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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9 - 한니발 티치노와 트레비아 승리후 트라시메노호수에서 로마군에 승리하다!
BC 218년 한니발은 6만 대군으로 에스파니아의 카타르헤나를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고 갈리아
(프랑스)를 지나 론강을 도강해 알프스에 이르니 4만 6천에 코끼리 37마리였는데,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꼬끼리와 병사들이 많은지라
북이탈리아 토리노에 이르렀을 때는 43%인 보병 2만과 기병 6천으로 줄었지만 최정예 였습니다.
이는 중국의 대장정을 연상시키니 1927년 8월 1일 남창에서 주은래의 지도로 주덕, 하룡,
엽정등이 봉기해 광주로 진격했으나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반격을 받아 패한후에는...
모택동은 정강산에 들어가 노동혁명군 1군을 창설하고 이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
(瑞金 서금) 에 소비에트 정권 을 구축하고 4차례나 국민당 군대의 공격 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50만 병력과 비행기 200대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5차공격에 패배해 1934년 7월 10만
홍군은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탈출해 대장정에 오르니 2년간 18개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서 1만 2,500km 를 초인적인 힘으로 행군해 싼시성에 1만명이 도달합니다.
10만 홍군이 1만으로 줄어들었지만 2방면군과 4방면군이 합류해서 홍군은 3만명 으로
늘어났으며 죽음을 넘어 장정을 완수한 병사들은 최정예 부대로서 항일투쟁과 공산
혁명의 중심부대 가 되었으니, 이들이 지나간 중국 곳곳에는 혁명의 씨앗이 뿌려졌고
이들 병사들은 모두 소대장을 시켜도 감당할 정도의 "정예병사" 가 된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한니발 이후에도 대군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은 장군이 있으니 랑고바르드왕국을
치러 가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 1800년의 나폴레옹이 있으니....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의 주문자는
본인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던 스페인왕 카를로스 4세 였다고 합니다.
피사에서 2개 군단을 인수해 북쪽 피아첸차에 도착한 로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시칠리아 에서
북상하는 다른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를 기다리기로 하고는... 기병과 경무장 보병만 데리고
포강을 거슬러 전선을 시찰하는중에 이탈리아 제일의 쌀 생산지인 티치노(파비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수백년간 로마인이 전투에서 만난 적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결같이 겨울이
오면 자연적인 휴전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으며 전투는 내년 봄에 시작되곤 했는
데.... 로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겨울철에 꼬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온
저 젊은이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을 인물이라 보고 병사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합니다.
“전사 여러분, 여러분이 마르세유까지 나와 함께 갔던 병사들이라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들이라면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론강에서 첫 대결을 했을
때 우리 로마쪽의 대승(?)으로 끝난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소규모 기병
정찰대 끼리 마주쳐서는 로마군 전사자는 140기이고 카르타고 기마대는 200기 였었음)”
"하지만 여러분은 그때의 눈부신 전과를 직접 보지 못했다, 여러분은 새로운 적과 싸우는게 아니라
우리가 23년 전에 무찌른 패배자(시칠리아에서 1차 포에니 전쟁)의 잔당들이다, 우리는
이겨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얻었다. 그들은 알프스를 넘어오느라 전력의 3분지 2를 잃어
버렸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몸은 오물투성이에 암석에 다친 의지없이 떠도는 유랑자들이다“
한니발도 숙영지에서 병사들을 모아놓고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으니 둥글게 둘러 앉히
고는.... 포로로 잡은 갈리아인을 끌어냈으니 굶주린데다가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해 동상에 걸렸으니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사슬을 풀어준 후에 “원하는
자들에게는 결투를 허락하겠다, 이긴자에게는 무기와 말을 주고 자유롭게 풀어주겠다”
그를끼리 검투사인양 애처로운 결투가 벌어졌으니 이긴 자에게는 박수를 보냈지만
져서 죽은자들도 가혹한 삶을 끝낼수 있게 되었으니..... “너희가 방금 본
갈리아인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고
확신한다. 방금 본 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너희들의 현재 실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의 좌우에는 2개의 바다로 가로막혀 있고 포강은 론강보다 크고 물살도 거세다, 엄청난 고생
끝에 넘어온 저 알프스 산맥을 다시 넘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너희에게는 로마군과 전투
에서 이기느냐, 패하여 죽느냐 하는 길 밖에 남아있지 않다. 승자가 되면 불사신조차도 바랄
수 없는 보수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이기면 로마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 된다”
“ 적장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알프스를 넘은 나를 당할 수는 없을 것이며 전쟁이 끝나면
카르타고든, 에스파냐든 아님 이탈리아든 원하는 땅을 주겠다, 조세는 자식대 까지
면제이고 금화나 카르타고 시민구너을 원하는 자는 그것도 주겠다. 상전을 따라온
예에게도 자유를 줄것이며 모든 병사들에게는 1인당 2명의 로마인을 노예로 주겠다!”
코르넬리우스는 겨울철이기도 한데다가 다른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도착할 때 까지
는 전투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엇지만 지형 정찰을 위해 나선 것으로 티치노강에
다리를 놓고는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는데.... 한니발은 로마 2개 군단이 피아첸차
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전투를 위해 군대 전체를 이쓸고 동쪽으로 출발합니다.
그때 한니발도 기병만 데리고 지형 정찰을 나왔다가 두 기병대가 마주쳤으니 로마 집정관이
가는 곳에는 막대기 묶음에 도끼를 맨 12개의 권표(權標)를 든 12명의 호위대가 따르니
적 기마대 행열속에 집정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한니발이 먼저 공격하기로 합니다.
한니발은 가장 우수한 누미디아 기병을 양쪽 날개에 배치한후 중앙에 카르타고와 에스파니아
출신 기병을 배치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앗는데..... 로마군은 동맹국 기병이
본대를 구성하고 전위에는 로마와 강화를 맺은 갈리아인 기병을 배치했는데 로마
경무장 보병은 첫 화살을 쏜후 카르타고 기마대의 집단 돌격에 겁을 집어먹고 흩어져 버립니다.
코르넬리우의 4천 로마 기병대는 처음에는 호각지세로 싸웠지만.... 곧 카르타고군의 양 날개를 맡은
누미디아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해서 갈리아기병은 바로 쓸려나갔고 로마 본대에 육박하자 로마
기병대는 포위당할까 염려해 도망치려고 하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주변이 허전해져서 상처를
입고 포위되었지만 스키피오는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구출됩니다.
아들은 그후 트레비아강 전투에서도 다시 아버지를 구출해 후퇴했으며 6년후 기원전 211년
에는 2만 5천으로 에스파니아로 건너가 바이쿨라 전투와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파하고는...... 기원전 204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에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적 기병의 위력을 실감한 스키피오는 평원인 피아첸차에서 숙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깨닫는
데..... 알프스에서 발원한 티치노강이 북쪽에서 포강으로 흘르드는 반면에 아펜니노산맥
에서 시작된 트레비아강은 남쪽에서 포강으로 흐르니 트레비아강 남쪽이 울퉁불퉁
한지라 기병이 활동하기 어렵다고 보고 아펜니노산맥 아래 언덕 위에 견고한 요새를 만듭니다.
한니발은 포로 심문을 통해 알게된 로마군 군량저장소인 카스테조 마을을 습격해 로마군 군량을
확보하니 주변 갈리아인들의 마을을 약탈할 필요가 없어진지라 주변 부족 회유에 나섰으니
1만명의 용병을 받아 군대를 3만 6천으로 불렸으며..... 이때 시칠리아에 있던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는데 스키피오군과 연합해 한니발을 격파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셈프로니우스가 집정관 임기 말기라 빨리 군공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지만 스키피오는 겨울을
싸움없이 버텨보자고 했으니 갈리아인들은 변덕이 심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한니발과 갈리아족의
동맹이 와해될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군공에 목말랐던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의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한니발도 갈리아인 절반 정도의 지지만 확보했을 뿐이라 두 번째 전공이 필요했습니다.
두 장수의 필요에 따라 자연 한겨울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피아첸차 남쪽 20km 숙영지에 한니발이 도착
하니 평민 출신인 셈프로니우스는 자기 계급이 이후에도 집정관에 오를수 있도록 몇달 남지 않은
임기중에 군공이 절실했는데 2명의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때는 하루씩 번갈아 지휘권을 행사하지만
당시는 스키피오가 중상이라 한니발은 단독 지휘관인 셈프로니우스가 도발에 응할 것으로 예상 합니다.
한니발은 강을 사이에 두고 7km 떨어진 지점에 본진을 설치한후 기병대를 내보내 주변
의 갈리아인 마을을 약탈하면서 셈프로니우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는 지형 정찰을
통해 동생 마고에세 보병 1천과 기병 1천을 주어 숲속에 숨긴후 병사들에게는 아침
식사후 몸에 기름을 바르게 한후 12월 22일 혹독한 추운 날씨에 로마 진영을 급습합니다.
셈프로니우스는 아직 아침 밥도 먹지 못한 로마군 기병에 당장 출격 명령을 내리는데, 기병 외에
보병도 방한용 털옷을 짐수레에서 꺼낼 시간이 없는지라... 짧은 옷 위에 황급히 갑옷을 걸치고
칼과 방패만 움켜지고 진영을 뛰쳐 나오니 벌서 저그이 기병은 로마 기병에 쫃기어 후퇴하는
중이라 셈프로니우스와 중무장 보병은 오늘 처음 대결하는지라 적을 섬멸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후퇴하는 적 기병을 쫓아 그들이 강을 건넜을 때는 카르타고군 전군이 대기중이었으니 트레비아강을
건너온 로마군은 흠뻑 젖은 상태였고 뱃속은 텅비어 있었던데 비해 새벽에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모닥불에 몸을 말린후 몸에 기름까지 바른 카르타고군의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로마군은 동맹시
병사를 합쳐 4만이었지만 기병은 4천에 불과했으며 카르타고군 3만 8천 중에 기병은 1만이었습니다.
카르타고군은 몇 마리 안남은 코끼리는 추위에 달아나 버렸고.... 로마군 중무장 보병은 강한 전투력으로
카르타고군 본진을 격파하며 밀고 들어오니 보병은 로마가 우세했는데 하지만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대에 격파당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군은 공복과 추위에 물에 젖은 몸이라는 악조건이 심해집니다.
기병이 격파되어 무방비 상태가 된 로마군 양쪽 날개에 한니발 보병이 쳐들어오고 기병까지 로마군 배후를
덥쳐오는 중에 숲속에 숨어있던 마고네 2천이 불시에 일어나니 4만 로마군은 포위되어 버렸고,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로마군은 차츰 쓰러져 갔으니 셈프로니우스는 카르타고군 중앙을 돌파해 하류에서 트레비아
강을 건너 피아첸차까지 도망쳤지만 도주한 병사는 1만에 불과했으며 2만이 죽고 5천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에 서니 5만을 헤아리는지라 로마군 패잔병은 북이탈리아 에서
포강을 넘어 리미니로 후퇴하니 몇 달전에 제패한 북이탈리아 영토를 포기한 것인데.... 한니발은
로마시민병 포로에게는 식사조차 제대로 주지않고 가혹하게 사역을 시켰으며 로마연합 포로들은 음식
을 충분히 주고 손발도 묶지 않앗으며 심지어 모닥불을 쬐는 것도 허락했으니 이간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후 로마시 병사들은 죽이고 동맹시 포로들은 모아놓고는... “나는 로마연합을 적대하는 것은 아니다,
내 적은 로마 뿐이다, 몸값을 받지 않고 자유을 주겠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동포에게 말하라, 한니발은 로마 연합에게는 적으로 삼지 않고 자유와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그나마 포 강에 있던 로마 식민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는 16년후 종전까지 함락되지 않고 존속
했으며.....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트레비아 전투 패전으로 집정관 자리를 잃고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돌아갔으며 부상당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로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만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한니발의 본거지 히스파니아(에스파냐) 를 공격하러 떠납니다.
에스파니아에서는 그의 동생 그네우스가 2개 군단으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과 싸우고 있었는데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쳐들어 와서는 "로마연합“ 의 붕괴를 노렸다면......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의
배후 거점인 에스파니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으니 적의 전쟁 보급능력을 없앨려고 한 것입니다.
한니발은 병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해 무기 점검을 불시에 했다는데 어느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
들이 몇명 발생하자 한니발은 이들을 모아두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죽은 자가 먹을 필요는 없다" 야단치며 식량을 배급하지 않으니 사흘을 굶은 병사들은 동료의 것을
훔치려 들었는데, 동료 병사들은 자신의 것을 도둑맞지 않도록 잘 때도 창과 검을 끌어안고 잤습니다.
그리고 굶은 병사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병도 끼어 있었는데, 한니발이 그 병사에게 어쩌다 무기
를 잃어버렸냐고 묻자 병사는 "평소에는 창을 안고 자는데, 눈보라가 심해서 막사로 들어가서
고향생각을 하다가 그만 창을 잊어버렸다" 라고 대답했고, 한니발은 "앞으로는 고향 생각을
할 때도 창을 안고 있으라" 라고 말하며 무기고로 병사를 데려가 무기를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무기고의 벽 한쪽이 부서졌는데, 덕분에 무기를 분실한 병사들이 자기 무기를 발견
하고는 찾아가서 급식을 받았다는데 애초부터 한니발이 순찰 중에 무기 관리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몰래 빼돌려서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려고 이런 연극을 벌였던 것입니다.
기원전 217년 로마는 평민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귀족 게미누스 세르빌리우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병했으니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인 감찰관까지 맡았었으며, 평민들의
지지까지 받는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한니발은 이듬해 BC 217년 봄에 남하를 시작합니다.
포강의 켈트족 갈리아인들을 더 충원하여 보강된 5만의 한니발군은 로마를 향해 남진해 볼로냐에서
겨울을 나는데, 아펜니노산맥에 막혀 멀리 우회해서 동남쪽인 리미니로 내려 가야 하지만 로마인
누구도 예상못한 겨울철 알프스를 넘어 허를 찔렀던 한니발은 동쪽 평야지대 편한 가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직진해 험한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에트루리아인이 사는 토스카나의 피렌체로 내려옵니다.
한니발이 어느 길을 택할지 모르는지라 게미누스 세르빌리우스는 동해안의 리미니 에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방어하고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아레초로 가서 적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토스카나로 내려올 것을 대비하는데..... 2개 군단식이지만 증간된지라
각 2만 5천 군대를 거느렸으며 한니발의 핸군 노선이 밝혀지면 즉시 합류하기로 합니다.
로마에서 물량을 앞세운 방어전을 계획한 것이니 기원전 217년 4월 볼로냐를 떠난 한니발
은 동쪽 리미니로 우회하는 평탄한 길 대신에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내려오는
험한 길을 택했는데...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연합에서 이탈하기를 기대한 것으로 피해를
입으면 동남쪽의 움브리아인들도 동요할 것으로 보고 이 코스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르노강 유역으로 내려왔을 때 지중해성 기후인 이탈리아는 비가 겨울부터
봄까지 집중저긍로 내리는지라 평야지대는 온통 늪지대로 변해버렸으니.... 늪지대를 통과하는데
나흘이 걸렸는데..... 리비아와 에스파냐 보병대가 앞장을 서고 갈리아 병사들이 따르고 후미는
누미디아 기병이 보호했는데 그 보다는 탈주하는 갈리아인들을 저지하는게 주 목적으로 보입니다.
그 늪지대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킬로미터나 뻗은 험난한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카르타고군
은 휴식은 커녕 수면도 없이 3박 4일에 걸친 강행군을 했으니 지체하면 한니발의 행군이 로마군에
들통날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이는 마치 당태종이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군량이 떨어져
철수하면서 요하지역 그 늪지대를 통과하며 이세민이 몸소 풀을 날라 진창을 메꾸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카르타고군의 많은 병사들이 과로사하거나 풍토병에 시달렸고 한니발 본인도 눈병을 얻어 애꾸눈
이 되었고 이때 한니발이 햇다는 말이 전해지니... "눈물 흘릴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
스럽구나." , "나는 감은 눈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겠다." 그리고
"숙명이 부여하는 많은 문제는 깊이 검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는 말도 남겼다고 합니다.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성공적으로 늪지대를 통과해 사흘의 휴식을 가졌으니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역사가들도 알프스 산맥의 유명세에 가려서 그렇지 실제 난이도는
오히려 이 늪지대 돌파가 더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데 피렌체에서
휴식하며 척후 기마를 통해 로마군이 100km 남쪽 아레초에 주둔중이란 것을 압니다.
로마연합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동맹국인 에트루리아를
짓밟고 약탈하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세르빌리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아레초
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데 분통을 터뜨렸으니....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를 피해
로마군의 합류 예상지점인 페루자로 가기 위해 먼저 트라시메노 호수 북안에 도착합니다.
그만 한니발을 놓쳐 버려서 당황한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 25,000 은 급히 뒤를 추격해 오자
한니발은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로마군의 신경을 한껏 돋운 후에 트라시메노 호수에
다다랐는데 이대로면 한니발은 페루자 남의 티베레강 유역 폴리뇨에서 로마의 두 집정관
의 군대 사이에 끼여서 포위를 당하는 아주 곤란한 형국 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한니발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할수도 있는 상황
인데... 처음에는 게미누스 세르빌리우스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한니발과의
결전을 미루었하지만.... 하지만 한니발이 지속적으로 민가 약탈과 초토화 작전
을 저지르자 초조함을 누르지 못하고 섣부르게 그를 공격하기로 하고 남진합니다.
한니발은 호수 북쪽 언덕에 병사들을 숨긴 후에 불을 피우는 것 조차 금지하고 기다리니 한니발을 놓친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은 추격해 호수에 이르렀으니 길쭉하고 좁은 호반 길로 로마군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으니.... 그런줄도 모르고 로마군은 밤이되어 도착했는데 한니발군은 페루자로 내려간 것으로
짐작하고는 숙영한후 기원전 217년 4월 19일 아침에 호수 북쪽 산 아래의 저 좁은 길로 행군해 옵니다.
봄에는 안개가 끼는데 특히 이날은 안개가 더욱 짙어 심한 곳은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을 정도
였지만 오늘이야말로 적을 따라 잡을수 잇다고 생각한 로마군 2만 5천이 길로 접어들었는
데.... 전위 부대는 마침내 호반의 동쪽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르타고군과 접전을 했지만
후속부대는 영문을 알지못한 상태에서 산 위에서 카르타고군이 쏟아져 내려와 로마군을 덥칩니다.
세시간의 전투 끝에 전위부대 6천은 일단 카르타고군을 뚫고 도주했지만 카르타고군 기마대
가 추격해 모두 포로로 잡았으며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비롯 1만 7천은 전사했습니다.
산속으로 달아나거나 호수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등 살아서 로마로 도주한 자는 2천에 불과
했고 한니발의 손실은 2천이나 이번에도 주로 갈리아인인지라 지금까지 3차례 전투
에서 알프스를 넘어온 본대 2만 6천은 거의 죽지 않고 병력 보존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노호수 북쪽에 병력을 매복 시키고 추격해온 플라미니우스군 이 호반의 좁은 길을 지나고
있을 때 "기습해 전멸" 시킨 것이니.... 훗날 맥아더도 말한바 있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전방 정찰을 게을리
했으니 그 결과 자신은 죽고 로마군은 파멸 했으니 도망친자는 로마군 2만 5천 중에서 불과 2천명 남짓이라!
유럽에서는 그리스군과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 그리고 로마군은 중무장 보병 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로
평원에서 전법에 따라 진형 을 갖추어 정정당당하게 전면전 을 하는것 밖에 몰랐었나요? 트라시메노
호수는 해발 268m 로 페루자 지방에 자리잡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처럼 엄청 넓다 보니 오히려
"바다" 라는 느낌이 들며 호수 안에는 섬 이 있는데 12세기에 지어진 성 미카엘 천사 성당이 있습니다.
리미니에 진을 쳤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플라미니우스 요청에 따라 기병 4천을 먼저 보냈는데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폴리뇨 근처에 이르렀으니 북쪽으로 올라가면 합류예상 지점인
페루자인데 거기서 기다리고 잇던 군대는 우군이 아니라 누미디아 기병대 였으니 수적
으로나 전투력에서 열세인 로마군은 2천기를 잃고 도주했지만 곧 추격을 당해 모두 포로가 됩니다.
로마 집정관 게미우스 세르빌리우스는 동쪽 바닷가인 리미니에서 대기하다가 한니말이
지름길로 산맥을 넘었다는 보고에 허겁지겁 플라미니아가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는
데.... 원래 계획은 폴리뇨에서 페루자로 북진할 예정 이었으나, 기병이 전멸당한지라
싸울수 없으니 치사피나에 이어 토스카나까지 적에게 내준 현실을 인정하고 후퇴합니다.
로마군은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비롯해 2만이 죽고 7천이 포로가 된 것도 아프지만 더욱 큰 손실은
4개 군단에서 기병 8천이 사라진 것이 뼈아픈데.... 기병은 하루 아침에 재건할 수가 없으니
훗날 칸나이 전투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손실로 기세가 오른 한니발은 바로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하니 로마는 이제 플라미니아 가도를 행군하면 사흘 거리에 5만 적군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화된지 20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저 처참한 결과를 보고도 갈리아
인들과는 달리 코르토나를 비롯한 도시들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당장 로마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니발은 프라미니아로 가는 길이 아닌 아드리아
해로 가는 길을 택하자 병사들은 크게 약탈할수 있는 로마 진격이 아닌데에 큰 불만을 품습니다.
한니발은 견고한 성채러 둘러쌓인 철옹성인 로마를 공격하다가 시일을 지체하면 로마
연합의 도시들이 배후를 공격해 오면 진퇴양난의 처지가 된다고 여기고는, 먼저
이탈리아 남부로 진공해 로마연합을 먼저 오해시키는 것이 로마의 힘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 승리할수 있다고 여긴 것이니 포로 중에 동맹도 시 병사들은 석방 합니다.
로마 시민병은 로마시에만 있는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70개 이상의 식민도시를 건설
했으니 이들이 로마시를 공격하는 배후를 칠 것이 분명한지라 한니발의 장기적인 전략은...
1. 로마연합 도시들을 공격해서 약탈하고 불태운다 2. 로마군이 출동하면 싸워서
승리한다 3. 승리가 거듭될수록 로마연합에서 이탈하는 도시가 늘어난다
4. 로마연합 바깥 해자가 다 메워져 로마가 고립되면 공격해 최종 승리를 거둔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 이르러서 휴식을 취한후 누더기 같은 옷을 벗고 죽은 로마군
에게서 벗겨낸 로마군복으로 갈아 입었으니 나중에 로마군은 저 군복을 보고 아군
인지 적군인지 헷갈리게 되는데.... 해서 로마군은 수염을 깍는걸 의무화시켰으니
한니발 군대의 카르타고인과 에스파냐 및 누미디아인은 모두 수염을 길렀기 때문입니다.
플라미니우스의 패배에 놀란 로마는 파비우스를 독재관에 임명하여 파견했지만 파비우스는 한니발
과의 결전을 피하며 소극적인 지구전으로 일관하니 하루빨리 한니발군을 무찌르기를 바랐던
로마 원로원과 민중을 실망시키자 기병장 미누키우스는 "이 도망자 독재관 때문에 우리 로마
군이 전장의 유랑자가 되었다" 라면서 파비우스를 비난했고 이 일로 병사들의 신임을 잃게 됩니다.
이에 파비우스의 친구들이 찾아와 충고했으나 파비우스는 "조국을 위하여 쓰는 수치는 수치가 아니며,
독재관인 내 어깨에 조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한, 어떤 성급한 작전으로도 한니발을 기쁘게 만들
생각이 없다" 라며 지구 전략을 고수했는데 한니발은 풍요로운 캄파냐 지방을 로마군의 방해를
받지않고 약탈한후 5만의 병력과 월동하기 위해 이탈리아 동남부 풀리아지방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파비우스는 마침내 움직였으니 로마군을 이탈리아의 등뼈인 아펜니노 산맥 남쪽 3군데 고갯길에
배치했는데 한니발은 카실리니움 골짜기에 도착해 짐수레를 끌던 소 중에 2천 마리 소의
뿔에 마른 나뭇가지를 묶은후 밤에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능선으로 몰아올리니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습격으로 보고는 언덕을 하나 내어 주기로 하고 매복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사이에 한니발은 밤중에 로마군단을 피해 골짜기 다른 사잇길을 통해 계곡을 통과했으니 약탈품
도 모두 챙겨 갔으며 병사 한명도 잃지 않았는데..... 파비우스가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한 이후라.... 서둘러 기병을 보냈으나 또다시 누미디아 기병에게 격파당합니다.
일설에는 안내를 맡은 현지인이 카르타고 발음을 못 알아들어 그들의 목적지의 이름과 비슷한
다른 도시로 안내한 것이었으니 카시눔으로 안내를 부탁했는데 엉뚱한 카실리눔이라는
곳으로 안내한 것이며 이후 로마인들이 그 지역의 카르타고군을 포위했던 것이라고도 합니다.
황소 이야기는 일본의 겐페이 전쟁에서도 나오는데 헤이케(平)씨 치하에서 1180년 8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서 거병하고 9월에는 사촌 요시나카가 시나노에서 거병해 북륙을 점령
하자 교토 조정의 헤이케씨는 1183년 4월 호쿠리쿠(북륙) 지역의 겐지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타이라 코레모리(平維盛) 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시작해 에치젠의 히우치성을 점령합니다.
5월에 카가(加賀)를 점령한후 도야마현과 이시카와현의 경계에 쿠리카라 고개(倶利伽羅峠)에서 요시나카
는 낮에는 싸움을 피하고, 한밤중에 군을 본대 4만, 분대 1만으로 나눈후, 분대를 우회시켜 배후에서
야습을 걸자 헤이케 군은 남쪽으로 도망쳤으니 밤인지라 쿠리카라(倶利伽羅) 계곡으로 7만이 떨어져
죽었는데 이때 요시나카군이 수백마리 소의 뿔에 햇불을 붙여 돌격시키는 계책을 써서 이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에 불을 붙여 돌격시키는 전술은 중국 제나라의 명장인 전단이 썼다는 화우계를 본뜬
것으로.... 꼬리에 불을 붙이는 본래의 중국 화우계와는 달리 뿔에 햇불을 달면 소가 불을
무서워해서 제대로 돌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실제 사실인지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위의 사건으로 파비우스는 로마 정부와 시민들의 신임을 잃었으니 그는 독재관 임기도 연장
받지 못했고 거기다 파비우스의 신임은 한니발의 계책으로 더욱 추락했으니 한니발은
로마 근방을 공격하면서도 파비우스의 농장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는데.... 이는
파비우스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로마를 내부에서 분열시키려고 한 수작이었습니다.
한니발의 계책은 성공해 파비우스는 전쟁 보다 자신의 영지 보호에 힘쓴다는 누명을 썼으며
원로원은 다음 해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한니발과의 싸움을 맡기기로 했으니..... 그동안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의 칸나이를 점령하니 유명한 "칸나이 전투" 가 벌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