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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여러사료를 종합해보면 그림과 같은 진격로에 의문이 간다.(운영자)
임진왜란 종군기는 정유재란때에 軍醫僧으로 조선에 온 케이넨( 慶 念 ) 이라는 스님이 1597년 6월 부터 1598 2월 8개월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왜군의 진공루트를 따라서 본 경상도 와 전라도의 전투상황과 조 선인의 참상 과 피해 등을 상세히 기술한 종군기록서이다. 패배이며 이는 전장이 왜열도가 아닌 조선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와 참상은 고스란이 조선 조정과 조선백성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터 300년전에 벌어졌던 왜란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것으로 기술됨에 , 말하여 무엇함이 있겠나.. ( 大田飛州 )라는 무사의 군의관으로 종군한 기록이다. 이 원본은 현재 일본 안양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원본을 편집자인 나이또( 內 藤 )씨가 조선학보에 1961년에 해설과 함꼐 발표한 것이다. 많이 나온다.하지만 전부 소개 할수는 없고 그 당시로 부터 320년 후에 조선에 들이닥친 일본 제국주의 로부터의 피해자인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고초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임진왜란중에 자행한 만행과 잔인함들이 여기서도 배어 있다. 계속 북진하여 전주에 진입하였고 이어 충청도 진천에 이른다. 그러나 얼마후에 퇴각 명령이 내려져 경상도 상주로 내려와 한동안 머물렀다가 영천에 이른다. 퇴각 명령을 받고 울산 서생포를 거쳐 부산에 도달하고 잠시 머물렀다가 대마도로 ,이끼를 거쳐 구주로 상륙하여 고향인 우스끼로 돌아가는것으로 글을 맺는다. 집에서나 각지의 사찰등에서 보물을 약탈하고 난 후 약탈한 보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자기편끼리 죽이는 왜군들, 심지어는 왜군을 뒤따라온 왜상인이 전쟁중 포로가된 조선인을 매매하는 상황까지 그대로 묘사 되고 있다. 알려 드린다. 불질러버려서 부산해로 후퇴하였다. 우고 조선군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불 태워지고 있었고 성들마다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조차 없다. 끌어간다. 어버이는 자식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 되었다. 있다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뜨고 볼수가 없는 처참한 모습이다. 한것 투성이다. 지는 것이다... 난 사람이 많이 죽었다. 있었지만 모두 도망가고 모두 불타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다. 빨리 고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그릇된 행위이기에 백성들의 슬픔은 판단의식을 흐리게 하여 조선인의 목을 잘라서 네거리에 세워 놓도록 만든다. 눈에 거슬리면 즉시 심히 질책하면서 사슬로 묶고 두들겨 패는등,죄업을 기록하고 따지는등 보기에도 곤혹스럽다. 남지 않도록 주의하여 전원 배에타게 하라는 명령 이었다. 모든 사람이 기뻐하였다. 노소 할것 없이 사서 줄로 목을 묶어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부쳐 두들겨 패는 모습은 지옥의 아방이 죄인을 잡아 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움직일수도 없을뿐 더러... 풍경이다. 개입하여 ... 급습해 왔다고 한다. (울산성인듯 함).성문의 문이 아직없어서 명군이 난입하여 맹렬하게 벽위 돌담 밑에서 불화살을 쏘아댄다...성내에 불이 붙어서 인부,무사들이 수천명이 타죽었다. 물러나서 성을 에워싸서 소모전을 피우며 자연히 항복토록 하는 계략으로 보여서 ... 던지며 ,...성안에서도 분발하였고 ... 온통 불바다가 되고 한 나라의 유적과 재산과 보물은 온데간데 없어지듯 침탈을 당하며 죄없는 백성들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산하 고을이 피로 물들게 되는 모습을 일기를 통해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무능한 국왕 선조와 자기 안위에만 몰골하는 대신들 ,그리고 지원한 명군의 소극적 움직임..,이 전부 절대권력 지도자의 무능과 아집 그리고 백성은 온데간데 없고 祀稷만 지키려는 치졸한 아집에서 비롯되었음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