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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6일 시편128편1~ 6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노래가 무엇일까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가정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한 상에 둘러 앉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요. 주일이 되면 온 가족이 손에 손을 잡고 교회를 향하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의 여학생은 집안도 부유하고, 공부도 상위권입니다. 그런데 너무 슬프고, 답답하여 어디를 무작정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네 가족이 한 상에 둘러 앉아 한 번도 밥을 먹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허물없이 대화를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시편 128편을 결혼시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좌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세 번,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성전에 모였습니다. 가장은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며칠 동안 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예루살렘성전으로 갔습니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노래 부르면 온 가족이 합창을 하면서 즐겁게 예배를 드리러 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해보면 아마 이런 장면일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온 가족이 한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데, 막내가 “예수께로 가면나는 기뻐요”라고 찬양하면 옆에 있던 형이 덩달아 찬양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손뼉을 치면서 신나게 찬양하고, 아빠는 운전대를 잡고 즐겁게 교회 오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1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존경한다.'는 말과 '두려워한다.'는 말이 합해져 상대방의 권위와 사랑에 빠져 믿고 의지하여 자신을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힘과 생각으로 지배하기 어려운 대상을 만나면 두려워합니다. 어릴 적에 마을 입구의 보호수를 지날 때마다 신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나무에 금줄을 쳐두고 제사를 지낼까? 자녀를 낳지 못한 사람은 왜 큰 바위 앞에서 빌까? 아침에 어머니들은 왜 물을 떠놓고 빌까? 왜 사람들은 해와 달, 별 앞에서 빌까? 사람들은 왜 비가 오지 않으면 돼지 머리를 놓고 기우제를 지낼까? 인간은 내가 설명하고, 이해하고, 지배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경외를 느낍니다.
이성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내 마음대로 정복하고, 동물과 인간을 탐욕을 채우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이젠 심리학이 대세가 되어 나를 개발하고, 나의 문제를 풀어주는 것을 믿습니다. 지난 주 수요예배 마치고 서울로 조문을 가려고 후배목사와 사모님이 교회에 왔습니다. 사모님은 여성의 전화에서 상담을 하는데 “상담을 하다보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별별 희한한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상담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목사나 하나님께 가지고 가지보다 상담자에게 상의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서점에 깔린 책은 온통 ‘불안과 중독, 신경과민, 의존, 자존감, 성, 양육, 성격, 불화, 자기개발, 등’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순진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물질을 이용하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나를 성공시켜주고, 나를 만족해줄 신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장 20~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을 바꾸었느니라.”
우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내 욕망을 채워주고, 나를 편하게 해주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우상을 섬겨서 어둠과 저주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루기 쉽고, 만만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내가 기대한 대로 해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와 거룩, 자유와 평화, 아름다움보다 내가 원하는 욕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정보를 쫒아가느라고 파김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내 머리 안에 가두고, 내 발바닥 아래에 짓밟고 있습니다. 만사를 내 입맛대로 요리하려고 하다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강박증에 걸리고, 허무해하고, 비난하고, 모함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무능하다고 절망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경쟁하여 전쟁을 치릅니다. 가정에는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고, 부모가 없고, 자식이 없고,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고독한 외톨이만 있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고, 술을 의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합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도시를 떠나고, 자연은 생명이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가고,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가족은 해체되어 갑니다. 우리는 내가 배운 지식, 내가 가진 재산, 내가 가진 신앙, 나의 욕망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의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셔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 둔 이론과 내가 경험하고 기대한 것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주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국 국민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오직 하나님을 잘 섬겨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위와 성품에 감동하여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매력에 푹 빠질 때 거짓 자아가 깨어집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능력이 더 많은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손을 붙잡히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고, 내가 잘 살려고 하나님께 나를 송두리째 맡깁니다. 캄캄한 동굴 안에 갇혀 살던 사람이 동굴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눈부신 태양 때문에 고개를 들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아는 듯이 설명하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깜짝 놀라 욥42: 5~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성전에 나왔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정하고, 무능하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입술을 숯불로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최고로 알고 뜻한 대로 되지 않아서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순종했을 때 자신이 기대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께 무릎을 꿇고,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를 떠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오만하고 혈기왕성한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에는 “오호라 나는 곤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기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성품에 푹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숭배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무디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면 실망하게 되고, 친구를 의지하면 헤어지게 되며, 돈을 의지하면 패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의 집짓고 누구 발 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악하고 타락하고 방탕하여 저주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마음에 행복과 평화를 얻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항상 악하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죄를 짓고, 두려워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맡기고, 순종할 때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존귀하고 아름다운 인생과 행복한 가정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합시다.
1절 하반절에서 “그 길을 걷는 자”는 복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인생을 통해 살아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과 악한 사람은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김천에서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식자재를 골라서 배달시킵니다. 뼈는 청송, 고춧가루는 봉화, 마늘은 의성에서 사서 다음 날에 쓸 것을 밤마다 깝니다. 하루는 뼈를 24시간 골을 때 10시간 정도 삶으면 뽀얀 국물이 나와야 하는데, 누런 국물이 나왔습니다. 권사님은 이상하다 싶어서 뼈를 배달하는 가게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실수로 뼈를 잘못 배달한 것입니다. 사장은 권사님에게 “사모님 오늘 딱 하루만 커피 프라마를 좀 타서 장사 하세요. 프리마를 타면 원래 뼈 국물 색깔로 맞춰질 겁니다. 프리마는 못 먹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다음날 가게 문에다가 이렇게 써붙였습니다. “오늘은 재료가 안 좋아서 영업을 쉽니다.” 권사님은 이런 마음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을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대접했습니다. 허술하게 식자재를 준비해서 예수님께서 아무것이나 드시게 할 수 없다면서 그런 날은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같이 삽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님이 많기를 권면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사업과 가정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길을 걸을 때’ 어떤 복을 약속하셨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할 때 저주의 길을 가던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래 나의 모습대로 회복됩니다. 내가 주장하던 권리를 포기하고, 내 것이라고 하던 모든 것의 소유권을 주님께 양도하고, 내가 주인처럼 군림하던 교만한 생각에서 주님께 복종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사랑으로 이웃과 교제하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행하고 가는 지식의 근본을 배웁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냅니다. 적은 소유에도 만족합니다. 안전한 삶을 보장받고,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평안하고, 지혜와 지식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인생이 됩니다. 기쁨이 샘솟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용감하게 내어좇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아내인 유독시아의 사치에 대해서 경고하다가 유배를 갔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스승이 황제의 부하들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면서 걱정했습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죽음 뒤에 천국을 알고 있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배를 떠나는 것이 두렵습니까? 모든 땅과 세상이 주님의 것인데 고향을 떠난다고 해서 두려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 나는 빈손으로 왔고, 또 빈손으로 갈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쫓아내면 우리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사자굴 속에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입니다.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친다면 요한처럼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매질한다면 사도바울처럼 될 것입니다. 자! 이제 그대들이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억압과 협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승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2~6절에서 가장과 부부, 자녀에게 이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번창의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주시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가장에게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일했는데 월급을 받지 못하고 사업을 했는데 허탕을 치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주인 되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은 수고한 대로 열매를 거둡니다. 하나님은 가장이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넉넉히 먹여 살리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일한대로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부부가 두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내들을 결실한 포도나무 같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7,8월이 되어 포도 줄기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도를 걷는 사람은 아내가 탐스런 포도송이처럼 자녀를 낳고 길러서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감람나무 같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기도와 말씀의 양분을 공급받아 여러 곳에 귀하게 쓰여는 감람나무같이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을 천대까지 누릴 수 있습니다.
서울의 한교회 장로님의 어머니께서는 50년 전 충남 예산에서 집안을 일으키려고 무작정 자식들을 데리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술과 노름으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마을 사람처럼 될 것을 생각할 때 희망이 없었습니다. 장로님의 어머니는 자식을 악습으로부터 구하여 믿음의 가문을 세우려고 결단했습니다. 그 뒤 장로님의 아버님이 소천하여 장례식을 치르면서 어머니는 문상객들에게 술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옛날 시골에서 ‘초상집에서 술도 나오지 않느냐?’고 문상객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객들에게 “믿는 집의 가정에선 술과 화투를 할 수 없다.”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담배도 집 밖에서 피우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인심이 사납다면서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지난달에 백발성성한 자녀들이 어머니 추도식을 맞아 서울의 한 교회에 모였습니다. 아들들은 어머니 믿음 덕분에 귀한 가정을 이뤘다고 감사했습니다. 한 아들은 미국연합감리교회 뉴저지주의 감독이 되었고, 큰 형님은 외과 의사가 되었고, 한 아들은 기독교방송국에서 상무로 재직하고, 한 아들은 공위공무원으로 은퇴하였습니다. 목사가 아닌 세 아들은 모두 장로입니다. 믿음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분들만이 세상과 구별되게 양육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를 키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서교회 성도님, 우리가 무서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이목입니까? 세상의 성공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돌보시고, 축복하는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