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걷히는 숲속길을 들어서는 순간 어둠의 동굴 속으로 빨려들며 정신을 잃었던 파티아와 루아가 다시 깨어난 곳은 어느 강변 모래밭이었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사나울까? 이 바람은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야.’
꿈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파티아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파티아가 윗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바람이 길 잃은 아이처럼 방향을 못 잡고 쏘다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낯선 곳이었지만 분명 숲 속은 아니었다. 앞쪽으로 푸른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뒤쪽 멀리 높고 낮은 산을 배경으로 갈대 숲 같은 것이 보이긴 했지만 분명 천사의 집을 둘러싼 숲은 아니었다. 갈대숲이 끝나는 지점에 자그마한 돌담 집 하나가 홀로 쓸쓸히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옆을 보니 루아가 쓰러져 있었다. 루아를 깨우려는 순간 자신의 손에 무언가 쥐어진 걸 느끼며 손바닥을 펼치자, 별 모양의 수정체 가운데 하트 구멍이 뚫린 루아의 마스코트가 아침햇살에 반짝 눈을 떴다. 파티아는 하트별을 얼른 호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루아야, 루아야!”
파티아가 루아의 몸을 흔들었다.
“으으으응!”
루아가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틀더니 다음 순간 탁구공처럼 튀어 올랐다.
“여기 어디야?”
“성공했나 봐! 분명 천사의 집은 아니야, 숲 속도 아니고.”
루아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긴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성공했지? 난 마스코트도 없었는데……”
“내가 말했잖아. 내 손을 붙들고 있으면 될 거라고. 내 말 맞았지?”
루아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나왔지? 마스코트도 없이……”
루아의 시선이 갈대 숲 근처 자그마한 돌담 집으로 향하는 순간, 얼굴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놀라움과 생소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루아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여긴… 낯이 익은 곳이야. 저 집… 저 집은……!”
“혹시 네가 살던 집이니?”
“글쎄… 모르겠어.”
하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탄성을 질렀다.
“아아아, 맞아! 그런 것 같아. 저기서 엄마와 살았던 거 같아.”
“그래? 그럼 가보자! 네 엄마가 있을지 모르잖아.”
돌담 집을 향해 달려가는 루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돌담 집 앞마당 한쪽엔 카모밀라가 가득 피어있었고, 다른 한쪽엔 올리브나무가 하늘높이 자라 있었다. 파티아가 올리브나무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기, 연이다, 하트별 연!”
올리브나무가지에 대롱대롱 걸린 연을 뒤늦게 발견한 루아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날리던 연이야. 엄마가 만들어 줬어. 아아아, 엄마!”
돌담 집으로 돌진한 루아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엄마!”
그러나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루아가 엄마를 외치며 집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동안 파티아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소박했다. TV세트와 그것을 올려놓은 서랍장, 그리고 소파와 책장이 전부였다. 책장 눈높이에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빨간색 드레스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네 살 안팎으로 보이는 아이의 눈매가 루아를 닮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루아의 집이 맞나 보다.’
한참 후 루아가 부엌 쪽에서 풀이 푹 죽은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도 없어. 분명 우리 집 맞는데… 엄마는 없어.”
파티아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 너 맞지? 이 여잔……”
“엄마다!”
“어쨌든 넌 집으로 돌아 왔으니 됐잖아. 엄마는 곧 오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안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비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혹시 아빠 기억은 안 나니?”
“아빠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전혀 기억이 없어.”
파티아는 루아가 살던 동네로 온 것이 다행스러웠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정말 여기 어디에 검은 신전으로 가는 길이 있을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자기 방으로 돌아온 스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마스코트를 완성시키는 순간, 원장은 나를 죽일 것이다!”
스칼은 원장 몰래 마스코트를 만든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하루 빨리 마스코트를 완성시켜서 탈출해야 한다.”
신기한 것은 피라미드의 면이 정교하게 다듬어질수록 중심에서 나오는 불빛이 더욱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마법의 램프처럼 그 불빛은 이제 스칼이 정신만 집중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스칼은 밤잠을 더 줄이기로 했다. 교육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어찌나 쥐어뜯었던지 허벅지에 손만 살짝 닿아도 졸음이 싹 달아날 정도로 쓰라렸다.
오늘은 달빛이 유난히 밝아 작업이 순조로웠다. 벌써 두 시가 지나 있었다. 이제 그만 잘까 생각하다가 산호 피라미드의 아랫면을 한 번만 더 다듬고 자기로 했다. 원장이 두 시 이후에 돌아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들킬 염려 없이 작업속도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잠깐의 방심으로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작업칼을 들고 깜빡 잠이 든 사이 원장이 야간 불시순찰을 나온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시꺼먼 물체를 본 순간 스칼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장이 빙그르르 돌았다.
“이 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스칼이 피라미드를 얼른 감추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원장이 스칼의 손에서 피라미드를 빼앗아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마스코트를 완성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마스코트가 완성되면 나한테 신고해야 한다는 걸 잊었냐?”
“아 아네요! 아직 완성 안……”
“시끄럽다! 그러면 이 불빛은 뭐냐? 넌, 천사의 집의 규율을 어겼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마스코트 신고의무를 어겼어. 따라서 이 마스코트는 내가 압수하겠다. 그리고 넌 내일부터 사흘 동안 식사도 없고, 방에서 나올 수도 없다. 알았냐?”
스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스코트를 완성시키면 빼앗고 죽이라던 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굶겨 죽이려나 보다!’
원장은 스칼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방을 나가고 있었다. 스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안 돼, 내 마스코트 내 놔!”
스칼의 오른 손에 쥐어져 있던 작업칼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가 싶더니 원장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힘으로 원장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원장이 몸을 슬쩍 비틀면서 망치 같은 주먹으로 스칼의 얼굴을 후려치자 스칼은 그 한방으로 방금 통과한 방문으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스칼의 입에서 악에 받친 비명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저주가 튀어 나왔다.
“크으으으아아악! 부… 불… 불의 저주를 내려라!”
바로 그 순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스칼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순간, 원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피라미드의 중심에서 시뻘건 화염이 터져 나온 것이다.
“윽!”
원장이 비명을 지르며 쥐고 있던 피라미드를 던져버렸고, 원장의 손에서 빠져나온 피라미드는 허공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원장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으윽!”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원장이 쓰러졌고 피라미드가 꽂힌 정수리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급소를 찔린 원장은 몸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고 눈은 뒤집혀 흰자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황판단이 안 된 스칼이 멍청한 얼굴로 작업칼을 손에 쥔 채 자신의 방문 앞에 서있을 때, 비명소리를 듣고 복도로 튀어나온 무지가 스칼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으로 스칼을 바라보다가, 정수리에 피를 흘리며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원장과 작업칼을 움켜쥔 스칼을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무지의 비명소리에 주위의 방문이 차례로 열리고 아이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상황판단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이 이윽고 무지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지, 해미안, 푸지 그리고 나미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합세하여 스칼에 대항하는 형세가 되었다. 무지가 복도에 세워져 있던 대걸레를 집어 들자 다른 아이들도 빗자루나 쓰레받기 등을 집어 들고 여차하면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스칼이 당황하여 작업칼을 든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이건 아니야! 너희들이 잘못 본 거야. 내가 그런 거 아냐! 정말이야!”
그러나 아이들은 스칼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무지가 대걸레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우리도 죽일 거야?”
“아 아니야! 내가 왜? 너희들이 날 해치지 않는다면 난 절대로 그러지 않아!”
무지가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말했다.
“좋아! 우리도 널 해칠 생각 없어. 그러니까 그 작업칼 내려놔!”
스칼이 그제야 자기의 손에 쥐인 작업칼을 의식한 듯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건 곤란해! 내가 작업칼을 내려놓는 순간 너희들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까.”
잠시 생각하던 스칼이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난 이제 마스코트를 완성했으니까 오늘 중으로 나갈 거야. 그때까지 휴전하자! 어때?”
아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무지가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해! 그 대신 오늘을 넘기면 안 돼,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