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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산 돌비 및 제단 건축
12/2(토) 신 27장 1-10
(신 27: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신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신 27: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신 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신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신 27: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신 27: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27: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신 27: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신 27: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신 27:1-10 / [큰 돌들에 이 율법을 새겨라]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거느리고 백성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항상 지키십시오. 7:2 여러분이 요단강을 건너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는 날이 오면 큰 돌들을 세우고 하얗게 회를 바르십시오. 3) 그 땅으로 건너가자마자 이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새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 그곳을 차지하고 살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에발산에 큰 돌들을 세우고 하얗게 회를 발라서 내가 오늘 명랑한 대로 하십시오. 5) 또 여러분은 그곳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되 연장을 대지 않은 돌들만으로 제단을 쌓으십시오. 6) 여러분은 자연석들만 주워다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거기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물을 살라 바치십시오. 7) 또 여러분은 화목제물을 거기서 잡아먹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다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8) 그리고 큰 돌들 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새겨 놓으십시오.' 9)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모세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이제 모두 조용히 하고 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10)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고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모두 시켜 행하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받았던 율법을 26장까지 다시 강론하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도록 큰 돌들에 석회를 바른 후 계명들을 기록하여 에발 산에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1-4)
고대 세계에서는 기념될 만한 사건이 있거나 상호 간의 언약을 나타낼 때 돌비를 세우고 기념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요단 강을 건너기 전,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날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큰 돌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계명을 새겨서 기념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 언약의 영원성과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요단 강을 건너서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확인하고 갱신하는 의미였습니다.
또 거기서(5-10)
율법을 새긴 큰 돌비가 저주의 산 에발 산에 세워지는 날, 거기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쇠 연장을 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의 제단처럼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게 하며,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듬지 않은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다니엘서의 뜨인 돌(단 2:34), 시편의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습니다(시 118:22; 마 21:42). 그리고 번제를 드린 후, 이스라엘은 즐거운 화목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 제물 일부는 불에 태워졌고, 또 일부는 제사장에 돌아갔으며, 나머지는 예배자와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오는 날, 이처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임을 공동체로서 확인하는 의미였습니다.
적용: 순종과 감사와 사랑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당신의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 설 교 >
오직 말씀에 따라
신 27:1-19 / 양인국 목사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 행해야 할 일들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었고(26장), 다른 하나는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27장). 특별히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복된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면 돌들을 취하여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 후 그것을 에발산에 세우라고 명하셨다(27:2-4).
이렇게 명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봄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돌을 취하여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에 새기라고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고대 세계에서 문서를 영원히 보존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그것을 돌에 새겼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그 말씀들을 두 개의 돌 판에 새겨서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에 새겨 에발산에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자 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율법을 새길 돌에 회칠을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을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고 또한 율법을 새긴 돌을 에발산에 세우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불변성을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삶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삶과 관련된 지식들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축복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고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실제로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믿음으로부터 떠나 실패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진 것도 믿음의 사람들이 세속화에 빠지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잃어버림으로 온 결과들이다. 오늘의 시대에도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설프게 믿음의 살을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어떤 때는 믿음의 사람같이 살지만 또 다른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그들의 삶이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고 있는 것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고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다음 말씀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준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들 가운데 유일하게 실패가 없는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환경이 어떠하든지 오직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삶의 이정표가 된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말하고 있든지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행한다. 이와 같은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불변하다는 확고한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요청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이스라엘에게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요청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우리 앞에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의 내용들은 우리에게 복된 삶에 이르는 길과 저주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말씀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27:11-14)”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어떤 길이 복된 삶에 이르는 길이고 어떤 길이 저주에 이루는 길인지 알기 위해서는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실제로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쳤다. 말씀의 연구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말씀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고백할지라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는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믿음의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적인 삶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이 단순히 문자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했고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보시고 그 뜻에 따라 행하셨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치유해 주기도 하셨고, 배곯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용인하셨던 것이다. 만일 모든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지키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면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사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이해하고 사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신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오해한 것이고 이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화있을진저”라는 책망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바르게 알 수 있는가? 이 물음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먼저 부지런히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는 것이고(딤후3:14,15), 다른 하나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것이다(요14:26).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말씀을 연구하는 중에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말씀의 내용을 알기 위하여 연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하는 그 자체가 기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적용(application)의 중요성이다. 여기 “적용”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보편적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자신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말씀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의 의식을 통해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돌에 율법을 새겨 에발산에 세우라고 말씀하신 후, 열두 지파를 둘로 나누어 한 편을 에발산에 그리고 또 다른 편을 그리심 산에 서도록 하신 후 레위인들로 하여금 돌에 새긴 율법을 낭독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멘 할지어다”라고 응답하도록 하였다. 여기 들은 말씀에 대하여 아멘으로 응답하라는 것은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보편적인 말씀으로 믿으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곳에 서 있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으로 믿으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우리가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모든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 비로소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게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27:3)” 여기 “그리하면”이란 “하나님의 말을 영원불변한 진리로 고백하고, 그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고 또한 그 말씀을 자신에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한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으로 그 땅에서 젖과 꿀을 얻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앞에 열린 축복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삶으로 그 문에 들어갈 수 있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오늘 주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말을 영원불변한 진리로 고백하고, 그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고 또한 그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에발산에 세워진 계단
신 28:1-10 / 피영민 목사
서 론
신명기 27장부터는 모세의 세 편의 설교 중 마지막 설교가 시작되는데, 이 마지막 설교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저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축복’입니다. 저주라는 단어가 축복보다 네 배나 더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이신데 왜 이 부분에서는 저주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얻기 위해서는 언약에 대한 바른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은 문자 그대로 단지 말로 하는 약속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도 포함하는 약속이며, 모든 약속 가운데 가장 강한 구속력을 가진 약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사용하시는 방편이 바로 이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종교는 언약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과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과 맺으신 은혜언약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가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내용입니다. 이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는데 본문의 상황은 시내산 언약을 맺은지 40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태어난 사람들, 혹은 시내산 언약을 맺을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소위 신세대들은 이 시내산 언약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신세대들에게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다시 가르치고 새롭게 갱신합니다.
1. 모세의 명령모세는 신명기 27장을 통해 세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큰 돌들을 찾아서, 그 위에 석회를 바르고 거기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명백히 기록하라는 명령입니다. 헷갈리거나 애매모호하게 기록하지 말고, 누가 듣고 읽더라도 모두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돌들 위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해야 합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이라 하면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말하는데 그 모든 말씀을 다 기록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을 통해 이 명령이 ‘돌 위에 율법의 핵심을 요약해서 기록하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를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귀로만 율법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제는 흰 석회 바탕에 검은 글씨로 드러나는 기록된 말씀으로 율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구전이 기록된 말씀으로 바뀌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왜 이 율법의 돌들을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에 세우지 않고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에 세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주석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해서 복을 받는 것보다 불순종해서 저주를 받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율법의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도록 명령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신명기 31장 29절을 통해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전에 악을 행하여 저주를 초래하고 말세에는 재앙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주가 인간에게는 도리어 현실적이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을 에발 산에 세우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둘째로 에발 산에 돌단을 쌓되,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단을 쌓고, 그 제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번제는 짐승을 모두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번제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내장 기름과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껍질만 태우고, 나머지 고기로는 제사드린 사람들이 공동의 식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 고기를 혼자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공동의 식사를 하라는 말씀이 두 번째 명령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여섯 지파씩 나눠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개의 산,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중턱에 각각 서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산 중턱에 섰기 때문에 서로 바라보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열 두 지파가 모두 산 중턱에 서면 제사장들이 가운데 골짜기에 서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선포하는 말씀이 저주의 말씀이면 에발 산에 서 있는 여섯 지파가 아멘으로 대답하고, 축복의 말씀이면 그리심 산에 서 있는 여섯 지파가 아멘으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 27장을 보면 열 두 가지의 저주가 선포되는데, 저주와 축복이 선포되는 에발산과 그리심 산이 서 있는 곳이 세겜이었기 때문에, 이 열 두 가지 저주를 ‘세겜의 십이 저주’라고도 말합니다. 이 세겜은 전통이 있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5대 제단을 쌓았는데, 그 가운데 처음으로 쌓은 제단이 세겜 제단입니다. 또한 야곱이 에서의 진노를 피해서 밧단 아람에서 20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다가 에서를 만나 화해한 후에, 엘엘로해이스라엘(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이라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곳도 바로 세겜입니다.
세겜의 열 두 저주는 드러난 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은밀히 행한 죄를 향해서도 선포되는 저주입니다. 신명기 27장 15절을 보면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상을 세우고 우상 숭배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이 번 추석 명절에 절대로 우상숭배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온 가족이 총동원해서 우상을 숭배하라고 강요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가족이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 17절에서는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을 지계석이라고 하는데, 이 지계석을 조금씩 옮겨서 자기 땅을 넓히는 땅 도둑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또한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18절),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19절)는 저주를 받고,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게 됩니다(20절). 계속해서 짐승과 교합하는 자(21절),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22절), 장모와 구합하는 자(23절),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24절),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25절)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2. 언약의 6대 구조와 2대 인준방식
사랑의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이렇게 많은 저주를 선포하신 바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는 언약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언약은 고대 근동 지방의 언약과 동일한 여섯 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약을 체결하려면 이 여섯 가지 구조를 모두 갖춰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도 이 구조가 잘 나타납니다.
첫째로 언약 당사자를 소개하는 전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실 때,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둘째로 역사적으로 베푼 은혜를 진술합니다. 여기서는 언약 당사자가 왜 언약 체결권을 갖는지, 역사적으로 어떤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언약 체결을 요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켰다. 나는 40년 동안 너희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다.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거저 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언약을 체결할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셋째로 언약 당사자가 요구하는 규례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규례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두 번째 설교(4:44-26:19)는 이와 같은 규례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넷째로 그 규례들을 기록하고 보관하여 수시로 재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발라서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고 수시로 읽도록 명령하신 것이 바로이 부분에 해당됩니다.
다섯째로 언약체결에는 반드시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약 갱신의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언약의 규례를 지키면 축복이 선포되고, 언약의 규례를 어기면 저주가 선포됩니다. 언약은 지켜도 그만이고, 안 지켜도 그만이 아닙니다. 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얻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언약은 이 축복과 저주의 선포에 의해서 실효성과 어느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는 위엄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떻게 인준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실 때 두 가지 방법으로 언약을 인준하십니다. 하나는 짐승을 쪼개 놓고 횃불이 지나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15장 17절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이런 인준 방법을 쓰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공동의 식사를 나누는 방법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서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에도 모세와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공동의 식사는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준의식을 위한 것입니다. 에발 산에 단을 쌓고 화목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앞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는 말씀도 바로 언약을 갱신하는 인준의식입니다.
3. 언약이 적용되는 세 영역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언약을 체결하고 축복과 저주를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대상은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축복과 저주의 약속은 이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가르시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에는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축복과 저주란 무엇일까요? 축복은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치에 가치를 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면, 축복은 그 사람을 더욱 존귀하게 만들어줍니다. 명예를 가진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더욱 명예로워집니다. 물질을 가진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물질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가진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상급이 더해집니다. 이처럼 축복이란 가치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귀와 명예와 재물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여 살면 됩니다.
반면에 저주란 가치가 감소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립니다. 자식을 많이 두고 있던 사람이 자식을 잃어버립니다. 명예롭던 사람이 명예를 잃게 됩니다. 하늘에 쌓았던 상급이 모두 찌그러듭니다. 이와 같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옥에 가는 저주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어길 때, 가치가 감소되는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 때 축복을 누리고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언약은 계약과 명백히 다릅니다. 언약에는 축복과 저주의 약속이 따라오지만, 계약(contract)이나 사교(fellowship)에는 축복과 저주의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우리 삶의 세 가지 영역에 적용이 됩니다. 첫째로 가정입니다.
가정은 단순한 계약조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끼리 몇 년 살아보고 좋으면 계약기간을 연장하고, 싫으면 헤어질 수 있는 계약결혼은 비성서적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는 거룩한 언약이며, 가정은 언약의 기관입니다. 이 언약을 평생 지키고 살면 언약적인 축복이 따라오지만, 이 언약을 깨뜨리면 고통과 언약적인 저주가 따라옵니다. 결혼이 단순히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사실은 언약의 구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약에는 증인이 필요하고 공동식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결혼식 때는 주례자가 증인으로 사인을 하고 언약을 인준하는 공동식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어떤 부부가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열 한 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도저히 서로 맞지 않아서 이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나눴는데, 아이들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우다가 결국 목사님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상담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시던 목사님은 “그러지 말고 가서 아이를 하나 더 낳으세요. 그러면 아이들을 여섯 명씩 데리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부부는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고 열 달 동안 같이 살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쌍둥이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을 나누지 못하고 같이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정은 언약적 조직입니다. 싸우든지 지지고 볶든지 계속 붙어살면 언약적인 축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깨뜨리면 언약적 저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언약적 조직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냥 아무나 와서 회원이 되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언약이 교회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천 대에 걸친 축복이 따르지만, 이 언약을 어기면 삼 사대에 걸친 저주가 따릅니다. 아버지가 부자라도 그 자녀들이 재물을 다 허비하고, 손자 때에는 더욱 재물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언약임을 깨달아서 이 언약을 지키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충성했는데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언약적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셋째로 국가도 언약적인 조직입니다. 위정자들은 그냥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국가를 잘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키기로 언약한 후에 위정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국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반역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충성하며 살 것을 언약합니다. 만약 위정자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지 않고 시장경제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면 그는 언약을 어김으로써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때로 가정이나 교회, 혹은 국가의 언약을 어겨서 언약적 저주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약적인 축복보다는 도리어 저주를 더 많이 받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이방국가의 포로가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된 상황에 닥칠지라도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언약을 어겨서 포로가 되었을지라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고, 순종하면 설령 하늘 끝에 가서 포로가 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10).’
삶 가운데 언약적인 축복을 받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혹시라도 삶 가운데 언약적 저주를 받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백성들을 다시 회복하시고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축복받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과 저주
신명기 28:1~2, 15 / 석원태 목사
성경에는 ‘머리’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여러 경우들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심(고전 11: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엡 4:12, 골 1:18), 그리스도는 세상의 머리가 되심(엡 1:22),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벧전 2:7, 8), 그리스도는 각 남자의 머리가 되심(고전 11:3), 아담은 인류의 머리가 됨(롬 5:12),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됨(고전 11:7, 엡 5:23~33) 등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머리’는 ‘으뜸’, ‘근원’, ‘존귀’ 등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사 9:14). 반대로 ‘꼬리’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사 9:15). 저주받은 애굽의 지도자들은 머리와 꼬리나 대동소이하다고 하였습니다(사 9:15). 지금 모세는 영감 속에서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 2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선민의 구원사를 회고하는 첫 번째 역사적 설교를 하였습니다(신 1:1~4:43). 그의 두 번째 설교는 이스라엘 선민이 받은 거룩한 성민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신 4:44~26:19). 그리고 그의 세 번째 설교는 선민들이 율법을 엄수할 것을 격려하고, 장려하는 것이었습니다(신 27:1~30:). 그 중에 28장은 축복과 저주에 관한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대강령을 지켜 순종하면 축복이요(신 28:1~14), 불순종하면 저주(신 28:15~68)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머리’요, 저주는 ‘꼬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위에만 있고, 꼬리(저주)는 아래만 있다고 하였습니다(신 28:13).
Ⅰ. 머리 되는 축복입니다.
1. 국민적 축복(머리)입니다(신 28:1~2).
이는 머리 되는 축복에 대한 서론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듣고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고 하였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라고 선언하였습니다.
2. 개인들의 생활 중에 임할 6대 축복입니다(신 28:3~6).
생활 중에 첫째 축복은 성읍과 들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신 28:3). 도시와 농촌에서의 축복입니다. 둘째 축복은 자손의 번영과 가문의 번영입니다(신 28:4). 「네 몸의 소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토지 소산, 곧 농작물의 풍성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4). 「네 토지의 소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넷째는 우양 등 가축의 번성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4).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가득 차는 복, 곧 일용할 양식이 충족한 복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5). 여섯째는 출입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고 하였습니다. 집안의 평안과 사회생활의 형통입니다.
3. 전쟁승리의 복입니다(신 28:7~10).
침략자를 격퇴시키는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 28:7)고 하였습니다.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레 26:8)라고 하였습니다. 전쟁 승리로 말미암는 경제적 부요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신다」(신 28:8)고 하였습니다. 전쟁승리로 말미암는 국위선양과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이 만민 중에 더 높여지는 축복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세계 만국 앞에 영적, 물질적, 명예적 축복이 온다고 하였습니다(신 28:8~10).
4. 만민의 으뜸 곧 머리가 되는 복입니다(신 28:11~14).
이스라엘의 부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경제적 축복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득한 농산물의 창고와(신 28:8), 육축과(신 28:11), 하늘의 단비와(신 28:12), 자손이 번성하는(신 28:11)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든 민족에게 꾸어주는 복을 받을지언정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12). 이스라엘의 부강은 세계만민 중에 하나님이 세우신 성민의 민족적 명예를 떨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신 28:9~10)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부강은 정치적, 군사적 우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3)라고 하였습니다.
Ⅱ. 꼬리 되는 저주(신 28:15~18)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떠나 다른 신을 섬길 때는, 여지없는 저주를 받아 꼬리가 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 생활에 미칠 6대 저주입니다(신 28:15~19).
앞에 말한 생활의 6대 축복의 정반대입니다. ① 성읍과 들에서의 저주, ②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의 저주, ③ 자손의 저주, ④ 토지의 저주, ⑤ 가축의 저주, ⑥ 출입의 저주라고 하였습니다.
2. 염병과 기근의 저주라고 하였습니다(신 28:20~24). ① 폐병 ② 열병 ③ 상한(염증) ④ 학질 ⑤ 한재 ⑥ 풍재 ⑦ 썩는 재앙이라고 하였습니다.
3. 패전과 포로가 되는 저주라고 하였습니다(신 28:25~37).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신 28:25)라고 하였습니다. 죽임 당한 시체는 날짐승, 들짐승들의 밥이 되고(신 28:26),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가려움증)으로 너를 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27).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28). 백주에도 밤처럼 더듬고, 갈길이 막히고,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29).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잠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거기 거하고, 포도원을 심었으나 열매는 타인에게 빼앗기고, 소를 저희 목전에서 잡았으나 타인의 입에 들어가고, 백주에 양을,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보는 고통으로 눈이 쇠하여지고 손에 기운이 빠져버린다고 하였습니다(신 28:30~32). 수고로 얻은 모든 토지 소산물은 빼앗김을 당하고,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가 나고, 알지 못하는 나라의 포로가 되며, 열국 중에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신 28:36~37). 이런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34). 정신 이상자가 되어버리는 저주라고 하였습니다.
4.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국가적 비운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38~46).
파종한 식물들은 메뚜기의 밥이 되고, 재배한 포도원은 동산이 되고, 감람나무의 열매는 주인이 오기 전에 떨어져 버린다고 하였습니다(신 28:38~40). 자녀들은 포로가 되어 만날 길이 없어져 버리고, 저들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은 수효가 많아지고 선민 백성의 수효는 줄어들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41~43).
5. 원수의 탄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47~57).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므로(신 28:47), 독수리같이 날아오는 원수의 침략을 받아 벗어날 수 없는 철 멍에를 메고, 죽음에 이르는 신음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6. 더 큰 재앙이 더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신 28:58~6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을 떠나 영화로운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신 28:58), 너희가 받을 재앙과 너희 자손이 받을 재앙을 극렬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신 28:58~59). 하늘의 별같이 많던 자손들의 남은 수가 얼마 안 되고(신 28:60~6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63).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어버릴 것이고, 발바닥이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만들어 버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64~66). 애굽으로 끌고 가서 영원한 노비가 되게 함으로 이스라엘 자체의 생존의미와 가치가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노비로도 값이 나가지 못하여 살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신 28:68). 이것이 저주요, 꼬리의 실상이요, 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 있는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인생)를 보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좋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이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머리 되는 축복입니다. 위에만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저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진노하므로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멀리하여 나에게 재앙을 내리는 이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꼬리요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머리가 되고, 위에만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는 꼬리가 되는 저주입니다. 아래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기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신 28:1, 2, 9, 14). 머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국민적(민족적)으로 복이고, 개인적으로 복이고, 전쟁 중에 승리하는 복이고, 만민(열국)의 으뜸 곧 머리되는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신 28:15, 58) 개인생활에 저주가 임하고, 염병과 기근의 저주와, 패전과 포로 되는 저주와, 마침내 망국의 저주와, 원수의 압제와 더 큰 재앙의 저주와 심판으로 노비가 되는 가치조차 없어져 버리는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꼬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과 저주, 머리와 꼬리가 되게 하시는 준엄하신 선언, 결정적인 선언, 필연적인 선언, 궁극적인 선언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와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 속에는 인생이 받을 복도 있고, 인생이 받을 저주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존의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머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대이면 저주요, 꼬리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11장 26~28절에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이 미래에 들어갈 가나안에서도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9)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는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복과 저주를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구원의 도에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명하고, 여호와를 불신하고 그 구원의 도를 버리는 자에게는 저주를 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명하는 오늘의 그리심산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머리로 축복하는 열린 벧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창 28:17~22). 우리가 이곳에 올라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단을 쌓을 때마다) ‘엘엘로헤이스라엘’, 곧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창 33:20)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과 머리가 되는 성소(聖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위에만 있게 하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는 높은 성산(聖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17:4-10 / 이영택 목사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근심을 주시지 않습니다.
(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근심을 주시지 않음에도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믿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습니다. 천국에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칭찬받은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마 8:8) 백부장입니다.(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고 하셨습니다.
(마 15:22) 가나안 여자입니다.(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입니다.(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눅 19:8) 삭개오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 26:7) 한 여자의 행동입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받은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 8:25)제자들입니다.(마 8:26) 예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막 4:40)제자들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고 하셨습니다.
(마 14:29) 베드로입니다.(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고 하셨습니다.
(마 17:14)어느 한 사람입니다. (마 17:17)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근심케 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1. 마음의 신비에 말씀을 새기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에 돌을 세우고 그 돌은 석회를 바른 다음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비가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기는 것입니다. 심비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자기의 말씀입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하였습니다.
개정성경에서는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밥은 입으로 먹습니다. 입으로 먹은 음식은 장으로 들어가 영양분을 몸에 제공하고 뒤로 버려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듣는 말씀은 영혼에게 양식으로 전달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마음으로 들어간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속사람인 영혼에게 양식으로 공급됩니다.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은 찌꺼기로 버려지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귀로 들어 믿음으로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 힘을 가지게 합니다.
능력을 가지게 합니다. 영성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야 제대로 된 성도입니다.
2. 제단을 쌓는 일이 중요합니다.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제단은 무엇으로 쌓아야 하느냐 하면 다듬지 않는 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구약교회시대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이 우리처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나 염소나 1년된 소나 비둘기나 규정된 것으로 각을 떠서 불에 사르는 예배였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단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면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주께 받칠 것을 가르치는
인간은 아담 타락이후 무엇가로 자신을 가리고 꾸미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참 모습을 원하십니다.
어떤 화가가 런던에서의 일상생활을 그리고자 해서 바쁜 도시에서의 다양한 생활상을 캔버스에 묘사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런던 거리의 어린 부랑아의 좋은 표본을 찾고 있던 중 마침내 그런 류의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얘야, 너 은화 한 개를 얻고 싶지 않니?"
"뭐라고요, 은화요? 물론 얻고 싶지요."
"그렇다면 여기 내 명함이 있다. 내일 9시에 이 주소로 현재의 네 모습 그대로 오너라. 그러면 은화를 얻게 될거야."
"네, 선생님, 내일 가겠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과연 은화를 얻을 수 있을까 의심했다.
다음날 정각 9시에 소년은 화가의 화실 벨을 누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 본 하녀가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어린 소년이 찾아 왔는데요."라고 했다. 화가는 많은 다른 생각들로 해서 어제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 어떤 아인데?"
"글쎄요, 가난해 보이긴 하지만 얼굴이 잘 생긴 게 깨끗하고 옷도 말쑥해서 꽤 괜찮아 뵈는 아이던데요." "들어오라고 해요."
어제의 그 소년은 화가 앞데 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깨끗하고 머리도 단정했으며, 그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이 어머니 덕분에 누더기 옷도 잘 기워서 입고 있었다. 소년은 물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은화는 어디 있나요?"
"너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니?"
"네, 선생님."
"확실하게?"
"그럼요, 9시에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 이렇게 정각에 온 걸요. 방금 9시가 지났어요."
"그러나 나는 네가 네 모습 그대로 오기를 원했다. 만약 네가 네 모습 그대로 왔다면, 너는 은화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주지 않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원하신다. 그 분은 당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 분은 자신의 보혈로 당신의 죄를 씻겨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신다. 그 분은 자신의 은총이 당신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신다. 그 분은 당신을 눈같이 희게 씻겨 주신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람이 참 모습으로 주님께 보이려면 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위선도, 거짓도 교만도 자존심도 부끄러움도 추한 것도 안 좋은 것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진실을 보기 원하십니다.
나의 모습으로 믿음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3.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하나님께“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서로의 교제요 친교입니다. 성령과 말씀의 은혜로 나누는 믿음의 영적 친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어른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으로 가져오는 날 다윗왕은 모든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며 춤을 추면서 백성들에 떡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기뻐하는 것이 성도라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결론: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은혜의 양식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심을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며 함께 하심을 인하여 찬송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의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회목하라고 하신 그리스도
신명기 27:6-7, 마태복음 5:23-25 / 이성희 목사
서론
알렉산더 대왕에게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클레토스’라는 친구였는데 한 번은 이 친구가 술에 취해 많은 신하 앞에서 왕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아서 던졌습니다. 친구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안타깝게 창이 친구의 가슴에 박혀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일이 크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은 후회와 자책감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다는 일화까지 남아 있습니다.
화병(火病)이란 미국 정신과협회에서는 화병(hwa-byung)이라고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분노의 억압에서 기인하는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고 한국인의 문화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충동범죄, 충동살인이 많은 이유는 화를 참지 못하는 우리의 증후군 때문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법이 있습니다. ‘내가 100% 옳다고 판단하지 말라’, ‘반드시 화해하라. 화해는 자신과의 만남이다’, ‘용서도 화풀이의 방법이다’, ‘내게 화내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 등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고해야 할 법입니다. 화(火)는 잘 다스려야 화(和) 할 수 있습니다. 화목, 화해, 화평, 화친 이 모두가 화를 잘 다스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불은 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은 물에게 꼼짝 못합니다. 불이 나려면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는 불에 타는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산소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셋 중의 하나만 없으면 불은 꺼집니다. 대부분 불을 물로 끕니다. 불에 물을 뿌리는 것은 발화점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발화점이 낮아지면 불은 꺼집니다. 동양학에서는 불 다음에는 물입니다. 그래서 요일도 화요일 다음에 수요일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물은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마이’라고 하는 일반적 물과, ‘마임’이라고 하는 넘칠 듯한 맑은 물을 구분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물을 헬라어로 ‘휘도르’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물은 질서와 혼돈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물은 사람의 생존을 의미하고, 정결의식에 사용하므로 깨끗하게 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세례는 물로 씻듯이 죄를 깨끗하게 씻어 거듭나게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물과 피는 함께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7-8에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물과 피는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한꺼번에 다 쏟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피는 구속을 의미하고, 물은 변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구속받은 사람은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화해의 삶을 살려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품의 발화점을 낮춰줘야 합니다. 성품의 발화점을 낮추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은 불(火)을 끄고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생명의 물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물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참 생명이 있어야 회개가 가능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의 체험이 있어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보면 살게 하셨는데 그것도 거부하였습니다. 잠언 19:3에는 “사람이 미련하므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합니다. 또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의 실수에 대하여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사람 사이에서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원망 없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목하고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예배보다 화목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이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화목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람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23에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고 약합니다. 그래서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약점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의미 없이 던진 한 마디 말이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SNS를 통하여 올린 글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무심코 올린 글이 인격살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낙하실험을 한다고 던진 돌에 50대 여인이 맞아 죽었습니다. 그 여인은 한 남편의 아내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일 텐데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엄청납니다. 이런 일은 아이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철없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유리 집에 사는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빤히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약점을 가진 사람의 약점을 들어 비난하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깊이 남기는 일입니다.
사람이 고의는 아니지만 남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을 누구나 다 합니다. 성경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를 거론합니다. 왜 그들이 심판을 받고, 공회에 잡혀가고, 지옥 불에 들어갑니까? 인격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칼로 죽은 사람보다 혀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칼보다 혀가 더 날카롭습니다.
사람의 약점을 절대로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피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힘이 약한 어린이나, 여성이나, 노인이나, 장애인에 대한 범죄는 중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몇 배나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시대에 군대에 끌려간 한국 남자도 있고, 탄광에 끌려간 남자도 있고, 공장에 끌려간 남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들보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더 아파하는 것은 더 약한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존 아사리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평균 15만 번 듣는다.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말은 약 5천 번을 듣는다. 부정과 긍정의 비율이 무려 30:1이다. 이 때문에 ‘난 할 수 없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부모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녀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원망이 쌓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필요 없어”, “너는 할 수 없어” 이런 말은 절망을 심어줍니다. 절망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고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나가 죽어”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다른 말에는 순종하지 않지만 이런 말에만 순종하는 아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망들을 만한 말을 고의로 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 90%가 부모에게 “너 같은 인간은 결국 감옥에 갈거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런 부모의 막말이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그 길을 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도 최근에 막말논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막말이 우리사회에서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하고, 젊은이가 어르신에게 막말을 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막말을 합니다. 막말 중에는 정치가의 막말이 최고입니다.
미국의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도 막말에는 2등이라면 서러워할 사람입니다. 소수민족에 대하여, 이슬람에 대하여 막말을 마구 뱉어내고 있습니다. 막말로 재미를 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이 특정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정부의 선전 문구에는 ‘성급하게 던진 말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Careless talk costs lives)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칫 내 한 마디 말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고, 원망을 쌓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첫 의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링컨의 얼굴이 못 생긴 것을 늘 꼬집던 한 의원이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라고 질책하였습니다. 이 의원은 무례하게 대통령의 못 생긴 얼굴까지 들먹였습니다. 모든 의원들이 잔뜩 긴장하여 링컨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링컨은 “의원님, 내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같이 중요한 자리에 왜 이 못 생긴 원숭이 같은 얼굴을 가지고 왔겠습니까?”라고 응수하였습니다. 의원들은 박장대소하였고 그 의원은 창피하여 슬그머니 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링컨 같은 순발력이 없습니다. 못 생긴 사람에게 못 생겼다고 하는 것은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것입니다.
“입은 마음의 하수구이고 말은 배설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타인에게 배설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의 말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듣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제사보다 먼저 화목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5:24에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형제와 화목한 것입니다. 화목이 없는 제사는 진정성이 없는 제사입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제사는 외식이며, 가식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가져야 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배자의 진정성입니다. 진정성이 있는 예배는 하나님께만 아니라 사람과 화목한 후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제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제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제사를 받고 싶으셔서 그들을 애급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예배하게 하기 위해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배’(worship)는 ‘가치 있는’(worse) 이란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명 제상이었던 글래드스톤은 “나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는 분이었고, 명 제상다운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아무데서나, 의미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제는 애급의 바로와 군사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출애급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빨리 제사부터 드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진정성을 보십니다. 정성을 다해 제사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예배드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성의 없이 예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진정성’이 무엇이겠습니까? 허위가 아닌 진실입니다. 형식이 아닌 준비된 것입니다. 막힘이 아닌 소통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화목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목한 후에 드리는 제사, 예배를 기뻐하시는 까닭은 진정성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화목하고”라는 말은 ‘프로톤 디알라게디’라는 헬라어로서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은 가장 강한 명령의 형태입니다. ‘화목하게 하라’는 강한 명령이란 의미입니다. 선수적으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먼저’란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 보다 형제와 화해의 중요성과 가치를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개선이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양심에 거스르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그릇된 행위가 기억나면 지체 없이 화해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나 헌신이나 헌물을 하나님은 절대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힘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부설 연구조사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내의 59개 인종 중에 우대받는 인종 순위에서 한국인은 43위를 차지했습니다. 일본인은 19위, 중국인은 30위, 필리핀인은 39위였고 흑인이 42위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흑인보다 한 단계 아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문화 적응도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정치참여의 부재입니다. 셋째는 영어 안배우기입니다. 넷째는 타인과 접촉기회와 이해의 부족입니다. 다섯째는 사회 참여도의 낮음입니다. 여섯째는 한인단체끼리의 불화 등입니다. 미국의 백인이 싫어하는 10대 인종 가운데 가장 싫어하는 인종이 인도인이고, 둘째가 한국인이고, 셋째가 흑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끼리 서로 불화하므로 다른 인종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화목이 민족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인사회의 불화, 시기, 갈등, 화목하지 못한 모습은 외국에 가서까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수로 계시다가 미국에 가신 도양술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제가 미국 유학 시절에 LA 카운티의 노인국의 국장이었습니다. 카운티 안에 있는 여러 인종의 노인회를 돕는 일을 하는데 한인노인회는 누가 대표인지도 모르게 대표가 여러 사람이고, 누구에게 지원금을 줘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사회나 한인교회는 수없이 나눠지고, 갈등을 가지고 있고, 경찰이 와서 지키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예배는 열심히 잘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문제가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편 51:17에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람에게 화목하였습니다. 선지자 나단과 자신이 취한 밧세바에 대해서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아이들이 집을 나갈 때 “그저 구불구불하여라”고 하였답니다. 구불(九不)은 웃음입니다. 웃음은 구불약(九不藥)이라 했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띠면 아홉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불안, 불신, 불화, 불손, 불편, 불초(不肖), 불쾌, 불경, 불공이 다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웃음이 대인관계에서 이 구불을 극소화해 주는 약이라 하여 구불약이라 했습니다. 웃음은 ‘불화’를 없애고 ‘화목’을 선사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화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 론
일전에 잠시 쉬는 동안 TV를 켰더니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경이라는 아이의 어머니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머리카락이 없어서 놀림당하고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고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민경이는 정체불명 탈모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탈모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아이가 “엄마, 쟤 머리털이 없어”라고 하니 그 엄마가 “그러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네”라는 이 세 마디의 말에 엄청난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민경이의 부모가 원하는 것은 아이를 특별한 눈으로 보지 말고 그냥 다른 아이와 똑같이 봐 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 스쳐 지나가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원망을 들을만한 아픔을 안겨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 공동체의 언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운 말의 싹을 틔우자. 배설하는 언어에서 배려하는 언어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토론 교육을 하자. 깊이 읽고,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훈련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설득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리더의 말이 중요하다. 리더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회에 지각해서 ‘게으르다’는 비난을 받은 영국의 처칠은 “예쁜 아내와 살다보니 일찍 못 일어나서 늦었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상처가 될 뻔한 리더의 잘못된 말에 처칠은 재치로 넘긴 것입니다.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을 언어는 배려하는 언어입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남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을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화목하여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므로 화목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명기 27:1-10
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율법을 기록하는 돌(1-3)
오늘 본문은 먼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는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종류의 돌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석회를 바른 큰 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에 에발산에 큰 돌들을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발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율법을 기록해야 했습니다. 이는 율법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돌은 다듬지 않은 돌들입니다. 자연적인 돌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합니다. 1절입니다.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1절이 말하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이 명령’은 표면적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가나안 입성 기념 돌비를 만드는 일이나 제단 축조를 말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돌들에 석회를 발라 그것이 굳기 전에 기록하게 하신 율법들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켜야하는 중요한 율법입니다. 2-3절입니다.
(2-3)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넌 후 바로 큰 돌들을 세우고 그 돌들에 석회를 발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록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즉 이 명령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일이, 다른 일을 하고 난 이후에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일에 앞서 신속히 수행해야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계산과 판단으로 여길 일,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군사력 정비나 주변 탐색과 같은 자신들의 안전과 직결되는 일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명령은 이들이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서 4, 5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4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돌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고, 더 나아가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전투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할례를 명령하시고 이를 시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방금 언급했듯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적진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 확보를 위한 전투력 유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황스럽게도 적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큰 상처는 내는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산이나,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손수 보여주며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돌과 그 곳에 기록한 말씀이 이스라엘 외부에 새겨진 지워질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할례를 명령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확신에 찬 하나님의 ‘자기선언’ 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승패의 여부가, 온 세상의 주관자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는 여정가운데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부족하지만 조금씩,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곳곳에 새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7절입니다.
제단을 쌓는 돌(4-7)
(4-7)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돌을 세워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을 쓰며, 쇠 연장을 쓰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는 행위는 요단을 건너고 에발산에 도착한 후, 즉 여호수아서 8, 9장에 가서야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둘러 이와 같은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이유는 이제 모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문화가 가득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된 가나안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일을 통해 모세의 부재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공백 상태를 사전에 막고자 한 것입니다.
이 당시 율법을 기록하며, 이를 계속해서 묵상하는 일은 오늘날로 하면, 성경을 읽는 일과 동일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적인 시스템이나, 인간인 지도자를 넘어 참된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자립, 즉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라는 지도자가 아니어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욱 깊이 성숙해가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것입니다.
돌들을 세우고, 제단을 쌓는 에발산은 문자적으로 ‘나뭇잎이 없는’ 즉 ‘벗겨진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에발산은 풀과 나무는 거의 없고 온통 돌과 바위로만 뒤덮여 있는 산으로, 세겜 지역의 북쪽에 위치해서 세겜 남쪽에 위치한 그리심산과 마주보고 있기에 그리심산의 그림자로 인하여 일조량이 적어 그리심산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황량하고 앙상하여 마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께서도 그리심산을 복의 상징으로, 에발산을 저주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무와 숲도 울창하고 햇빛이 많은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에발산에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세우라 하셨을까요? 그것은 먼저 돌들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저주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두 번째로 이 저주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저주의 자리에서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는 저주와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쇠 연장을 대지 않아,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은 철 연장으로 다듬은 돌을 쌓으면 이 곳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에 성전 터 밖에서 돌들을 다듬은 후 성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성전 안에서 철 연장 소리가 나지 않게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함을 추구했던 하나님을 향한 제사의 율법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제사에 사용되는 모든 것을 흠 없는 것들로 이루어지게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도, 제사에 사용되는 기구들도, 또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도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함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의 완전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속죄 제사의 궁극적인 완성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를 위해 제사를 드려주시는 예수님, 제사의 도구 되시는 예수님, 제사의 예물 되시는 예수님이라는 모든 측면에서 완벽한 제사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완전한 제사를 통하여, 저주의 자리에서 완전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 생명을 통해, 참된 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7절 마지막을 보면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즐거워 할 수 있게 됨을 이야기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리에서 참으로 기뻐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앞에서 제단에 사용된 ‘다듬지 않은’, ‘완전한’ 돌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된 히브리 단어 ‘쉘레모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은 ‘솰렘’의 여성 복수형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완전함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의 완전함의 은혜를 힘입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기쁨, 즉 ‘샬롬’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어원의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나의 기쁨과 나의 평안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은혜를 힘입어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제서야 참으로 기뻐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백성(8-10)
(8-9)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8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마음에 새기며 따라야 할 말씀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계산을 따라 순종할 말씀과 적당히 넘어갈 말씀이 구분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자신에게 편한 모양으로 곡해하며 일부분만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청년들을 만나다 보면,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답답해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의 참뜻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하나님을 뜻이라는 성공이 보장된 길을 빨리 발견하여, 자신이 남들보다 쉽고, 빠르게 세상적인 성공을 하고 싶은 바램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청년들을 향해 하나님의 분명하고 정확한 뜻이 단순한 직업 선택이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기본적인 원칙과 삶의 태도에 있다고 설명하면 금방이고 그 답변을 시시해 하고, 지루해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것을 못 따르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오히려 너무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이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그 정확하고 분명한 뜻 위에 우리가 서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명확한 뜻을 계속해서 따라는 인내와 믿음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와 다르게 우리가 어느 순간 하나님과는 다른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면 하루 빨리 분명한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의 자리, 참 기쁨과 평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현은 이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감으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행동이 먼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잘 따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쌓여가고 그 부족한 믿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선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은혜 아래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신약성경 베드로전서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두운 데에서 불러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가 과거 어둠의 일을 버리고, 새로운 빛의 자녀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약의 설명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0절입니다.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자신의 자유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본 일이 없거나 매우 부족하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 성소 휘장을 찢고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그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을 넘어 참된 자유와 승리를 경험하시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구원의 이유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희생으로 인하여, 완전한 구원의 자리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시간 나의 계산을 넘어 크신 은혜와 능력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소망하오니, 부족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어,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오늘 보다 내일이, 주님을 더욱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2. 위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제단을 쌓는 일을 먼저 시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우리가 부족함을 느껴 채우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언제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을까요?
4. 나의 생각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길을 경험해 본적이 있나요? 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봅시다.
돌비와 돌단을 세우고 마음에 새기라
신명기 27장 1-10절 / 코너스톤 장로교회
모세는 자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모세는 그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자신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큰 돌을 하나 세우라고 말합니다. 이 기념비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신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돌에 석회를 바르는 것은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에 어떤 내용을 새기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석회를 바른 돌 위에 기록된 말씀을 보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주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이 돌을 세우는 위치가 나오는데, 바로 ‘에발산’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나옵니다. 그러한 에발산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큰 돌을 세우라 하였으니, 이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아니하는 자에게 내릴 심판과 저주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돌에 새겼다면, 구원받은 우리들은 어디에 말씀을 새겨야 할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마음을 ‘심비’ 즉 ‘마음의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암송도 해야 합니다. 시편 1장을 보면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마음판에 말씀을 새기고 그 새긴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5절 말씀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돌로 만들어진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5절을 봅시다. “(신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여기 돌제단의 특징이 하나 기록되어 있는데, 절대로 철로 된 도구로 돌을 깎거나 다듬어서는 안됩니다. 자연석 그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보면 사람이 제단에 쓰일 돌을 철로 된 도구를 가지고 쪼개면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자연 그대로인 돌보다는 정으로 쪼개어 다듬은 돌이 더 아름답고 멋집니다. 이에 비해 다듬지 않은 자연석은 투박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듬지 않은 돌로 여호와의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당시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우상을 아름답게 조각하고 제단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제단보다, 예배 드리는 사람의 내적 아름다움을 요구하셨습니다. 제단을 제작함에 있어 ‘철기를 대지 말라’는 말씀은 부정한 것 없는 거룩한 제단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내면의 중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엄숙한 예배 분위기, 말끔한 복장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수한 마음과 거룩한 영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외형에 치중한 예배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예배의 형식과 외면보다 우리 내면의 상태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교회 건물, 예배 형식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심취해 있으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마음을 놓치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배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말씀이 기록된 기념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한 것은 지체해야 할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즉시 준행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최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진 기념비는 말씀의 중요성을, 철로 깎지 아니한 돌제단은 예배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사실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하고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세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는 말씀과 예배가 우리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자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