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교사들의 수난 - 새 선교사의 입국과 두 선교사의 죽음
① 1863년 3월 말경에 새 선교사(宣敎師) 오매트르(Aumaitre) 신부가 삐낭(Pin ang)에서 학업(學業)의 일부를 마친 조선학생(朝鮮學生) 2명과 함께 메린도(島) 근처에 닻을 내렸다. 중국선원들의 악의(惡意)로 그의 출발이 며칠 늦어졌기 때문에. 그를 맞으라고 보냈던 조선 배를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조선 배는 15일 동안 섬 주위를 갈지자걸음으로 돌아다니며 해변(海邊)을 샅샅이 뒤져 본 다음, 선교사(宣敎師)가 도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돌아갔었다.
3개월 후에 시도(試圖)한 두 번째 원정(遠征)은 성과(成果)가 더 나아서, 오매 트르(Aumaitre) 신부는 6월 말에 미구에 자기의 피를 적시게 될 조선(朝鮮) 땅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찬양(讚揚)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삐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 신부는 1837년 4월 8일에 앙굴렘(Ango -uleme) 교구(敎區) 뤼펙(Ruffec)고을의 애젝(Aizecq)에서 났고, 1859년 8월 18일에 외방전교회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입학했었다. 거기에서 3년 동안을 있으면서 신학공부를 마쳤고, 1862년 5월 30일(5월 30일이 아니라 6을 14일. Launay, Memorial, p. 14.)에 사제(司祭)가 되어, 조선포교지(朝鮮布敎地)로 임몀되어, 그해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나 임지(任地)로 향했다.
② 몇 달 뒤에 베르뇌(Berneux) 주교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1863년 11월 24일 자 서한. AME: Cause 1866, HB 25~34).
『내가 보낸 배가 두 번째 파견되었을 때, 오매트르(Aumaitre) 신부를 약속장소 에서 만났다는 것을 아마 알고 계시겠지요. 이 친애하는 동료를, 조선 사람들 의 예법(禮法)을 좀 배우게 하고, 또 필요한 옷을 모두 장만해 주게 하려고, 17 개월 동안 내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런 표현(表現)을 허락하신다면, 어떤 신자 마을(수원(水原)의 손 골. Launay, Memorial, p. 14.)에 보냈는데, 거기에 있으면 늘 불어(佛語)를 할 내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을 잘 배울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하고 혼자서 있으니, 싫건 좋건 간에 요령껏 일을 처리(處理)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말을 배우는 유일(唯一)한 방법입니다.
젊은 선교사(宣敎師)들이 말을 배우는 동안, 싫증이 나고 우울하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에게로부터 이 유혹(誘惑)을 예방(豫防)해 주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내 의견을 이용(利用)했는지를 확인하고, 만일 필요하다면 그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려고, 9월에 그에게로 가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는 만족(滿足) 해하고 건강(健康)이 좋았습니다. 호감(好感)이 가는 동료입니다. 그를 내게 보 내주신 데 대해 천만 감사를 드립니다(이때 오매트르(Aumaitre) 신부를 따라, 페낭 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2명이 귀국하였다. 한 명은 베르뇌(Berneux) 주교가 맡아 가르 쳤고, 한 명은 배론 신학교로 보내어 공부를 계속하게 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 의 전게(前揭) 1863년 11월 24일 자 서한. 본고(本稿) P. 312 참조).』
③ 오매트르(Aumaitre) 신부가 베르뇌(Berneux) 주교에게로 올 수 있기 전에, 죠안노(Joanno) 신부의 건강에 대한 주교(主敎)의 슬픈 예견(豫見)은 적중(的中)했다. 꾸준하고 견식(見識)있는 열성(熱誠)과, 완전한 규칙적인 생활을 한 이 젊은 선교사(宣敎師), 한마디로 베르뇌(Berneux) 주교가 그의 죽음을 알리면서 말한 것처럼, 천주께서 자비(慈悲)로 백성들에게 주시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이 젊은 선교사가, 2년 동안 활동한 뒤 1863년 4월 13일에, 천국(天國)에서 그의 덕행(德行)에 대해 보상(報償)을 받으려고 세상을 떠났다(베르뇌(Berneux) 주교의 전게(前揭) 1863년 6월 3일 자 서한. AME: Cause 1866, HB 25~34).
그는 끝까지 리델(Ridel) 신부의 돌봄을 받았는데, 리델(Ridel) 신부는 이렇게증언(證言)한다(리델(Ridel) 신부의 1863년 9월 9일 자 서한 AME: Vol. 579, f. 672 ~675).
『저는 성서집행(聖事執行)을 성지주일(聖枝主日)쯤에 끝내기로 되어 있었습니 다. 죠안노(Joanno) 신부는 그때부터 내 처소(處所)에서 아주 가까운 그의 구역 (區域)인 어떤 지점에 있었는데, 저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 다. 우리의 만남이 할 수 있는 대로 즐겁게 되도록, 저는 부활축일(復活祝日)을
목표로 모든 것을 준비하던 참이었는데, 그가 30 리 밖에서 매우 위중(危重)하 게 앓고 있다는 소식(消息)을 전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곧 그에게로 달려갔더 니, 지나치게 지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폐(肺)의 상태 (狀態)로 보아, 그때부터 어떤 참변(慘變)을 우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두 번에 걸쳐 병자(病者) 들에게 성사(聖事)를 주기 위해, 몇 시간 동안씩 그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 만, 곧 돌아오곤 했습니다. 부활축일(復活祝日) 전날 그가 하도 쇠약(衰弱)해져 있기에, 종부성사(終傅聖事(병자성사(病者聖事))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냈습니 다.
그동안 죽 그는 기도(祈禱)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 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熱烈)한 갈망(渴望)의 말이 새어나왔습니다. 위험(危 險)이 더해감으로, 저는 미사성제를 자정(子正)이 지난 뒤 곧 드리기로 결심(決 心)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열심히 노자성체(路資聖體)를 모신 다음 혼수상태(昏 睡狀態)에 빠져, 9일 동안 내내 계속된 긴 임종(臨終)에, 의식(意識)을 완전히 회복(回復)하지는 못했습니다.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微 笑)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에 무엇이 보였던 것일까요? 두 시경에 매우 위중한 발작(發作)을 일으켜서, 저는 임종(臨終)하는 이들의 기도(祈禱)를 외웠 습니다. 마침내 일곱 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動搖)도 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靈魂)을 천주께 바쳤습니다.(죠안노(Joanno) 신부는 충남(忠南) 공 주군(公州郡) 신하면(新下面) 조평리(造平里)(일명 둠벙이로 불리는 마을)에서 사망(死 亡)했고(Launay, Memorial, p. 330), 또한 거기에 묻혔다)』
④ 9월 초에 쓴 이 편지에는 아래와 같은 추신(追伸)이 덧붙여져 있다.
『저는 지극히 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 편지 봉투를 다시 뜯습니다. 우리의 가엾 은 포교지(布敎地)는 가혹(苛酷)한 시련(試鍊)을 당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이 일 거리를 당해내지 못하는데, 그들이 연거푸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천주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찬미 받으시기를! 그렇게도 영성(靈性)이 있고, 신심(信心) 깊은 동료 랑드르(Ladre) 신부가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약 15일 전에, 그가 걸린 심한 열병(熱病) 때문에 그의 곁으로 불려갔었습니 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열이 내렸으므로, 완전한 회복기(回復期)에 접어들어 기운(氣運)을 다시 차리기 시작하는 그를 남겨두고 떠났었습니다. 9월 20일에 저 있는 곳으로 그가 오기로 합의(合意)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16일에 어떤 신자가 와서, 그가 전염병(傳染病)으로 몇 시간 만에 그 전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즉시 길을 떠나갔더니, 시신(屍身) 곁 에는 다블뤼(Daveluy) 주교님이 계셨습니다. 주교님은 소식(消息)을 듣고 곧 달 려오셨으나, 친애하는 벗이 죽은 지 2, 3시간 뒤에야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가엾은 조선(朝鮮)에 대한 천주의 헤아릴 수 없 는 계획(計劃)을 경배(敬拜)했습니다. 우리와 우리 신자들을 위해 기도(祈禱)해 주시고, 또 기도를 청해주십시오(랑드르(Ladre) 신부는 충청도(忠淸道) 예산군(禮山 郡) 고덕면(古德面) 호음리(好音里), 일명 황무실에서 사망했고((Launay, Memorial, p. 356), 또한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묘소(墓所)는 매스트르(Maistre) 신부의 묘와 함께 1970년 4월 30일 구 합덕(舊合德)(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군(唐津郡) 합덕읍(合 德邑) 합덕리(合德里)) 본당(本堂)의 경내(境內)로 이장(移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