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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머슴, 소, 막걸리가 있었던 옛기억들
곰내 추천 0 조회 583 18.04.21 18:19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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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4.21 18:36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8.04.21 19:30

    제가 고맙지요.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 주셨기에.
    2018년 지금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50연, 60년 저너머의 농촌풍속이네요.
    논 농사를 정말로 소중하게 지었지요. 경제단위는 쌀이 척도였지요. 농지세도 벼로 공출했고,
    지금은요? 천벅꾸러기이지요. 2016년 서해안에서 쌀값은 80kg 한 가마니가 102,000원. 작년인 2017년에는 의외롭게도 140,000원으로 대폭 올랐대요.
    그래봤자이지요. 하루 품값도 안 되지요. 농촌에서 일꾼 품값도 한 한 가마니가 훌쩍 넘지요. 기술 가졌으면 250,000원도 요구하대요.
    차라리 농사 안 짓는 게 낫겠지요.
    머슴(일꾼)은 도시노동자로 유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지요.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인데...

  • 18.04.21 19:59

    저도 충남 홍성이 고향입니다.
    제 유년 의 시절을 그립게하는 장편의 글이네요.

    옛생각에 두번일고 추억에 젓어봅니다.

  • 작성자 18.04.21 20:27

    예.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홍성나들목이 나오지요. 태안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요.
    홍성군에는 덕숭산, 가야산이 아기자기한 산세로 사랑받고요.
    특히나 홍성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서산방조제 너른 들판과 갯바다를 바라보면서 태안군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지난 3월에도 홍성읍내에 홍성관아(옛건물)에 잠깐 들른 적도 있고요. 홍성에는 명소가 많이 있지요. 김좌진장군의 생가지 있으며,
    만해 한용운의 태생지이고.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이름을 날린 구국의 고장이고요.
    산과 들, 바다를 함께 가진 좋은 곳인 홍성이 고향이군요.

  • 18.04.21 20:27

    고생많으셨지요 옛날 어르신들 그분들덕에 우리가 이만큼 잘사는건데 지금 젊은이들은 모르는것 같아 아쉽습니다.

  • 작성자 18.04.21 20:47

    오늘 저녁 tv에서는 탄광지대의 갱부들의 이야기가 나오대요.
    땅속 지하 갱도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고, 운반하고, 이물질을 골라내고, 분쇄하려면 온통 석탄가루를 들이마셔야 하지요.
    폐가 무엇이 되겠어요? 힘들게 일한 댓가는 폐암 등에 걸려서 일찍 죽고... 농사도 그랬지요.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를 키우려고.. 맹독성 농약을 숱하게 쳤고...
    그래도 무학자인 부모님들은 자식들 공부 가르치려고 등꼴 빠지게 일했지요.
    제 아비 어미도 무학자이지요. 저는 덕분에 대학교에 다녔고...
    먹을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넘쳐나네요. 세상 정말로 많이 변화했지요.
    제 서해안 고향에는 1974년 6월에서 전기불이 들어왔지요.
    문명의 이기가 시작..

  • 18.04.21 20:32

    대하소설 한권을 읽은 듯 합니다.
    박경리님의 토지도 생각나구요.
    산촌에서 자란 저는
    농촌의 실상을 잘 모르긴 하지만 곰내님의 글로서 그림이 그려집니다.
    잠시 내용에 푹 빠져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비록 풍요롭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여유로웠던
    그 때 그 시절이 많이도 그리우시겠습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18.04.21 20:49

    베리꽃님이 살았던 태백산줄기 하늘아래 세 평 반인 곳보다는 제 고향 뜰이 조금 더 넓겠지요.
    산골이라도 농촌마을이었지요. 다랭이 논이 줄줄이 이어지고.
    예. 베리꽃님네 마을만큼은 아니어도 촌사람이 순박했고, 논농사, 밭농사를 지을 때면 동네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왔지요.
    일을 신명나게 했지요. 풍물(징, 장구, 북, 깽과리)를 치면서 흥을 돋구고,
    들밥도 넉넉히 지어서 지게로 나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서 밥을 먹였지요.
    나눔의 시대, 두레의 세상이었지요. 지금은요? 너른 들판에는 농기계가 들어서서 일하대요. 들판에는 사람이 없고요. 기계만...
    그 당시에는 혐동정신이 함께 했지요.

  • 작성자 18.04.21 20:49

    @곰내 해발 150m의 신한재에 오르면 충남 대천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입니다.
    그 넓은 갯바다... 지금은 바다를 막아서 간사지가 되었고, 온통 논이 한없이 이어지대요.
    조금 고개를 남녁으로 틀면 무창포해수욕장, 그 아래에는 서천군 갯바다가 줄줄이 보이지요.
    당시에는 배고픈 사람이 정말로 많았지요. 산골마을이라서 대흉년이 몇 년 지속되어 논농사를 못 지니까...
    장터로 나가 동냥해서 밥 먹고, 더러는 얼어죽고, 강물에 빠져 죽고...
    시골사람들은 놀이문화에 익숙했지요. 일하고 노는 것이 하나의 재미였으니까요.
    무당, 무수리도 많았고, 상이군인도 있었고, 전쟁과부도 있었고...
    그런데 도시발전으로 농촌의 정은 매말라갔더군요.

  • 18.04.21 22:11

    @곰내 곰내님의 글속에
    살아보지 않은 농촌이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네요.
    새참을 인 아낙네들은
    서둘러 집을 나서고
    품앗이로 모인 동네어르신들은 논에서 모심기에 한창이고
    한가로히 풀뜯는 소들과
    소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실 산촌은 그려지는 풍경이 그리 다양하지가 않습니다.
    세평 반 하늘아래다 보니
    농토도 조금 사람도 조금
    풍습도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죽으나 사나 저는 엄마와 단둘이의 삶을 그려낼 뿐이지요.
    제가 그리는 시골의 풍경이 곰내님 마을에
    다 있습니다.

  • 18.04.21 23:49

    뉴스를 보면 노인들만 남아있는
    지금의 시골농촌,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촌이 풍요러웠으면 하는 맘입니다.

  • 작성자 18.04.22 09:22

    댓글 고맙습니다.
    70대 농사꾼이 40%가 넘는 실정이지요. 이들의 평균 수입은 1,000만 원(총수입이므로 여기에서 자제값, 인건비 등을 빼야겠지요).
    '풍요로운 농촌'은 없습니다.
    1970년대 농촌지역에도 새마을운동이 번질 때 '풍요로운 농촌'이란 문구를 썼지만 그거야 위정자나 하는 소리이고.
    먹을거리. 세상에 넘쳐나지요.
    해외에서 대량수입되는 농산품 가격은 해마다 싸지요.

    하나의 예.
    제 아버지는 1982년 서울대학교병원 특실입원환자.
    간식거리로 바나나 사다 드릴 때 저는 동대문시장에서 1 ~2개 샀지요.
    무지하게 비쌌거든요.
    지금은요? 배 터지게 먹을 만큼 싸대요.

  • 18.04.22 06:44

    세세하게 잘 적어주셨네요
    어릴적 잠깐 시골살다가 서울에 와서
    도회지에 익숙한 사람 이지요
    잘 읽고 갑니다~^^

  • 작성자 18.04.22 08:07

    예. 댓글 고맙습니다.
    사실은 초안수준이지요.
    10년 전에 초안상태로... 퇴직한 뒤에는 컴퓨터 없는 시골에서 살다가...
    지금 다시 손질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도 사라지고, 느낌은 억세져서 뻣뻣하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나를 들여다봅니다.

  • 18.04.22 21:42

    곰내님 어머니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
    일꾼들에게 그리 하셔다는것은 자비하시기도 했지만
    일꾼들이 더욱더 열심히 일 했을거에요
    지금 시골은 할일니 넘 많어요
    저도 동생 네 작은 텃밭과 꽃밭 가꾼다도
    또 쑥도케야하고 두릅도 따고 망초대도
    넘 바뻐요바뻐
    힘은 많이 들지만
    전 요런일들이 잼 있어요
    그래야 20일 정도 지나면 수월할것인데요

  • 작성자 18.05.08 22:53

    예. 일꾼들은 3 ~4년씩 일했지요.
    예 모두 일 열심히 했어요. 당시에는요. 부잣집 농사에는 일꾼이 늘 넉넉했으니까요.
    풍물치며 논 농사를 지었지요. 하나의 놀이였기에.

  • 18.04.23 20:59

    아름다운 우리의 고향같은 글 잘읽었습니다
    곰내님은 올 봄도 바쁘시네요 ㅎㅎ

  • 작성자 18.05.08 22:54

    운선 님 고맙습니다.
    님은 수필집 두 번째도 성공하셨지요.
    또 산문집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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