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슴, 소, 막걸리가 있었던 옛기억들
나는 6·25전쟁 전인 1949년 1월에 서해안 작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말부터 기억한다. 전쟁 뒤 7년간 대흉년이 들어서 마을사람들이 배고파서 많이 굶어 죽었다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당시에 보고 겪었던 머슴, 소, 막걸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일꾼은 1950년대에서 1970년 초까지 있었다.
일꾼아저씨의 이야기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는 이유는 내가 그 당시의 시대적 가난과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몹시 가난했고, 어려움을 무던히도 겪어내야 했던 옛일을 반추하고 싶은데도 옛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 내가 너무 어려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특히나 열세 살에 대전으로 전학 간 뒤로는 시골을 점차로 잊었으며, 대전과 서울에서 살았고, 방학 때에만 시골에 내려와 잠깐씩 일꾼아저씨를 보았기에 그들의 내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스물다섯 살 나던 해부터 서해안의 작은 면소재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가 스물일곱 살인 1974년 겨울철에 대전으로 도로 나갔다.
내가 떠난 뒤 마을에서는 머슴살이를 언제부터 그만두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짐작하건대 가난의 상징이었던 농촌(어촌산촌)이, 누천 년 동안 정체되었던 전통사회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의 기치 아래 1972년경부터 빠르게 사라지고, 잊혀지던 시기였다. 초가지붕의 이엉을 벗겨내고 슬레이트와 함석으로 대체하면서 농촌사회도 급격히 달라졌고,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도시로 빠져 나갔다.
머슴을 두는 집은 대체로 농사 규모가 논 스무 마지기를 넘거나 남정네가 없는 집이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모두 객지에 나가 살았기에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도 머슴을 두었다. 동네에는 머슴이 열 명쯤 있었다.
머슴은 주인집에서 숙식하면서 일 년간 농사를 지었다.
우리 식구들은 ‘일꾼아저씨’라고 불렀지 ‘머슴’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일꾼아저씨가 식구였고, 단지 성만 다른 남이었다.
일꾼 새경은 일 년에 쌀 여덟 가마니나 열두 가마니였다. 당시에는 이자가 월 5부(5%)였으므로 일 년 치 새경을 미리 앞당겨 쓰면 쌀이 여덟 가마니이며, 농사가 끝난 뒤에 가져가면 열두 가마니였다. 형편이 어려우면 새경을 미리 받아갔으며, 여유가 다소 나으면 농사가 끝난 뒤에 받아갔다.
새경 열두 가마를 구루마에 실고 가는 날에는 일꾼은 신명이 났다. 그들의 얼굴이 그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논 마지기(200평)당 수확하는 쌀이 두 섬지기를 살짝 넘었으므로 새경을 주려면 네 마지기나 다섯 마지기가 덤으로 나갔다. 먹매를 제외하더라도 새경은 논의 수확량에 비하여 결코 적은 것만은 아니었다.
일꾼이 짓는 농사 규모는 스물다섯 마지기가 한계였다. 스무 마지기가 넘으면 장정이라도 힘이 벅찼기에 논이 많은 집에서는 젖(곁)머슴을 더 주었다. 아직 장정의 힘만큼 지게에 꼴리지 않는 나이이며, 또 경험부족으로 농사를 독단으로 짓지 못했다. 젖머슴은 상머슴 새경의 절반을 받았다.
한 해 일꾼의 옷은 두 벌을 주었다. 음력설을 지낸 뒤 일꾼이 처음 들어오는 날과 칠월 백중날에는 삼베옷 한 벌을 더 주었다.
백중날은 ‘일꾼의 날’이어서 ‘하루 싫컨 놀라’고 주인이 노잣돈 주었다.
일꾼은 끼리끼리 어울려서 장에 나가 흠뻑 취했다. 술 취해 건드렁거리면서 혀 꼬부라진 일꾼은 파장에서 사 온 반찬꾸러미를 어머니에게 넘기곤 했다. 아마도 오가는 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뿐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노래와 함께 절대 빈민층의 이농도 점차 잦았다. 농촌인구의 빠른 감소로 머슴 또한 귀해지고, 귀한 만큼 새경은 조금씩 더 늘어났다. 머슴을 둔 집에서는 새경을 얼마쯤 더 올려 줄 것인지 걱정되어서 남의 눈치를 살폈다. 새경이 적으면 일꾼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또 남보다 더 주면 떠도는 말들이 많았다. 새경을 올려 줄 수도 없고 안 올려 줄 수도 없는 상황이 해마다 거듭 되었다.
곶뿌래 새앙골(샘골)의 황 씨네는 부잣집이어서 남보다 먼저 새경을 더 올려 주었다. 동네에서 떠도는 비난과 구설은 이내 흐지부지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상인심은 아무래도 덜 가진 사람들의 편이었다.
체구가 작은 어머니는 일꾼을 고를 때는 일꾼이 상머슴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먼저 따졌다. 여러 사람들에게 문리했다(물었다). 힘이 세다고 상머슴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을 상(上)으로 쳤다. 논농사를 지으려면 이삼십 여 명의 일꾼들을 한꺼번에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즉 평소에 동네사람과 이웃동네 사람까지도 잘 어울렸다가 농번기에 이들을 모두 불러들일 수 있는 수완을 먼저 쳤다. 무학자인 어머니는 자기 깜냥대로 일꾼아저씨의 교섭능력을 더 쳐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일꾼아저씨가 농사를 직접 짓기보다는 남의 집 일꾼들이 농사를 지었다고 본다. 일꾼아저씨는 구루마와 쟁기를 잘 다루어야 했다. 우리 집에는 대전에서 지에므시(GMS) 트럭으로 싣고 온 구루마(달구지)가 있었다. 바퀴도 여느 발통이 아닌 비행기의 단단하고 매끈한 바퀴이었고, 목재소에서 각 지게 켠 참나무로 짜서 만든 크고 멋들어진 구루마였다.
일꾼은 오일장(2일, 7일)마다 구루마를 끌고 장터로 나갔다. 동네의 벼가마((쌀, 보리, 밀, 콩, 고구마, 스슥(조의 방언))등 무거운 짐을 날라주고, 올 때는 다른 장 물건을 조금 실어 날랐다. 또 벼 공출(농지세, 벼 수매) 때도 장에 나갔으며 타동네로 방아를 찧으러 다녔다. 동네 방앗간을 이용하지 않고 타동네로 방아 찧으러 가는 사람들은 죄스러워했다.
구루마 삯은 돈보다도 일품(품앗이)을 외상으로 달았다. 일꾼아저씨는 쟁기로 남의 밭과 논을 갈아주고는 품삯 대신 일품을 달아놓았다. 소가 딸린 쟁기질은 일품이 사람 몫보다 세 배 더 많았다. 소품이 있는 날에는 일꾼은 토방에 서서 말하고, 마루에 앉은 어머니는 치부책에 꼭꼭 달아놓았다. 나는 이따금 장에 나가서 쟁기보습을 몇 개씩 사 날랐다.
장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구루마가 빈 수레이면 하학 길의 아이들도 대담해져서 책보자기를 은근슬쩍 올려놓고 또 구루마 꽁무니에 눈치껏 매달렸다. 검정 고무신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타는 재미가 여간 솔솔하지 않았다.
고무신 밑창이 쉽게 닳는 걱정도 잠시 잊은 아이들은 구루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극.
소는 ‘음메’ 했어도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일꾼은 구루마(달구지가 표준어) 꽁무니를 자주 살피고는 ‘야, 이놈들아’ 소리를 길게 내질렀다.
화들짝 놀랜 아이들은 벼메뚜기 튀듯 떨어졌다가 찰거머리처럼 다시 은근슬쩍 구루마에 달라붙었다.
우리 집 소는 웅천면내 새장터 소전(소지장)에서 사지 않았다. 우시장(牛市場)으로 유명한 서천군 판교 장터에서 사 왔다.
소 사는 날에는 어머니는 돈 전대를 아랫배에 꽁꽁 동여서 졸라매고 일꾼과 함께 새벽에 걸어 나갔다가 한밤중에 걸어서 되돌아왔다.
새로 사 온 소는 듬직하게 컸으며 힘도 셌다. 눈망울이 유난히 큰 암소는 눈망울만큼이나 우직하며 순했으며 송아지를 밸 요량으로 암소만을 골랐다.
한 번은 새로 사 온 소의 등치가 큼직하고 듬직했으나 구루마를 끌지 못하고, 쟁기질을 전혀 못했다. “속았다”는 소를 다음 장날에 되팔고 새로 산 온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 때 내 일과는 소 뜯기는 일이었다. 소 콧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둥근 막대기를 꼽아서 묶는 코뚜레, 거기에 길게 꿴 나이롱 줄을 슬그머니 쥐고 들판으로 나갔다. 들풀을 마음껏 뜯어먹게 했다.
한적한 신작로 가생이, 논두렁에는 소와 나 둘뿐일 때가 많았다. 한가로운 들판에 정적만이 감돌면 나는 하모니카를 늘어지게 불었고, 소는 맹꽁이배만큼 풀을 뜯어 먹었다.
내가 저녁 무렵에 소를 몰고 집으로 오면 소는 나무판자들로 짜 맞춘 둥근 구정물통에 주둥이와 코를 박고는 틉틉하게 쉰 구정물을 거의 다 마셨다. 소가 배 터져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으며,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어머니는 흐뭇해했다.
내가 소를 뜯기면 일꾼은 소깔(풀)을 조금만 베어와도 되었다. 그만큼 일꾼아저씨가 농사일을 더 돌볼 수 있었다.
소와 나는 여름방학 동안 내내 풀을 찾아 들과 산으로 나돌아 다녔다.
우리 집 일꾼아저씨는 논일에 치중하였지 밭일은 등한시했다. 손공이 많이 가는 논에 일손이 딸렸기 때문이었다. 일꾼아저씨는 틈이 나면 쟁기로 밭 갈고, 씨 뿌리면 밭일은 그만이었다. 밭 매는 것은 가외였다.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을 품으로 사서 긴 이랑의 풀을 잡아야 했다.
때로는 남자 일꾼들이 밭에 들어서기도 했다. 오후 서너 시 경에 논일(지슴)을 끝낸 뒤 저녁 때것(새참)을 먹으려고 집으로 왔다. 때것을 마친 뒤에는 이삼십여 명의 사내들이 밭에 일렬로 들어서서 호미로 흙을 득득 팠다. 한켠(한편의 방언)에서는 풍물잡이들이 풍물을 치고, 나머지 사내들은 풀을 듬성듬성 쥐어뜯었다. 사내들은 신명으로 일했다.
하루의 일이 끝났어도 풍물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술때문이었다. 장터 술도가에서 자전거로 배달해 온 술통들을 거꾸로 쳐들어서 술바탱이(장독) 턱주가리에 걸친 다음 술을 퀄퀄 부었다. 술은 살아서 출렁출렁거리면서 쏟아졌다. 막걸리는 하룻밤을 새면 곧 쉰내가 났다. 쉰내가 너무 심하면 아깝더라도 자수물통에 내다버려야 했다. 막걸리가 더 쉬기 전에 다 마셔야 했다. 그래서 남은 막걸리는 모두 내왔다. 틉틉하게 쉰(발효된) 막걸리에 흠뻑 취한 채 신명나게 놀았다. 집으로 돌아갈 줄 몰랐다.
수십 명의 일꾼들이 한꺼번에 일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모 심기, 세벌(초벌 두벌 세벌)김매기, 벼 베기, 볏짐 나르기, 벼 바슴과 보리 베기(보리 바슴), 풀치기(산에서 풀을 베어 와서 퇴비장에 쌓아서 퇴비를 만듦)하는 날이다.
당시에는 농기계가 없었으므로 손으로 모를 찌고, 심고, 낫으로 벼를 베고, 지게(등짐)로 볏단을 날랐다. 많은 일꾼들이 지게에 두 개의 대나무 막대기를 덧대고 볏가리를 높게 쌓아 짊어졌다. 겅충겅충 출렁출렁 거리면서 행길(신작로)을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 왔으며, 구루마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바깥마당에 노적가리를 다섯 동이나 높게 쌓아 올렸다.
바슴은 늦가을에 했다. 찬 서리가 뽀얀하게 땅에 내린 첫새벽부터, 어둠이 채 가시기 전부터 사내들은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바슴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마당가에 장작불을 피워서 언 몸을 녹이고, 뜨거운 국물과 새벽밥으로 빈속을 채웠다.
일꾼이 노적가리에 올라가서 둥글게 쌓은 노적가리를 헐어서 볏단을 땅에 내던져 내렸다. 땅에 떨어진 볏단을 운반하고, 볏단을 새끼줄(샛나끼)로 동여맨 후 어깨 위로 쳐들어 올렸다가 절구통에다 힘껏 둘러 매쳤다. 볏낱이 우수수 사방으로 튀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한 뒤 홀태(호롱기, 와룽꽈룽기)를 밟는 사람들에게 넘겼다. 홀태는 톱니바퀴 물리는 소리, 시끄러운 굉음을 내면서 벼 알곡을 쏴르르 털어냈다. 짚토매가 연방 뒤로 내던져졌다. 사내들의 고함소리도 신났다.
내 어린 시절은 근력으로 하는 바슴이기에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다. 딸딸이(경운기)가 보급된 뒤로는 경운기 엔진에 피대를 걸어서 탈곡기를 돌렸다.
내가 스무 살이 넘은 뒤에는 반자동화된 탈곡기의 성능이 개량될수록 일꾼의 숫자는 반대로 계속 줄어들었다. 사내들의 시끌벅적거리는 잡소리, 탁하고 거친 웃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일꾼은 하루에 논 반마지기 일을 더 했다.
당시에는 일꾼 한 명당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즉 논 반 마지기를 살짝 넘는 분량이 하루의 일거리였다. 일을 하루나 이틀에 끝내려면 동네 사람은 물론 타 동네사람까지도 많이 불러 모아야 했다.
한 사람이 논 한 마지기의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새벽 서너 시 경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쉴 사이 없이 일하는 경우다. 자기네의 일이거나 한 마지기당 얼마씩 품값을 더 주기로 약속한 맡고지기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죽을동살동 일하는 분량이었다.
식구가 아니면 남의 일꾼을 그렇게 부릴 수는 없었다. 맡고지기 일이라도 사람들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탈진했다.
우리 집에는 일꾼사랑방이 있었다.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사랑방에는 일 년 중 대부분 아침저녁마다 군불을 때서 소죽을 끓였다.
그 당시에 소는 식구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 쇠죽솥에서는 볏짚과 쌀겨 익는 구수한 냄새가 났으며, 밤새껏 워낭소리(방울)가 딸랑거렸다.
아랫목 윗목(윗목의 방언)이 잘잘 끓은 뜨거운 구들장 방에서는 동네 머슴, 청장년 아저씨들이 항상 바글거렸다.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욕설 그리고 땀에 절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비 내리는 날이거나 밤중에는 지푸라기로 삼태미, 메꾸리, 멍석, 소 덥석 등을 만들었다.
바슴이 모두 끝난 늦가을에는 지붕 이엉도 엮었으며, 나무자새로 동아밧줄을 길게 꼬았다.
우리 집 식구는 보리꼽살미(꽁보리밥)로 밥 먹고, 일꾼아저씨한테만 쌀밥을 드렸다.
일꾼아저씨는 밥상머리에 앉은 쌍둥이에게 조금씩 남겨 주었다. 주인집 아들인 내가 밥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이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가마솥에 쌀을 안칠 때에 가마솥 밑바닥에는 보리꼽살미를 깔고 그 위에 쌀을 안쳤는데 쌀밥과 보리밥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밥은 일꾼아저씨 몫부터 먼저 펐으며 그 후에는 쌀밥과 보리밥을 마구 섞어서 식구들의 밥을 펐다. 우리는 그게 불만이었고, 어머니는 ‘일하는 일꾼아저씨한테는 쌀밥을 드려야 한다’고 무언으로 애들의 식욕을 억눌렀다. 부어터진 입술을 삐죽이 내밀면서 가새(가위가 표준어)로 빡빡 깎은 대갈통(머리통)을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2008. 1. 28.
예전에는 일꾼을 가외로 넉넉하게 구했습니다.
풍물잡이 몇 명은 장구 징 꽹가리 북을 치면서 신명나게 놀이하면서, 농사 지었지요.
요즘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당시의 여유였지요.
일부만 퍼 왔다.
오늘은 2018. 4. 21. 토요일.
서울 올라온지 아흐레째. 마음은 시골 텃밭에 가 있다.
건달농사꾼이라도 일해야 되는데... 두릅순, 엄나무순, 가시오가피순을 따야 하고, 감자밭도 매주고, 호박모종도 옮겨 심어야 하고... 잡다한 정원수 산풀 들꽃도 옮겨 심어야 하는데...
갯바다에 나가 바람도 쐬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지금
마음이 답답하여 예전에 써 둔 위 잡글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고맙지요.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 주셨기에.
2018년 지금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50연, 60년 저너머의 농촌풍속이네요.
논 농사를 정말로 소중하게 지었지요. 경제단위는 쌀이 척도였지요. 농지세도 벼로 공출했고,
지금은요? 천벅꾸러기이지요. 2016년 서해안에서 쌀값은 80kg 한 가마니가 102,000원. 작년인 2017년에는 의외롭게도 140,000원으로 대폭 올랐대요.
그래봤자이지요. 하루 품값도 안 되지요. 농촌에서 일꾼 품값도 한 한 가마니가 훌쩍 넘지요. 기술 가졌으면 250,000원도 요구하대요.
차라리 농사 안 짓는 게 낫겠지요.
머슴(일꾼)은 도시노동자로 유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지요.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인데...
저도 충남 홍성이 고향입니다.
제 유년 의 시절을 그립게하는 장편의 글이네요.
옛생각에 두번일고 추억에 젓어봅니다.
예.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홍성나들목이 나오지요. 태안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요.
홍성군에는 덕숭산, 가야산이 아기자기한 산세로 사랑받고요.
특히나 홍성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서산방조제 너른 들판과 갯바다를 바라보면서 태안군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지난 3월에도 홍성읍내에 홍성관아(옛건물)에 잠깐 들른 적도 있고요. 홍성에는 명소가 많이 있지요. 김좌진장군의 생가지 있으며,
만해 한용운의 태생지이고.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이름을 날린 구국의 고장이고요.
산과 들, 바다를 함께 가진 좋은 곳인 홍성이 고향이군요.
고생많으셨지요 옛날 어르신들 그분들덕에 우리가 이만큼 잘사는건데 지금 젊은이들은 모르는것 같아 아쉽습니다.
오늘 저녁 tv에서는 탄광지대의 갱부들의 이야기가 나오대요.
땅속 지하 갱도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고, 운반하고, 이물질을 골라내고, 분쇄하려면 온통 석탄가루를 들이마셔야 하지요.
폐가 무엇이 되겠어요? 힘들게 일한 댓가는 폐암 등에 걸려서 일찍 죽고... 농사도 그랬지요.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를 키우려고.. 맹독성 농약을 숱하게 쳤고...
그래도 무학자인 부모님들은 자식들 공부 가르치려고 등꼴 빠지게 일했지요.
제 아비 어미도 무학자이지요. 저는 덕분에 대학교에 다녔고...
먹을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넘쳐나네요. 세상 정말로 많이 변화했지요.
제 서해안 고향에는 1974년 6월에서 전기불이 들어왔지요.
문명의 이기가 시작..
대하소설 한권을 읽은 듯 합니다.
박경리님의 토지도 생각나구요.
산촌에서 자란 저는
농촌의 실상을 잘 모르긴 하지만 곰내님의 글로서 그림이 그려집니다.
잠시 내용에 푹 빠져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비록 풍요롭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여유로웠던
그 때 그 시절이 많이도 그리우시겠습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베리꽃님이 살았던 태백산줄기 하늘아래 세 평 반인 곳보다는 제 고향 뜰이 조금 더 넓겠지요.
산골이라도 농촌마을이었지요. 다랭이 논이 줄줄이 이어지고.
예. 베리꽃님네 마을만큼은 아니어도 촌사람이 순박했고, 논농사, 밭농사를 지을 때면 동네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왔지요.
일을 신명나게 했지요. 풍물(징, 장구, 북, 깽과리)를 치면서 흥을 돋구고,
들밥도 넉넉히 지어서 지게로 나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서 밥을 먹였지요.
나눔의 시대, 두레의 세상이었지요. 지금은요? 너른 들판에는 농기계가 들어서서 일하대요. 들판에는 사람이 없고요. 기계만...
그 당시에는 혐동정신이 함께 했지요.
@곰내 해발 150m의 신한재에 오르면 충남 대천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입니다.
그 넓은 갯바다... 지금은 바다를 막아서 간사지가 되었고, 온통 논이 한없이 이어지대요.
조금 고개를 남녁으로 틀면 무창포해수욕장, 그 아래에는 서천군 갯바다가 줄줄이 보이지요.
당시에는 배고픈 사람이 정말로 많았지요. 산골마을이라서 대흉년이 몇 년 지속되어 논농사를 못 지니까...
장터로 나가 동냥해서 밥 먹고, 더러는 얼어죽고, 강물에 빠져 죽고...
시골사람들은 놀이문화에 익숙했지요. 일하고 노는 것이 하나의 재미였으니까요.
무당, 무수리도 많았고, 상이군인도 있었고, 전쟁과부도 있었고...
그런데 도시발전으로 농촌의 정은 매말라갔더군요.
@곰내 곰내님의 글속에
살아보지 않은 농촌이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네요.
새참을 인 아낙네들은
서둘러 집을 나서고
품앗이로 모인 동네어르신들은 논에서 모심기에 한창이고
한가로히 풀뜯는 소들과
소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실 산촌은 그려지는 풍경이 그리 다양하지가 않습니다.
세평 반 하늘아래다 보니
농토도 조금 사람도 조금
풍습도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죽으나 사나 저는 엄마와 단둘이의 삶을 그려낼 뿐이지요.
제가 그리는 시골의 풍경이 곰내님 마을에
다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노인들만 남아있는
지금의 시골농촌,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촌이 풍요러웠으면 하는 맘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70대 농사꾼이 40%가 넘는 실정이지요. 이들의 평균 수입은 1,000만 원(총수입이므로 여기에서 자제값, 인건비 등을 빼야겠지요).
'풍요로운 농촌'은 없습니다.
1970년대 농촌지역에도 새마을운동이 번질 때 '풍요로운 농촌'이란 문구를 썼지만 그거야 위정자나 하는 소리이고.
먹을거리. 세상에 넘쳐나지요.
해외에서 대량수입되는 농산품 가격은 해마다 싸지요.
하나의 예.
제 아버지는 1982년 서울대학교병원 특실입원환자.
간식거리로 바나나 사다 드릴 때 저는 동대문시장에서 1 ~2개 샀지요.
무지하게 비쌌거든요.
지금은요? 배 터지게 먹을 만큼 싸대요.
세세하게 잘 적어주셨네요
어릴적 잠깐 시골살다가 서울에 와서
도회지에 익숙한 사람 이지요
잘 읽고 갑니다~^^
예. 댓글 고맙습니다.
사실은 초안수준이지요.
10년 전에 초안상태로... 퇴직한 뒤에는 컴퓨터 없는 시골에서 살다가...
지금 다시 손질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도 사라지고, 느낌은 억세져서 뻣뻣하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나를 들여다봅니다.
곰내님 어머니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
일꾼들에게 그리 하셔다는것은 자비하시기도 했지만
일꾼들이 더욱더 열심히 일 했을거에요
지금 시골은 할일니 넘 많어요
저도 동생 네 작은 텃밭과 꽃밭 가꾼다도
또 쑥도케야하고 두릅도 따고 망초대도
넘 바뻐요바뻐
힘은 많이 들지만
전 요런일들이 잼 있어요
그래야 20일 정도 지나면 수월할것인데요
예. 일꾼들은 3 ~4년씩 일했지요.
예 모두 일 열심히 했어요. 당시에는요. 부잣집 농사에는 일꾼이 늘 넉넉했으니까요.
풍물치며 논 농사를 지었지요. 하나의 놀이였기에.
아름다운 우리의 고향같은 글 잘읽었습니다
곰내님은 올 봄도 바쁘시네요 ㅎㅎ
운선 님 고맙습니다.
님은 수필집 두 번째도 성공하셨지요.
또 산문집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