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일이 아닌 토요일 오전을 몹시 바쁘게 보낸 날이었다. 근무 마치고 인근 초등학교에 후배랑 진주를 다녀오기로 약속해두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독서발표회와 친선배구를 하는 자리다. 직전 회장단에서 나는 끝자리 총무를 맡은 적 있다. 나를 태워 가기로 한 후배가 몸살이 심해 동행이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바쁘게 창원시청 앞으로 나가 선배가 운전하는 차편을 이용했다.
선배는 도교육청에 근무해서 토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창원을 벗어나기 전에 원로 선배 한 분을 더 모셨다. 셋은 진주까지 가면서 그간 두세 달 남짓 보낸 퇴직 후 안부를 여쭈면서 웃음꽃 피우면서 갔다. 그런데 나는 점심밥 먹을 새 없이 나선 걸음이라 배가 고파도 참아야했다. 모이기로 한 진주교육대학 부설 초등학교 체육관에 닿으니 오후 두시 가 지나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회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모교 대학캠퍼스였다. 진입로에는 단계별로 진행 중인 교원임용고사 합격을 기원하는 후배들의 격문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는 단풍이 물들었고 벚나무 낙엽은 바닥에 쌓여 뒹굴었다. 그간 주로 마산과 창원에서 정기모임을 가졌으나 사이 한 번씩 서부경남으로 장소를 바꾸기도 했다. 진주 회원들에만 멀리 이동해야하는 불편을 들어 중부권과 균형을 맞추는 배려였다.
본래 대학 인근 배영초등학교에서 모임을 가지려 했으나, 그곳 강당이 학예발표 행사장으로 쓰여 불가피하게 장소가 옮겨졌다. 음료와 다과가 놓인 테이블 앞에서 안부를 나누고 배구시합을 먼저 했다. 편을 갈라 직전회장이 심판을 보고 나는 점수판을 넘겨주었다. 연세든 교장이나 장학관이 있는가 하면 사십대 여선생도 섞여 있었다. 알맞게 땀을 흘려갈 즈음 승부가 났고 한 게임 더 도전해 승부를 나누어 가졌다.
배구를 마치고 근처에 예약해둔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230차 정기모임이니 이 모임의 연륜을 짐작 할만 했다. 회원들이 준비한 독서발표는 시간관계상 유인물로 대체하고 전자우편으로 주고받자는 제안이었다. 매년 한 권씩 발행하는 회지 편집계획을 안내받았다. 매번 있어온 기획 특집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건배제의에 이어 정담을 나누는 자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날이 어둑했을 때 함께한 스무 명 회원들은 자리를 마치고 일어섰다. 통영으로 마산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나를 태워 함께 온 선배는 진주의 다른 선배랑 2차를 모의하느라 주차된 장소로 조금 늦게 돌아왔다. 나는 낌새를 차리고 시외버스 타고 돌아오려고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고 말았다. 어느 로터리 근처 지하주점으로 함께 가야했다. 분위기로 봐서 내격에 맞지 않는 양주에다 접대부가 나올 자리지 싶었다.
이어 연락이 닿은 지역교육의 수장과 선배 몇 분들이 더 합류했다. 도우미가 오기도 전에 양주 병뚜껑이 두 개째 열리고 있었다. 선배의 차는 어느 시간대가 될지 몰라도 창원까지 대리운전을 각오해야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렸다가는 안 되겠다싶어 아가씨가 입장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잽싸게 탈출에 성공했다. 나오고 보니 방향감각을 몰라 택시를 타야했다. 택시 안에서 알고 지내는 선배한테 전화를 넣었다.
창원행 시외버스가 끊어질 시간이지 싶어 심야버스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교대학에 적을 둔 선배는 토요일 밤임에도 마침 연구실에 있었다. 시외주차장으로 향하던 택시를 돌려 모교캠퍼스로 되돌아왔다. 그사이 선배하고 전화나 메일은 주고받았어도 가까이는 지난 봄 창원에서 한 번 조우했다. 오래 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야간강좌 대학에서 다시 공부할 때 만난 선배로 형처럼 터놓고 지내는 사이다.
선배는 모교대학의 국어과 정교수로 더러 보직도 맞는 중견이었다. 올 겨울방학 땐 일본 가서 두 달 동안 머문다면서 틈내서 한 번 다녀가라는 제안이었다. 조만간 안식년으로 해외에서 일 년 간 연구 활동도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선배가 깎아주는 과일조각을 몇 점 들면서 두어 시간 후딱 지났다. 밤이 꽤 깊어가고 있었다. 대학 후문에서 선배 배웅을 받고 시외주차장에 닿으니 창원행 심야버스는 열한시 넘어야 출발했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깊은 밤 남해고속도를 달린 버스는 북마산 나들목을 내려섰나보았다. 기사양반이 ‘석전동에 내리실 분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 잠에서 깨었다. 그때 버스 안 전광판 시계는 날짜변경선을 넘겨 새날이 시작되었다. 버스는 훤히 뚫린 시내 길을 더 달려 창원 중앙동에서 남은 승객을 내려주었다. 깊은 가을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길거리에 낙엽은 뒹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