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말씀을, 그러니까 한 달 전 쯤이었습니다. 그날 한국기원에서 기왕전 리그전이 있어 오전 대국을 치루고 점심을 먹으러 기원에서 가까운 복집으로 갔죠. 거기서 나와 루이 등 세명이 먹은 식대를 계산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일수였죠.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어딘가 어눌하고...하여튼 평범한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요?"
"뜻밖의 팬의 호의에 감사를 드리고 다시 대국장으로 갔죠. 대국이 끝나고 나오자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조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쪽으로 걸어가 커텐을 걷었다. 아름다운 연수원의 밤 풍
경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계룡산 줄기에 자리잡은 탓에 주변 풍광이 자연 조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남일수가 명인댁까지 따라갔습니가?"
"아니죠. 초면이고 서로를 잘 모르니 그렇게는 안되죠. 그런데 그의 말이 가관이었
습니다. 내기바둑을 한 판 두자고 하더군요."
"내기 바둑을요?"
"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그 사람이 심각하고 진지하게 나왔습니다. 금덩이를 하나 내 보이며 자신
이 지면 깨끗히 그걸 내 놓겠다더군요. 그리고 자신이 이기면 내가 소장하고 있는 바둑판을 한 번 보여 달라는 겁니다."
"금덩이와 바둑판이라...그건 조금 균형이 맞지 않는데요?'
"그렇지요. 금덩이는 족히 이백 돈은 되어 보였습니다."
'천여만 원에 해당하는군요. 그래서요?"
"나는 그 자가 단순 내기바둑을 제의해 왔다면 절대로 응하지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내가 소장
하고 있는 오래된 바둑판을 거론하며 꼭 한번 보고 싶어 하는 열의가 좋아 집으로 데려갔습니
다."
"명인댁에 오래된 바둑판이 있습니까? "
"네, 한 오백년 쯤 된 방점이 있는 순장판이죠. 일본에 건너가 있던 것이 인연이 닿아 제가 소장하
게 된 거죠."
"순장판이라고요?"
"순장을 아십니까?"
조명인이 노반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국의 피로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모레 있을 다음 대
국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도 아마 5단입니다."
노반장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듯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명인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당
대의 명인과 아마 5단의 바둑 기력 사이엔 어떤 간격이 있을까. 하늘과 땅이라는 비유가 이런
경우를 두고 나왔을 것이다.
"하하 잘 두시네요. 어쨌던지 그와 나는 바둑판 앞에 앉았습니다. 승부는 가려봐야 하는 거니..."
"호선으로 두신 게 맞습니까?"
"호선에 내가 핸디로 사석을 두 점 접어주는 치수로 했죠. 이건 명인의 최소한의 자존심이고 하
여튼 그날 나는 졌습니다."
"실력이 그 정도로 출중하던가요?'
" 힘이 무진장 강했습니다. 마치 거대한 산맥이 밀고오는 듯 하더군요. 다만 포석에 약간 문제가
있어 보였으나 전체적인 기력은 프로 강이였습니다. 놀랄 일이죠. 몇번을 그 대국을 복기해 보
았는데 뭐랄까...하여튼 전혀 새로운 유형의 바둑이었습니다."
조명인이 아직도 그날의 대국이 선하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바둑판을 보여 주셨나요?'
"보여줬죠. 그런데 바둑판을 대하는 그 자의 모습이 특이했습니다. "
" ... ...?"
노반장은 명인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본 바둑판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마치 바둑판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 죽은 조상을 상면하는 듯 하더군요. 참으로 특이한 모습이었
습니다. 그런 그가 죽다니요. 그것도 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조명인이 무상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바둑에서 승부라는 이유로 숱한 사석의 모태로 살아 온 그
였지만 현실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바둑판이 특별한 겁니까?"
"비자나무로 된 것인데 오랜 연륜을 빼면 특이한 건 아닙니다. 판 뒷면에 풍자와 수자가 양각된 것을 빼면 ."
"풍수라고요?"
"바람 풍자와 손 수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순장판의 소장자가 당대의 고수였던 모양입니다."
"오백년 쯤 되었다면..."
"연산조쯤 되나요. 아마 그 정도일겁니다."
조명인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멋이 있어
보였다.
" 그외 다른 것은 없습니까?"
내친 김에 노반장이 명인을 물고 늘어졌다. 언제 다시 이런 접견의 기회가 온다는 말인가. 다행
히 명인도 부드럽게 대하고 있지 않은가.
"아, 그자가 딸이 하나 있는데 가까운 시설에 맡겨 놓았다 하더군요.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기억에 나네요."
"시설이라면 ...?"
"아동 보호소를 말하는거죠. 참 안타깝고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조명인이 남일수의 인생을 애도하는듯 했다. 너무도 아까운 재주라 말하지 않는가. 적어도 한 나
라의 명인의 입에서 아까운 사람이 타개했다는 토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란 생각을 노반장
은 했다.
"저, 명인님 오랜 시간 고맙고 죄송했습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노반장이 자리를 일어서며 조명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시간이 벌써 밤 11시를 넘고 있었다.
"서울까지 가셔야 된다고...고생이 많으십니다. 아참, 이건 도움이 될라나 모르겠네요. 그 친구가
가고 다음 날인가. 한 통의 이상한 전화가 왔어요. 혹시 바둑을 두자고 한 사람이 왔었냐고 묻
더니 그렇다고 하니까 바로 끊더군요. 그 이후로는 이상입니다."
"... ...?'
조명인이 객실 문앞에서 배웅을 해 주었다. 의외로 많은 소득이 있었던 만남이었다. 야밤에 산을
오르다 렌턴을 하나 주은 격이었다.
2. 시간을 타고 온 한 기객
안개가 도시로 진주해 온 계엄군처럼 도로를 점령했다. 시야가 10미터도 채 확보되지 않았다.
천안의 단대앞 호수를 지날 때부터는 안개가 비로 변해 뿌리기 시작했다. 안개 비가 따로 없었
다. 도로변에 코스모스가 구별될 즈음 노반장은 서울에 도착했다. 먼저 목욕탕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서장이 과장들을 데리고 들어와 소리를 쳤다.
드디어 경찰의 꽃인 서장의 닥달이 시작된 것이다.
"자네가 이 사건의 주무 반장이야?"
"네."
"그래? 이봐, 왜 이 모양으로 진전이 없나? 삼 개 반이나 투입된 인원들 다 뭐하는 거야? 오늘이 팔 일째야. 팔 일째 백육십명의 국가 인력을 낭비하고도 피살자 신원 파악도 못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 말이야?"
서장이 사건 보고서를 책상위로 내던지며 발악을 했다. 목의 힘줄이 자칫 터질 지경이었다. 노반장은 그런 서장의 모습을 보며 삼성 야구단의 코끼리 감독이 떠올랐다. 지휘자가 되면 다 저러고 싶은 것일까.
"이봐 노반장?"
"네 서장님."
"뭔 말을 해봐. 내가 기수대에 있을 때는 기수대 식구들 일 이렇게 안 했어. 도대체 일을 어디서 배
운거야?"
서장이 툭하면 내세우는 18번이 나왔다. 서장은 경기청 형사기동수사대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
는 청장 직속의 수사대 대장을 하다 진급을 해 서울로 온 사람이었다.
" 대답을 해봐? 옳아, 말이 말같지 않다 이건가. 오늘부터 사건 해결 날 때까지 아에 집구석은 들 어갈 생각을 마라. 범인을 잡는 순간까지. 어제 기중자 검거 실적도 서울청에서 꼴찌야. 아니 가장 작은 종암서는 이겨야 할거 아냐. 이 자식들 나가면 뭐하는 거야? 형사 활동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서장의 화풀이가 중구난방이었다. 아침 청장 보고에서 깨진 것이 분명했다.
"내 말이 틀렸나? 어제 하루 종일 나가 기중자 두 놈을 잡아 왔어. 형사반 강력반 조사계 외근 형
사 팔십 명이 나가 겨우 카드로 고소된 두놈을 잡어와. 에라이...아이고 두야!"
서장이 입에 개거품을 물다 자리를 박차고 강력반을 나가버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경무 과장과
형사 과장 등이 뒤따랐다.
허탈했다.
노반장은 간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옴을 느꼈다. 반원들이 어제의 실적을 보고해 왔다. 별다
를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족과 내한한 중국인들을 조사한 형사반의 내용도 별무 소득이었다.
사건은 공전 직전이었다. 사건 초기 1주일이 중요했다. 1주일 안에 해결점을 찾지 못한 살인 사
건의 공전이나 미제화는 필연이었다. 미제 살인 사건은 경찰에게 있어서는 악몽이나 마찬가지
였다. 기소 중지자 100명의 검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인 사건의 예방과 범인 검거가 어찌보면 경찰의 존립 이유라 할 수 있었다.
" 남형사는 상왕십리를 중심으로 왕십리 홍익동 행당동 신당동 등의 시설을 둘러봐. 아동보호 시
설 말이야. 최근 수 개월 내에 남일수란 사내가 맡긴 아이를 찾아보라고."
" 남일수가 누구입니까?"
" 피살자의 이름이야."
" 네에?"
남형사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수사 내용이면 방금 서장에게 그리 깨질 일이 없었다
는 표정이었다.
" 조명인에게 얻은 정보야. 빨리 확인을 해. 찾으면 곧바로 내게 연락을 하고 그리고 윤형사?"
" 네. 반장님."
" 윤형사조는 이 전화번호 내역을 조사해 봐, 지난 일개 월 전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해야 돼. 아
에 전화국에 서류를 만들어 가라고. 두번 걸음하지 말고 요즘 기관들 까다로워 진 거 알지."
노반장은 남형사와 윤형사조를 내보내고 자신과 파트너를 이뤄 다니는 차형사를 바라보았다.
" 차형사 너는 말야."
" 네 반장님..."
" 한국기원에 가 남일수를 혹시 만난 적이 있는 기사가 있는지 좀 알아봐."
" 남일수라뇨?"
"남일수가 피살자의 이름이야. 지금껏 뭘 들은거야?"
" 아 네, 알았습니다. 충성!"
차형사가 노반장의 심기가 불편하는 것을 알고 형사수첩과 자동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
들이 다 나가자 이번에는 과장이 노반장을 불렀다.
" 피살자의 이름을 알아 낸거야?"
과장이 자리를 권하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과장이 어
느새 정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붙은 경정 계급장이 실내등을 반사해 번쩍번쩍 빛났다.
"정복을 왜 갑자기...?"
"응 오늘 청에서 간부 교육이 있어. 경찰 수사권 독립에 대한 외부 강사 강의도 있고."
" 네, 피살자의 이름이 남일수라 일단 추정이 되는 진술이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 봐야죠."
"남일수라 이 말이지. 그런데 조명인과는 어떤 관계던가?"
" 별다른 관계는 아니고 대국을 한번했답니다. 명인의 집에서 말이죠. 이 친구가 명인에게 한 판
대국을 청했나 봐요."
"그래.. 연원은 있는 친구군. 이 친구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친구가 왜 호적이 없는거야. 주민등록
에서 빠질 나이가 아니잖아?"
과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민등록 절차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잘 되
어 있는 나라가 한국 아닌가.
" 조선족을 다시 한 번 정밀하게 조사해야겠습니다. 불법적으로 넘어왔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탐문을 해야죠."
"그렇게 해. 서장 말씀 고깝게 듣지 말고, 나 나갔다 올께."
과장이 노반장의 등을 두드려 주며 서를 나갔다. 노반장도 과장의 뒤를 이어 밖으로 나왔다. 어슬
렁거리다 서장의 눈에 띄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룰 판이었다.
조직이라는 것이 다 그랬다. 노반장은 지난 20년을 돌아보았다. 스물 셋에 순경 시험을 치러 부
평 부개동에 있던 경찰종합학교에 입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년 세월이 흘러 장강에 똥덩이 떠내려가 듯 떠밀려 가는 자신이 처량했다.
" 우울한 하루군."
노반장은 왕십리 소방서 근방에 승용차를 세우고 근방 3층 건물에 있는 기원으로 들어갔다. 들
어서자 마자 입장료 5천원, 음료수 선불이라 써 놓은 안내문이 손님을 맞았다. 이른 오전에 십여 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내기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태평한 사람들이었다.
2. 시간을 타고 온 한 기객
"아니, 노반장?"
"아침부터 손님이 좀 있네요?"
기원안을 정리하고 있던 원장 이청산이 노반장을 보고 놀라 물었다. 그들은 바둑 마니아인 노반장이 가끔 들러 바둑을 두다 원장의 매너와 인격에 반해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오늘 비번인게야?"
"아닙니다. 오늘 아이 병원에 가는 날 아닙니까?"
노반장이 소형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으며 말했다. 노반장의 아파트는 기원 뒤
로 난 소방도로가 지름길 역활을 하는 행당동이었다.
"함께 왔어?"
"아뇨, 지금 대전에 출장 다녀오는 중입니다. 아이 혼자 집을 본거죠."
"아이고 큰 일이군. 뭔 수를 내던지 해야지 원..."
이원장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와는 서로 복심을 내 비치는 사이였다. 원장의 살림집이 멀지 않은 탓에 때로 도움도 많이 받는 처지였다.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골치 아픕니다."
"강도나 뻑치기 그런거야?"
"아이고 형님, 말하면 더 골치 아픕니다. 저 가볼께요. 시간이 나면 올께요."
"우리처의 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네, 가볼께요."
노반장은 기원을 나와 집에 도착했다. 10층 높은 새장에서 한 마리 슬픈 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흔들거리는
바람이에요.
"아빠!"
"오! 내 딸, 혼자 잘 있었어? 무섭지는 않았고..."
노반장이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딸 소영을 껴안으며 말했다. 열여덟
살 푸른 소녀였다. 스무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죽는다는 병명도 모르는 천형에 걸려
시드는 꽃처럼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딸이었다.
"아빠아!"
소영이 있는 힘을 다해 노반장의 목을 껴 안았다. 그러나 양 팔안에는 한줌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래 내 딸, 오늘 병원에 가야지?"
"병원?"
"응."
"병원은 왜 가는데...?"
"왜 가기 싫어?"
"아니 갈께. 내가 안간다 떼쓰면 아빠 슬퍼하잖아."
소영이 쓰고 있던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침대로 간신히 걸어가 앉았다.
"뭘 쓰고 있었는데? 소설 쓴다는 것은 다 끝난거야?"
노반장이 주방을 치우며 물었다. 소영은 차려놓은 밥을 간신히 먹고 자기 주변도 겨
우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소설?"
"써본다 안했어?"
"그건 힘들더라. 나는 안되겠어..."
소영이 침대에 누워 말했다. 학교도 중단한 지 2년이나 되었다. 중 2에서 자퇴해 지
금껏 혼자인 셈이었다.
"왜 안돼. 해보지도 않고?"
"소설은 경험이 있어야 된데. 나는 경험이 없잖아. 그래서 걍 쓰던 시나 쓸까 해. 어
제도 한 편 썼거든."
"읽어볼래?"
"싫어."
"왜?"
"창피해."
"시를 쓰는 것이 부끄럽다면 어떻게 시인이 되지. 어디보자 아빠가 우리 딸의 시를 한 편 감상해 볼까."
노반장이 소영의 책상으로 가 노트를 들고 마지막 페이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출렁이는 파도에요.
손을 주세요.
그대 파랑으로 신호를 보내면
나는 하늘의 물방울로
응답할게요.
"... ...!"
가슴이 뭉클했다. 소영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의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
러나 세상이 언제 단 하루라도 소영에게 그만의 공간을 내 준적이 있었던가.
"유치해? 아빠."
"아냐 유치한 건 잘은 모르겠지만 아빠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데."
"뭐가 느껴지는데?"
"사랑이 느껴져. 바다와 파도 그리고 나의 사랑 나의 달 소영의 따뜻함이 느껴지지."
"아빠, 우리 바다에 갈까?"
"바다에?"
"응 그때 있지, 아빠하고 갔었던 을왕리던가 거기 배에서 버린 큰 닻이 막 널부러져 있던 거기
말야."
노반장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창쪽을 바라보았다. 중학교 입학 무렵을 얘기 하
는 거였다. 10년전 아내가 집을 나가 버린 후 언제 한번 마음 편하게 여행을 다녀본 적이 있던가.
아이는 병이 아니더라도 혼자의 밀폐 속에서 말라 죽을 일이었다.
"가자. 바다에 가는거야."
"언제? 아빠 정말이지?"
"그래 우선 병원부터 갔다와서... 자, 우리 딸 행차합시다."
노반장이 소영의 외출 준비를 시켜 밖으로 나왔다. 병원 치료도 별다른 게 없었다. 그저 근육이
서서히 파괴되는 속도를 줄여주는 약을 타오는 것과 여러 종류의 검사로 병의 진행 속도를 체크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빠, 우리 강아지 한 마리 살까?"
소영이 병원으로 가는 도중 갑자기 강아지를 사자는 소리를 했다.
" 너 강아지 다시는 안키운다고 했잖아?"
소영이는 밍키라는 스파니얼 종의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었다. 달리 정 줄 곳이 없는 소영은 밍키에게 푹 빠져 있다가 어느날 밍키가 이유 없이 죽어버려 큰 낙심을 한 적이 있었다.
"아냐. 근데 밍키가 보고 싶다. 아빠,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고 싶은 거지?"
소영이 길다란 손가락으로 차창을 만지며 말했다. 차창에 밍키라고 써보다가 엄마라고 썼을 것
이다. 가을의 열정을 아직 알지 못하는 소영에게 언제 한 번 청춘의 사랑과 갈등이 올 것인가.
노반장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고 싶다는 소영의 말이 실감났다. 새삼 아내의 빈 자리가 생각났다. 존재는 항상 불편하다.
2. 시간을 타고 온 한 기객
하루 하루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일수라는 피살자의 이름을 단서로 확보한 수
사팀의 움직임은 활발했지만 쉽사리 후속 단서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상왕십리 주변의 몇개 동의 시설을 탐문하던 수사팀이 성동구 전역과 인근 구의 시설로 범
위를 넓혀 갔지만 아이 또한 찾아지지 않았다.
조명인의 집으로 걸려 왔던 의문의 전화도 추적 불능이었다. 수사가 한마디로 난관에 봉착했다.
보다 못한 서장이 직접 수사 회의를 주재했다. 일선 서의 서장으로 처음 발령을 받아 나와, 살인
사건 하나를 미재로 안고 간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전화 번호 추적한 거 그거 얘기 해봐?"
서장이 윤형사를 불러 세웠다.
" 네, 금년 7월 20일부터 9월 20일 사이에 조명인의 집 전화와 접촉을 한 회선은 총 270회선에
823통입니다. 모두가 조명인의 가족 인척 한국기원 언론사 등의 접촉이었고 이들외 약간의 특정
인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바 특이점 없습니다."
" 전화를 한 그 자가 용의자라면 추적이 될 만한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겠어? 공중전화나 여타 방
법을 생각했겠지."
서장이 시덥잖은 표정을 지었다.
" 네, 공중 전화에서 접촉한 통화는 총 30통화였습니다."
" 5프로네."
"서장이 한 손에 말아 쥔 스포츠 신문으로 자신의 한 쪽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 조명인댁에 대학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는데 거의 그 학생의 전화였습니다.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더군요. 그런데 8월 20일 오후 8시 7분 장안동 장안호텔 근방의 전화부스에서 걸려온 통화가
있습니다. 확인이 안되는 것으로 보아 문제의 그 통화가 바로 그곳에서 건 전화로 보입니다."
"장안동이라고...염병! 노반장?"
"네."
"용의자로 보이는 자가 장안동에 살고 있다 이 말인가? 남일수를 주시하고 있던 제 3의 인물이 장
안동에서 조명인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는 그 말이야? 그래?"
서장이 노반장의 의견을 물었다. 형기대장으로 광역화 폭력단이나 대규모 기획 사건을 수사해
왔던 수사통답게 수사의 리듬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를 찾는 것과 목격자 탐문 전화를 건자 등 모든 수사 방향이 난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더구
나 다소간의 희망을 가져 보았던 조선족에 대한 수사도 그렇습니다. 일단 남일수의 신원 파악을
위한 전단을 만들어 공개수배를 하고 ."
" 하고?"
서장이 노반장의 설명에 장단을 넣었다. 타령의 추임새 같았다.
" 조명인 집으로 걸려온 공중전화를 중심으로 세밀한 탐문 수사를 다시 해야겠지요. "
"오케이, 바로 그거야. 수사는 실낱 같은 단서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지금부터 전원 장안동에 가
서 살아. 용의자는 장안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 사람이 분명해. 노반장, 잘 해봐. 그리고 과장 나
좀 봅시다."
서장이 수사 회의를 끝내고 형사 과장을 데리고 강력반을 나갔다.
수사는 다시 심기일전하고 있었다. 원점에서부터였다. 3만여 장의 전단이 만들어져 관내에 뿌려
지는가 하면 전국의 경찰서와 지 파출소를 통해 제보가 유도되었다. 동시에 남일수의 아이를 찾
기 위해 서울 전역의 시설을 뒤지기 시작했다.
노반장과 1반 전원은 장안동에 투입되었다. 문제의 공중전화 부스는 호텔과 붙어 있는 대형 나이
트 클럽의 앞에 있었다.
" 한강변에서 바늘 찾기라더니 딱 이거네요."
형사들이 전화 부스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간단한 노상 미팅을 가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령 용의자가 이 전화 부스를 한번 이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이고, 한숨부터 나오네요."
남형사가 노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8차선 도로 옆의 가로수에서 낙엽이 비오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형사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쏟아지는 낙엽은 눈과도 비슷했다.
" 일단, 시작을 해. 용의자가 지나가다 잠깐 이 부스를 이용한 것이라 생각 말고 이용하기가 용이
하기 때문이다, 라는 긍정적인 자세로 임해. 그래야 용의자도 나오고 단서도 나오는 거야."
노반장이 들고 있던 담배 꽁초를 버리고 각 조를 세 방향으로 내 보냈다.
"각 조별로 탐문을 하고 7시에 이 자리로 집결하자고, 자..."
노반장이 차형사와 호텔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 쪽은 유흥가였다. 그들은 실낱 같은 단서를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 참이었다. 최대한 무식한 것, 그것이 수사의 정도이자 왕도였다 .
두뇌 수사나 과학 수사도 바로 그 피와 땀이 소용되는 발품이 있고서야 존재하는 것이었다.
노반장과 차형사는 다시 탐문 범위를 나눠 집집을 돌아다녔다. 부동산 직업소개소 다방 등 정보
가 모이는 곳은 모두가 탐문대상이었다.
푸른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것이 수사였다. 노반장은 옛날 선배 형사들의 잠언을 기억 해 내
며 하늘에 대고 더욱 힘찬 삿대질을 했다.
장안동의 밤거리에 하나 둘씩 네온이 들어 오고 있었다. 네온의 붉은 홍등이 발광을 할 때까지 그들의 발품은 계속되었다.
3. 검계.
북대 좆대에 돌려치기
추설 삼남에 가보치기
목단 가원에 우동 뽑기
삼수갑산에 날라리 뽕
ㅡ투전판의 노래
먼동이 트고 있었다.
오장육부를 지질 듯 뜨겁던 폭양도 조금 꺾이고 밤새 야기를 몰고 아침을 맞는 기운은 제법 몸과 살을 내어 놓을 만했다.
적소(赤巢)에 작은 미풍에도 밀려오는 파도가 다가와 문안 인사를 했다. 적소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적막했다.
저 바다속 깊은 심연에서도 아침이 온 것을 안 거대 어류들이 잠을 깨어 해양을 휘저으며 하루를 살 궁리를 하고 어촌의 어부들은 바다에 드렸던 그물질을 멈추고 황포돛배를 몰고 귀함을 하고 있었다.
돛배가 출렁거렸다.
함수를 포구로 향하고 돌아오는 황포돛배 위에 만선을 알리는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하 수상한 세상에서 그래도 순수하고 정직한 것은 바다뿐이었다. 바다는 커다란 흉년 없이 뱃사람들의 식고를 해결해 줄 최소한의 양식을 보급하는 창고였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산봉우리를 터트리고 분출하는 용암처럼 약산 위로 떠오르는 시간을 맞추어 식이 거행되었다.
둥ㅡ두웅ㅡ둥두웅!
대고의 육중한 음정에 다당 거리는 소고가 장단을 먹이고 서해 군도의 패자 황단(黃團)의 적소 마당에는 두령 미륵을 위시한 1백여 명의 왈자들이 일사분란하게 도열해 있었다.
황단은 체계가 있었다. 서강패와 황단이 경인 서해 지방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충청도에서는 홍길동(洪吉同)의 홍단이 깃발을 꽂고 있었고 삼남 지역에서는 추설단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그들은 외부로 꼭두나 두령이란 이름을 사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군사 조직을 방불하는 체계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별우사ㅡ두령
부 별우사ㅡ부두령
영감ㅡ고문 참모
중년ㅡ행동대장
만사ㅡ경리 보급
종도ㅡ행동부대
"시작하라!"
두령이자 황단의 별우사인 미륵이 소리를 쳤다.
그의 지시에 의식의 집사를 맡은 영감 막장대가 좌우를 돌아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태양이 뜨는 이 시각, 강화도가 고향인 박춘보와 김포가 고향인 떡바위는 우리 황단의 4대 계율을 듣고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라. 첫째 동지의 처나 첩을 범하면 죽음이다.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막장대가 두 신입 단원들에게 질문을 했다.
"지키겠나이다."
"둘째, 의금부 포청 기타 형옥에 구금되었을 때 동지들의 내력을 말하겠느냐 말겠느냐?"
"함구, 저희들의 입은 저희의 것이 아닙니다."
"셋째, 습득한 재물을 은닉할 것인가? 그리하지 않을 텐가?"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넷째, 천행으로 행락을 얻어 세상에 나갔을 때 어려운 동지가 찾아오면 돕겠는가? 말겠는가?"
"돕겠습니다."
행락(行樂)이란 조직을 은퇴하거나 부득히 중도 탈락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조직 탈퇴는 이제나 예전이나 힘든 일이다.
"별우사여! 이들이 우리의 4대 계율을 죽기로 지키기를 맹서하오니 이들을 받아들임이 좋을 듯합니다."
영감 막장대가 미륵을 올려다보며 청원을 했다. 두명의 예비 단원들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칼을 내리라."
미륵이 두 자루의 칼을 탁자 밑에서 꺼내 놓자 왈자 두명이 다가와 막장대에게 전달했다.
"존명!"
막장대가 두 자루의 몽고식 칼을 뽑아 신입 단원들의 입에 물려 주었다. 사전에 치밀한 교육이 있었던 탓에 신입들을 칼을 입에 물고 개처럼 기어 미륵 앞으로 갔다. 미륵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쳤다.
"땅을 보라."
" ... .."
"다시 하늘을 보라!"
두 사내의 목이 땅에서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마치 사마귀가 벌레를 잡기 위해 취한 자세 같았다.
"그리고 나를 보라. 보았느냐?"
"넷! 두령!"
"니들이 오늘 황단의 적소에서 전 동지들을 모아놓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았다. 동지들이여 나는 너희들의 두령이고 너희들은 나의 동지다."
미륵이 두 사내의 입에서 칼을 빼어 주고는 또 다른 왈자가 가져온 맑은 술을 한 모금 들이 마셨다가 그들의 얼굴 위에 내 뿜었다.
"승천! 황단!"
"승천! 황단!"
미륵의 환영사를 황단의 전 왈자들이 들고 있던 각종 병장기로 땅을 내려치며 그들의 입단을 축하했다.
일명 검계로 불리는 조선시대 군도의 조직력과 단결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허튼 삶이나 역사의 미 기록을 이유로 그들의 실체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륵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이 시대의 역사는 충청도 의군도 홍길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조실록 연산조의 한 대목이다.
위의 홍길동은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그 홍길동은 아니다. 허균의 홍길동이 낭만파라면 충청도의 홍길동은 블랙 머니다. 검계의 색감이 검은 만큼...
3. 검계
연산 10년 어느날 정승 성위안은 다른 두명의 정승을 대동하고 지밀에서 보고를 한다.
ㅡ성상의 바른 치세와 광명한 은혜를 입고 살면서 저 무도한 백성들의 무리에서 지난 10년 간 군도를 이루어 충청도 지방을 어지럽히던 홍길동을 체포했나이다. 길동은 붉은 홍포를 입고 수백의 무리를 모아 홍산 홍주 등 내포의 여러 관아를 업신 여기고 양반가를 침범해 재물을 약탈하는 등 그 죄상이 서장 한 장을 적고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사옵니다. 그럼에도 그간 행동이 민첩하고 지모가 여우 같아 잡히지 않다가 연전에 공주 목사의 지략으로 옥에 가두게 되었나이다.
성위안은 홍길동의 죄상과 내력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자못 홍길동의 체포 사실에 분을 감추지 못한다. 군도 홍길동의 힘이 얼마나 컸던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성위안은 홍길동을 비호했던 관현들을 색출하고 홍길동은 군기시 앞에서 효수할 것을 주창한다. 연산은 예의 블랙 유머를 덧붙여 비답을 내린다.
ㅡ효수를 하고 몸통을 충청도로 보내 조리를 돌리라. 그래, 내가 다리를 뻗겠구나.
황단의 신입 단원 입단식이 끝나고 미륵은 참모 막장대와 단의 전사이자 검객인 용호를 불러 앉히고 무엇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박참정이 연통을 보내왔다."
"어떤?"
막장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돌아오는 그믐날 박원종의 집에서 순장판을 다시 벌리기로 했다는 거야."
"지난번에 어거지 공사를 하려 했다면서요?"
용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지. 영감은 남일수를 단조리 해 준비를 시키고, 그리고 참..."
미륵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약간 뜸을 들이는지라 두 사람이 긴장을 했다.
"이제 준비를 많이 해 왔으니 움직일 때가 온 듯한데...?"
"... ...?"
"기탄 없이 말들을 해봐? 더 준비를 해야 하나?"
"두령,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동천홍을 말하는 것인지...?"
"아냐, 이 사람들아. 아니지 이것도 또한 동천홍의 첫발일 테니...서강으로 가는 것 말이야."
서강은 한양의 관문으로 나라의 모든 물산이 집합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풍성한 경기가 보장되는 땅, 서강...그곳으로의 진출은 황단의 오랜 숙원이자 꿈이었다.
"결심하신겁니까? 두령이 명하면 저희들은 죽음으로 따를 뿐... 사족은 필요치 않습니다."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하하, 고맙군. 그래 가자. 서강으로 가 한양의 턱밑을 장악하고 보는 거야."
"계획이 있으십니까?"
"며칠전 서강의 당취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온 적이 있지?"
"네 들었습니다."
"그걸 핑계로 전면적으로 공격을 한다. 당취는 용호 니가 맡을 수 있지?"
미륵이 용호에게 물었다. 그는 군왕 경호대인 충위영의 장교로 있던 검술의 달인이었다. 술과 노름을 좋아하던 성품에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와 돌아다니다 귀양을 받아 도망을 쳐 미륵이 거두고 있는 자였다.
"그놈을 죽이면 끝나는 일입니까?"
"당래와 합심을 해 황단 전원을 끌고 서강을 들이친다. 수적으로 우리가 열세니 작전이 필요할 터 둘이 작전을 짜보도록..."
"거사 날짜는?"
"박원종의 집에서 순장을 벌이는 바로 그날 밤이다. 육손이 문제인데 그곳에 틀림없이 나타날 터 그놈은 내가 죽인다."
"두령이 직접 말입니까?"
두 사람이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위험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내가 한다. 지난번의 대결도 결말을 지어야 하고."
"그런데 장소가 박원종 대감댁이라 뒷탈이 없을까요?"
용호가 말했다. 그는 권력자의 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아는 자였다. 조선의 실력자의 집안에서 더구나 그의 비호를 받는 인사를 죽이겠다는 두령의 생각을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에게 생각이 있다. 나가들 봐."
미륵이 두 사람을 내 보내고 비밀금고를 열어 금덩이 몇개를 꺼내 포장을 했다. 박원종에게 육손의 목숨 값으로 셈할 심산이었다. 박원종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금덩이가 생기고 육손의 역할을 할 인사도 함께 얻는 것이니 마다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육손을 능가하는 새로운 군도의 비호는 그가 더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밖에 심부름꾼이 왔다. 서강패에서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무엇인가?"
"소인은 봉래옵고 당취 소두령이 황단의 미륵 두령을 뵙고 언제 작패를 할 거냐고 답을 얻어 오라십니다."
작패란 투전판에서 골패를 맞추는 행위로 언제 한판해 보겠냐는 뜻이었다.
"건방진 인사다. 돌아가라. 곧 인사를 해 준다 해라. 이건 가면서 요기나 하고."
미륵이 사내에게 은전 몇닢을 던져 주고 적소를 나왔다. 바람이 시원했다.
여름이 조금씩 열기를 누그러트리고 있었다.
미륵은 포구를 나와 민가들이 즐비한 관아 쪽으로 걸었다. 마주치는 행인들이 모두 인사를 했다. 간혹 마주치는 양반들은 미륵을 보고는 한쪽으로 비켜서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양반 상놈을 따지는 사회에서 보면 희극이었다.
미륵은 색주가를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낯이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노래 소리였다.
노류장화 피어난 곳에 뼈를 묻은 저 늙은이
젊어선 방종으로 온갖 꽃을 탐하다가
죽어서도 기생년의 살냄새를 위하더니.
"... ...?"
미륵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술과 몸을 함께 파는 창가였다.
"아니...?"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한양에서 돌아올 때 배 위에서 보았던 그 여자가 맞았다. 기생으로 한시절 영화를 누리다 제물포까지 흘러든 여자... 미륵과 마주친 기생의 눈이 차갑고 독했다.
얼음장이 있다 해도 저렇게 차가울까.
3. 검계
어름꽃이라던가.
천산(天山)을 모태로 멀리멀리 서역으로 뻗은 산맥에서 핀다는 어름꽃은 보기에는 천상의 아름 다움을 주지만, 손으로 만지면 그 손을 얼려버린다는 전설의 꽃이었다.
미륵은 한양에서 제물포로 낙향한 기생이라고 보기엔 그녀의 아름답고 고고한 자태가 믿어지지 않았다.
한양의 웬만한 기생방을 다 돌아다녀 본 미륵도 처음 보는 절색이 아닌가.
" 미륵 두령, 초명(草明)이라우. 며칠 전 서강 창가에서 좌수영 잡기로 온 걸 내가 사온거라우. 뭐하노?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
주모가 미륵을 보고 버선발로 마당으로 내려와 반겼다.
" 어서.. 이분이 바로 황단의 단주시다."
초명은 여전히 대청 마루에 앉아 미륵을 보며 고개만 조금 숙여 수인사를 했다. 도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어찌 예의가 그렇누? 한양에서 그리 뜨거운 맛을 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게야?"
주모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초명에게 소리를 질렀다. 주모는 인천 제일의 포구인 제물포 물안에서 가장 큰 색주가를 운영하는 만큼 당차고 성질도 사납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놔두쇼. 뭔 흥이 나는 인생이것수. 술이나 내 오시우."
미륵이 성큼 대청위로 올라가 앉았다. 매미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집안에 커다란 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 초명이옵니다."
초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으며 반절을 했다. 기생으로 손님을 맞는 첫 인사인 셈이었다.
"미륵이라 한다네."
"저희는 구면이지요?"
초명이 미륵을 보며 말했다. 아름다운 콧날과 반짝이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넓은 아미 적당한 미간 부드러운 목 등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명품이란 생각을 미륵은 했다. 그러나 한 여름에도 냉기가 감돌게 하는 서늘한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초명은 천산의 만년 설산이 뿜어내는 한기에 가득 싸여 있었다.
"지난번 배를 기억하시요?"
"달리는 뱃전에서 저는 이녁을 보고 아 어떤 인연이 있겠구나. 생각 했지요."
"지금 인연이라 말하셨수?"
미륵이 반문했다. 초명의 눈썰미가 대단했고 거기다 친화술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미륵이 지역의 유력자임을 간파해 내고 한자락 자리를 깔고 시험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번 근수를 계산해 보고 있는 것이다.
"인연이지요. 한양 기방에서 기적을 뽑히고 인천 수영의 잡기(雜岐)로 내려온 처지이지만, 다행이 안목이 있기에 이녁을 기억하다가 이리 만난것 아닌지요?"
커다란 술상이 내어오자 초명이 미륵에게 한 잔 술을 따라 주었다.
" 기적을 작파 당하고 어찌 수군 잡기로 온다는 말인가? 자네 얼굴이 잡기가 가당한가?"
미륵이 술잔을 받아 입안에 털어 넣고 말했다. 잡기는 조선 병영의 찬모를 말하는 것으로 공노비로 예속된 여노비들 중 가장 쓸모가 없는 노비들을 골라 변방의 군에 배치하여 병사들의 심부름과 잠자리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종의 위안부였다.
"장사의 씨가 따로 없거늘 항차 수자리 잡기에 차별이 있을까요? 하 수상한 세월이 병고인게죠."
초명이 알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더니 옆에 있던 악기를 집어 들고 연주를 하며 노래 한 곡을 뽑아 내었다.
어희야 어희야,
어희야 놀자.
초명이 뱉어낸 목청이 초장부터 가장 높은 곳으로 치달았다. 음색은 맑았고 장단은 높았다.
성하를 노래하던 매미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연안을 불던 해풍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방풍림 사이에 앉아 쉬는 듯 사방이 조용했고 하늘과 땅 사이엔 오직 초명의 절창이 간들거렸다.
" .. ..!"
미륵은 순간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아도 초명은 국보급 기생임이 분명했다. 미모와 예절과 기예 3절이 절정에 이른 기생이 인천 수영의 잡기로 내려온 곳에는 엄청난 곡절이 숨어 있을터였다.
녹음 방창에 꾀꼬리 우짓어
나무 하는 사립동
몽정을 할 적에는
어희야 어희야
어희야 놀자.
미륵은 자작으로 술잔을 따라 마셨다. 송화가루로 만든 술인지라 입가에 맺히는 향이 진하고 깊었다.
조선 전 중기의 기생은 전적으로 국가의 재산이며 관리 품목이었다. 기생들은 조선 8도 280 곳의
목 군 현에 배치되어 관청의 허드렛일과 관원들의 여흥을 위해 존재하는 위안부라는 철저한 신분을 갖고 있었다.
하여, 모든 기생들이 창이나 여흥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미색과 끼가 있는 기생들을 발탁해 별도 여흥 조직을 만들었고 이들 중에서 돈을 모은 기생들이 속전을 내고 기생적에서 빠져나오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의 개념이 성립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면에서 무능하기 그지 없던 조선 조정은 이 속전 기생들의 알량한 경제력마저 참탈한다. 속전 기생마다 조방(助房)이라는 일종의 기둥서방을 세워 갈취 구조를 만들어 그들의 고혈을 빤다.
대전 별감이나 포청 포교 의금부 나장 등 조정에서 녹봉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힘든 관원들을 조방으로 두어 그들의 생활 방편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방의 예절국 청송(靑松) 조선의 정신이 무색하다.
"단주, 이왕 인연이라 여기신다면 오늘 하루 나를 속전시켜 주실 수 없을는지요?"
초명이 창을 그치고 미륵에게 청을 했다. 하루 속전이란 자신을 하루 동안 사달라는 뜻이었다.
의외의 청이었다.
"연유를 묻지 말고 말이요?"
초명이 대답 대신 울타리 너머 바다쪽을 응시했다. 썰물이 시작되었는지 갯내음이 물씬 바람을 타고 전해 왔다.
3. 검계
적소로 돌아온 미륵은 서강으로 진출하려는 황단의 숙원을 풀기 위한 여러가지 준비에 바빴다. 단원들의 조련과 정신 교육은 물론이고 무기나 보급 등 준비할 것이 태산과 같았다.
먼저 참모인 막장대가 세운 공격 전략을 가져와 미륵에게 보고했다.
"공격 시점은 그믐날 해 떨어질 무렵으로 정했습니다. 그날 아침 적소에 집결한 모든 단원들이 하늘에 고유한 후 3척의 세곡선에 나누어 타고 서강으로 들어가 삼삼오오 서강패의 적소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두령과 약속한 작패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당최와 그 일당을 일거에 제거하고 서강의 크고 작은 시전과 물상 거기다 규모가 큰 모든 색주가를 장악할 것입니다."
"당취에게 기별은 넣었나?"
"네, 통인을 보냈으니 놈도 알고 있을겁니다."
"인원은 모두 몇명이나 준비되었나?"
"모두 102명입니다. 조련과 체계가 막강하고 무장이 튼실해서 능히 서강패를 넘볼만합니다."
"넘보는 게 아니라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할 승부는 거는 것이 아닌 법, 승산이 없을 때는 36
계가 선이라고 손자병법에도 나오지 않나? 그리고 죽으면 아무 소용 없는 법, 막영감! 당신은 이번 전쟁에서 무조건 살아 남아야 한다."
미륵이 막장대의 손을 잡아주며 당부를 했다. 황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인사였다.
전라도 순천 관아에서 이방을 하다 목사의 모함을 받고 참수형을 당할 처지에서 도망을 쳐온 자였다.
황단의 구성원 하나 하나는 이런 곡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거대한 곡절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세상을 향한 저주와 적개심도 강한 법, 미륵은 소수를 지향하면서도 이렇게 단원들을 골수로만 채워 왔었다.
"두령께서도 몸을 위하십시요?"
"걱정마라. 육손이 아무리 장천에 빛나던 태양이라 하더라도 서산에 지는 해, 내가 단 하루 만에 놈을 서강에 밀어넣어 버릴 것이다."
"두령께선 오늘 올라가실겁니까?"
"지금 떠나 박참정을 보고 그믐밤 저녁에 박원종 대감댁으로 갈걸세. 일수는 준비됐나?"
미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미륵 옆에는 단장 속에 칼을 품은 종도(從徒) 두 명이 따라나섰다. 용호에게서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왈자들이었다.
"가자, 일수는 어찌됐나?"
"네, 여기 따릅니다."
남일수가 황급히 행장을 꾸려 미륵을 따라나섰다. 적소의 문 앞에는 초명이 와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작은 봇짐이 들려 있었다.
"자 따라나서시요."
미륵이 초명에게 말한 후 일행의 앞장을 서 걸었다. 초명 남일수가 그의 뒤를 따랐고 왈자들이 뒤를 따르며 일강쪽으로 향했다.
이 길이 조선 찰방로의 하나인 경인 가도였다. 덕개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배를 타면 저녁 무렵이면 서강에 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한양에 뭔 일로 가는지는 모르나 가는 중에 노래나 하나 해보슈."
미륵이 초명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 속전을 해 달라던 초명의 의도는 한양에서의 뒷정리 정도라 생각하고 주모에게 사흘 말미를 얻어 데려오는 중이었다.
"길을 가면서는 창이 안되죠. 기가 모아지질 않으니까요. 그러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감상이 하나 있습니다. 연전에 들은 시인데 제법 마음에 담아 새겨 볼 내용입니다."
초명이 가볍고도 부드러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몸에서 분꽃 내음이 났다.
"시도 노래요?"
"좋은 시는 노래이죠. 좋은 노래는 시이기도 합니다."
초명이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시 한 수를 나즈막히 읊었다.
경인 가도에 몸을 내 주고 있는 주변 풍광이 고즈넉했다. 작은 냇가에는 멱을 감는 아이들이 가득 했고 들판에는 폭양 속에서 김을 매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감만 못하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
촉의 하늘 공활하고 구름도 망망한데
천봉이 첩첩하여 넘을 길 바이 없고
만목이 빼곡하여 바라볼 곳이 없다.
가고파도 못가매 애간장이 녹나니
나그네 길 즐겁단들 근심만 더하누나.
ㅡ 서거정 ㅡ
"어떤 뜻의 시요?"
"세상에서 끈을 잃은 한 지사의 단장지통이죠. 장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귀향길에서 귀촉도 우는 소리를 듣고 지은 시랍니다."
"단장지통이라? 창자가 끊기는 아픔이라 이 말인데..."
"귀촉도는 상사조죠. 산막의 깊은 밤에 벗이라고는 귀촉도밖에 없다면 그 밤이 어떻겠는지요?"
" .. ...?"
초명이 미륵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무서울 정도로 그녀를 싸고 돌던 이유를 모를 한기도 지금은 가시고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미륵은 초명에게 자신이 베풀어 준 하잘것 없는 대가에 감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 정체 불명의 여자는 누구일까. 어떤 말 못할 곡절을 갖고 이런 만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륵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동시에 미륵은 초명이 자신의 전적에 걸림이 된다면 가차 없이 접어 주리라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3. 검계
서강 나루를 통해 한양에 들어 온 미륵 일행은 북촌에서 멀지 않은 한 다림방의 방을 빌려 짐을 풀었다.
고기를 매달아 놓고 판다고 해서 현방(懸房)이라고도 부르는 다림방은 백정 계통에서는 연줄과 자금력이 풍부한 자들이나 할 수있는 이권 사업이었다.
북촌 다림방의 주인은 오래전부터 미륵과 교분을 트고 지내 오고 있는 오정(五丁)이었다.
오정이란 뜻은 5월에 난 노비라 하여 그리 지어진 것이었다.
"어서 오슈. 일행이 많수?"
소 머리를 다듬고 있던 오정이 칼을 내려 놓으며 미륵을 반겼다.
"방 몇개나 있나?"
"방 세개가 다 비었수. 저쪽에 여장을 푸슈."
오정이 다림방 뒷편에 있는 삼칸집으로 안내를 했다. 작지만 정갈하게 지어진 흙집이었다.
"여기서들 쉬고 있어. 비호는 초명이를 보호하여 한양 길을 돕고 일수는 대국 준비를 하면서 쉬도록. 그리고 백호는 나를 따르고."
미륵이 일행들의 할일을 지시하고 다림방을 나왔다. 오정에게 식사와 여타 수발을 부탁한 것은 물론이었다.
"두령, 어디로 가시는지요?"
"나는 박참정을 만나러 간다. 백호?"
미륵이 수행원을 불렀다. 쇠똥이니 말똥이니 하던 그들의 이름 대신 미륵이 비호나 백호 등 단원들의 성격에 맞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네 두령!"
"너는 이 길로 서강으로 가 초명의 뒤를 캐라. 출생의 내력이나 그동안의 행적, 특히 인천부로 내려온 이유를 자세하게 알아봐."
"그것만 하면 됩니까?"
"은밀하게 해. 대사를 앞두고 사소한 실수로 낭패를 보는 수도 있으니까. 빨리 가봐."
미륵이 백호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북촌 박영문의 집을 찾았다. 박영문이 퇴청을 해 집에 와 있었다.
"오, 이사람. 아직 날짜가 남았잖아?"
박영문이 미륵을 보고 반갑게 맞았다. 그의 집에는 손님이 한명 더 와 있었다. 커다란 등치에 구렛나루가 볼만한 사내였다.
"미륵, 인사 드리게. 사복시에 있는 홍교위일세."
" ... ...!"
미륵은 그 자가 사복시의 왈자 군관 홍경주라는 것을 알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드시게. 오, 자네가 황해에 용력이 자자한 미륵이로군?"
홍경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륵을 맞았다. 다른 벼슬아치들 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박영문이 홍경주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홍경주는 사복시 안에서 용력과 담력이 제일가는 무장이었다. 무식함과 천박함을 오직 힘 하나로 극복하고 버티는 사내였다.
"이렇게 반겨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내가 누군가? 장안에서 제일가는 무식이 나 아닌가? 나는 다른 거 없네. 사내에게는 오직 하나 힘이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일세. 자네 말을 많이 들었지. 언제 한번 만나면 힘을 겨뤄볼 참이었지."
"뭔 말씀을..."
"아닐세. 지금 어떤가? 수박이나 씨름... 다 좋아."
홍경주가 금방이라도 한 판 붙자는 듯이 나왔다. 단순 명징한 사내였다. 한 머리로 두 가지는 생각 못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하. 제가 졌습니다. 어찌 제가 감히 조선 제일의 장사 홍교위와 맞서겠습니까?"
미륵이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홍경주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항복이라 이 말이지? 하하, 박참정 자네가 증인이야. 오늘 홍경주가 미륵을 이기고 동생을 삼은 것 말야."
"하하하, 좋은 동생을 얻는 데 맨입으로 됩니까?"
"그렇지! 박참정, 우리 기방으로 자리을 옮기세. 이봐 아우, 가세나. 내가 한턱 쓰지. 암."
홍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급한 성격답게 행동도 민첩했다.
이 사람, 홍경주.
한가한 무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참가, 6조 당상을 거쳐 참판 판서 좌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