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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
한밤의 사진편지 제2021호 (13/11/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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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소영(운영위원, soyoung2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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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방규명, 김창석.김경진, 김영신.윤정자, 이규석.이영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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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 불긋 고운 단풍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이 아름다운 날 ,2013년 11월 3일 (일) 오후 2시 30분 제 310회 주말걷기는 창덕궁 단풍 관광입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앞이 만남의 장소입니다. 한사모 회원 55명이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창덕궁은 서울에 있는 5대 궁궐 중 가장 넓고 화려하며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보물 중의 보물이라 생각됩니다. 저 개인 적으로는 이러한 창덕궁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무보수의 자원 봉사자로 궁궐 지킴이가 되었습니다. 주말걷기 운영 위원을 맡은 이래 처음으로 넥타이를 착용한 복장으로 참가합니다. 현장 사정이 복잡할 것은 예상 했지만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후원 입장 마감 시간이(오후 3시) 임박했는데도 인증 샷을 뺄 수 없는 한사모의 전통은 돈화문을 배경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촬영 각도로도 멋진 사진을 찍습니다. 이미 입장인원이 초과되고 매진 싸인이 공시된 매표 창구 앞에서 원칙만을 앞세우는 매표 직원과 길게 늘어선 발매 창구 대기자순서를 무시하고 이럭저럭 후원 입장에 성공합l니다.
영문 모르고 끼어든 일반 관람객을 우리 한사모 식구들과 구분하며 빠져달라 요구하고 통상 안내를 주섬주섬 시작합니다.
오늘 관람하신 이후부턴 창경원(昌慶苑)l이나 비원(秘苑)이라는 호칭은 사용을 자제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후원,내원,북원,금원,상원등으로 불리고 있고 창경원이 아니라 창경궁이 올바른 명칭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국가개념을 말살하고 폄회하기 위해 궁내부에 이왕직(李王職)이라는 부서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조선왕조(朝鮮王祖)를 자기들 국내 파벌족의 하나로 격하하며 일본왕실에 편입하며 가치를 무시하기위해 이왕가(李王家)라는 명칭을 날조하여 호칭하였다. 조선 왕조의 법궁인경복궁에는 만국박람회라든가 조선 총독부(중안청) 라는 건물을 지어국체를 무시하였고, 동궐(東闕)인 창경궁(昌慶宮)에는 코끼리,원숭이,하마등 동물원을 조성하고 벚나무를 심어놓고 봄철이면 ‘밤벚꽃놀이’등으로 유원지화 하여 창경원(昌慶苑)이라 불렀다. 창덕궁(昌德宮)은 아름답고 드넓은 후원을 가꾸고 관리하던내밀원 소속의 비원(秘院)이라는 부서를 전체 명칭으로 바꿔 불러 아직도 대중들은 비원(秘苑)이 바로된 호칭으로 알고 있는 현실이다. 조선왕조 22대 왕이시던정조(正祖)임금에 대한 설명과 영화당(暎華堂)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앞에 자리잡고있는 해시계(仰釜日咎)설명으로 이어갑니다. 수많은 석학들의 뛰어난 활동으로 세계 어느곳을 막론하고 이렇게 긴 세?을 단일 왕조이면서 전통과 주체가 뚜렷한 국가형태가 존재한적은 없었다. 가히 문화의 꽃이라 할만한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정치 주체로 본다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첨예한 대립이 끝내는 파당정치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22대 왕이던 정조대왕은 즉위 당년에 규장각과 주합루를 만들고 신분차별의 장벽에 서름받던 서얼(庶?)을 발굴하여 중용하는 등 국정을 위하여 애를 많이 쓰셨다. 주합루(宙合樓)등 조성경위와 영화당 일대에 연루된 일화등을 소개하고 앙부일구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꼭지점의 위치로 시각과 절기까지 측정할 수 있는 세종조 장영실의 발명품이다. 엎어놓은 솥같이 생긴 오목한 눈금 부분에 투시되는 향침의 그림자 끝 부분의 꼭지점을 기준을 하여 경도는 시각, 위도는 계절을 표시한다. 나타내고 좌측으로 짚어가면 사시,진시,묘시,인시등을 나타낸다.
매 시각은 네 등분으로 나뉘며 작은 눈금을 각(刻)이라 하는데 15분의 단위를 표시하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일각(一刻)이 여(如) 삼추(三秋) 같다’는 말은 15분 시간 보내기가 마치 가을을 세 번 보내는 삼년 지나기만큼 지루하고 오랜 기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한옥 크기를 나타내는 칸을 세는 간단한 요령과 더불어 단청(丹靑)의 의미와 적용되는 건물의 종류를 소개했습니다. 불노문(不老門)을 지나며 한사모 회원님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백성들의 고충을 몸소 체험하시려고 내농포에서 농사지으시던 임금님, 누에를 먹이시며 양잠의 수고로움을 체험하시던 중전마마님들의 애민사상을 새삼 고마워합니다. 카메라에 담느라 부산스러워집니다. 의미를 삭이며 걸으시기 바란다" 는 제 소개에 잠시 숙연해지는 분위기 였습니다. 포진해있는 반도지 일원에서 정조임금의 호(號)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의미를 소개합니다. 약간 오르막이지만 상쾌한 흙길을 오르며 주말걷기의 의미를 되삭입니다. 모두들 힘은 들지만 즐거운 표정들이십니다. 5언절귀의 한시가 있습니다. 옥류천이라는 글씨는 인조임금의 친필이고 경치를 읊은 한시는 숙종임금의 작품입니다.
비류삼백척 飛流三百尺 흐르는 물은 삼백 척 멀리 날고 요락구천래 遙落九天來 흘러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오네 간시백홍기 看是白虹起 이것을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번성만학뢰 飜成萬壑雷 온 골짜기에 우랫소리 가득하네
경주의 포석정을 닮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소요암(逍遙岩)외에,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의倚亭), 농산정(籠山亭)을 맞이하다보니 어느덧 후원 뒷돌담에 다다름니다. 간단히 유래를 설명합니다. 무게로 창덕궁 후원의 대미를 장식하던 터였으나 2010년도에 몰아친 태풍 곤파스호로 인해 허리가 부러져 키가 반토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타 소진된 것과 창덕궁의 잘 나가던 향나무가 하찮은 태풍 한자락에 반토막이 되어버린 기막힌 우연이 하필이면 내 생애, 내 눈 앞에서 벌어지냐며 제 운수 팔자 소관이 기박한 모양이라고 허공에대고 한탄합니다. 안내순서가 뒤바뀌어 후원을 먼저 들렀지만 오후 3시까지만 입장이 허용되는 절기가 아니었다면 한사모 출발시간이 변경되던가 후원안내는생략하던가 할뻔했습니다.
소개되던 회화나무를 안내해드리겠다던 기억이 떠올라 돈화문(敦化門) 안내에 이어 간략하게 회화나무를 소개합니다. 그 아래 모여앉아 중요한 국사를 논하던 상서로운 나무로 선비나무라 하며 영어로는 Scholar Tree라고 한다. 창덕궁의 여덟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부엉이 가족이 앉아 있던 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 이른봄에 아카시아 비슷한 꽃이 피는 콩과의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목재는 건축이나 가구에 쓰고 꼬투리는 약제로 쓰인다.줄여서 홰나무라고도하며 괴목(槐木)으로도 불리운다. 정상적인 양위를 받으시던 여덟분의 임금님이 인정문앞에서 즉위하셨으며 그 즉위식이 상주(喪主)로써의 슬픈 의식(儀式)이었음을 설명합니다. 품계석(品階石), 양반(兩班), 월대(越臺), 답도(踏道), 드므(방화수 저장용 ?)등을 설명하고 옥좌, 일월오병도, 보개(寶蓋)등 내부를 안내한다. 그림자처럼 장식되던 그림이다. 내용 중 달과 해는 음양을 뜻한다기도 하고 왕과 왕비를 뜻한다고도 하며 폭포 옆의 다섯 큰 산은 우리나라 영역을 뜻한다는 설도 있고 오행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국은행발행 만원권 지폐 전면에 세종 임금님 배경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여념없으셨을 나랏님의 모습과 더불어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여 사초를 만들고 이것을 기초로 유네스코에 등제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인 조선왕조 실록까지 언급하게되고 근간에 NLL 문제로 사회적 논란꺼리가된 사초 실종 사건까지로 머릿속의 둔한 순발력이 비약 발전하게 됩니다. 중기에 와서는 승정원 주서도 서관에 포함되어 기록의 채집에 동원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당후일기(堂后日記)가 쓰여지다가 나중에 승정원일기의 주된자료가 되었다. 임금께서 붕어하시면 영의정을 필두로 조정의 관계관들로 망라된 “실록청”을 설치하여 발간작업에 착수한다. 즉 사초와 시정기(時政記)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 편찬에 착수하게 되는것이다. 사초는 사관의 형편에 맞춰 입시사초(入侍史草;사초보관 장소에 기밀 보관)와 가장사초(家藏史草;사초 작성자의 생활구역에 보관)로 구분되며 임금의 생존시에도 본인에 관련되는 부분은 국법에 의해 열람이나 간섭이 금지된 사항이므로 간여할 권한이 없었다. 실록청에서는 사초와 시정기를 정리하여 초초(初전실록청에서는 사초와 시정기를 정리하여 초초(初草)를 만들고 이 초초를 수정하여 중초(中草)를 만들며 이중초를 바탕으로 하여 정초(正草)를 완성한다. 이때 예문관 사관이 초초,중초 기록지를 물에씻어(洗草) 말린후 조지서(造紙署)에 보내어 종이제작 원료로 재활용하는등 기밀엄수에 주력하였다. 대조전에서 왕비의 역할과 궁중에서의 비중에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흥미 유발 의도로 제작되는 중전마마의 존재를 애증 갈등과 권력 암투로만 왜곡되게 소개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로 알려지는경우가 있어 제가 궁궐안내를 맡은 범위내에서 철저히 시정하려 합니다. 구중궁궐(한자 문화에서 아홉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숫자 아홉이 아니고 단자리 숫자개념중 가장크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구중궁궐, 구만리장천, 구절양장,구천)에서 임금을 모시고 평생의 반려로 생활하시던 중전마마는 그 신분에 걸맞는 인격, 집안배경, 성장환경, 학문적성숙도,건강,생산능력,외모등등 최고의 조건을 갖춘 요조숙녀로써 그 시대 규수중 최고의 여성상 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시정 잡배들 처럼 제왕을 대상으로 하는 치정놀음이나, 사이비 무속인들의 술수에 휘둘리거나 기품을 스스로 잃는 행동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입니다.
간혹 극히 일부 생각이 짧은 행동을 하던 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전체에 대입시키고 매도하는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발상입니다. 내명부라는 추상같은 규율의 잣대를 적용하여 신상필벌의 운영을 하시며 부군이신 나랏님의 절대적인 내조자로써 국정 운영에 큰역할을 맡던 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조전 동편에 위치한 흥복헌(興福軒)을 안내하지 않는다면 오늘 전체가 의미없는 행위로 비칠것같은 염려에서 며칠 전에 준비한 원고를 꺼냅니다.
조선왕조 제27대 순종황제는 비운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후 1907년에 국왕에 등극하셨지만
1909년에 일본 헌병들의 시위와 간신배들의 협박에 의해 바로 이곳 흥복헌에서 합방동의서에 강제 날인을 하시게 됩니다. 1926년 4월 25일 여기에서 53세로 붕어하시기 직전 민간 촌수라면 고모부였을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궁내부 대신이던 조정구에게 유조를 내리셨습니다.
이내용은 동년 7월 28일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샌 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한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1997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병합인준은 강린 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데로 선포한 것이요 나의 한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협제하며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것이 아니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목숨이 꺼지지 않는한 잠시라도 이를 잊을수 없는지라 어두운곳에 갇혀있는 처지로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 까지 이르렀으나지금 만병이 침중하니 한마디라도 말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는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것이 아닌것을 분명히 알게 한다면 이전의 소위 병합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것이리라 구중 궁궐에서 친정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할만큼 궁 밖으로의 나들이가 거의 없는 중전마마의 뒷뜰입니다.
각가지 화초와 식물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담장과 굴뚝등의 장식이 매우 아름답고 현재 서초동 예술의 전당 국악원의 담장도 이를 본 뜬것이라 생각됩니다.
궁궐의 난방은 화목을 사용하지 않고 숯을 사용하는 함실아궁이였고, 임금님의 요강인 매화틀이 드나드는 문도 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관람객이 빠져 나간 상태에서 우리도 식당인 북촌면옥으로 이동합니다. 우리 인원을 모두 받을 만한 식당이 드물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떡 만두국과 빈대떡으로 식사합니다. 우리 모두 건강하시라고 " 건강을 위하여 "로 건배했습니다.
커더랗고 고운 빛의 단감이 올려집니다. 새로 회원이 되신 조순금님이 제공하셨습니다. 껍질 째 드실 수 있도록 깨끗이 닦아오셨습니다. 고운 빛의 단감 처럼 마음도 고우십니다. 감사합니다.
또 후식으로 잘 익고 씨가 없는 연시도 올려졌습니다. 박동진 방규명 부부 회원님이 준비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찍느라 애쓰신 김소영님 감사합니다.
함수곤 대표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 회원 중의 원로이신 홍종남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의 한사모 모임은 해가 갈수록 연륜이 쌓이고 있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수준이며 이대로 잘 계속 되길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규칙과 원칙은 잘 지켜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후식이나 위스키 등도 미리 연락하여 남음과 모자람이 없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U자 걷기의 총 마무리인 " 서해안 1300리 " 책이 멋지게 완성 되었습니다. 저자들께 미리 1권씩 배부했습니다
이어 이경환님의 따님 이의진 작곡 발표회 에 대한 안내가 있었습니다.
궁궐에도 왔으니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미풍 양속을 생각 해보야 겠습니다. 새로 이사간 댁 방문에 대한 예의와 배려, 어른에 대한 예의 등등 입니다.
다음 주 제 311회 주말걷기는 걷기 전문가 이신 안철주님이 남산 둘레길을 안내하십니다. 깃발을 인계합니다. 회원님들 즐겁고 행복하실 가을 단풍나들이가 성과가 있었기를 혼자 가늠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R. Schumann (1810 -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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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
첫댓글 창덕궁지킴이 대장님, 김창석 운영위원님의 안내로 많이 배우고 생각하며 명품길을 잘 걸었습니다. 고운 단풍구경도 잘 했구요. 순종황제의 유언까지 모두 수록해주신 귀한 편지를 막 읽었습니다. 주말걷기를 마치고 집에 가서 한 숨 자고 새벽버스로 백무동 가서 1박 2일 지리산 산행, 무사히 마치고 어제밤 돌아왔습니다. 사진정리 중에 편지 읽고 감사말씀 전합니다. 어리 이창조 드림
창덕궁 단풍관광!! 참 아름다웠습니다.
궁궐지기 김창석위원님!!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주 자신있게 해설을 잘 하여 주셔서 많은 배움과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을의 막바지를 잘 즐기었던 좋은 시간이였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