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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한 종교의 교인이었다.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연대장 이범석이 모두 같은 교단 소속이었다.
박은식, 신채호, 이상설, 이동녕, 김동삼, 홍범도, 김규식, 조소앙, 이시영.
독립운동사의 굵직한 이름들이 같은 교적에 올라 있었다.
그 종교의 이름이 대종교(大倧敎)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과서에서 대종교는 몇 줄로 처리되고, 일반의 기억 속에서 이 교단은 '단군을 믿는 오래된 종교' 정도로 남아 있다.
이유가 있다.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로 규정해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기록을 지웠으며,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이 교단을 종교의 틀 안에서만 바라봄으로써 독립운동사의 맥락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대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제대로 아는 일은, 그래서 한국 근대사의 지워진 심장 하나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먼저 이름부터 풀어야 한다.
대(大)는 크다는 뜻이고, 종(倧)은 상고의 신인(神人), 곧 한배검(단군)을 가리키는 글자다.
대종교는 스스로를 새로 만들어진 종교라 하지 않는다. 창교(創敎)라는 말 대신 중광(重光), 거듭 빛냈다는 말을 쓴다.
단군조선 이래 부여의 대천교, 고구려의 경천교, 신라의 숭천교, 발해의 진종교, 고려의 왕검교로 이름을 바꿔가며 이어져 내려오던 민족 고유의 신교(神敎)가 몽고 침략기 이후 700년 가까이 단절되었는데, 그 오래된 빛을 다시 밝혔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중심의 사대 질서 속에서 단군이 기자에게 밀려나고 제천의 전통마저 천자국에 대한 사대의 논리로 포기되었으며, 수서령으로 단군 관련 사서들이 수거·소각되었다.
대종교의 중광은 이 망각의 시대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 응답의 중심에 홍암 나철(羅喆, 1863~1916)이 있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던 그가 처음 선택한 구국의 길은 종교가 아니라 외교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 그는 오기호 등 동지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정계 요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의 독립 보전을 요구했고, 일본 천황에게 항의서까지 보냈다.
응답은 없었다.
외교가 막히자 칼을 들었다.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했으나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전남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말 특사로 풀려났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외교로는 열강을 움직일 수 없고, 몇 명의 매국노를 제거해도 침략 자체는 막을 수 없다. 필요한 것은 2천만 민족 전체를 하나로 묶을 정신의 구심점이다.
그가 찾은 답이 단군이었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에서 나철은 동지들과 단군대황조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올린 뒤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대종교는 이날을 중광절로 기린다. 이듬해 교명을 대종교로 고쳤다. 나철이 남긴 말 가운데 이 교단의 성격을 가장 압축하는 것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여덟 글자다.
나라가 무너져도 정신이 살아 있으면 나라는 되살아난다. 국망도존의 신념이 이후 40년 항일투쟁의 뼈대가 된다.
대종교의 신앙 대상은 단군 개인이 아니다. 대종교를 단군교로 평면화하는 것은 기독교를 예수교로 평면화하는 것과 같다. 대종교의 궁극적 신앙 대상은 한얼님, 곧 하느님이며, 환인·환웅·환검의 삼신이 결국 하나라는 삼신일체(三神一體)가 신관의 핵심이다.
이 교리를 담은 기본 경전이 '삼일신고(三一神誥)'다. 본문이 366자에 불과한 짧은 경전이지만 그 안에 우주론과 신관, 인간관과 수행론이 모두 들어 있다.
천훈은 우주의 광대함을,
신훈은 하느님의 속성과 인간과의 관계를, 천궁훈은 수행으로 도달하는 경지를, 세계훈은 우주와 지구의 생성을,
가장 긴 진리훈은 인간의 본성과 수행의 길을 말한다.
신훈의 가르침은 특히 압축적이다. 하느님은 더없이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동시에 "너희 머릿속에 내려와 계시다"고 한다. 초월하는 신과 내재하는 신이 한 구절 안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서구 신학이 오래 씨름해 온 초월과 내재의 문제에 대해, 이 짧은 경전은 둘 다라고 답한다.
수행론의 목표는 삼진귀일(三眞歸一)이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세 가지 참함, 곧 진성(眞性)·진명(眞命)·진정(眞精)을 회복하여 한얼님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의 세 가지 법이고, 그 완성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성통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아는 것, 공완은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남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개인의 내면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이 대종교 수행관의 요체다. 수행은 혼자만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밖으로 나아가 이웃과 공동체와 인류를 이롭게 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교의가 여기서 나온다.
신앙 실천의 강령으로는 다섯 가지 종지가 있다.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들고(경봉천신), 정성으로 성품을 닦으며(성수영성), 사랑으로 겨레를 합하고(애합종족), 고요히 이로움과 복을 구하며(정구이복), 부지런히 생업에 힘쓴다(근무산업).
하느님 공경과 인간 사랑이 첫머리에 놓인 이 구조는 여러 세계종교의 핵심 계명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런데 대종교를 세계 종교사 안에서 정말로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초종교성(超宗敎性)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기 울타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내부를 단단히 묶으려면 외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고 그 밖은 어둠이라는 구도가 세계 주요 종교들이 공유해 온 오래된 문법이다.
대종교는 이 문법을 처음부터 거부했다. 선언이 아니라 규칙으로, 유훈으로, 경전으로, 세 층위에 걸쳐서.
첫 번째 층위는 규범이다.
중광 원년인 1909년, 교인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한 봉교과규(奉敎課規)에 이런 조항이 명문화되었다.
"봉교인이 견문을 넓히고 슬기를 더하기 위하여 타교에 들어가 참여하여도 금하지 말 것. 또한 타교에 이미 가입한 자가 본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곧 허가할 것. 한배검의 너그러우신 큰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아니함."
(현대어 풀이: 대종교를 믿는 사람이 견문을 넓히고 지혜를 키우기 위해 다른 종교에 나가 참여하더라도 막지 말 것. 다른 종교를 이미 믿는 사람이 우리 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곧 허락할 것. 한배검의 크고 너그러우신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거나 비방하지 말 것.)
자기 신도가 타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타종교인의 이중 소속을 인정하며, 타종교 공격 금지를 신자의 행동 규범으로 못 박은 것이다.
오늘의 기준으로도 낯선 이 조항이 교단 창립 첫해부터 존재했다. 관용의 제스처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체계였다.
두 번째 층위는 유훈이다. 1916년, 홍암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명(殉命)을 앞두고 밀유(密諭)를 남겼다.
"물기시교외인(勿岐視敎外人) 물이론역외인(勿理論域外人)"
(현대어 풀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달리 보지 말라. 외국인이라 하여 따로 떼어 논하거나 차별하지 말라.)
열여섯 글자다. 수식도 없고 설명도 없다. 공개 선언이었다면 더 길고 화려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장 은밀하게, 가장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었기에 이렇게 짧고 단호하다.
그리고 이 짧은 유훈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포용 이상이다. 타자를 처음부터 타자로 규정하지 말라는,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사유다.
세 번째 층위는 경전이다.
같은 해 나온 중광가(重光歌) 54장 가운데 10장 도연원(道淵源)은 이 사유를 경전의 언어로 완성한다.
"찾아보라 가닭가닭 한배빛 /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 석가(釋迦)의 제석존숭(帝釋尊崇) / 유씨(儒氏)의 상제임여(上帝臨汝) 야소(耶蘇)의 야화화(耶和華)와 / 회회(回回)의 천주신봉(天主信奉) 실상(實狀)은 한 한배님"
(현대어 풀이: 찾아보라, 가닥가닥 살펴보면 한배님의 빛이 깃들어 있으니, 도교의 으뜸 신선도, 불교의 석가모니가 공경하는 제석천도,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는 상제도, 기독교의 야훼도, 이슬람에서 신봉하는 천주도, 그 실상은 모두 하나인 한배님이다.)
도연원의 연(淵)은 못이고 원(源)은 근원이니, 도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뜻이다. 물은 하류에서 보면 저마다 다른 강이지만 근원을 거슬러 오르면 한 산의 한 발원지에 닿는다.
도교·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 다섯 종교가 궁극으로 섬기는 신을 이름으로 하나하나 호명하고 그 실상이 하나라고 선언한 이 구절이 1916년의 텍스트다.
세계 종교사와 견주어 보면 이 시점이 얼마나 이른 것인지 드러난다.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국제 모임은 1893년 시카고의 세계종교회의였고, 로마 가톨릭이 타종교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였다.
종교다원주의가 서구 신학계의 화두가 되기 반세기 전에, 대종교는 그것을 논의가 아니라 신자의 행동 규범으로, 순교 직전의 비밀 유훈으로, 경전 구절로 이미 써넣고 있었다.
규범과 유훈과 경전, 제도와 정신과 세계관 세 층위 모두에 포용이 새겨진 종교. 이런 사례는 달리 찾기 어렵다.
이 열린 종교관은 교리 해석에서도 일관된다.
대종교 교리를 체계화한 백포 서일은 지감·조식·금촉의 삼법 수행이 불교의 명심견성, 도교의 양기, 유교의 수신에 각각 대응한다고 풀었고, 공자·노자·석가·예수·무함마드가 모두 자기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본 성품을 먼저 깨달은 이들이니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였던 주시경이 제자들과 함께 입교할 수 있었고, YMCA에서 활동하던 안재홍이 귀의할 수 있었다. 종교와 신분과 인종을 초월해 사람들이 대종교로 모여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이 처음부터 그렇게 열려 있었다.
일제는 이 종교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기독교와 불교는 허가하면서 대종교만은 1915년 포교규칙으로 종교 인정에서 배제해 국내 활동을 사실상 불법화했다.
일제가 국교로 삼은 신도(神道)의 연원이 오히려 조선의 신교에 있다고 주장하는 교단, 단군이라는 이름 아래 민족을 묶어세우는 교단을 총독부가 용납할 리 없었다.
탄압이 조여오자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보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께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를 남기고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죽음으로써 교단을 지키고 가르침을 증거한 것이다. 대종교는 이날을 가경절로 기린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불씨였다.
총본사는 이미 백두산 기슭,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겨 가 있었다.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와 중국 본토를 동·서·남·북·외 다섯 교구로 나눈 포교망은 그대로 독립운동의 조직망이 되었다.
서일이 1911년 결성한 중광단은 만주 최초 항일 무장조직의 하나였고, 뒷날 북로군정서로 발전했다. 2세 교주 무원 김교헌은 '신단실기' ,'신단민사'를 저술해 단군을 중심에 둔 민족주체사관을 세웠고, 그 역사학은 박은식의 국혼(國魂), 신채호의 낭가사상으로 이어졌다.
1918년 말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은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에 앞선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는데, 서명자 39인의 대부분이 대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듬해 임시정부가 서고,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다. 1920년 청산리에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을 대파했을 때 그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이듬해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무너지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
대종교가 삼종사로 받드는 세 분의 묘소는 지금도 청산리가 내려다보이는 중국 화룡시 청호촌 언덕에 나란히 있다.
총칼의 투쟁만이 아니었다.
대종교의 항일은 정치·군사·교육·언어·역사를 아우르는 총체적 저항이었다. 주시경과 그 제자 김두봉·이극로·최현배로 이어지는 한글운동의 계보가 대종교와 겹치고, 조선어학회의 뿌리가 여기에 닿는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교장 윤기섭도 대종교인이었다. 그래서 일제의 마지막 탄압도 언어와 종교를 함께 겨냥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내 지식인들을 검거한 직후, 일제는 이극로가 3세 교주 단애 윤세복에게 보낸 원고의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해 만주의 대종교 지도자 25명을 일거에 체포했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넉 달의 혹독한 고문 끝에 안희제를 비롯한 열 분이 옥중에서 순국했으니, 대종교는 이분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받든다.
순국자 가운데는 나철의 두 아들 나정련·나정문도 있었다. 무기형을 선고받은 윤세복은 법정에서 이렇게 답했다. 대종교의 기원은 강신태백이요, 교의는 홍익인간이요, 교리는 삼진귀일이며, 조선 독립은 국민운동에 속한 것이라고.
이 짧은 문답에 이 교단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가 다 들어 있다. 중광에서 광복까지, 대종교인의 희생은 10만을 헤아린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 환국한 대종교는 이 나라의 기틀에 마지막 유산을 새겼다.
개천절이 국경일이 된 것,
단기 연호가 한때 공용 연호로 쓰인 것, 그리고 무엇보다 홍익인간이 대한민국 교육법의 교육이념으로 명문화되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이 대종교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홍익대학교와 단국대학교,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까지, 대종교인들이 세운 학교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교단 자체는 일제 40년의 탄압으로 인재와 재산과 기록을 소진한 채 광복을 맞았고, 이후 교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무게와 오늘의 존재감 사이의 이 낙차야말로, 대종교가 민족을 위해 무엇을 내어놓았는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대종교는 무엇인가. 한배검의 오랜 가르침을 다시 밝힌 민족의 종교이면서, 다섯 종교의 신을 한 경전 구절에 나란히 불러 "실상은 한 한배님"이라 노래한 초종교적 보편 영성이며, 나라가 망한 시대에 정신의 독립을 지켜 무장투쟁과 임시정부와 한글과 역사학의 뿌리가 되어 준 항일투쟁의 총본산이다.
봉교과규는 지금도 유효하고, 밀유의 열여섯 글자도 바뀐 적이 없다.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고, 외국인을 따로 말하지 말라.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를 지우는 일이 그치지 않는 오늘의 세계에서, 110여 년 전 이 땅에서 못 박힌 이 규칙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