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추천완료작___수필부문│
윤세영,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 2편
―─심사위원 / 이상인·이충이
■추 천완료 심사평
대상이나 사물과의 어깨 맞춤
윤세영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 2편을 추천완료작으로 선정한다. 또 다른 작품들도 감성과 사유를 바탕으로 쓰여진 수준 높은 글이다. 어디에도 비문非文은 없다.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난 다음에 자신의 문채文彩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대상이나 사물과 어깨를 맞추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글쓰기는 우리의 내면을 성찰토록 하는 시적 형상의 놀라운 전개이다. 때때로 삶은 먼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일상의 고통은 그렇게 두렵지 않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풍경들이 삶 속에 산재되어 있다. 그 가운데 ‘나무’의 길, 숲의 ‘길’, ‘북한산’의 길은 그에게 다가서는 장면들이다. 우리가 지나는 길은 우리가 만드는 상처이거나 미래일 수도 있다.
윤세영은 일상적인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서서 모든 시적, 산문적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이상인·이충이
추천완료 당선소감
이름을 갖는다는 것
평생을 신문기자와 잡지편집장으로 글을 써오다가 50대 중반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등단을 생각한 것은 새로운 이름을 갖고 싶어서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고, 그 이름 값을 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산다고 믿는다. 55살이 되도록 내가 가져온 직책상의 이름들이 지금의 자리에 나를 데려다 놓았듯이 말이다.
나는 쉰 다섯 살, 지금 나의 나이를 사랑한다. 살아보지 못한 세월은 아직 모르겠지만 살아온 세월을 되짚어볼 때 지금 이 나이가 정신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나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님이 말한 지천명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것에 원만하고 원숙해지니 맑고 고요해서 참 좋다. 이해되지 않는 세상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적어지니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 이런 기념비적인 나이에‘수필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니 금상첨화다.
수필가로 등단했으니 앞으로는 수필가다운 글을 쓰고 싶다. 아니, 수필같이 단정하고 투명한 삶을 살고 싶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덜컥 수필가라는 이름부터 받았다. 더 성실하게 내 삶을 가다듬고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다. 내게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시와산문』에 깊이 감사 드린다.
윤세영 / 195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산문집 『때론 길을 잃어도 좋다』, 작가론 『한국의 사진가 14』, 역서 『숨어사는 난장이들』이 있다.
추천완료 당선작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 2편
윤세영
어떤 한 분야에 정통하고 박식한 전문가를 보면 주눅이 든다. 무엇 하나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없다는 열등감 때문이다. 베테랑 주부도 못되고 그렇다고 작가도 아니고 훌륭한 어머니는 언감생심이고…….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이럴 수가 있는가, 도대체 난 무얼 했는가?” 스스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무에 관해 쓴 나무의사 우종영 씨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다가도 같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분은 이렇게 나무에 대해 아는 게 많을까. 아예 나무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다가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쓸쓸해지기도 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누구나 지나온 일년을 되돌아보며 결산을 해보게 마련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었는가를 따져보면서 덧없이 세월이 흘러감을 아프게 실감한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었음인가, 각 분야의 성과를 알리는 막대그래프를 그리는 일에는 조금씩 무디어지고 내 마음이 얼마만큼 성장했느냐에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내 마음이 그러해서였는가. 그 어느 해보다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나무에 대해 새삼 감탄하고 경탄하면서 가을을 보냈다. 그런 속에서 유난히 나무에 대한 글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한 시인의 수필집에서 발견한 글이 나를 멈추게 했다.
“나무는 뜨거운 햇볕을 받지만 우리에게 서늘한 그늘을 준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간디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는가? 그 뜨거운 햇볕을 내 몸으로 다 견뎌내면서 남에게는 그늘을 드리워주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한 그루의 나무가 갖는 아량만큼도 못한, 어찌 보면 한 뼘의 그늘조차 남에게 허락하지 못한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것은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한 분야가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세상에 순응하면서도 뿌리는 흔들림이 없고,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잎을 떨어뜨리는 냉정함이 있으면서도 더불어 숲을 이룰 줄 아는 넉넉함.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며 나무의 미덕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가지 않은 길
봄은 스스로 찾아오지만 또한 찾아 나선들 어떠랴. 봄을 맞으러 남쪽으로 향했다. 아니, 겨울을 떨구려고 남녘으로 향했다. 길 따라 달리다보면, 어딘 가로 향하는 샛길을 보면서 저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일까, 저 길로 가보면 무엇이 나올까, 혹시 지금 저 길로 들어서면 내 운명이 바뀔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늘 다니던 길로만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등등 온갖 상상이 다 떠오른다. 동시에 우리나라에 나 있는 길이라도 모두 한 번 씩은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차여행을 할 때도 그렇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작고 예쁜 역을 만나면 문득 내리고 싶어진다. 예정에 없는 저 간이역에 내려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보고 싶은 충동,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느꼈을 것이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실행해보지 못한 미완성의 유혹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역마살 때문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상이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선생이다. 우리나라를 당신의 발로 다섯 바퀴는 돌았다고 했던가. 지도를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대가도 보장되지 않는 전국 답사를 외롭게 수행했을 그 분을 떠올리면 그건 차라리 고행이 아니었을까 싶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요즘엔 걷는 수행이 유행이라는데 아마 그 분은 그때 이미 걷고 또 걸으면서 득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분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의 엄청난 업적이 평가를 받기는커녕 역모 죄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기막힌 현실에 분노했던 기억이 새로운데, 아마 그분의 일생이 해피엔딩이 아니었기에 길을 보면 그 분을 떠올리며 애잔함에 젖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서울에서 동해안 최북단으로 가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남해안을 따라 목포까지, 목포에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서울까지, 우리나라 지도를 반쪽이긴 하지만 그려보고 싶다.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면 비록 자동차로 돌긴 해도 고산자古山子 선생의 수고를 100분의 1은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국토를 엉성하게나마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보았다는 성취감이 생길 것 같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아니면 내가 스스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며 새 출발을 해도 좋은 계절, 봄이다. 그 길이 탄탄대로가 될지 가다가 돌아서야 할 막다른 길이 될지 물론 지금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출발하자. 여행이든, 인생의 새 출발이든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은 두근거림이 있어 좋은 계절이 아닌가. 올 봄의 여행에서는 자주 낯선 길로 빠져보고 싶다. 누가 아는가. 거기 혹시 그 순간 그 길로 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운명적인 그 무엇을 만나게 될지. 그것이 여행의 묘미이고 삶의 우연성이 아니겠는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상기해 본다.
“기대하지 않으면 예상 밖의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북한산을 바라보며
어느 유명한 산악인은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 했다는데, 요즈음 나는 산이 저기 보여 바라본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던 조상님의 말씀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오르지 못할 산을 날마다 열심히 쳐다보게 된 것은 월간 <사진예술> 사무실이 광화문에서 인사동 쪽으로 이사한 덕분이다. 새로 이사한 사무실의 넓은 유리창 너머 북한산의 정상이 나를 바라보니 나도 날마다 그 산과 눈을 맞추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본래 사대문四大門 안을 좋아한다. 아주 오랜 세월의 숨결을 갖고 있는 그 역사성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당위성을 설명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숱한 경우의 수를 가진 시공간에서 하필 내가 오늘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비밀을 알 수 있을 듯싶기 때문이다. 날마다 사무실 옥상에서 운현궁을 내려다보며 대원군이 가마 타고 부지런히 경복궁을 드나드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가 간절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이 권력이었는지 아니면 조선왕조의 자존심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1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 지키려고 안달하며 오가는 것이 흥미롭다.
사대문四大門 안에서도 인사동은 예술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상업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줄만한 곳이 여럿 있어 좋다. 특히 최근 들어서 인사동의 미술화랑들에서 사진에 관심을 갖고 사진전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오르지 못할 나무 같던 상업 화랑들이 사진에 부쩍 관심을 갖고 사진을 하나의 돌파구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은 21세기 한국사진의 밝은 앞날을 예고해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기분 좋은 동네로 이사 와서 창 밖으로 북한산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 명예욕이나 어떤 목적이 없이 순수하게 그냥 산이 좋아서 오른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사진이라는, 예술이라는 봉우리를 오르려 함도 그래야 할지 모른다. 그냥 좋아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그것이 기쁨이고 보람이어서 그것에 몰두할 때 그때 그의 발 밑에 있는 땅이 정상頂上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오르고자 하는 봉우리를 하나씩은 갖고 산다. 중간에서 산행을 포기하기도 하고 발을 잘못 디뎌서 미끄러지거나 추락사를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정상에 오르기도 할 것이다. 날마다 북한산을 바라보며 나는 내 봉우리의 어디쯤 와 있는가를 가늠해본다. 그리고 만약 정상에 오른다면 무엇이 보일까, 과연 행복할까를 상상해본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음을 확인했을 때 진정 기쁠까? 글쎄, 아직은 해답을 모르겠다. 인사동을 들락거리는 우리 독자들이 스스럼없이 사무실에 들러서 함께 차를 마시며 북한산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각자의 산행이 어디까지 이르러 있는지 함께 북한산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