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사 이경류(從事 李慶流)
[생졸년] 1564년(명종 19)~1592년(선조 25) / 향년 28세
[문과]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07/34)
[진사]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46위(7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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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 이공 묘갈명(從事李公墓碣銘)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영남 일대가 와해되었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이르자 조방장(助防將) 변기(邊璣)는 도망쳤고, 종사관 이경류(李慶流) 공은 전사하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길이 통하지 않아 조정에 제때 보고하지 못하였으며, 난리가 평정되고 나서도 미처 포상하여 녹훈하지 못했다.
공의 아들 제(穧)는 공이 전사할 때에 겨우 네 살이었다. 장성한 뒤에 글을 올려 아뢰니 비로소 아무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세워 ‘충신의 집안’이라고 하였다. 공의 자(字)는 장원(長源)으로, 한산(韓山) 사람이다. 가정(稼亭,이곡(李穀)과 목은(牧隱,이색(李穡)으로부터 양경공(良景公) 종선(種善), 문열공(文烈公) 계전(季甸), 대사성 우(堣)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고관대작이 나왔으며, 3대를 내려와 판서 증(增)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 사직 몽원[夢黿,상서공파 옥구(沃溝) 입향조]의 딸과 혼인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강개하고 절개가 있었고, 2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이어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판서공의 공로에 의하여 6품으로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다음 해에 사헌부 감찰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에 예조로 옮겼다.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이 갑자기 이르자 백관들은 새나 짐승처럼 숨어 버렸으나 공은 급히 대궐로 달려갔다.
묘당에서 장수를 보내 조령(鳥嶺)을 지키려고 하는데 공의 중형(仲兄) 경함(慶涵)이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급작스러운 와중에 공의 이름을 잘못 써서 계하(啓下)를 받았다. 형이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나에게 맡겼으니, 내가 반드시 가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세가 급박하니, 어찌 감히 어려움을 사양하겠습니까.”
하고는 곧 말을 달려 떠나니, 아무 기미도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영남에 이르러 주장(主將)이 머물러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 있음을 보고 의리로 책망하였다. 그날 밤에 주장이 달아나 간 곳을 알 수 없자 모든 군사들이 놀라서 흩어졌다. 공은 방법이 없었으나 이일(李鎰)의 군대가 상주(尙州)에 있다는 말을 듣고 속히 가서 그를 따랐는데, 수십 리도 못가서 적군이 이미 온 들판에 가득했고, 이일도 달아나 버렸다.
윤섬(尹暹) 공과 박호(朴箎) 공이 종사관으로서 모두 죽자, 공이 눈물을 흩뿌리며 남아 있는 무리들에게 고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드디어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곧 4월 25일의 일이었다.
전장에 다다라서는 관복과 이불을 한 아전에게 부쳐 돌려보내며 집안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사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 다만 부모님을 편안하게 받들고 아이들을 잘 보호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또 가동(家僮)에게 말하기를,
“내가 시장기가 심하니 밥 한 사발을 가져 오거라.”
하였다.
밥을 찾아서 돌아오자, 이미 공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이에 사잇길로 돌아오다가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판서공을 만나 통곡하며 정황을 아뢰니, 판서공이 그 관복과 이불을 사용하여 광주(廣州) 낙생(樂生)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이〈삼종사가(三從事歌)〉를 지어 그들을 애도하였다.
아! 공은 보잘것없는 백면서생으로서 벼슬길에 나선 지 겨우 1년이었고 군사에 관한 일은 그가 배운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아침에 급작스러운 변고가 발생하자 사지(死地)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저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도 적의 기세만 바라보고 도망치는 자가 서로 잇따랐는데, 홀로 목숨을 버리고 의리에 나아갔으니, 분명하고도 조용하였다.
비록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풍도와 의리는 사람의 인륜을 부지하기에 충분하다. 국가에서 수백 년 동안 선비를 양성하여 바로 오늘에야 그 힘을 얻게 되었으니, 공의 죽음을 또 어찌 작은 것이라고 하겠는가.
공이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자났으나 혼백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어떤 걱정이나 경사가 있을 경우에 집안사람에게 종종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들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같은 고을의 후생(後生)으로서 또한 익숙하게 들었으니, 어찌 주자(朱子)가 말한 “수양하여 얻은 기(氣)는 강대하여 한번 응결되면 흩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기이하도다.
부인은 횡성 조씨(橫城趙氏)이며 그 부친은 첨지 린(遴)이다. 부인은 가정의 범절을 순수하게 갖추었으며, 공이 보낸 영결하는 편지를 종신토록 마음에 새겼다. 88세의 나이로 경인년(1650, 효종1) 세상을 떠나니, 공의 묘소 우측에 장사 지냈다. 아들 제(穧)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별좌 권영(權偀), 목사 김효성(金孝誠)은 사위이다.
부사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정기(廷夔)는 참판이고, 정룡(廷龍)은 군수이다. 봉사 자(澬), 군수 행(涬), 판서에 추증된 항(沆)은 장남 소생이며, 부사 오(澳), 참판 택(澤), 진사 협(浹), 관찰사 집(潗)은 차남 소생이다. 항의 아들 병상(秉常)은 판서를 지내고 대제학을 맡았으며, 협의 아들 병태(秉泰)는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외손으로 현달한 자는 승지 김세정(金世鼎)과 판서 윤덕준(尹德駿)이다.
공의 후손은 이미 번성하고 또 훌륭한 인물이 많으니, 하늘이 공에게 보답으로 베푼 것이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인가.
관찰사가 황해 감영에 있을 때 묘갈을 세우고자 하여 서찰과 예물을 보내와 글을 청하였는데, 내가 공경히 승낙하였다.
얼마 뒤에 관찰사가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 상여로 돌아오니, 그의 조카인 판관 병정(秉鼎)이 편지로 독촉하기를, “글을 지어주지 않으시면 우리 숙부께서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관찰사의 뜻을 슬피 여겨 드디어 그를 위하여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천지 사이는 / 天地之間
기운이 강하고도 굳세도다 / 氣剛烈兮
살아 있으면 존재하고 / 不生與存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死與滅兮
혹 녹아서 응결되면 / 是或融結
우뚝한 산이 되고 / 山岳崒兮
또 우레와 번개가 되어 / 又爲雷霆
답답한 기운을 쏟아내네 / 洩壹鬱兮
상수가 넘실넘실대니/ 商水湯湯
평원이 보이지 않네 / 平原忽兮
공중에서 귤이 떨어지니 / 空裏投橘
신령이 황홀하도다/ 神怳惚兮
원숭이 울음과 학의 날개 짓은 / 猨唫鶴飛
내 짝이 아니라네/ 非我匹兮
울창한 오동나무와 가래나무 / 有菀梧楸
이 집에 편히 살리라 / 安此室兮
선비들 많이 모여 / 冠佩莘莘
정갈히 제사 지내네 / 享祀潔兮
이 충효를 심었으니 / 鍾玆忠孝
경사가 길이 드러나리라 / 慶長發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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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종사 이공 묘갈:
이 글은 이경류(李慶流,1564~1592)의 묘갈이다. 이경류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장원(長源), 호는 반금(伴琴)이다.
[주02] 판서공의 공로:
이경류의 부친 이증(李增)은 1589년 대관의 장으로 정여립(鄭汝立) 옥사의 국문에 참여하는 공을 세워 이듬해 평난 공신(平難功
臣) 3등에 책록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주03] 삼종사가(三從事歌):
구사맹의《팔곡잡고(八谷雜稿)》〈찬화(贊畫)〉에 실려 있다.
[주04] 상수(商水)가 넘실넘실대니:
상수는 상산(商山)의 강이라는 뜻으로, 상산은 상주(尙州)의 고호(古號)이다. 이경류가 상주 전투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
이다.
[주05] 공중에서 …… 황홀하도다:
성해응(成海應)의《연경재전집》권54〈초사담헌〉에 이경류가 상주 전투에서 전사한 뒤 혼령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혼령이 모
습을 드러내어 모친이 기절한 일이 있고, 또 이경류의 아들 재(穧)가 천연두를 앓아 의원이 동정귤(洞庭橘)이 있어야 치료할 수 있
다고 하자, 귤 10개를 떨어뜨려 주어 아들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주06] 원숭이 …… 아니라네:
이경류의 혼령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유(韓愈)가 유종원(柳宗元)을 위해 지은〈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墓
碑)〉에, 유종원의 혼령을 말하는 부분에 “후(侯)가 아침에 나가 놀다가 저녁에 돌아오시니, 봄에는 원숭이와 함께 날고 가을에는
학과 함께 날도다.[侯朝出遊兮暮來歸, 春與猿吟兮秋鶴與飛.]”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