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주영숙의 난정뜰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정
노덕천 일대기
글/ 김광한
성직자, 운동권 학생,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 '지옥의 대리인' 또 는 '저승 사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서울 시경의 공안 분실장으로 있던 노덕천 경감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생김새도 섬 찟했지만 쇳소리를 내는 그의 목소리에 처음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우선 공포감에 젖는다. 단군의 자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의 잔인한 싱격 이라든가, 눈자위가 멍든 것 같은 푸른기가 감도는 얼굴만 보아도 상대방이 주눅이 드는 그런 얼굴에, 키가 구척이나 되어 마치 '수 호지'에 둥장하는 이귀와 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수호지'의 주인공 이귀는 의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협객이었지만, 노덕천이 란 인물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나 서슴지 않고 하는 위인이란 점에서 다르다.
무식한 노덕천이 경찰의 고급 간부인 무 궁화 두 개를 달기 위한 각고의 노력만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 다. 노덕천은 태어날 때부터 힘이 장사여서, 국민 학교 때 벌써 사과 한 개를 한 손으로 뭉개 버리는 괴력을 소유했었다. 국민 학교 다닐 때에는 반 친구들이,아예 그의 도시락을 번갈아 싸다 주는 등 그의 무시무시한( ?) 힘을 두려워했다. 그는 국민 학교 5학년 때 힘으로 전교를 통일했고,나아가서 이옷 학교 '가다'들까지 굴복시켰다. 국민 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봉원사로 봄 소풍을 갔는데, 마침 계곡에서 막 겨울잠을 깬 개구 리들이 맑은 물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노덕천은 개구리들을 한 마리씩 잡더니 손으로 패대기를 치면서 내장이 터진 개구리들을 보고 즐거워했다. 담임 선생이 이런 노덕 천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저놈 이담에 커서 큰일 내겠군," 하고 걱정을 했다. 그의 천성이 잔인함을 잘 알고 있는 그의 홀어머니는, 아들에게 '이웃을 괴롭히지 말고 사랑하라'는 당부를 백 번도 더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노덕천이 태어나자 바 로 유아 영세를 시켜, 아들을 부를 때는 덕천이라 하지 않고 세례 명인 '요한'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그의 성품을 온화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부가 하기 싫던 그는 다니던 국민 학교를 5학년으로 마감하고, 버스 회사의 차장이나 조수로 일을 했다. 버스 차장으로 있을 때 운전수들로부터 구박을 받던 노덕천의 소원은 버스 운전수가 되는 것이었다.
운전 학원이 없던 그 시절, 그는 운전을 배우기 위해 버스 운전 대에 올라 운전 연습을 하다가 여러 번 사고를 내 운전수들로부터 경을 친 일도 있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그는 운이 좋았던지 어느 경찰서의 경비과장의 지프차를 몰게 되었는데, 그의 우직함이 경비과장의 눈에 들게 되 었다. 과장이 경찰서로 출근하기 전 과장의 자택으로 가 마당에서 그가 내려올 때를 기다려 그의 발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냄새나는 구두 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챙겨 주길 수십 차례, 마침내 경비과장은 그의 충성심에 감동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충직한 자가 있나 싶어, "덕천아, 너 순사 한번 해 볼래 ?" 하며 그의 의증을 물었다. 비록 무식했지만 그의 성실함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특채 라는 것이 있을 때였다. 경비과장의 말을 들은 그는 처음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순 경이라면 하늘같이 알았던 그였다. 하루 온종일 대기실에 죽치고 있다가 퇴근 무렵에야 경비과장을 귀가시키는 일이 그의 전부였고, 물른 월급이라야 용돈에 불과했다. 그는 경비과장의 사설 운전수였던 것이다. 허리에 방망이를 차고 호루라기를 힘차게 부는 순경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한번 순경이 돼 보았으면,그러나 그것은 넘볼 수 없는 일이었다. 경비과장이 느닷없이 순사가 돼 보라는 말을 그는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혹시 자기 같은 사람도 순사가 되는 길이 없지 않나 하는 꿈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경비과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쩐지 농담 같지가 않았다. 또 농담을 할 사람도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너 순사 될 맘이 있냐?" "하고는 싶지만 국민 학교도 못 나온 놈이‥‥‥‥ "그까짓 것은 괜찮아. 내가 영감님들한테 잘 이야기하면 되는 것 이고‥‥‥‥ 그는 집에 돌아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가 순경으로 정식 발령이 난 것은 1년이 지난 후였다. 고용직 에서 임시직, 그리고 형식적인 시험을 거쳐 순경이 되었던 그는 세 상이 모두 자기 것 같았다.
순경이 되고 그는 기술직으로 백차 운 전을 했다. 괄시받던 버스 차장, 조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었다. 백차를 몰다 보니 수입이 괜찮았다. 그해 그의 홀어머니가 죽자 그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됐는데, 그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였다. 노덕천 역시 유아 영 세를 받았지만 성당 같은 데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는 성당에 같이 나가자는 부인의 말에, "경찰관이 그런데 어떻게 나가나. 당신도 집안일이나 잘하고 그 런데는 절대 나가지 말아." 하며 성당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 "당신이 순경이 된 것도 모두 천주님 덕이에요. 천주님을 그렇게 대하시면 죄받아요." "천주님 좋아하네. 천주가 어디 있어 ? 저희들이 장사 해먹기 위해, 없는 하느님을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 절을 하란 말이야! " 하며 그는 벌컥 화를 냈다. 이때마다 그의 부인은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친주여,용서하소서, 저 사람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옵니다. 제발 저 사람을 빨리 회개시켜 큰 은혜를 받게 하소서." 그러나 노덕천은 부인의 이런 기도에도 불구하고, 집에 모셔 놓은 성모상이나 고상들을 모두 집어 던져 부숴 버렸다. "이런 귀신 단지 같은 거 다시 들여놓았단 봐라. 재수없게시리." 부인은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이런 사실을 모두 고백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다. "회개할 날이 있을 것이오.잠시 그의 영혼 속에 악령이 침투했을 뿐입니다. "
하면서 시간을 내서 노덕천을 만나 보겠다고'했다.
노덕천이 유아 영세를 했다면 성령의 빛이 조금쯤은 들어 있을 터이고, 언젠가는 회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신부는 노덕천이 노는 날을 택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노덕천은 며칠 전 지급받은 권총을 소제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버스 차장에서 권총까지 차게 된 순경이 됐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에게 꾀죄죄한(?) 로만 칼라 차림의 신부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그는 비아냥부터 했다,그의 부인이 신부를 소개했다. "신부님이세요, 인사드리세요," 노덕천은 권총 소제를 끝낸, 기름칠해 반짝반짝 빛나는 권총을 들고, "신부님이시라면 이 권총 알을 맞고 살아날 수가 있다고 생각합 니까? 천주나 예수가 살려 준답디까?" 하며 권총부리를 신부의 얼굴에 들이댔다.
기겁을 한 그의 부인이 '주여, 이 불쌍한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며 화살 기도를 올렸다. 늙은 신부는 노덕천에게 인자한 말로, "형제여,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오. 형제의 마음 속에 있는 강퍅함을 순하게 만드시오. 기도합시다. " 하혀 그의 머리를 만졌다. 그러자 노덕천은 발끈 성을 냈다. "아니, 이 새끼가 어따 손을 땠어 ! 너 한번 죽어 볼래 ! ". 하며 따귀를 때렸다. 그의 부인이 만류를 했으나 듣지 않았다. 느 닷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노신부는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노덕천은 그게 더 화를 돋구었는지, "내가 알기에는 예수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놓으라 고 했는데, 이번에는 왼쪽을 맞아 보겠나 ! " 하며 벌떡 일어났다. 노신부도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그것이 형제의 소원이라면‥‥‥‥ 하며 왼쪽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신부의 왼쪽 뺨을 때렸다. 노신부가 그의 억센 힘에 못 이겨 쓰러졌다. 노신부는 쓰러지면서 '주여, 저 어린양을 용서하소서' 했다. "당신 미쳤어요! 신부님 ! 오, 신부님‥‥‥‥ 하며 그의 부인이 쓰러진 신부를 얼싸안았으나, 노덕천은 발길로 부인을 걷어찼다. "이것들이 모두 한통속이로군 ! 빨리 꺼져 ! 감히 대한 민국 경 찰관에게 ‥‥‥‥ 하며 권총을 들이댔다. "빨리 꺼져 ! " 신부는 노덕천의 회개가 꽤 늦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집에서 물 러났다.
그리고 그의 부인을 위해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그녀의 어려움이 어서 빨리 끝내기를,그리고 노덕천의 마음 속에서 평화가 깃들기를 빌었다. 노덕천은 신부가 다녀가고부터 더욱 교회나 성당 같은 데 나가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일요일날 그의 부인이 성당 갈 차비를 하면 고함을 지르고 문을 아예 닫아 버렸다. "성당에만 나갔단 봐라, 당장 이혼이야 ! " 부인은 그가 출근하는 날을 택해 성당에 나가 미사도 드리고 했 으나, 가끔씩 발각당해 그에게 손찌검을 당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부인은 창피해서 성당은커녕 바깥 출입도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비가 오는 날 부인이 성당 가는 낌새를 차리자, 그의 부 인이 쓰고 있던 우산대로 엉덩이를 찔러 버렸다. 뾰족한 우산대가 엉덩이에 곶혀 피가 낭자하게 흘러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부인은, "주여, 그분에게 들어 있는 마귀를 쫓아 주소서." 하며 밤새껏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의 표적인 노덕천의 마음 속에 있는 힘센 마귀( ?)의 세력보다 약했는지 더더욱.그녀를 박해했 다, 백차를 몰던 노덕천은 택시 운전사들이 자기에게 굽신굽신거리는 것이 .여간 기분이 좋질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완장을 차야겠 다는 생각이었다. 범법 운전사들로부터 받는 수입( ? )도 짭짤하고 그런대로 살맛 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엔 백차 모는 일보다 수사과나 조사계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학력이 국민 학교 중퇴한데다가 머리도 명석치 못한 그를 수사과 형사로 쓰는 데 간부들은 망설였다. 노덕천은 수사과장을 찾아가 애걸을 했다. 그리고 두툼한 돈봉투를 건됐다. 돈봉투는 그가 운전수들로 부터 갈취한 것이었다. 돈봉투를 확인한 수사과장은 '고려해 보겠 다'면서 서랍 속에 넣었다. "과장님, 소원입니다. 형사가 돼서 열심히 범죄 소탕하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 머리는 모자라지만 생김새가 우락부락하고 힘깨나 쓰는 노덕천을 수사과장은 수사과로 발령시켰고, 그 후부터 노덕천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것처럼 활개를 치게 되었다. 공부 머리는 없지만 사람 잡는 머리는 비상해서, 그의 손에 한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가 없었 다. 주로 소매치기, 절도, 강도범들이 그의 손님이었다.
그래서 그해 한 해 동안 그의 손으로 형무소를 가게 된 사람이 1백 명도 넘었다. 형무소 안의 감방 벽에는 그를 저주하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지 옥의 염라 대왕 노덕천, 두고 보자.'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자 형사들에게 칭찬받는 일이 즐거웠다. 따라서 여러 번의 서장 표창과 경찰국장 표창, 나중에는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진급도 순경에서 경장, 경장에서 경사, 그리 고 그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경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시국이 시끄럽다던 70년도, 마침내 그의 세상이 왔다. 정부를 비판하는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고,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체제 운동이 날로 심화됐다.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정치권은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도둑놈 잡는 것에서 그는 반체제 인사를 체 포해 고문하는 일이 주업무가 되었다.
그는 수사과에서 정보과로 옮겨 왔다. 경찰 고위층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성직자를 체포하는 일이었 다. 그렇지 않아도 성직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그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소명( ?)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성역이라는 성당 이나 교회 같은 곳을 무상 출입했다. 그는 성직자를 성직자로 대하 지 않고 파렴치한 범죄자로 취급하는 몇 안되는 경찰관이었다. 성 직자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으면 스스로 신자로 가장해 성당에 가 강론을 듣고, 강론 내용에 수상쩍은 말이 있나 체크해 잡아들이곤 했다. 그의 부인에게는, "성당에 나가는 것 허락하겠다. " 고 했지만 성당에 나가거든 신부나 신자들이 이상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곧 이야기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처음 부인은 성 당에 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남편이 회개하는구나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 더 큰 실망을 했다.
"당신 점점 더 죄를 짓는군요. 하늘 무서운 줄 아세요."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이때 천주는 무슨 천주야. 나라가 망하 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월남을 보라구. 월남은 데모하다가 망했 어. 우리 나라도 지금 그 짝이야."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성직자나 데모 학생들을 잡는 데 수훈 을 발취했다. 경찰서장이 그의 노력을 치하했다. "자네 같은 애국자 때문에 나라가 지탱하는 거야. 수고했네." 하며 악수를 내밀 때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날아가는 기쁨을 느 줬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국가를 좀먹는 무리들을 노덕천이가 뿌리뽑겠습니다. " 그러나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동료들은 그와 술자리조차 히지 않으려 했다, 강한 자에게 종처럼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그의 노예 근성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가 존경하는 사람은 직속 상관 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러한 공적으로 받은 표창장을 표구 사에 맡겨 표구를 해 방 안에 걸어 놓고 즐거워했다. 물론 훈장은 따로 케이스를 만들어 영구 보존했다. 그의 부인은 이런 남편의 허세를 근심했다. 그래서 이혼까지 생 각했으나 자식들을 생각해 차마 이혼은 하지 못했다. 또 천주교에 서는 이혼이 금지가 돼 있었다. 이런 노덕천이 꼭 한 번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현정부 물러가라는 데모가 고려대에서 한창일 때, 그는 신문 기자를 가장하고 학생들 틈에 끼였다. 그는 소형 카메라 로 데모를 주도하는 학생에게 다가가 계속 셔터를 눌렀다.
다른 기 자들은 모두 보도 완장을 찼는데 가죽 잠바에 우락부락한 노덕천이 아무래도 기자 같지 않아서 학생들에게 잡힌 것이다. "어느 신문사 기자요? 신분증 좀 봅시다. " "신분증을 놓고 왔습니다. " "기자가 신분증도 없다니 말이 됩니까? 어느 신문사요?" "T신문사 사회붑니다. " "신문사라고요? 이 사람 수상한데," ""선생 이름이 뭐요? 그는 없는 남의 이름을 둘러다 댔다. "남덕천이오," 학생 한 명이 신문사에 조회를 했다. 물론 가짜였다. "당신 형사죠? 정보과 형사죠?" 노덕천은 얼굴이 새파래져, "아닙니다, 아닙니다. " 하면서 사색이 되었다. 그러자 그에게 고문을 받은 적이 있던 학생 한 명이 그의 얼굴을 보고, "당신 노덕천 형사죠, 독재 정권의 개말이야 ! " 하며 부산을 떨었다.
"여기 노덕친을 잡았소 ! 악질 노덕천이 ! 죄 없는 민중을 고문 한 빨갱이보다 더 나쁜 놈 ! " 한 학생이 소리치자 그의 주위로 몰려든 학생들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가죽 잠바가 벗겨져 나갔다. 그는 이러다가는 죽겠다고 생각했는지 학생들에게 빌었다. "학생님들.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 하며 마치 파리가 두 손 모아 비는 것처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이때 그의 매맞는 모습을 본 근처 성당의 보좌 신부 김요셉 신부가 학생들을 만류했다. "때리지 마시오, 학생들은 불의한 정권을 향해 항의하는 것이오. 학생들의 순수성이 희석돼요. 이 사람은 경찰관으로서 임무를 수행 하는 것이오. 잘못은 불의한 정권을 운영하는 정치가들에 있소. 이 사람을 풀어 주시오._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소." 그러자 노덕천에게 고문당한 학생이, "신부님 이놈은 사람도 아닙니다. 개만도 못한 놈입니다. 신부님 이 당하시지 않아서 모르십니다. " 하면서 계속 구두발로 그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김요셉 신부는 그를 타일렀다.
"이 사람은 나이로 보아 학생들의 아버지뻘이오, 증오를 줄이시 오. 원수를 죽인데서야 말이 되오. 이 사람에게 특별히 원수진 일도 없지 않소," 하며 학생들의 손에서 노덕천을 풀어 주었다. 노덕천의 얼굴은 흙 투성이였다. 김요셉 신부는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노 덕천은 숨을 헐떡이며, "고맙습니다, 신부님,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가십시오. 살면서 죄짓지 마십시오. 조그만 권력을 억압의 도구 로 사용치 마십시오. 편안히 가십시오," 노덕천은 짓밟힌 가죽 잠바와 망가진 카메라를 주워 들고 비틀 거리며 학교 정문을 나왔다. 자기 신세가 이렇게 비참해질 줄 몰랐 다. 그러나 그는 그런 와중에도 자기를 구타한 학생들 몇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속으로 '잡히기만 해 봐라. 이놈들을 그냥 놔두나 봐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경찰서로 돌아온 그는 학교에서 수모를 당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수고했소. 당신 같은 경찰관이 있으므로 인해서 국가가 보위되는 것이지." "면목없습니다. 앞으로도 빨갱이 잡는데 앞장서겠습니다. " 그는 데모를 하는 학생들이나 구국 선언문 같은 것을 낭독하는 신부를 모두 빨갱이로 알았다. 그의 말대로 빨갱이(? ) 몇 명이 검거되었다. 그 가운데 며칠 전 자기를 풀어 준 김요셉 신부도 끼여 있었다. 김 신부는 구국 선언문에 발기인으로 참석했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그 이외에 목사 몇 명과 학생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덕천은 이때야말로 국가에서 자기에게 임무를 부여해 준 것으 로 알고 이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먼저 낯을 익힌 김 신부에게 그는 따귀부터 때렸다.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한 패거리지." 하며 그를 고문실이나 마찬가지인 독방으로 끌고 갔다. 김 신부는 이런 류의 인간에게 인간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며 칠 전 자기의 행동으로 봐 노덕천이 그렇게 나오리라곤 예상도 못 했다. "형제여 ! 내가 맞는 건 괜찮지만 형제의 얼굴이 더럽혀질까 봐 걱정 이오."
신부가 말했다. "뭐야? 어쭈, 이 새끼 봐라," 그는 신부가 입고 있던 로만 칼라를 벗겨 발로 뭉개 버렸다. "신부가 뭐 특권충인 줄 아나. 다른 형사들하곤 달라. 어림도 없 지, 숨겨 놓은 학생들이 지금 어디 있나?" "그건 잘 모르겠소." "'모르겠다고 ? " 노덕천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 히죽 웃었다. 고르치 못한 이빨 사 이에 낀 고춧가루가 유난히 돋보였다. "물 선생을 만나겠나, 전기 선생을 만나겠나? 아니면 고추가루 선생을 보여드릴까? 주문에 응할 테니까." 물 선생은 물 고문, 전기 선생은 전기 고문, 고춧가루 선생은 눈에 고춧가루를 집어 넣는 고문이었다.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노덕천은 우선 김 신부의 옷을 벗겨 그에게 수치심을 유발시키게 했다. 고문의 한 방법이었다. "신부들은 장가를 안 간다는데. 어때 ! " 김 신부가 속으로 기도를 했다. "주여 ! 이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십시오." "뭐야? 이 새끼가 주접 떠네 ! " 노덕천은 신부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꾸하는데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이런 곳에 오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김 신부의 얼굴에선 두려운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날 물 고문, 전기 고문, 고추가루 고문 등을 김 신부에게 했으나 소득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인간적인 치부만 드러 냈을 뿐이었다. "아, 이 새끼야! 나도 영세를 한 사람이야.그러나 그 따위 것이 중요한 게 아냐. 지금 나라가 망해 가고 있어. 이 빨갱이 새끼야.! " 노덕천은 아무래도 말을 안 듣자 이번에는 자기가 개발한 고문 도구를 사용했다. 그는 틈틈이 고문 도구에 대한 연구를 했었다. 상대를 기술적으로 고통을 주는 최신식 도구였다. 뾰족한 송곳 끝 에다 전기침을 따로 달아 관절을 꾹꾹 누르면 아픔이 가중되는 그 런 도구였다. 그는 이 고문 도구를 발명했다는 공로로 팀장에게 칭찬을 받았다. 김 신부는 그때마다 '용서하소서'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학생들의 소재지를 대진 않았다. 수배중인 학생들을 그는 자신의 사제관에 피신시켜 놓았던 것이다.
노덕천은 악질(? ) 성직자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인에게 교리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인은 그의 검은 의도도 모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야말로 남편이 회개를 했다고 본당 교리반에 원서를 냈다. 교리 기간은 1년이었다. 그런데 교리를 담당한 신부가 공교롭게도 김요셉 신부였다. 김 신부는 무혐의로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나왔었다. 노덕천은 김 신부를 보자 인간적인 일말의 양심이 있어선지, "그날은 미안했습니다. 카톨릭을 알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죄송 했습니다. "
하고 말했다. 그러자 김 신부는, "괜찮습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용서를 했 습니다. " 하며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는 교리를 배우면서도·혹시나 신부들이 시국에 관련된 말을 하나 예의 주시, 메모를 했다. 그리고 천주교 쪽의 동향을 조사하는 데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상관이 그런 투철한 반공관에 대해 어깨를 특툭 치며 격려를 했다. "범죄자를 소탕하는 때는.성역이 없지, 열심히 해 봐, 특히 시국 사범들이란 빨갱이와 같아." 그는 교리반의 회합에도 참석해 예비 신자들의 동향에 대해서뿐 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동태도 일일이 보고했다. 그리고 손에 걸리 기만 하면 다른 형사들에게 알렸다. 완전히 회개했다고 생각한 김 신부는 가끔씩 그와 농담도 했다. 그러나 노덕천은 그게 아니었다. 교리 시간에 김 신부가 교리 이외 의 말을 하나 주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김 신부의 사제관으로 노덕천이 들어갔다. 영세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서 마지막 교리 문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 제관은 보기보다 넓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 "영생을 믿습니까 ? " " 예."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습니까? " "믿습니다. " "됐습니다. " "영세명은 바오로가 좋겠군요." "고맙습니 다. " 이때 사제관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종이 쪽지가 노덕천의 눈에 띄었다. 거기엔 몇 월 며칠 어느 장소에서 회합이 있다는 정의 구현 사제단의 명단이었다. 이 명단을 김 신부 모르게 주머니에 집어 넣 고 나온 노덕천은 뛸 듯이 기뻤다. 그 명단에는 어느 장소에서 2차 시국 선언을 한다는 신부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날짜 가 바로 이튿날 토요일이었다. 그는 경찰서로 돌아와 이 쪽지를 실 장에게 전했다. 실장은 그 쪽지를 보고, "노덕천은 귀신이야. 애국자야. 노덕천이가 FBI 노릇은 다 하는 하며 곧 진급 승진을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들날은 노덕천의 영세식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세가 목적이 아니라 불순한 성직자를 체포하는 데 있는 그는 명동 성당 으로 달려갔다.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이제야말로 큰 건 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빨갱이들을 일망타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가슴이 벅찼다. 하늘이 자기를 도와 준다고 생각했고, 하느님은 자기편이라면서 처음으로 하느님에 대해 감사 해했다. 그가 명동 성당 고갯길을 오를 때였다, 별안간 맑던 하늘이 캄캄 해지면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박을 피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얹었다. 이때다. 그의 눈가에 뭔가 조여드는 물체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걸 떼어내려 하자 한번 붙은 물체는 옴짝달짝하지 않았다. 눈을 떠보았다. 그러 나 캄캄한 어둠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육중한 음성이 들려 왔다. "덕천아, 너는 네 이름을 버렸느냐. 덕으로 하늘을 보필한다는 네 이름을 되찾거라. 나는 너에게 복을 주었거늘 그 복을 악으로 갚았 느니라. 네 이름을 되찾기 전까지 소경으로 보낼 것이다. "
노덕천은 눈을 꿈적꿈적 해 보았다. 꼼짝도 않았다. 눈까풀만 붙 은 것이 아니라 눈까풀과 눈도 따라서 함께 붙은 것 같았다. 그는 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엎드렸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 "나는 이 땅의 어린양들을 보살피는 야훼니라." "야훼 ? " "그렇다.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f" "누구십 니 까 ?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 그리스도다. " 그제서야 그는 지난 날들의 잘못이.떠올랐다. "잘못했습니다. 제 눈을 뜨게 하신다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나는 너에게 몇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너는 그 기회를 놓쳤다. 번번이 나의 양들을 학대했고, 그때마다 나의 영토 속으로 악령을 끌어들였다. 너는 너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충복처럼 악의 무리에 충성을 다했다. 이제 그 악이 하늘에까지 미쳐 천사들이 너 의 죄를 묻게 했다. " 노덕천은 그 말씀이 들리는 데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암 흑이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장님이 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경찰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자기가 반대했던 사람들로부터 놀림거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의 곁으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렀다. 그들의 어떤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는지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끼 이제 보니 노덕천이 아냐, 악질 고문 형사! 웬일로 신성한 성당까지 들어왔어." 하며 그의 머리에 발길질을 했다. 그는 눈이 멀어 상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어서 또 다른 발길이 들어왔다. . "이 새끼 ! 여기 들어와 무고한 사람을 잡으려 하지." 그는 얻어맞을 때마다, "어이쿠,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 를 반복했다. 그의 모습이 불쌍했던지 또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은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소. 그냥 놔두시오. 벌을 받고 있는 중이오. 벌은 우리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이 내리는 것이오. 참으시오," 하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노덕천은 그가 누군지 알 수조차 없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걸했다. 다시 눈을 떠보려 했으나 비늘이 눈가를 더욱 꼭 죄었다. 이때 또다시 말씀이 들렸다. 그는 그 말씀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중이. 었다. "덕천아. 지금 곧 일어나 가거라."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주여 ! " "네가 가야 할 길이 있다. " "그곳이 어디입니까 ? "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다. " "쓰레기 매립장으로 ? " "그렇다. 거기 네 눈에 붙어 있는 비늘을 떼어 줄 사람이 있다. 지체하지 말거라." "그분이 누구십니까 ? " "프란치스코라는 사람이다. " "프란치스코 ? " "그렇다. 프란치스코다. 그 사람은 겸손하고 양순하고, 너와 같이 못난 사람과도 형제가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찾아가거라," "난지도 어디쯤입니까 ? " "쓰레기더미 가운데 움막이 있다. 그곳으로 가거라," 노덕천은 그분의 말씀을 더 기다렸으나 그 이상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었다. "저를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행인이 그의 모습이 딱했는지 그를 부축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 리고 물었다. "택시 값은 있소?" 노덕천이 주머니를 뒤져 보니 아무래도 난지도까지 갈 차비가 모자랄 것 같았다. 그러자 낌새를 알아차런 행인이, "여기 있소. 보태 쓰시오." 하고 그의 주머니에 얼마의 돈을 찔러 넣어 주었다. 노덕천이 고마 워서, "선생님의 성함은 ? " 그러자 행인이 대답했다. "당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거든 그때 그 사람에게 보태 주 시오"
이윽고 택시가 멎어 노덕천이 택시에 올라탔다. "난지도로 갑시다. " "난지도요? 거긴 쓰레기장인데. 거기 가서 뭘 합니까? "그리로 갑시다. " 운전사는 그의 말이 수상쩍었다. 혹시나 강도로 돌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승객을 살펴보니 장님이었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난지도에 아직도 사람이 있나요?" "예, 아주 훌륭한 사람이 있죠." 노덕천은 난지도로 가는 동안 마음의 강퍅함이 점차 무너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가 적대시하던 모든 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택시는 성산 회관을 거쳐 난지도로 꺾어져 들어왔다. 비포장 도 로라서 운전사가 짜증을 냈다. "요금 따로 생각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 "예, 알았습니다. " 운전사는 그를 난지도 쓰레기장 가운데에 내려놓고 갔다. 노덕천 은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도 없었다. 그는 가을 바람 이 거칠게 부는 공터에서 그분의 말씀이 더 한 번 들려 오길 기다 렸으나 그분의 말씀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찾아가는 사람이 프란치스코란 것을 알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프란치스코님 ! 프란치스코님 ! 노덕천입니다! "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흩날려 얼마 가지 않고.끊어져 버렀다. 프란치스코란 사람이 아무래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때 누군가 그의 한 손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은 무척 따뜻했다. 자신의 손길이 차갑다는 걸 느꼈다. "댁은 뉘십니까 ? " "형제가 집을 찾지 못할까 봐 마중 나왔소." "여기가 쓰레기장입니까 ? " "그렇소." "나는 ? " "형제를 쓰레기 더미에 버리지는 않소. 형제의 오염된 영혼을 쓰 레기장에 버리려 하오." "그럼 당신은 프란치스코?" "그렇소. 형제가 찾으려 한‥‥‥‥ 노덕천은 그의 발 밑에 엎드렸다. 그리고 빌었다. "저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일어나시오, 그분의 말씀대로 될 것이오. 조금 전에 그분의 계 시가 있었소, 형제가 이리로 온다는 것을 알렸소. 그리고 그분은 내게 형제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알려 주었소. 일어나 내 집으로 갑시다. 그곳은 내 집이기도 하고 형제의 집이기도 하고, 그리스도 그분의 집이기도 하오." 노덕천은 가까스로 일어나 다시 그의 양손을 잡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걸어갔다.
눈이 멀어 보이진 않았지만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 는 것 같았다. 숨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여기 방황하던 어린양을 데려왔소. 형제들이 잘 보 살피길 바라오. 영혼이 오염돼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형제들의 사 랑으로 얼굴에 묻은 티를 닦아 주시오." 그러자 여기 저기서, "잘 오셨소. 형제는 마침내 구원을 받았소." 하면서 손길이 다가왔다. 노덕천은 그 손길을 잡으면서, "아닙니다. 나는 죽을 죄를.진 사람입니다. 지옥의 맨 끝에서 방 황해야 할 나쁜 인간입니다. " 하며 엉엉 울었다. "형제의 잃어버렸던 영혼이 마침내 자리를 잡았소. 여기서 며칠 동안 지냅시다. 여기 모인 많은 형제들도 처음엔 다 그랬소. 지금 부터 노덕천 형제가 할 일은, 형제가 형제의 출세를 위해 억누르고 고문을 해서 병신이 된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청하는 것이오. 할 수 있겠소 ? " "예.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저를 용서해 줄까요?" "용서할 것이오. 그 사람들은 악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거요. 그리고‥‥‥‥ "또 뭡니까 ? " "형제가 더럽힌 이 땅에 입을 맞추시오." " 예." "형제는 지금 피곤할 거요, 우선 잠이라도 한숨 푹 자시오." 노덕천은 프란치스코가 깔아논 요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모처럼만에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잠에 빠진 것이다. 그 동안 그는 가끔씩 악몽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그가 고문했던 사람들의 증오에 찬 얼굴들이 나타나고,불구가 된 사람들의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이대로 쓰러져 영원히 잠들었으면 싶었다. 깊은 잠에 빠진 그에게 어떤 영상이 나타났다. 그 영상은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 았다. 횐옷을 입은 장의(長衣)에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말씀했다.
"노덕천아. 내 말을 잘 들어 둬라,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두겠다. 그 동안 너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혼돈.속에서 악의 길을 택했다. 불의한 정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애국인 줄 착각했다. 물론 무지한 네가 소유할 수 있는 길이 그것인 줄 알았겠지만 부패한 권력자를 위해, 너의 무지를 이용한 무리들 에게 너는 깊이 빠져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의인이요, 내 사랑 하는 아들 프란치스코다. 앞으로 이 사람의 말을 따라 행동하면 너 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다. " 그가 깼을 때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아침이라도 그의 눈에 까풀이 붙어 있어 그저 암흑이었다. 그의 곁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형제여, 지금 말씀이 들렸소. 형제의 눈에 붙은 비늘을 떼라 고... 그러자 그의 눈 위에 손놀림이 감지됐다. 무언가 들러붙은 것을 떼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자, 비늘을 떼었소. 찬찬히 눈을 뜨시오. 그러면 태양이 보일 것 이오. 형제가 빨갱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 순진한 어린양으로 보일 것이오." 노덕천은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는 너 무도 감격해 큰 소리로 외쳤다. "보입니다. 물체가 보입니다. 아름답습니다. " "예전에 형제가 보았던 것과는 모든 것이 틀릴 것이오. 육체의 눈과 함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시오. 그분 은 형제를 죽이지 않았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오. 형제도 앞 으로 사랑을 하시오." 노덕천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질서 없이 늘어놓은 싸구 려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었고 몇 명의 .사람들이 자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형제는 앞으로 형제가 할 일을 찾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형제의 눈에 비늘이 덮일 것이오.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셨소." 말하는 사람을 보니 언겐가 꿈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때는 곧 잊어버렸었다. 절름거리는 다리에 옷은 물들인 군복을 입고 있 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지만 눈이 선량한 그 사람, 그렇다, 가난한 사람, 그러나 겸손한 사람, 그는 그 사람을 그 동안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프란치스코 ? " "맞소.가장 빈천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 누구나 형제가 되어 주 는 사람이오,"
그는 진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분이 형제를 위해 하는 기도요." "감사합니다. " "그러면 말하겠소. 사랑하는 아들아, 주의깊게 들어라. 나는 너의 하느님 야훼 형체도 소리도 시작도 마침도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스스로 있는 나 온갖 신비가 무던히 어우러지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빛줄기가 흐르는 곳 때문에 나는 스스로 오묘함이라 이름한다. 오묘함이란 온갖 이해를 초월한 신비이며 삼라만상의 고향으로 그 이상은 없다. 아들아, 들어라. 나는 지혜이다. 아들아 눈을 ·들어 바라보아라 인간의 눈에는 끝없이 거대하게 미치는 .우주 안의 작은 별 태양을 나는 이 작은 별을 나와 너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만들었다. 그러나 너는 이 빛의 의미를 몰랐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세상은 공평하다는 것. 그리고 무한히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것. 너의 증오에 가득찬 마음을 나는 마침내 녹여 주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가를 이제야 너는 깨닫게 된 것이다. " 그의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기도가 끝났을 때 노덕천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프란치스코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 일어나 걸으시오. 그리고 형제가 소망하는 곳으로 가시오, 나는 보시다시피 이제 형제를 데리고 갈 힘이 없어졌소. 그분이 말 씀하셨소. 가장 빈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곧 그 분을 위하는 것이라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형제가 되시오. 편안히 가시오." 노덕천은 고맙다는 말을 백 번도 넘게 했다.
이제까지 멸시했던 사람들이 모두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는 프란치스코가 살고 있는 움막집을 나와, 쓰레기더미가 쌓인 지저분한 길을 걸어갔다. 쓰레기에서 풍겨나오는 악취가 심했지만, 과의 코에서는 그것이 향내가 되어서 들어왔다. 그는 찬란히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길로 그 동안 비워 놓았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이십여 년 동안 일을 해 왔던 직장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덕천은 서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서장은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행방불명된 지 이틀 만에 나타난 그에게 서장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말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서장이 이해할 것 같지 않아서 주머니에서 사직서를 내보였다. "사직을 하겠다니 ? 자네 농담을 하는 건가?" "아닙니다. 좀 쉬고 싶습니다. " "당신 머리가 돌았어, 지금은 비상 시국이야. 자네가 그만두면 나라가 망해," "그 동안 외람된 일을 한 것만 같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 이로 만들고‥‥‥ 더 이상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자네 어린아인가? 자네는 경찰 간부야. 자네 어깨에 무궁화 두개를 달아 준 게 누군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야.
그 어른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충성을 바쳐야지 이게 뭔가?" "결심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그 일은 다른 사람이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사람이 ? 이 사람 제 정신이 아니군.자네가 그만두면 이 나라는 어찌고 ? 불순한 사상을 갖고 있는 신부나 목사들은 누가 잡아들여, 대학생들은 ? " "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 "그럼 그 동안 자네는 잘못한 일만 해 왔나?" "결과적으로 권럭의 앞잡이 역할을 해 왔습니다. 서장님도 회개를 하셔야 합니다. " "회개 ? 자네 예수 믿나? 별안간 엉뚱한 소리를 하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예수 귀신이 애국자를 못쓰게, 만들었국 사직서는 받아 두겠지만 며칠 더 생각해 보게." 노덕천은 서장실을 힘차게 걸어 나왔다. 앞일을 생각하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분께서 뭔가 사람답게 사는 일을 줄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부하 직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으나 그는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경찰서 문을 나설 때 성난 데모대들이 경찰서로 들이닥쳤다. 그 들은 각기 피켓을 들고 외쳤다. "악질 형사 노덕천 ! 나와라! 고문 경관 죽여라! " 노덕천은 데모대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여러 형제들이 찾는 노덕천이오, 그러나 옛날의 노덕천은 아니오, 지금 나는 사직서를 내고 나오는 길이오, 여러분과 형제가 되기 위해서. 나를 때려 주시오." 그가 외쳤어도 선뜻 그의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이상하게 한 명 도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 그를 알아보고 발길질을 했다.
그런 그를 앞장선 학생이 만류했다. "때리지 마시오, 이 사람은 회개했소. 우리와 한 형제요." 그들은 노덕천을 폭력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노덕천은 의외로 자 기 편이 많다는 걸 느꼈다. 그가 공안 분실장으로 있을 때 자기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성직자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자기를 지지해 주는 것을 알고 진정 한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 이 때다. 길 건너편에서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어떤 눈길이 있었다. 프란 치스코, 바로 그였다. 노덕천은 그에게 달려갔다. "프란치스코님, 고맙습니다. " "님이 아니라 우리는 형제요. 앞으로 형제는 할 일이 많소. 형제 가 가슴에 품고 있던 칼과 총을 이제부터 보습(쟁기)으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오. 아마 잘될 것이오. 그분이 형제를 보호할 것이오." 프란치스코는 절름거리면서 앞장을 섰다. 이번에는 노덕천이 부 축을 했다. "제가 형제님의 오른발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프란치스코 형제는 저의 두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 "고맙소. 사직서를 냈다고요 ? " "f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분이 말씀하셨소. 내일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을 하지 말라고‥‥‥ 날아가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라고‥‥‥그것들에게도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셨는데 하물며 그분이 창조한 사람에게 내일을 위해 걱정을 끼치겠소. 너무 염려 하지 마시오," 그들은 어깨동무를 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인삼각을 우스꽝스럽게 쳐다 보았다. 노덕천은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했다. 노덕천은 뒤늦게 영세를 했다. 영세식날 노덕천은 명동 성당으로 성직자를 체포하러 갔었던 것이다. 가는 도중 그는 눈이 멀었던 것 이다. 그의 영세 신부는 김요셉 신부였다. 그가 학대했던 신부였다. 그 러나 노덕천을 가르쳤던 신부였다
. 김 신부는 그에게 몇 가지 물었다. 미심쩍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서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습니까? " "예, 믿습니다. " "좋습니다. 형제의 영세명을 바오로로 하시오. 옛날 바오로 사도 가 그랬소. 그도 형제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앞 장섰소.그리고 형제처럼 눈이 멀었소.마침내 그는 형제처럼 영혼의 눈이 열렸소. 형제와 똑같이 바오로가 되십시오. 우리 시대의 진정 한 바오로. 그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오. 축하합니다. " 많은 신자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많은 꽃다 발을 받아 보는 것이 그에겐 처음이었다. 그 가운데 제일 기뻐한 것은 그의 아내 이 루시아였다. 그녀는 히느님의 계획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그 녀는 남편의 회개로 인해 새 삶을 찾게 되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때 성당 마당으로 웬 초라한 의복 차림의 절름거리는 40대 중 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노덕천이 그를 바라보고 엎드렸다. "프란치스코 형제님 ! 저분은 프란치스코님이오 우리들의 가장 가난한, 가장 겸손한 형제 ! " 프란치스코는 노덕천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그걸 걸어 주었다. "이분은 진짜 프란치스코요.우리들의 형제,내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준 형제요. 프란치스코를 위해 만세를 부룹시다. "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났다. 그 성당이 창설되고 나서 신부가 아닌 가장 초라한 사내에게 박 수를 치고 만세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날은 즐거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