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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군정충신영정각(錦南君鄭忠信影幀閣)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33호(전북)
명 칭 : 금남군정충신영정각
지정일 : 1984. 04. 01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 413-4
장계면 소재지에서 천천면 방향으로 약 1.5㎞ 지점에 장계면 금곡리 원금곡 마을이 있다
천천면 소재지에서 장계면 방향으로 약 2㎞ 지점 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1984년 4월 1일
전북 문화재자료 제 33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관리 되어온 금남군 정충신 영정각이 있다
이 곳에는 만운 정충신(1576~1636)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나는 토요일 오후를 택해서 이 곳을 답사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1월의 중순인데도 날씨가 좋아
겨울답지 않는 나른한 오후이다 올해가 을미년 온순한 양 이라서 그럴까 그리 춥지않다.
장수를 출발하여 계남면 소재지 지나면 장수 IC가 나온다 이곳 고속도로 이용하면
대전, 통영, 익산등 전국을 못가는 곳이 없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장계면 소재지에서 천천, 전주방향 국도 26호선을 따라 가는길 약 1.5㎞ 지점에 오늘의
답사지 원금곡 마을 안내판이 나온다 도로가 우측으로 약 300m 들어가면 원금곡 마을이다
마을입구에 소나무가 울창한 나즈막한 산이 푸르름을 뽐내며 나를 환영하듯 맞이 하는구나
이 마을의 특징은 앞산과 뒷산 모두 울창한 소나무가 동네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언뜻봐도 충절과 절개가 있는 마을인듯 싶다 장계면 금곡리는 본래 장계군 임현내면에
속하던 지역으로 쇠가 많이 난다하여 쇠끼미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태종때 장수군
임현내면에 편입 되었다가 고종32년(1895년)에 계서면(溪西面)으로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금곡(金谷).가항(加項).동촌(東村)일부와 동정(洞庭),월계(月溪)를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계내면에 편입 되었다 훗날 장계면으로 바꿨다.
“금남군정충신영정각”이 자리하고 있는 원금곡은 일명 “쇠끼미“라 부른다
이 마을이 조성된 설화는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오고있다 옛날 어느날 노인 한분이 마을너머
칡넝쿨이 우거진곳(원금곡마을)에 새터를 잡으라고 하였다 그 곳에 자리를 잡으면 당대에
쌀 백석(百石)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가마 혈 때문에 밥이 가득할 것 이라고 하면서 동네 주위의
이름도 지어 주었다한다 곱돌고개, 우렁바위, 월계, 노다지골, 차돌배기, 부자방망이 등이며
마을이름을 쇠가마(金谷), 쇠끼미(쇠가마)로 지어 주었다 그후 이곳 마을에서 많은 부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 마을 중간에 소나무가 빽빽이 둘러쌓여 엄호하고 있는듯하고 약간 경사진
곳에 양지바른 명당터 초라하지만 기풍이 서려있는 영정각이 보인다
이 곳은 만운 정충신(晩雲 鄭忠信)(1576∼1636)의 후손인 정백흥(鄭百興)이 순조11년(1811년)
3월16일에 이곳 금곡(金谷)에 영정각을 세우고 영정을 모시고 있고 이곳의 영정을 그린 작자는
미상으로 전해진다.
영정각 옆에 1991년에 세워진 사적비를 보면 공(정충신)의 6대손인 정백흥 부장통훈대부
(部將通訓大夫) - 조선 시대,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의 문관 품계.
“行縣監 百興이 入長水하여 1811年 影幀閣을 創建” 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자료를 찿아보니 정백흥이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사실이 없고 장수와
아무 연관이 없다 무슨 연유로 인하여 이곳 장계면 금곡리에 정충신 영정각을 세웠는지
궁금하고 답답하여 백방으로 찿아 봤으나 찿을길 없었다 본인은 고민끝에 서산에 거주하는
정충신장군 후손들인 문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서산시청 문화관광부서에 전화를 하여 정충신후손의 문중 회장님의 번호를 입수하여서
문중 회장님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영정각이 장수에 생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500년대에 장계 금곡일대로 정충신장군 큰 형님이 이주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정충신 장군은
3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장계면 금곡리에 이사를 하여 가족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살고 계신다고 전한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1811년 후손인 정백흥이
장수를 방문하여 큰형 옆으로 동생 정충신장군 영정을 모시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고 한다
나름의 대답을 들을수 있었다 비록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문중 족보를 근거로 하여 판단을
하니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영당(影堂)은 정면3칸, 측면2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곳에는 매년 음력 9월18일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이 곳에 모셔진 영정은(125㎝×75㎝) 크기로 되었으며 비단에 그린그림 즉 견본채색(絹本彩色)
으로 금남군 정충신 좌상(座像)을 모사한 것인데 작자는 누가 그렸는지 기록 되어있지 않는다
영정각을 들어가는 입구의 문은 2개의 나무 대문으로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입구
기둥 오른쪽에 “금남군 충무공 충신 금곡영당” 이라는 한문 글씨가 판자에 세로로 쓰여있다
서너발 옮기어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 건물 중앙에 “影幀閣”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누가 쓴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영당(影堂)은 굳게 잠궈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옆 뜰에는 희미하게 퇴색한 사적비가 있다 오랜세월 풍파로 인하여 글씨가 잘 보이질 않는다.
* 금남군 만운 정충신(錦南君 晩雲 鄭忠信)은 누구인가 ?
금남군 정충신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한 논문과 책이있다
이 중에 일부를 발췌하여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 충무공 정충신의 전기는 1978년
처음 간행되었다 당시의 편집 작업은 국사편찬위원회 이봉래 연구관이 주관하였고
최영희(崔永禧)위원장이 서문을 지었다 후손인 정환호선생이 오랜기간에 걸쳐 정사(正史)와
일화(逸話)를 채집하여 이책의 내용을 크게 보완하고 또 유려한 문장으로 쉽게 풀어써서
다시 편집하였다 정환호 선생은 서산여고 교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금남군충무공정충신」
저자 이시다 선조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각고의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래 글은 정충신 후손인 정환호 선생의 글을 그대로 인용함을 밝힌다
정충신 장군은 1576년(선조9)에 광주에서 태어나 1636(인조14)에 돌아가신 분으로
왜란과 호란 반정과 반란이 중첩되던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 되었고 탁월한 지혜와 전략으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고 일등공신이 되어 천추만대에 이름을 남긴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이 다이내믹하고 감동적이다.
정충신 장군은 고려말에 삼도도절제체찰사( 三道都節制體察使)를 역임하고 요동백(遼東伯)에
피봉되었던 정지(鄭地)장군의 9대손이다 그의 선대는 증조대까지 벼슬을 하던 양반이었으나
후에 가문이 몰락하여 매우 빈곤하게 되었다 장군은 가난때문에 어려서 관아(광주부)에
시종으로 들어가 잔 심부름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17세의 아이로 권율장군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그 해 7월 권율이 이치(梨峙) 전투에서 승리한후 의주 행재소(行在所)까지
장계(狀啓)를 보낼 때 鄭 장군이 전령을 자원하여 적진을 뚫고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권율의 사위였던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에게 발탁되어 학문을 익히고
행재소에서 실시한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이후 장군은 이항복의 군관이 되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군대와의 연락을 맡았고 그 일을 하는 사이에 중국어에 통달하여 어전 통역관
으로 활동 하였다 후에 군기시정(軍器寺正)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등을 지냈으며 1602년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왔으며 이후 1617년에 통신사 오윤겸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정월 이항복이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하여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 곳에서 타계하여 장례를 치를 때까지 장군이 시종일관 측근에서 수행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이때의 일을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으로 남겼다
이 책은 충무공 정충신의 대표저서로 꼽힌다.
장군은 1620년(광해군 12) 관직에 복직하여 체찰사(體察使) 장만(張晩)의 군관으로 활동하였고
당상관에 올라 창주첨사(昌州僉事)를 지냈다 다음해 만포진첨사(滿浦鎭僉事)로 재직중에 왕명을
받고 심양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후금의 정세를 자세히 파악하고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 협상하였다 1623년(인조1) 안주목사(安州牧使)로 방어사를 겸임하였고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隊長)이
되어 이괄의 반군을 서울 안산(鞍山)에서 격파하고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인조 정권의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자자 8도 부원수(八道 副元帥)에 임명되어 전국의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였고 정묘호란 후에는 서북지방의 방어를 맡았다 1633년 2월 조정에서 후금(後金)의
세폐증액에 반발하여 국교를 단절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장군은 체찰사(體察使)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국교단절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의 국제정세에 정통하였던
그는 후금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 국가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아 당진과 장연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1634) 복직되어 포도대장과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1636년 5월에 병이 심해지자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했으나 장군은 효험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자신이 입던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壽衣)로 쓰게 하는 등
은전을 내렸고 충훈부에서 공신의 예로 예장(禮葬)하였다 장군의 묘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마힐산에 있고 서산 진충사(振忠祠)와 장수(長水)의 영정각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정충신 장군은 키가 작았으나 용맹하고 지혜로웠으며 또 덕장(德將)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장군은 일등공신에 올랐으나 항상 겸손하였고 관직생활에서 청렴하였다 또 이항복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무관으로 드물게 경전과 시문에 능하였고 천문.지리.복서.의술
외국어 등 다방면에 걸쳐서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백사집(白沙集), 만운일기(晩雲日記)” 등을 남겼다
그는 천민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입신 출세하여 위대한 공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민간에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 정충신사당(진충사)
조선 전기 무신인 정충신장군(1576∼1636)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사당이다
이 곳은 인조 14년(1636) 왕명으로 세운 이후 영조 13년(1737년) 고쳐 지었다
정조 24년(1800)에는 당시 곡성 현감으로 있던 그의 5대 손인 정세환과 9대 손인 정재칠이
각각 충남 당진 정미면 신시리 현 13세손 정종열 가옥 옆으로 옮겼다 훗날 후손들이 서둘러
1970년에 지금 있는 자리(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로 옮겼다
이곳에는 중요민속자료 36호로 지정된 유품 5점을 비롯한 그의 유품들을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해마다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남 서산시 진충사
* 충무공 정충신(忠武公 鄭忠信) 장군의 묘
충무공 정충신(忠武公 鄭忠信)장군의 묘는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건립된 장군의 사우
진충사에서 서편으로 800여m 떨어진 마힐산의 국사봉 중턱에 장군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쌍분으로 안장 되어있다 2개의 봉분과 중앙 전면에 묘비가 서있고 그 앞에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앞 양옆으로 각종 석의가 있다
장군의 묘소가 이곳에 있게 된 연유는 조선 인조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때 장군
전부대장으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시키고 난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인해 진무 일등공신이 되어 나라에서 마힐산 국사봉을 중심으로 약 45만여평의
땅을 장군에게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하였다
정충신 장군은 살아생전에 아들 “빙”과 “지상”을 대동하고 유택을 친히 잡아 놓고 아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 자리에 장사를 지내주도록 당부한 곳이라고 전한다.
장군이 숙환으로 1636년 5월 4일 한양 반송방 자택에서 61세로 별세하여 이곳에
예장(禮葬)하였다 장군이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작은 공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바이니 죽은 뒤에 문자로 공적을 미화 찬양하거나 시호를 청하거나 비와 석물을
세우지 말고 다만 그릇을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묘지는 충남 서산시 문화재자료 210호로 지정 받았다.
* 중요민속자료 제36호 정충신장군 유품(鄭忠信將軍 遺品)
정충신장군의 유품들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는 정충신 장군의 진충사라는 사당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1975년 도난 당하고 2달만에 다시 찾았는데 그때 투구가 없어져 사진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된 장군의 유품은 모두 5점이다.
“영정” 중요민속문화재 제 36-1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의 초상화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시 지곡면 정충신(鄭忠信)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족자 형태의 초상화로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중국식 의자에 앉아있는
장군의 전신(全身)을 그렸다 가슴에 두른 흉배에는 구름과 모란이 그려 있으며 초상화는
‘금남군시충무정공유상(錦南君諡忠武鄭公遺像) 이라 써있어 시호가 내려진 1685년8월11일
이후에 그려진 것을 알 수있다.
“갑옷” 중요민속문화재 제 36-2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장군의 갑옷이다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시 지곡면 정충신(鄭忠信)장군의 사당에 진충사에 보관하고 있다
이 갑옷은 1630년 5월 1일 가도에서 일어난 병란을 토벌할 때에 인조임금께서 활과, 화살
검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입었던 군복이다 갑옷의 안에는 가죽을 누빈 3겹의
무명천이 들어있고 활동하기 편하게 양쪽 겨드랑이 밑에 다른천을 대었다
총길이는 116㎝ 이고 등솔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 길이는 60㎝로 목둘레는 둥글게 파여있다
앞쪽에는 지름 1.2㎝의 징을 어깨선에서 밑으로 11줄을 박고 밑으로 간격을 두고 아랫단까지
2줄을 더 박았다 이 갑옷은 오늘날 임진왜란 당시 갑옷의 모습이 제대로 고증(考證)되었는지
밝힐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어 더욱더 학문적 값어치가 높다 특히 선조임금때 이순신
장군의 갑옷이 바르게 고증 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되고있다.
“서군사명기” 중요민속문화재 제 36-3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장군의 깃발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시 지곡면 정충신(鄭忠信)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이 깃발은 싸움을 할때 제일 앞장서서 부대사기 및 부대의 징표이다
이 깃발에는 ‘서군사명(西軍司命)’이라 써 있고 총길이 138㎝, 너비 55.5㎝이다
가장자리에는 가로 19㎝, 세로 16.5㎝의 주황색 비단이 붙어있다.
“향 로” 중요민속문화재 제 36-4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의 향로(香爐)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시 지곡면 정충신(鄭忠信)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향로(香爐)는 향을 피우기 위해 사용하던 기구로 놋쇠로 만들었다 좌우 손잡이가 위를향해
솟아있고 향로(香爐) 주변에는 산과 구름의 무늬가 새겨 있다 동물 모양의 굽다리 3개가
달려 있고 반원 모양의 뚜껑은 뚫어서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맨 위에는 뿔달린 용무늬 장식을
달아 꼭지 역할을 하게 했다.
“향 합” 중요민속문화재 제 36-5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의 향합(香盒)으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시 지곡면 정충신(鄭忠信)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향합(香盒)이란 향을 넣어두던 뚜껑 있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둥그런 형태에 3개의 삼각 다리가
달려 있으며 뚜껑은 중앙이 약간 솟은 모양으로 한가운데 꼭지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그러나 향로에 비해 형태가 훨씬 소박하고 무늬가 없다.
* 금남군 정충신 시비
광주시 남구 사직공원 내 “정춘신 시비”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우는 저 두견아 !
촉국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거늘
지금껏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정충신은 조선이 임진왜란에 이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당하자
위와같이 우국충정을 노래했다 지금도 금남로에는 정충신의 애국정신이 흐르고 있다
광주시 남구 사직공원내에 있는 금남군 정충신의 시비로서 1974년10월15일 광주시에서
건립하였다 광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이 김덕령 장군과 고경명 장군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에비해 정충신장군은 많이 알지 못하는것 같아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조사하게 되었다 또한 광주의 도로명 중 역사적 인물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의미로 호 “충장”
에서 따온 것이고 금남로는 정충신 장군의 군호 “금남”을 따서 붙인 도로명이다.
장계면 금곡리에 있는 금남군 정충신장군 영정각을 답사하는 길 많은것을 느껴본다
시체말로 요즘에도 빽없고 배경없는 사람들은 출세길이 막혔다 하는데 계급이 뚜렸한
조선시대에 빽없는 무명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무관의 유명한 장군 1등공신
금남군이란 칭호를 얻었을까 이내 흐뭇하구나 가슴벅차구나 신세타령만 하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워 지는구나.
찿아오는 길
☞ 서울. 대전. 통영 고속도로 → 장수IC → 장계면 소재지 → 천천.전주방향
약 1.5㎞ → 금곡리(원금곡 마을)
☞ 전주 → 진안 → 천천 → 장계방향 약 2㎞ 지점 → 금곡리(원금곡 마을)
☞ 광주 → 88고속도로 → 남장수IC → 번암면 → 장수읍 → 장계면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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