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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렁궁시렁 스크랩 나의 다섯가지 꿈 - 황광우
체게바라 추천 0 조회 243 06.07.23 23:36 댓글 2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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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7.23 23:40

    첫댓글 雨香님께, 일전 황광우 씨에 대해 궁금한 점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관하고 있던 그의 글을 찾아 올려 봅니다. 그는 맑스, 특히 노동문제에 관한 한, 아주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 06.07.28 00:58

    감사합니다. 대충 읽어보았는데.. pc에 저장해놨다가 다시 읽겠습니다. 일단 황광우씨의 철학콘서트를 구입했는데 당장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체게바라님 덕분에 황광우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 06.07.29 00:35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정인 지음.황광우 선생이 쓰시던 가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작성자 06.07.30 14:55

    맞습니다. 황광우 씨가 노동운동으로 수배 시절에 세상에 발표한 글쓰기에서의 저자명이 '정인'이었습니다

  • 06.07.29 10:44

    만일 경제활동인구의 20%만 가지고도 재생산을 감당할 수 있다면, 10명 중 2명만 일하고도 10명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발전하였다면, 인류는 <주5일 노동제>가 아니라 <주1일 노동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지 않을까요. 일을 한(하도록 선택된?) 2명이 10명분의 생산물을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겠죠. 지나친 낙관론이란 생각이 듭니다. ^^;; //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새로운 자극을 주는 글이네요.

  • 작성자 06.07.30 15:14

    마르크스가 생산 측면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쓸데없이 생산하는 과잉 생산물이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이 논리의 근거는 Garian님 집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우선 옷의 경우 내가 자주 입는 옷, 한두번 입다가 그냥 방치한 옷, 한번도 안입은 옷 등으로 구분해 본다면, 아마도 첫번 째의 경우가 60%, 두번째가 30%, 마지막이 10%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인간은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실제 사용은 구매 충동과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집안에서 발생시키는 음식물을 생각해 보면, 사찰의 공양처럼만 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먹고 남기는 음식의 20% 이상은 최빈민층에게 돌려도 무방한

  • 작성자 06.07.30 01:27

    과잉 생산된 음식물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생리는 눈굴리기의 양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업의 경우도 이 눈굴리기와 진배없습니다. 어느 기업이라도 신년도 사업계획서를 기획할 때, -성장을 목표로 잡는 기업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1%건, 10%건 혹은 50%건 반드시 상승된 수치를 목표로 제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선택되지 못한 과잉 생산된 재화는 어떻게 처리됩니까? 덧붙여 고객이 구매를 하였더라도 전자의 경우처럼 그 사용 용도가 폐기되는 제품이 부지기 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맑스의 주장은 과잉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쥐어 짜지 않고, 오히려 생산을 감소시켜도 인간은 필요 충분한 재화를 획득

  • 작성자 06.07.30 15:15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만을 생산한다고 전제한다면 일주일에 5일 근무가 아니라, 4일, 아니, 3일정도로 족하며 나머지 일수는 창조적 노동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서 노동이 자체로 기쁨이 되는 사회를 꿈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 06.07.30 09:59

    체게바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필요와 충족이 최적으로 맞아떨어진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죠. 문제는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만 소비하는 동물이 아니라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 필요 없는 옷을 사는 게 인간이죠(저는 그런 소비행태를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경제학에서는 그런 욕구까지 '필요'에 포함시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닌가요? 그런 인간에 비해 자연은 철저하게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자는 먹을 게 필요할 때만 사냥한다 - 는 말 처럼. ^^ 이 경제체제가 과잉의 욕구를 부추김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 작성자 06.07.30 15:19

    그렇죠. '욕구'야말로 인간 진보의 매개물이지만 역지사지로 인간 황폐의 원인이라는 것.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과 인간정신의 본원적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에의 딜레마 - 이것은 마치 인간에게 있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결코 해답이 아니며, 양자의 장점의 융합만이 해답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의 공동체 활동, 낮은 곳으로의 연대, 봉사의 생활화, 쓰고 남을 재화의 先 사회기부, 가리안 님께서 지적하신 필요한 만큼의 선이 지켜지는 사회가 자연의 사회인즉, 이를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집단이 인간이라는 것, 그에는 이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욕구를 극대화,

  • 작성자 06.07.30 15:30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제도로 보증되어 있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유한성을 끝까지 끝장(그렇습니다. 소위 대안없이 인간은 후손들이 사용하여야 할 자산까지 앞당겨서 흥청망청하고 있습니다)을 보자는 이데올로기인 이 '자본주의'의 변화나 개선없이 인류의 미래가 담보될 수 있을까요?

  • 06.07.30 10:23

    - 소유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저 이스터섬의 멸망 처럼 과잉 생산과 소비에 제동이 걸릴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이 앞으로 100년도 못 간다죠. //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위의 계산은 쉬웠지만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백 명 모두가 4시간씩 일하면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고 해도, 그 중 일부는 그 짧은 시간 일하는 게 싫어서 바둥대기도 하고 일부는 좋아서 더 열심히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다양성, 비획일성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 작성자 06.07.30 15:32

    바로 자본주의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같은 작금. 그래서 160여년 전 맑스의 주장이 다시 설득력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에게 <민노당>에서 주장하는 교육, 의료및 노후를 위한 연금정책만 보증될 수 있다면 우리가 현실생활을 '전쟁치르 듯'이 할 필요가 전혀 없겠지요. 그래도 인간 욕구의 무한성이 문제가 되겠지만 이는 공동체 운동과 창조적 노동 등으로 완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 작성자 06.07.30 15:26

    다시 돌아가서 과잉생산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잉소비- 일단의 사회주의적 경제학자들은 이 비율이 40%정도가 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사용하지도 않을 재화 40%의 과잉생산과, 실생활에서 소비되지도 않는 40%의 재화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잘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포탈 뉴스에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 102위로 나왔던가요? 다시, 티벳과 방글라데시의 민중들을 떠올립니다.

  • 작성자 06.07.30 15:38

    그리고 제가 볼 때 2,000여년을 지나면서 인류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점도, 이를 타개할 해결책도 나와있고 또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또는 형이상학자들이 비웃는 200년 전의 계몽이 다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 06.07.31 00:12

    저는 종교야말로 그런 계몽에 앞장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해쳐서(어쩌면 철학의 의무인지도..?) 현세계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유명세를 타는 종교는 모두 그런 과잉 생산&소비를 묵인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막으면 기득권층을 거스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현 사회에서 힘을 잃게 되니까요. 그래서 종교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저도 좀 더 탐구해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또 얘기해 보죠. ^^

  • 06.07.31 12:47

    언제 이렇게 많은 댓글이.... ^^ 저도 Garian님과 비슷한 생각인데요. 종교와 교육이 (계몽이라고는 그렇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씩 종교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은 종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 많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올리기도 하고, 종교인들이 각성을 해서 소속된 종교를 하나씩 변화시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그런데 댓글을 보면 의도와 다른 반응에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예전에 어떤 글을 읽다가 서문에 '인간적인 사회주의'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인간적인 게 된다면... 하고 고민해보는데 눈앞이 깜깜하죠

  • 작성자 06.07.31 23:38

    예, '휴머니즘적 사회주의' 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나왔구요, 특히 허버트 마르쿠제가 즐겨 사용하였지요. 일테면 '수정 사회주의' 쯤으로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휴머니즘이 접두사로 반드시 붙어야 하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입니다. '휴머니즘적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는 이 땅의 무정부주의자 이병주 선생께서 쓰시던 용어지요.

  • 06.08.01 00:00

    지리산의 저자 이병주 선생을 말하는 것인지요?

  • 작성자 06.08.01 15:01

    그렇습니다. 문학가, 저널리스트이었으며 동서양의 사조에 두루 능했던 자유인, 그러나 그를 관통하고 있던 신념은 '니힐리즘'이었습니다. 그 '허무'를 넘어서는 것, 혹은 허무뒤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 06.08.01 19:09

    지리사을 읽다가 책을 요따위로 쓰기도 하는구나 했습니다.현장 취재는 거의 안보이고 자료만 들추어 인용하면서 그 장편을 만드는 잔머리에 아주 질리더군요.

  • 작성자 06.08.02 08:58

    무슨 말씀을, 그는 경남 하동 출생으로 지리산을 자기 품처럼 알고 있고, 그만큼 이 땅의 자생적 파르티잔에 대해 잘알고 있는 지식인도 드물었죠. 다만 그의 공인으로서의 삶의 약점이란 저 질곡의 60년대와 70년대에 대하여 침묵하였다는 '묵시적 동의의 부역의 죄'를 꼬집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 동, 서양의 고전과 교양에 대한 지식의 깊이에 대하여 군계일학이라 알려져 있죠. 따라서 님의 이병주가 단순한 책상물림으로서 상상력과 천학적 자료에만 의존하여 '지리산'을 썼다는 것에 도무지 동의 할 수 없으며, 더구나 '장편을 만드는 잔머리(?)'라는 수식어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또한 '지리산'을 지칭하여 참칭하신'요따위'라는

  • 작성자 06.08.01 21:36

    수식어는 작가 이병주에 대한 심한 모독이며, 그에 대한 정보나 지식없이 뱉아낸 저잣거리식의 욕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허니, 이병주에 대해 더 알아 보시고 사시적 편견을 완화하심이 어떠신지요.

  • 작성자 06.08.01 21:33

    특히 작가로서의 이병주는 평소에 자신의 글쓰기에 대하여 '2/3는 사실적 자료로, 1/3은 허구'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원칙으로 했으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관부 연락선>, <현해탄은 알고있다>, <지리산>은 그의 직접적 체험과 고증이 오롯이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 06.08.01 22:08

    그런 찬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짜증만 나던 기억이 있습니다요.책을 읽으면서 특별한 생각이 안들더군요.더 배울 것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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