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오얏)나무
◆자두의 어원 유래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순수 우리말 이름은 오얏이고 한자명은 이(李)이다.
옛 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오얏 꽃을 감상하면서 시한수 읊조리고, 여름엔 열매를 따먹는 과일나무로서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史書)에는 꽃피는 시기로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번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시가(詩歌)로 실린 것만도 20여회나 된다.
자두나무는 본래 우리나라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고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나무이다. 시경(詩經)에 보면 중국에서도 주나라 시대에는 꽃나무로서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 자두의 옛 전설
옛날 중국에 동방삭이라는 재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복숭아 세 개를 먹고 무려 3,000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어느 날 동방삭이 제자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목이 말라 옆에 있던 제자에게 길가 자두나무 곁에 있는 민가에 가서 물을 얻어 오라고 했다.
제자가 그 집에 가기는 하였으나 주인의 이름을 몰라 주인을 불러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러자 동방삭은 그 집주인의 이름이 이박이라고 가르쳐 주고 다시 물을 얻어 오라고 하였다.
제자는 바로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주인은 동방삭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이며,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었다. 동방삭은 서슴지 않고 때까치들이 자두나무 아래로 많이 날아와 앉은 것을 보고는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원래 때까치의 다른 이름이 博勞(박로)인 것이 박(博) 자를 따고, 때까치가 자두나무 아래에 날아온 것을 보고 이(李)자를 따서 이 박(李博)이라고 한 것이다. 우연이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동방삭의 놀라운 재치에 모두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려시대와 자두
“오얏 성씨 왕조가 들어서리라”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는 그의 예언서 도선비기(道詵秘記)에, 500년 뒤 오얏 성씨(李)를 가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이후는 한양에 오얏나무를 잔뜩 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베어버림을 반복함으로써 왕기(王氣)를 다스렸다 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보람도 없이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500년의 영화를 누린다.
◆ 조선시대와 자두
조선왕조가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정한 적은 없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이왕가(李王家)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뭇가지, 왼쪽에는 무궁화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 자두와 관련된 고사성어
-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직역) 복숭아,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난다.
(해설) 산 속의 복숭아나무나 오얏[자두]나무는 그대로 있지만 열매를 따러 사람들이 다니다가 길이 생긴다는 뜻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는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그의 감화(感化)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출전) 史記-列傳(사기-열전)
(한자풀이) 桃(도) 복숭아/ 李(이) 오얏(자두)/ 蹊(혜) 좁은 길
-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옛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즉 오얏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얏 밭은 우리 주변에 흔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의심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꼿꼿한 마음가짐을 내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