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8강] 카인과 아벨 이야기. 2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창세기 4장 5절부터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로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자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카인과 아벨의 첫 번째 강의에서 제가 뭘 강조했습니까? 카인은 땅에서 난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첫배 양, 그리고 살찐 양을 바쳤더니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축복하셨다. 카인은 화가 나서 어떻게 했다고요? 들로 데리고 나가서 동생을 돌로 쳐 죽였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카인도 노력했는데, 왜 그렇게 매정하게 아벨의 제물만 축복하셨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 한 답이 지난 강의(카인과 아벨 이야기 1)에 나와 있습니다. 뭡니까? 히브리서 11장 읽어보셨죠? 거기에는 카인과 아벨의 얘기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4번 ‘믿음에 의하여’라는 말이 나오죠. 아벨의 제물은 믿음에 의한 제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 흐르고 있는 모든 하느님께 대한 봉헌은 딱 세 줄로 요약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첫 번째 바치는 ‘제물이 살아있어야 한다.’ 즉, ‘생명이 있는 봉헌이어야 한다.’ 이겁니다.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순명, 살아있는 봉사, 살아있는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든지 또는 자기만족을 위한 그런 것은 죽은 봉헌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나 있으면 안 된다.’ 하느님 앞에 계산하면서 봉헌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봉헌은 애초부터 하느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행여나 욕심 많은 청지기처럼 소유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부터 내 자식부터 모든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경영할 뿐이죠. 경영권만 있지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일을 맡긴 청지기에게 10분의 1을 항상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에게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죠.
어떤 댓글에 ‘십일조를 개신교회에서는 너무 강조하다 보니 좀 거부감이 생긴다.’ 물론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의 십일조만이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내 육신의 십일조, 물질의 십일조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시간의 십일조는 내 하루 24시간의 10분의 1을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얘기죠. 육신의 십일조는 내 몸뚱아리의 10분의 1, 움직여서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곳 찾아 나서야 하고 또 세상 떠날 때 장기 기증도 육신의 봉헌입니다. 그 물질의 봉헌은 말 그대로 내가 거둬들인 수입의 10분의 1,
사실 전부 다가 하느님 것이지만 하느님은 자비롭게도 10분의 1만 바치라고 얘기하셨죠. 그 10분의 1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소유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치는 개신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안 바치는 천주교 신자들이 어찌 보면 비성서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십일조 얘기 잘 안 하십니다. 십일조만이 아니라 돈 얘기 잘 안 하시죠?
세 번째는 뭐라 그랬습니까?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까지 나와야 한다. 바로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만 믿음에 의한 봉헌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벨은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고, 카인은 갖추지 못했던 겁니다.그래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는 얘기죠. 그러다 보니 카인은 첫 번째 인류이면서 첫 번째 살인자가 된 겁니다. 우리들의 조상 제1번은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에게도 면면히 흘러 내려와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 누가 잘 되면은 정말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또 칭찬해 주십니까? 물론 그러신 분들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입으로는 참 잘 됐다고 하면서도 부러움 또 그 부러움이 기차 레일을 벗어나면 질투심 또 괜히 화가 나기도 하죠. 이러한 어두운 이 기본적인 패턴이 아마 카인으로부터 내려오는 어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90년대에 모택동이 죽은 후 등소평이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중국 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열어도 선교를 목적으로는 연 것은 아니었죠. 그래서 그때 들어갔던 외국 신부님들은 영어 선생님, 수녀님들은 간호사, 이런 식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절대 선교를 못 했습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팀을 꾸려서 5년 동안은 조선 연변에 있는 조선 자치주를 다녔고, 다음 5년은 한족들을 위해서 피정을 시켰습니다. 몇 번 잡혀서 강제 추방될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뒤돌아보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강제 추방된 적은 없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공무원을 잘 알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공무원한테 잘 못 보이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어찌하다가 중국의 판사를 사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법을 집행하는 그는 연변 조선 자치주에 있는 중국 사람, 한족 판사였죠. 그 양반이랑 술을 한잔 먹다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조선족은 중국의 많은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큰 민족으로 자치주까지 있는 숫자가 많은 민족인데, 놀랍게도 법원에 소송이 제일 많이 걸려 있는 것이 조선족들끼리의 소송입니다.’ 조선족은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높고, 중국 사람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검소하고 부지런해서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손가락이 보일 때까지 일하는 근면한 민족인데, 왜 같은 조선족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그래서 법원에 들어와 있는 소송 가운데 같은 조선족들끼리의 송사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죠. 똑똑하고 근면하지만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그런 민족이라는 그 한족 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필립비서 4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라.’ 내 안에 이러한 칭찬할 만한 것들이 들어와 있으면, 위에 얘기했던 참된 것, 고상한 것, 옳은 것,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있으면, 그렇게 쉽게 남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이 잘됐을 때 시기 질투하고 분노하는 카인의 마음에서 분명히 멀어질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나보다 여러 가지 능력이 많고 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우리 인간들은 왕왕 시기 합니다. 인간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능력도 비슷해야만 좋아하게 되고. 가진 것도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없어야만 우리 편이라고 하는 카테고리 안에 그 사람을 집어넣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기와는 뭔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좋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카인은 ‘아벨, 이놈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질투심에 불타 미워했습니다. 혹시 카인이 하느님을 창조자로 경외하고 절대자로 복종했었더라면, 하느님이 아벨을 축복하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을 때 분명히 겸손하게 반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공정하심을 인정하지 않은 오만한 자가 바로 카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충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죠. 하느님은 어떻게 충고하셨습니까?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은 카인에게 참다운 훈계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듣질 않았죠. 참회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정복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죄는 죄를 부릅니다. 카인은 죄를 정복하기는커녕, 분노가 격동해서 아벨을 들로 불러내 죽이고 말았던 겁니다. 만일 아벨에게 하느님께 축복받을 만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맞는 얘기죠? 그 믿음 때문에, 그 믿음에 의해서 바친 제물을 하느님이 축복했기 때문에 자기 형한테 무참하게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에 아벨은 그 믿음 때문에 죽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인류 최초의 순교자라 불립니다. 아벨 이후 현대에 이르도록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았습니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 첫 번째 순교자가 바로 아벨입니다. 왜? 믿음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확실하게 들어오십니까? 제 말의 의미가. 믿음 때문에, 가장 정성 어린, 흠집 없고, 살아있고, 또 본인이 직접 하느님 앞에 제물을 바친 그 믿음 때문에 카인의 시기 질투를 받아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벨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하느님에게 칭찬받을 일도 없었고 형이 죽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카인은 대를 이어서 현재까지 내려옵니다. 마찬가지로 그 카인의 분노와 시기 질투에서 죽는 순교자들도 역시 지금까지 대를 이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살인자 카인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면서 잡아떼고 모른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네 아우 어디 있냐 했을 때 하느님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아벨이 어딨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죠. 그것은 마치 카인의 아버지 엄마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이 정원을 거느리니 나무 뒤에 숨었을 때,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죠.
그때도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태이길래 나를 보고 피하느냐, 그 뜻이었죠. 첫 번째 살인자였던 카인은 하느님이 네 아우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참 대담합니다. 살인죄를 저질러 놓으니, 이제는 얼굴이 두꺼워지는 거죠. 처음에 죄짓기가 힘들지, 살인죄 짓고도 당당합니다. ‘내가 내 아우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기 동생을 그리 죽여놓고도. 요즘 신문에 존속 살인 이야기가 참 심심치 않게 나오죠. 이제 너무 흔한 일이 돼버리다 보니까 그런 기사를 보더라도 ‘사이코패스가 하나 또 있구나’ 하며 별로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카인이 아우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니까 야훼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꾸짖으시고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간은 농경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그는 경작해도 결실을 얻지 못하는 운명이 된 겁니다. 그는 자기 일을 잃어버리고 그 땅을 떠나 방황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이 금한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되고 두 아들을 낳고 일심불란 일하였지만, 동생이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형은 먼 곳으로 방랑자가 돼서 떠나간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비참하게도 두 아들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어버이는 낙원에서 추방되고, 그 자식 둘 하나는 죽고 하나는 부모의 땅에서 하느님에게 쫓겨납니다. 답답하죠. 이 과정을 읽으면 이러한 비극은 애초에 아담과 하와, 하와의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과 오만함으로부터 시작된 일들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도 카인과 아벨에게 하느님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쳤을 겁니다. 뭐라고 가르쳤겠습니까? ‘얘들아, 우리들이 낙원에 있을 때는 하느님과 조석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참 즐거웠단다.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는 참 편안한 나날이었단다. 하느님은 바르고 거룩하신 분이었단다. 이 애비, 애미가 그분을 어기고 이렇게 쫓겨나온 거란다.’ 하면서 하느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하느님의 공정하심에 대하여 분명히 두 아들에게 가르쳤을 겁니다. 특별히 첫 번째 아들에게는 ‘장남이기에 동생을 잘 챙겨야 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없더라도 네가 동생한텐 부모 노릇 해야 한다.’ 그런 것을 가르쳤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비극이 생겼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또 낙원에서 살았을 때 그 아름다웠던 모습들을 가르치면서, 이마에 땀 흘리고 일하게 되면서 낙원을 동경하고 하느님 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후회를 했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인과 아벨은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랬을 거라고 봅니다. 결과가 그렇기 때문이죠. 아벨은 양친의 이야기를 듣고 양친 이상으로 그들의 죄를 한탄하고 하늘나라를 동경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되지는 않고 정말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어야겠다. 아버지 어머니가 저지른 죄를 나는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긍정적이고 또 회개하는 모습으로 성장이 됐던 것 같아요.
반대로 카인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낙원에서 살았던 이야기, 추방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카인은 일단 낙원에서 추방된 그 부모들을 비웃고 있었을 겁니다. ‘아이고 등신들, 나 같으면 안 쫓겨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거기서 머물지.’ 같은 교육을 받고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달랐던 겁니다. 그 결과 아벨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이 했고, 카인은 하느님과 등을 지고 또 교만한 모습으로 자라났던 겁니다. 창세기 4장에는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은 네 가지의 흥미로운 질문이 나옵니다. 네 가지 질문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찾아서 줄을 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냥 한 번 듣고 끝나지 마시고, 반복해서 들으시면서 오늘 강론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시는 지혜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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