸고 이번 경우는 다르다고 한다.
모두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불리해지면 기준을 바꾼다.
그 모습을 보면 순박한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말도 그렇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것이다.
말 : 말을 많이 뱉어내면
의 : 의도와 달리 뱉은 말에
함 : 함몰되어 몰입되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정 : 정을 맞을 수 있다는 점 유념해야 한다.
터진 입이라고 할 말을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뱉어내면 결국 자신이 건너온 다리마저 불태우는
배수진을 치는 결과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된다.
말은 한 번 뱉어내면 일수불퇴다.
바둑판에 돌을 놓고 다시 물릴 수 없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온 말도 즉시든 훗날이든 주워 담을 수 없다.
한 개인은 말은 야사. 또는 야담으로 떠돌고
공인의 말은 부정확해도 파문을 일으킨다.
개인이 남긴 글은
그 사람만의 인생철학이 담긴
오직 그 사람만의 역사일 뿐이나.
공인의 글은 두고두고 역사에 남아 회자한다.
말과 글에는 그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내었는지
그의 철학이 담긴 것으로 무엇을 먼저 바라보았고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품고 살아왔으며 행동했는지
은연중 또는 직설적으로 들어낸 그의 삶을 주절인 것이다.
과녁을 조준하지 않고 당긴 화살은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말 한마디에 관계는 끊어지고
사람 사이에서 하나둘 밀려나다 보면
어느 순간 고독이라는 놈이 찾아온다.
암 덩어리와 비교해도 결코 덜하지 않은
고독이라는 놈이 어느 날 문을 두드리며 묻는다.
“나하고 친구 할래?”
그제야 곁에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초라해지고 힘들어졌을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곁에 남아주는 사람.
내가 힘들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는가이다.
뒤늦게라도 사람의 숫자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 내 곁에 머물기를 바랬던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고 싶은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되짚어 봐야 한다.
내가 타인을 향해 원하는 사람을 찾기보다는
척을 지지 않는 사람의 모습으로 먼저 살아보자.
누군가에게 짐이 되기보다 쉼이 되어주자.
내가 외롭다고 그 외로움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자.
내가 상처받았다고
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지도 말자.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내가 좋은 마음을 먹었다고 쉽사리 잠들게 하지도 않는다.
어느 날 밤,
잠을 청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잠에게 따져 묻는다.
불면의 밤.
불 : 불청객, 반가울 리 없는 네가 감히.
면 : 면상을 치켜들고 찾아와 머물 줄을.
의 : 의심조차 할 수 없게 당연한 듯 찾아오고.
밤 : 밤이 깊어져 잠을 청했건만 눈만 똥말똥말.
.......갖가지 상념에 옭아매어져 뒤척이다 밤을 새우는 것이다.
네 이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네가 내 잠을 어디로 빼돌린 것이냐,
설마 짝사랑에 잠못 이룬다는
이웃집 처자에게 네가 흑심 있어
내 잠을 훔쳐다 가져다주었느냐.
그것은 불면의 밤이었다.
평생 일에 파묻혀 살았다.
남들이 코 잘 때도 일했고 남들이 쉴 때도 일했다.
그러니 잠이 조금 늦게 찾아오는 것쯤은
몸이 기억하고 있어 참아낼 수 있다.
다만 이제는 조금만 일찍 와주었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눈을 뜨고 싶어도 뜨지 못하고
원 없이 잠만 자야 할 날이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눈을 감으면
나무토막처럼 깊이 잠들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뭔 말인지 잠도 알겠지.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었으니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을 돌아보며 살아간다.
남편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한 가정의 권좌에 눌러앉아
권한을 휘두르는 지휘관도 점령군도 아니다.
가족의 평안을 위해 이견을 조율하고
힘든 일에는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넘어지는 가족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심점이자 선장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또 말을 만들어 본다.
자승자박 자남자처.
자 :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를
남 :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자 : 자신을 믿고 기대어 사는
처 : 처를 어떻게 대했는지 먼저 떠올려 보라.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를 남 탓하기 전,
남편을 믿고 묵묵히 살고 있는 처를
어떻게 대했는지부터 떠올려봐야 한다.
타고난 본성도 있다.
성장환경도 있다.
상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씨앗을 품고 태어났는지는 내가 정할 수 없다.
다만 그 씨앗이 자라난 뒤 어떤 열매를 맺게 할지는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화가 치밀 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행동이 눈에 거슬릴 때, 도둑처럼 찾아온다.
그러니 바꾸고자 한다면 절박해야 한다.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품은 전서구 한 마리가
산 넘고 물 건너 날아가기 소식 전해올 순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사람처럼 절박해야 한다.
그만큼 애써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래야 조금씩 사람이 달라진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첫 번째 공동체는 가족이라는 것을.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는 것.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의 가치를 먼저 인정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문명의 꽃이 피는
가장 작은 씨앗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삶은 결국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 살아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 가장자리에서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살아남으려 했던 이름 모를 잡초처럼.
그렇게 나도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남은 길에서는 조금 덜 상처 주고
조금 더 품어가며 걷다가 생을 놓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걸 비워내는 그날 순간에는
내가 이 땅에 잠시 소풍 나와 빌려 쓴 자연의 품으로
서두른 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귀할 것이다.
소쩍새가 이른 봄부터 목 놓아 울어
국화 한 송이 피워냈다는 가을처럼.
내게 뭐가 더 필요하리. 그것 하나면 가히 족한 것을
맥락이 뒤엉켜 서로 싸우는 듯한 글을 가름하면서.
추신 : 돈도, 남편이라는 지위의 권한도, 타인에게 인정받은 것도, 심지어 고생 끝에 자수성가했노라고 그래서 잘 살아왔노라는 누군가를 위한 자신을 향한 변명도 자랑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밟혔지만 끝끝내 살아남은 잡초가 바로 나였으나 결국에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온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본 비망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