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6.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행 17:13~15
*제목; 우리는 다 영적 변론자들입니다.
1. 아덴에 도착한 바울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 성령의 부르심으로, 마케도니아의 큰 성 ‘빌립보’에 오게 된 바울을 “길을 만드시는 주님”(WayMaker,‘루디아’를 만남, 감옥에서의 은혜 경험 등)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 동족 유대인의 시기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베뢰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많은 헬라인들과 로마 귀부인들’이 복음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 다시 “길은 만드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서 경험하지 못한 “편견 없는 믿음의 백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그 말씀의 능력을 상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재촉하셔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이유는, 이처럼 복음의 자녀들이 그곳에서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지금은 이해되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좇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쫓아와 이들을 방해하여 ‘아덴’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었던 본문입니다.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3~15)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구원받을 백성이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량한 유대인들의 소동”을 통해서 이렇게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이를 위해 먼저 ‘아덴’은 어떤 곳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들 ‘아테네’로 불리는 ‘아덴’은 그리스 헬라문명 중심지입니다. 또 이곳은 철학의 본고장이고, 각종 신전들과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모든 그리스인들은 죽기 전에 꼭 가보야 할 장소로 당시 ‘아테네’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16절’을 봅시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 17:16)
“마음의 격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고, 아덴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곳을 보면서 울분과 안타까움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고, 또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대항하며 “변론”하였습니다. ‘17절’입니다.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辯論)하니” (행 17:17)
“변론”이란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서 논증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논증하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설교자들의 사명이요, 정체성입니다.
‘믿음을 위해 나아가는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사명’은 ‘세상 앞에서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영적 변론자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2. 아덴의 두 가지 영적 전투
이러한 아덴은 어떤 영적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먼저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8)
여기는 ‘철학의 본고장’입니다. 이 철학은 당시 크게 세 가지 분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로 ‘소유로부터 멀어질수록 신에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며,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학파였습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사람이 ‘디오게네스’였는데, 그의 사상에 감동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소원을 묻자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좀 비켜달라’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소유에 철저히 반대하였습니다.
두 번째가 “에피쿠로스학파”로 이 세상을 유물론적 사고로 바라보며 신이란 존재는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부정했습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쾌락’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세 번째가 “스토아학파”로 ‘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최고의 선이며, 이를 위해 이성과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철학의 핵심은 “최고선으로서의 쾌락”과 “신의 분리성” 그리고 “인간의 노력의 가치”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27~29절’입니다.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7~29)
바울은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선포했고, 우리가 그의 자녀임을 알렸습니다. 그가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알립니다.
바울은 임마누엘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이루어짐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지 바른 말씀이 선포되어지면, 반응하게 되고 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2~34절’입니다.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 17:32~33)
3. 정리
길을 만드시는 주님입니다. 그 분의 따르면 그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소동(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유대인들의 반대와 고발 등)에도 하나님을 새로운 복음의 역사과 교회를 이를 통해서 만들어 가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영적 변론자들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으로, 성도는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말씀은 반드시 반응을 만들어내고,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성령에 순종하고 따르는 바른 말씀의 선포가 이토록 중요합니다.
첫댓글 인간의 어리석음의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아덴에서도 구원 받을 "몇 사람"으로 인해서 바울을 부르시고,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역사에 부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바울처럼 영적 변론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