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복음과상황 이범진 |
바야흐로 ‘먹방’(먹는 방송) 시대다. 연예인들의 유튜브 먹방이 넘쳐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인 유튜버들의 온갖 먹방 영상까지 종종 뉴스거리가 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SBS)에 출연하는 백종원 씨는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가 인정하는 식당엔 손님 줄이 배로 길게 늘어선다. SNS로 공유된 전국의 ‘맛집’ 정보 덕에 사람들은 누구나 가성비 좋고 더 맛있는 먹거리를 탐닉하기 위해 찾아다닌다.
이런 먹방 시대와 별개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눠 먹는 일은 갈수록 귀찮은 일이 되어간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 식탁을 나누는 문화는 사라져간다. 사실 식당을 ‘소비’하는 쪽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도 가성비 높을 수도 있다. (어쩌면 높은 가성비의 한 축을 ‘자영업의 무덤’ 한국 사회의 외식업계 상황이 떠받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자영업 중 외식산업의 폐업률은 23.8%로 가장 높고, 전체 산업 평균 13.2% 대비 두 배에 가까웠다.)
이런 시대에, ‘겸손한 미식 밴드’ 운영자 김용노 목사는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고 식탁을 차려서 먹이는 일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누군가를 초대하여 식탁을 차리는 일을 통해 그는 복음과 환대를 발견했다. 미국에서 영화 학부를 전공한 뒤 신학을 공부한 김용노 목사는, 그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뒤늦게 한국에서 목회를 해온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겸손한 미식 밴드’ 운영자이기도 한 그는, 밴드의 SNS 페이지에 밥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환대의 식탁을 연 이야기와 그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비법이 담긴 레시피 공유가 아니라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을 위한 밥상을 준비하며 묵상하고 더불어 식사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남긴다.
요리 과정에는 자원봉사자의 참여가 이뤄지며, 재료비를 제한 식사 비용은 ‘기부’의 이름으로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이는 어쩌면 그동안 교회에서 주방 봉사자들이 교우들을 위해 ‘헌신’해온 일과 비슷한데, 거기에 개인의 자발성이 더해진 것이 ‘겸손한 미식’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환대와 기부의 식탁’이라는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자기 집 식탁을 환대의 통로로 여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연초 경기도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용노 목사에게, 지금까지 여섯 명이 멤버로 참여하는 ‘겸손한 미식 밴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자리에는 얼마 전부터 자기 집 식탁을 열기 시작한 김희경 집사도 함께했다.
― 목사님 소개부터 해달라. 경기도 일산 탄현 지역(잉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미국으로 가서 영화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나서 한국에 귀국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 영화를 하다가 왜 신학을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고 고등학교 때까지 사랑의교회를 다니면서 서울의 강남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에 미국으로 대학을 진학하여 생활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인종과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봤다. 그때 미국 상황이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다. 처음엔 문화적 차이에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서 게이 축제를 하고, 에이즈로 죽은 친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데 전까지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한국에서 게이가 성정체성을 드러낸 일도 얼마 안 됐지만, 미국은 이미 90년대에도 열려 있었다. 처음엔 그 사회 분위기가 이해가 안 됐지만 조금씩 알아가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관점이 생겼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기독교 방송을 보고 있는데 ‘저게 방송할 내용이 되나’ 싶었다. 선교 방송을 표방하면서 설교를 포함해서 방송 주요 내용이 사회 문화에 대한 아무런 맥락이 없었다. 이게 기독교 시장에서 기독교인들만 보는 거지 선교 방송이라고 할 순 없겠더라. 그때 준비 중인 영화 시나리오도 있었고, 여러 질문이 생기면서 여차여차 다시 미국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 그리고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한 건 아니어서, 안수 받을 때 고민했다. 목사를 하면 경제활동을 못하고 주는 밥을 얻어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과연 행복할까 싶었다. 유학 중에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주신 것 같다.
― 지금은 목사면서 동시에 ‘겸손한 미식’ 활동도 겸하고 있다. 요리는 원래 좋아하던 일인가. 요리하기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계속 해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 안 계신 어느 날 동생들이 배고프다고 해서 뭐라도 먹이려고 처음으로 라면을 끓였다. 한글도 잘 모르는데 설명을 떠듬떠듬 읽어가면서. 부모님께 많이 혼났다. 음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래 그런 경향이 있다. 잘 몰라도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 한다. 교회 주방 봉사하시는 분들 말씀을 듣다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분들이 주방에만 박혀 있다고들 생각하시겠지만 대개 교회 안에서 돌아가는 일을 다 보고 계시는 분들이다.(웃음) 초등 4학년 때는 김치찌개를 처음 끓여서 먹었고, 나중에 계속 요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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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방 봉사자 이야기는 경험에서 나오는 말처럼 들린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전도사를 할 때부터 주방에만 계시느라 종종 예배에 불참하시는 권사님들과 친했다. 그분들이 음식 남은 거 있으면 싸주시고, 누룽지도 만들어서 주시곤 했다. 스스로 요리를 해서 대접하는 걸 즐기셨고,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그걸로 보상을 받으시는 분들이었다. 그런 귀한 마음을 교회에서는 너무 당연시 여기고 하대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남순 교수가 90년대에 쓴 논문 중에 교회 여성에 관한 내용을 보면, 교회에서 여성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사회봉사, 말씀연구 순이었고,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주방 봉사와 청소라고 나온다. 그러나 정작 하고 있는 일은 주방 봉사와 청소가 50%를 넘는다. 주방 일이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맥락과 상관없이 당연히 여성이 해야 할 일처럼 형성되는 분위기가 문제다. 바뀌고 있다지만, 지금도 남자고 목사인 내가 요리를 하면 대단한 일이고, 목사 사모 혹은 다른 여성 교인이 밥을 하면 당연한 일로 여긴다. ‘겸손한 미식 밴드’ 활동 중에도 혹시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돌아볼 때가 있다. 사회 문화의 영향으로 여전히 여성이 상당 부분 역할을 하는 현실을 전부 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결과에는 아픔이 있고, 분명 세상을 지탱해나가는 부분으로 존재한다.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밥을 하고 남을 대접하고 환대해온 일들은, 기독교가 이웃을 대해야 할 기본적인 방식(태도)이기도 하다. 여성들만 감당할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요리하는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셨다고 했다. 미국 한인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언제나 부흥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게 뭔가 고민했는데, 나는 부흥을 ‘타 문화권을 향한 복음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선교적 차원에서 부흥을 고민하면서 선교지를 경험하고 난 이후 목회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 미국에서 준비하는 1년 동안 돈을 벌어야 했다. 공부하면서 진 빚도 해결해야 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는데 아내는 아직 공부 중이었다. 그런데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부담스러웠는지 세탁소 같은 데서는 써주지를 않았고, 스타벅스나 마트는 파트 타임을 주말에만 구해서 일자리 얻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파머스 마켓’이라는 지역 농수산 시장의 작은 스시 코너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아는 청년이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연결해줬는데, 사장이 기독교인 아니라서 목사인 나를 부담 없이 써줬다. 사장님은 유명 일식 레스토랑의 세컨드 셰프 출신이었는데, 그분이 영어를 잘 못하고 나는 잘하니까 주로 음식을 파는 건 나고, 만드는 건 사장님이 맡았다. 그렇게 일하는 곳에서 선교지에서보다 더 많이 선교적 삶을 배웠다. 종종 스시 맛을 물어보는 손님이 있었는데, 영어로는 맛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미국인이 추구하는 맛의 정보를 내가 공유하고 있지 못하니까. 사장님은 맛을 물어보는 사람에겐 설명하지 말고 그냥 공짜로 주라고 했다. 물어보는 사람한텐 다 시식을 시켰는데 먹어본 사람들이 계속 찾아왔다. 거기서 일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 적성에 맞으셨나 보다. 장사도 잘 되고, 일하는 내내 사장님이 기독교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하셨다. 그때 함께 책을 읽었는데, 존 스토트의 《신앙생활가이드》였다. 한 챕터씩 같이 읽고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기도를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좁은 공간에서 박스 펴놓고 점심으로 라면 끓여 먹으며 함께 기도도 하고. 사장님한테 못되게 굴던 청과물 가게 장로님도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잘해주셨다. 우울증이 심각하던 생선가게 아주머니에겐 매일 커피를 사드리면서 친해졌다. 직장 한인들 사이에 관계가 생겼다. 사장님이 나중에 교회를 가고 싶다고 해서 교회도 소개해드렸다. 스시집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 사장님이 나를 끌어안고 우셔서 놀랐다. 무뚝뚝한 분이었는데, 중국 선교 가면 죽는 줄 아신 거다.(웃음) 그리고 내 빚을 충분히 갚을 만한 퇴직금을 달러로 주시면서, 중국에서 돈 없으면 일식 레스토랑 가서 2-3년차 셰프라고 말하라고 했다. 일식집은 원래 주방도 안과 밖으로 분리되어 있고 밖에 나와 일하는 수준이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나에게 그만큼 많이 가르쳐 주셨던 거다. 일을 하면서 우리의 일상과 일터가 선교의 현장이라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 중국 선교는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북경의 한 선교단체에 신학 강의를 영상으로 제작해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그쪽과 연결되어 북경에서 아내와 중국 어린이 찬양 CD를 제작했다. 나는 한국의 홍대쪽을 오가면서 뮤지션들을 만나 음원을 만들고 돌아가서 연습시키면서 음반을 제작하고, 아내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북경에서 연결된 교회들에 퍼트렸는데 아직도 사용한다고 하더라. 물론 중국에서는 다 불법이었다. 사역 임기 동안 애초에 거기서 필요하다고 한 사역은 사실상 할 수 없었고,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했다. 임기 중에 선교단체의 안 좋은 면을 경험하기도 했다. 애초 선교지와 연결됐던 미국으로 귀국하기 꺼려지기도 해서 한국으로 돌아와 목회를 시작하기로 했다.
― 한국에 목회적 연고가 없었을 텐데…. 미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서 한국 사회가 낯설었다. 전도하겠다는 마음으로 홍대에서 아침, 점심, 저녁에 가 있을 카페 세 군데를 정하고 매일 갔다. 선교사여서 가능한 생각이었던 거 같다. 중국에 있을 때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뮤지션들이 연결되면서 주중 예배를 처음 시작하게 됐다. 나름 네비우스 선교방법(미국 선교사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가 주창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의 선교 정책-편집자)에 따라 선교적 교회를 시작했다. 사역자는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교회에서 생계 지원을 받지 않고, 외부로부터도 교회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급하는 교회를 세우기로 하는.
― 목회가 계속 이어졌나? 돈 안 들이고 목회하는 걸 목적으로 했는데, 홍대에서 예배할 공간이 계속 생겼다. 처음엔 노래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 달에 20만 원이면 장소 비용이 해결됐다. 그러다 홍대에서 음악학원을 하시는 어느 교회 집사님이 공간을 쓰게 해주셔서 처음엔 주중 모임을 가지다가 나중에는 주일에도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러다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공간이 없어졌는데 이번엔 어느 밴드 연습실과 연결이 되어 예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내가 대안학교 선생님이고 아이들이 함께 학교에 다니는데다가 내가 한국에서 대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 적은 공간 사용료를 댈 수 있었다. 교인이 50명에서 60명으로 계속 늘어나면서는 주중에 모일 아지트 같은 공간도 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마추어로 그림을 배우는 지인의 전시회도 거기서 열었다. 우리 교회로 폐지 모으러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분들 밥을 드시게 하려고 인근 한식 뷔페식당과 상의해서 할인된 가격에 식권 쿠폰을 사서 나눠드리기도 했다. 홍대를 떠나면서 끝까지 지속하진 못했다.
― ‘겸손한 미식’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그럼 언제쯤인가? 목회에 대한 고민이 곧 그 시작이었다. ‘식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애초부터 지속해온 고민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 주방에서 만나는 권사님들과 친했고, 미국에서 청년 사역을 할 때 우리집에 청년들을 데려와서 밥을 자주 해 먹였다. 명절을 앞두고는 마트에서 만두 재료를 왕창 사와서 집에서 청년들과 아침부터 계속 만들면서 점심에 끓여 먹고, 저녁엔 튀겨 먹고, 집에 갈 땐 싸서 보내기도 했다. 종일 그렇게 함께 식탁을 나누면 물어볼 필요도 없이 힘든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혹은 별 말할 것도 없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식탁’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성찬’의 의미로 연장해서 생각하게 됐다. 한국에서도 목회하는 내내 고민했다. 거창하게 교회론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목회와 선교는 어디에 우선으로 집중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 새 시대에 변화된 목회와 선교를 추구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성도들 개개인의 일상이 복음적 스토리가 형성되는 현장으로 인식되는 게 중요하다. 일식집에서 일할 때, 홍대에서 젊은이들과 예배할 때, 내가 한국에서 처한 어려웠던 상황과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배운 선교와 목회의 핵심이다. 그리고 홍대를 떠나 강남에서 목회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민을 더 깊이 하게 됐다. ‘겸손한 미식 밴드’ 첫 멤버인 김희경 님도 그중 한 분이다. 김희경 님이 교회 일로 거의 혼자 봉사하듯 운영하는 카페에서 잉크교회가 “임귀당귀”(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커피 교실을 오래 했었다. 그때 개인 식탁을 오픈하여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일에 대해서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다.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삶을 만나면서부터 실제로 시작하게 됐는데, SNS를 통해서 전에 말한 내용을 기억하고 연락하셔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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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무너졌다는 게 무슨 말인가? 다른 교회와 연대해서 사역을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맞았다. 힘들었고, 교인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결국 두 가정과 청년 한 명의 교인이 남으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 싶었는데, 내 친구이기도 했던 교인 한 명이 쿠킹 스튜디오를 예배 장소로 섭외했다.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서 또 1년 정도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미 시작한 누가복음 강해를 마칠 때까지만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거창한 목회는 아니고, 누가복음을 연구해서 묵상하고 전하는 일만 했다. 한국에서 7년을 목회했는데 더 이상 개척교회라고 할 수도 없고, 그만두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정말 어려워졌다.
― 많이 힘드셨겠다.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목회를 그만두려니 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아들 대학 입학금도 필요하고, 아버지 수술 비용도 걱정이었다. 강의하던 대학교에서는 수업 시수가 잘렸고,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가 영어학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처음에 반기다가 나이가 많아 거절당했다. 그러다 우유 배급소에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 경력이 없다고 또 거절당했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한국에선 고등학교까지 나온, 아무런 경력이 없는 40대 중반이더라. 문화적 식물인간이었다. 존재감의 위기의식을 느껴서 배급소에 다시 전화해서 졸랐더니 사장님이 계약서 없이라도 하겠느냐고 해서 수락했다. 그렇게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 우유 배달 일은 어떠셨나. 옛날과 달리 어려운 점이, 우선 요즘은 특별한 집 말고는 우유 배달을 안 시킨다. 차로 배달하면서 교통비를 빼고 남기려면 최소 100가구는 돌아야 하는데, 옛날처럼 아파트가 복도형이 아니라서 한 동에 한 두 집밖에 없다. 그런데 이젠 한 배급소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하는 우유 브랜드를 모두 다루기 때문에 리스트까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우유 배달은 신선도 이미지가 생명이라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새벽 2시에 일을 시작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6시 전엔 일을 마쳐야 한다. 2주 정도면 적응할 줄 알았는데 나이 드니까 적응이 안 되더라. 그런데 새벽에 노동자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신문 배달 아주머니를 사귀었는데, 하루는 자기가 올라가는 김에 대신 우유를 돌려준다고 해서 고맙다고 넘겨드렸다. 다 돌고 나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뭘 믿고 나한테 우유를 내주느냐”라고 하시더라.(웃음)
그분과 맨날 마주치면서 친해졌는데 서로 초를 다투는 일을 하다 보니 오래 이야기는 못 나누다가 어느 날 커피를 타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는 이 일이 끝나면 공부 잘하는 아들 둘 밥을 먹여서 학교 보내고 식당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그렇게 밤 10시에 퇴근해서 들어오면 집안일을 끝내고 새벽 2시까지 쉬었다가 또 신문을 돌린다. 힘들어서 어떻게 사시느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그런 분들을 새벽에 많이 만났는데, 나만 빼고 다 에너지가 넘쳤다.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흔히 어렵게 사는 분들이 더 긍정적이고 밝다고들 말하지 않나. 그분들이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 삶을 감당하려면 스스로 긍정성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엔 일 마치고 집에 가면 애들 밥 차려 먹이는 건 포기하고 아내한테 맡겼는데, 견디려면 바꿔야겠다 싶어서 스스로 ‘으쌰으쌰’ 했다. 집에 오면 아침밥 먹여서 애들 학교 보내고, 하다가 잠들더라고 책 보고 강의 준비하고. 대신 동네 밖으론 안 나갔다. 그때가 상담 치료도 받을 때였는데 관계를 다 끊고 할 수 있는 일에 몰입을 하라고 하더라. 우유 배달은 이후에 학교 기관 일을 맡으면서 3개월로 끝났지만 이후로는 새벽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계속 집에서 밥을 지으면서도 내 일상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바꿀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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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겸손한 미식’을 시작하게 된 것인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들 둘이 하교해서 집에 오기 전에 반드시 밥을 해놔야 했다. 원래 음식을 잘하고 관심도 있으니까 영양소나 재료의 균형도 맞췄다. 세 아이가 태어날 때 모두 건강 문제가 있었는데 밥을 잘 먹어서인지 잘 자라줬다. 내가 건강 상태가 좋아지면서 SNS에 애들 먹이는 음식 사진들을 올렸는데, 보는 사람들한테 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자꾸 올리기 미안해지더라.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서 먹인 것도 아니고 내 새끼 먹이면서 사진 올리는 게 민망해서 ‘겸손한 미식’을 구상했다.
나에게 밥 하는 일이란 좋으면서도 실은 굉장히 스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가족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 밥을 열심히 짓는 일밖에 없어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화적 통념으로도 그렇고.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8평이라는 작은 우리 주방과 식탁을 열어 이웃과 지인을 초청했다. 식사하는 환대를 통해 복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겸손한 미식을 시작한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복음의 구체성이 생각보다 크다. ‘겸손한 미식’은 환대를 취지로 하고, 기부로 이루어지는 식탁운동이자 문화운동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영성 훈련이기도 하다. 기관이나 조직의 일이어서는 안 되고, 의미와 취지에 공감하는 개인들이 많아지는 게 목적이다. 겸손한 미식을 준비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적 환대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 뭘까 많이 생각했다.
―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누가복음 6:37-38을 보면 기본적으로 연약하고 이기적인 우리를 먼저 용납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실제로 십자가 처형 직전 예수님이 불안한 마음을 이기시고 베푼 마지막 유월절 식탁과, 부활 이후 해변가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기다리시며 불을 지피시고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시어 아침을 준비하신 식탁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 전후를 열고 닫는다. 물론 예수님 생전에 다양한 식탁의 중심에는 늘 사역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식탁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을 기념했다. 이 모든 식탁은 사랑으로 환대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담은 것이라 본다. 이렇듯 식탁은 기독론과 교회론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라는 현장에 대한 은유이며, 그 현장이 제의(祭儀)가 있는 성전이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상이라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문화적으로도 환대를 잊고 살고 있다.
―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지금도 많은데 어떻게 잊고 살고 있다는 말인가? 식사를 대접할 때에도 어느 때부터인가 집이 아닌 식당을 이용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환대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현장을 집, 개인의 식탁으로 할 때 그 정신을 잇게 되는데, 이는 선교라는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환대가 교회 안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성도들 개인의 일상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환대가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게 하려면 성도들의 일상의 식탁이 그 현장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 이웃을 교회로 초대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집 식탁으로 초대하는 건 훨씬 진실하고 가까울 수 있지 않은가?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사회적 약자 또는 소외자가 이웃에 살고 있다면, 그들을 교회라는 특정 사회 문화 계층이 모이는 곳으로 초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안타깝지만 오늘 교회의 현실이다. 교인으로 만들려는 종교적 목적으로 오해를 받아서 지금까지 이어진 좋은 관계가 어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식탁은 그렇지 않다. 내 경우, 지인 중에 산재를 당한 어려움에 처한 분이 있어서 식탁으로 초대했었다. 내가 그분을 목사로서 교회로 초청했다면 분명 심적인 부담을 가졌을 텐데 우리 집 식탁을 통해 환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고, 그분도 편히 받아주셨다. 그래서 ‘겸손한 미식’ 시즌 중에는 ‘환대와 기부의 식탁’을 진행하지만, ‘특별 식탁’을 기획해서 어려운 이웃을 초대하는 순서를 꼭 갖는데, 도움이 필요한 경우엔 이 식탁 교제를 SNS나 다른 경로로 주변에 알린다. 실제로 산재로 수년간 어려움을 겪어온 이 분을 돕겠다는 자원의 손길도 연결됐다. 이렇게 환대는 교회를 넘어 복음적 가치를 실현할 때 더 큰 열매를 맺게 되는 것 같다. 겸손한 미식의 목적은 환대와 기부의 식탁을 개인이 열어서 교회를 넘어 성도들의 일상에서 복음적 가치를 구현하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이런 환대와 기부 식탁은 혐오와 분쟁과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 기독교 정신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 | ▲ 솔터콰이어 때 음식을 준비하는 '겸손한 미식 밴드' 멤버들 (사진: 겸손한 미식 페이스북 페이지) | | | ▲ 솔터콰이어 기부 식탁에서 김희경 씨 (사진: 겸손한 미식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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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 식탁’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보통의 시즌은 겸손한 미식 회원 6명의 개인 식탁을 열어 환대와 기부 식탁을 운영한다. 이때 식사비 명목의 기부금 절반은 지정한 기부 대상에게 보내지고, 나머지 절반은 재료비와 겸손한 미식 운영비에 사용된다. 특별히 운영되는 기획 식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개인의 식탁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분을 초대하여 전적으로 섬기는 경우이다. 앞서 얘기한 산재를 당한 이웃을 초청한 식탁이 그렇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부 대상을 선정해 시즌 시작마다 진행하는 행사의 경우이다. ‘겸손한 미식 밴드’ 멤버 전원이 참여하여 만드는 일종의 파티이기도 하다. 시즌2에서는 멤버 6명이 성가 합창단인 솔터콰이어에서 초대한 분 90명을 대접했다. 솔터콰이어는 그동안 연습한 성가곡을 공연으로 준비했고, 겸손한 미식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음식을 준비했다. 일종의 디너쇼 같았는데, 이런 공연을 기획한다면 재정이 수백만 원도 들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솔터콰이어의 기부금 115만 원으로 90명을 먹였고, 합창 공연도 열었다. 환대와 기부하는 나눔의 마음이 만들어낸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었다. 이후 기부는 시즌2 기부처인 청소년 멘토링 사역 기관인 ‘러빙행즈’로 흘러들어갔다.
― 김희경 집사님도 식탁에 함께하셨을 텐데, 어떻게 참여하시게 됐는지 궁금하다. 희경: 목사님이 강남에서 목회하실 때 내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만났는데, 기부 식탁 이야기가 의미 있게 들리더라. 나도 평소 음식을 만들어서 누군가와 나누는 걸 좋아했고 행복해했으니까. 특별히 밥상의 중요성을 절감한 계기는 우리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젖을 떼고 3-4살이 되면서부터 쭉 직장 생활을 했다.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없으니까 ‘알림장 편지’로 소통했고, 무엇보다 밥을 해 먹이는 데 열심을 냈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두 아이들이 이런저런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큰 상도 받고, 유학 후에 귀국해서 학교생활도 잘해서 가족끼리 어느 날 저녁밥을 먹으며 서로 칭찬을 했는데, 아이가 그러더라. 학교 다닐 때 엄마가 밥을 잘해주셔서 그럴 수 있었다고.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고 믿어주어 고맙다고. 밥을 잘해주어 고맙다는 말이 정말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충격이었다.
| | | ▲ 김희경 집사가 '겸손한 미식'의 환대와 기부 식탁에 차려낸 음식. (사진: 김희경 제공) |
- 어떤 점이 충격이었는지. 내가 앞에서 말한 엄마들처럼 했다면 아이들에게 고맙다거나, 엄마가 해준 밥 때문에 힘이 났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을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는데, 학원에는 보내질 않았다. 주변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소위 ‘좋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좋다고 하면 무조건 아이들에게 퍼부어주는 분위기였다. 요즘 드라마 〈SKY캐슬〉을 보면 아이들 어릴 적 주변 분위기 생각이 난다.(웃음) 애들 학교 끝나기 기다렸다가 비싼 음식이든 도시락이나 삼각김밥 사 먹여서 가방 바꿔 주고 학원에다 과외에 경쟁 붙이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애들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집밥 먹이고, 편지로 소통하고, 기회될 때마다 함께 가족 여행하는 거였다. 남편과도 그런 게 잘 맞았다. 그리고 집에 손님들을 자주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자연스레 함께 준비하고 장보고 음식하고 치우면서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가 생겼다. 밥상머리 교육, 가족 식탁의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었는데 그 행위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 집사님은 어떤 식탁을 만들어 가시는지 궁금하다. 목사님과는 음식 스타일부터 다르다. 목사님은 깊은 맛을 우려내는 고강도 노동이 들어가는 요리를 하신다. 나는 음식 조리가 간편하고 산뜻한 쪽인데, 브런치로만 (예쁘게) 두 번 한 적도 있다. 외출이 잦지 않고 생활공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애기 엄마들을 위한 식탁을 차렸다. 목사님이 내가 처음 식탁을 열었을 때 몸살 안 났느냐고 물어보시면서 본인은 처음에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끝난 뒤 쓰러졌다고 하시더라.(웃음) 겸손한 미식을 하기 전엔 누군가를 초대해서 먹는 일이 그냥 간단히 먹고 치우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오는 분들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 일이다. 먹는 분의 건강 상태부터 고려한다. 그리고 아까 목사님도 말씀하셨지만 함께 식탁을 마주하게 되면 속 깊은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의외로 말 못한 아픔을 가진 분들이 있다. 그러면 식탁 이후에도 생각하고 식탁 전에도 기도하게 되는데 그렇게 영적으로도 접근을 하다 보면 나도 에너지를 쓰게 된다. 목사님이 그래서 몸살이 나셨나보다 생각했다.
― ‘겸손한 미식’ 활동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인가? 희경: ‘겸손한 미식’의 기부 식탁은 ‘함께 먹는 밥’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가짐이 새로워진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 함께 먹는 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받은 분들이 “이런 대접 오랜만에 받아본다”라는 얘기를 많이들 하신다. 특히 주부들은 언제나 남을 위해 밥을 하다 보니, 누가 자기를 위해 정성 어린 밥상을 차려준다면 마다하지 않는다. 요즘 워낙 맛집도 많고, 좋은 식당들도 넘쳐나는 세상이고, 돈만 주면 내가 먹고픈 것을 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남이 차려주는 밥상은 분명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평소대로 하는 건데 받는 분은 훨씬 더 깊은 감동을 경험하더라. 정성과 마음이 담긴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 고급 식당이나 맛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는 다른 행복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식탁에도 마음과 정성을 더 가득 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한다. 결국 대접받는 이도, 식탁을 차리는 나도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요즘 어떤 형식으로든 작더라도 기부를 하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데, 식탁에 함께하는 분들도 그저 먹는 걸로 끝나지 않고 필요한 곳에 기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뿌듯해 하신다. ‘겸손한 미식’ 이름으로 식탁을 차리는 나는 “애(愛)쓰는 자”로서 자부심과 큰 감사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용노: 요즘에는 기부하는 마음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는 부담도 있다. 미리 초청장도 준비한다. 아직 ‘겸손한 미식’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도 있어서, 구두로 동의를 받고 어떻게 참여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초청장을 보내드리는 게 낫겠더라. 기부 식탁에 참여했다가 어느 타이밍에 기부를 하는지 몰라서 집에 그냥 돌아갔다가 다시 문의하신 분도 있었다.(웃음)
― 어려운 점은 없었나. 희경: 아이러니한 게, 교회 식구들을 겸손한 미식으로 초대하는 게 좀 어렵더라. 여러 번 한 건 아니지만, ‘우리 교회 일이 아니고 다른 교회 일 아닌가?’ 하는 반응이 있었다. 세상에는 봉사와 섬김의 종류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한 교회를 오래 섬긴 분들은 ‘우리 교회’ 봉사, ‘우리 교회’에 하는 헌금만 중요시 여긴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교회 봉사를 해야 믿음이 자란다고 하거나, 믿음이 좋으면 교회 모임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 말들을 접할 때면 닫힌 교회라는 느낌에 마음이 무겁다. 나는 40대가 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서 신학대학원 수업도 듣게 되고, 여러 방면의 다른 사역자분들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른 교회에서 스터디도 하고, 개인적으로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다양성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과거 교회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가 행위만 남는 ‘교회일’이 되거나 결국 ‘돈’이 사람보다 더 우선되는 현실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봉사나 일을 맡는 데 신중을 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50대에 접어든 지금, 내 나이에 무겁게 책임을 져야 되는 시기 같다. 젊은 혈기로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던 때와는 분명 다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 목사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교회를 오래 섬긴 분들 중에는 어느 지점에서 허탈감을 갖는 경우가 꽤 많다. 가치 있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데, 아까 말한 것처럼 교회 주방 봉사자들처럼 수고에 대해서 귀히 여김 받지 못하거나 부림을 당하는 식으로 상처받은 경험을 한 분들이 많다. 주방 봉사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교회 일에 헌신하라고 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의 복음적 스토리가 없어져 버리는 경우가 상당하다. 공동체 안에서 헌신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냥 개인이 삭제되고 교회 혹은 목사의 커리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의 복음적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가 될 수 있지만, 개개인의 복음적 스토리가 없는 공동체라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라 집단주의다. 하나님의 창조에 기반을 둔 공동체성은 집단주의가 아니라 그의 주권아래 피조 세계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완전한 균형을 이룬다.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은 통일성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통일성은 획일성과 다르다. 교회는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됨을 이룬 공동체인데 이는 왕 되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다양한 개인을 회심하게 하는 역사이고, 변화한 개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무리를 이룬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일하시는데, 목회는 그 도구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영성과 일상에 복음의 스토리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인의 일상과 복음의 스토리가 교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지 목회적 기획이 교회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처럼 교회 사역이 존재 착취, 영혼 착취로 가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교회에 자기의 복음적 스토리를 나눌 수 있다. 그게 모여서 교회의 스토리도 쌓이는 거지 뭐든지 교회 일을 먼저 만들어서 하는 건 아닌 거 같다. ‘겸손한 미식’을 통해서도 개인들의 복음적 스토리가 만들어지면 좋겠지 이게 어떤 교회의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겸손한 미식’은 그런 교회의 일과 어떻게 다른가? ‘겸손한 미식’은 각각의 개인 프로젝트다. 복음적 환대를 통해 서로 경험하는 복음적 스토리가 생기고 그 스토리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겸손한 미식’ 식탁에 초대되어 환대를 경험하고 기부에 동참한 손님이나 환대와 기부 식탁을 운영하는 ‘겸손한 미식’ 밴드 회원들이나, 모두 자신만의 복음적 스토리를 소유하여 교회에 그 스토리를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 ‘겸손한 미식’은 내 목회 사역과도 무관한(물론 우리 교회 교인도 참여할 수는 있지만), 자기 개인 식탁을 열어 복음적 환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대 프로젝트이다. 물론 이 연대가 지속가능하게 되려면 개인 이상의 필요도 느끼며 고민하고 있다.
― 환대와 기부 식탁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나. 이미 대접하고 환대하는 걸 워낙 잘하는 분들도 많은데, 요즘 우리 문화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로 인해 맛집 탐방을 넘어 직접 요리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맛의 탐닉에 그치지 않는 식탁을 창출해내는 문화를 성도들이 일상에서 이루어 지금 문화에 대안적 목소리가 되는 게 중요하다. 우선, 이런 일에 동참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겸손한 미식’ 밴드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요리 실력도 필요 없다. 환대와 기부하는 나눔의 마음이 우선이고, 요리는 누구나 배우면 된다.(웃음) ‘겸손한 미식’ 밴드는 아직 정기 모임은 없고, 이번 시즌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러빙핸즈에 기부할 목적으로 환대의 식탁을 연다. 일상에서 환대의 식탁을 만들고 싶은 분들은 함께할 수 있고, 같이 모아서 기부금을 보낸다. 새로운 시즌마다 기획을 하는데, 계획한 모금액이 차면 한 시즌이 끝난다. 아직은 김희경 집사님 말고는 개인 식탁을 연 분은 없지만, 어떤 강제성도 없는, 어쩌면 일종의 동아리 모임과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만 누구든 연대할 수 있다. 혼자 하면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적인데, 멤버들을 통해 더욱 확장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