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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마지막 재앙 의로우신 심판
16장은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쏟는 내용입니다. 15:1절에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한 대로 이는 마지막 재앙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자 보좌로부터 “되었다”(17)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하여 마지막 재앙이 되는가? “큰 성 바벨론”(19)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주는가 하는 점을, 바벨론은 16장에서 무너지는데 그에 대한 상론(詳論)이, 17-18장 두 장에 걸쳐 나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재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혀를 깨물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10-11)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합당하니이다,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5-7)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심점이 있습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4) 대접을 땅에 쏟으라
둘째 단원(5-7) 이렇게 심판하심이 합당하니이다
셋째 단원(8-21)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
첫째 단원(1-4) 대접을 땅에 쏟으라
①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1) 합니다. 드디어 성전에서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명이 하달이 됩니다. 이 “성전”은 15:5절의 “증거 장막의 성전”과 동일한 것으로, “성전에서 큰 음성”으로 말씀했다는 것은 (율)법대로 심판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16장에만 “크다”는 말이 “큰 음성(1), 큰 날(14), 큰 지진”(18)등 11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은 심판 날의 엄정성을 말해줍니다. “7인, 7나팔의 재앙”이 순차적으로 시행이 된 것과는 달리 일곱 대접은 일시(一時)에 “너희는 가서, 쏟으라”고 명합니다. 이처럼 첫 절의 분위기는 엄숙성과 긴박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② “쏟으라” 하십니다. 지금까지 “인과, 나팔”재앙을 상고했는데, 인(印)은 “뗀다”함으로 열린다는 개봉(開封)의 이미지가 있었고, 나팔은 “불다”고 말함으로 알리는 경고(警告)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만, 진노의 대접은 “쏟으라” 하심으로 즉각적으로 “심판”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자기 아들에게 쏟으셨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그림자인 레위기를 보면 속죄제로 드려진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 4:7, 18, 25, 30, 34, 8:15, 9:9)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쏟으셔야 할 진노를 대신 어린 양에게 쏟으신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에게는 진노를, 우리들에게는 “사랑”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롬 5: 5). 또한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행 2: 17). 그러나 이제는 진노의 대접을 “쏟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③ 일곱 대접재앙들을 보면 대부분이 출애굽 때에 애굽에 내린 재앙들과 상응하고 있습니다. 이는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15:2-3)고 말씀할 때에 예견(豫見)된 바입니다.
㉠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2) 합니다. 이는 애굽에 내린 여덟 번째(출 10:12-20) 재앙입니다.
㉡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3) 합니다.
㉢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4) 합니다. 둘째와 셋째 재앙은 애굽에 내린 첫 번 재앙(출 7:14-25)과 상응합니다. 다만 다른 점은 출애굽 때에는 애굽에 한정이 되었으나, 마지막 재앙은 지구 전체에 임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여기서 잠시 심판을 중단하고 막간(幕間)에 15장에서처럼 찬양이 나오는데 찬양의 내용은 무엇이며, 이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둘째 단원(5-7) 합당하니이다
①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5) 합니다. 어찌하여 의로우신가? 심판보다 먼저 구원을 행해주셨고, 구원을 행해주시되 자기 아들의 대속을 통해서 행해주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마련해주시고 저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곧 이 때(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자기 아들에게 대신 진노를 쏟으시고야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의로우신” 구원입니까?
반면 이를 끝끝내 거절하는 자들의 죄에 대한 진노를 쏟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의로우신 심판입니까? 그러므로 만일 심판이 없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지 않으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②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6) 합니다. 찬양의 내용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심판의 의로움과 합당함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합당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심판보다 먼저 행해주신 구원행사에 있어서도 너무나 합당(合當)한 방도로 행해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2:10절에서는 죄인을 구원하셔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주(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십자가)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이 없이 죄인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면 합당한 것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고 도리어 복음을 전해주는 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면,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심이 “합당하니이다”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③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고 의로우시도다”(7) 합니다. 이는 천사의 찬양(5-6)에 대한 화답(和答)인데 누가 화답하고 있는가? “제단”(祭壇)이라고 말합니다. 이 제단은 번제단을 가리킵니다.
1절에서는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났다”고 말씀했는데, 어찌하여 성전, 또는 천사라 하지 않고 (번)제단이라고 하는가? 이는 제단에서 드려진 제물(祭物)이 누구의 무엇에 대한 그림자인가를 생각한다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을 위하여 제단에서 대속제물로 드려주신 복음을 거부한다면 “네 죄는 네가 담당하라”고 제단이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피를 관제(灌祭)처럼 드린 순교자들도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합당하심”을 충분히 인식하시게 되었습니까?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 75:2-8).
셋째 단원(8-21)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
①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8) 합니다. 이는 애굽에 내린 아홉 번째 재앙(출 10:21)의 반영인데 그때는 해가 어두워져 흑암이 있었는데, 대접심판에서는 도리어 강하여져서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 지점에서 저들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9)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대적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합당하시도다 하는 것입니다.
②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10상) 합니다. 짐승의 “왕좌”가 무엇인가? 13:2절에서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짐승)에게 주었더라”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짐승의 왕좌”란 적그리스도의 보좌를 강타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0하-11) 합니다. 이 장면은 주님께서,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13:42) 하신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이 9절과 11절에 거듭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함은 이때까지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셨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들이 심판 받아 마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계시록에 등장하는 “회개”의 마지막 말이요,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③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12) 합니다. “큰 강 유브라데”에 대한 언급은,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도 등장했습니다(9:13-14). 그때는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마병대 이만만을 거느리고 사람 ⅓을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하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국경선(國境線)입니다. 그런 유브라데의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왕들이 온다는 것은, 14절의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한 것과 결부되는 것으로 마지막 일전(一戰)을 위한 최후발악인 것입니다.
④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13) 합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심각하게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영(13), 귀신의 영”(14)이, 그 “입”에서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말>과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⑤ 14절에서는,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하는데, 이처럼 “온 천하 왕들”을 모으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 귀신의 영”의 역사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심같이 귀신의 영도,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비 진리의 말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빛을 비춰주는 대목이 있는데, 아합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작전을 구사하는 중에 한 영이 나아와,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고 말하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이겠고 이루리라”(왕상 22:22)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 전쟁이란 다름이 아닌 진리와 비 진리의 “언어의 전쟁”이요, 말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과 악령의 “영”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깨달아야 할 점은 지상에는 많은 나라, 많은 족속들이 있다하여도, 영적 논리로 하면 두 나라, 두 진영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에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삼상 17:3) 했는데, 종말적인 싸움에 있어서 두 진영 간의 경계가 큰 강 유브라데로 상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삼두체제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영” 곧 미혹하는 영은 최후 일전을 위해서 자기편을 소집하여 총집결을 시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왕들이 이 유브라데 강을 넘어서 온다는 것은 마지막 공세를 펴고 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주님의 긴급 훈령
⑥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주님은,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고 격려하십니다.
㉠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졸면 죽는다는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만 도적같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강도도 도적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하)하십니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책망(3:17-18)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긴박한 상황에 많은 말씀 중 “벌거벗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가?
㉢ 먼저 “자기 옷을 지키라” 하신 “옷”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인데 이는 성화가 아니라 의의 옷, 즉 칭의로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구속사의 넓은 맥락으로 볼 때 “벌거벗음”이라는 주제가 칭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벌거벗었던 노아가 가림을 받고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엡 6:14)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이 “의의 호심경”이 자신의 행위에서 난 의라면 그의 가슴은 뚫리고야 말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한 칭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줄 뿐만이 아니라, 사탄의 정죄에서도 막아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⑦ 오해를 막기 위해 부언할 점은 “옷”은 칭의를 가리키지만 “자기 옷을 지켜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인가? 참으로 칭의의 감격을 맛본 자, 즉 내게 입혀주신 의의 옷이 어떻게 해서 마련이 된 것을 아는 자는 성결의 삶을 살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19:8절에서도 나타나는데 어린 양의 아내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칭의입니다. 그런데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는 것은 성화가 뒤따른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15중) 하심을 주목하십시오. 칭의교리에 서 있지 못한 십자가 군사는 마치 벌거벗고 전쟁에 나간 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최후결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사령관 되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경계하심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완전무장을 하라는 독려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겟돈
①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6) 합니다. 어찌하여 아마겟돈으로 모은다고 하는가?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언덕인데 아하시야, 요시야 왕이 죽은(왕하 9:27, 23:29 대하 35:22) 격전지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겟돈과, 666”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묻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느냐 하고요.
도리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마지막 최대의 싸움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구속사(救贖史)에 있어서 최고 최대의 격전은 언제 어디서 일어난 전쟁인가? 하고요.
②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답이 계시록에도 있습니다. 요한이 크게 울자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5:5)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한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5:6)이 서 있는 것을 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최고 최대의 격전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어린 양을 죽임으로 승리하는 줄로 알았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결정적으로 그 머리를 상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다 함께 살리심을 얻어 해방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어떻게 해서 더 강한 자가 되셨는지 형제는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히 2:7) 되신 것이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한 약해보이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말씀합니다. “죽으심”이 끝이라면 패배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부활하심으로 “더 강한 자”가 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십자가의 전투보다 더 큰 전쟁이 있고,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한 승리보다 더 큰 승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담당하여주신 십자가를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③ 이점에서 1장에서 말씀드린 중요한 원리가 대두되게 되는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1:4)라는 원리입니다. “아마겟돈”은 이미 갈보리에서 승리한 전쟁이요, “출애굽이나 출 바벨론”도 아마겟돈 전쟁이었으며, 이제도 지구촌 곳곳에서 사탄의 진영과 그리스도의 진영 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장차 대단원을 장식하게 될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놓치지를 말아야 할 점은 이제 우리가 싸우는 전쟁도, 전에 바울이 싸운 전쟁도, 장차 있을 전쟁도 주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승리에 근거하여 이길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되었다
④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17) 하십니다. “세 영”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자(16), 일곱 번째 마지막 재앙은 쏟아지게 되는데, 마지막 재앙을 “공중에 쏟았다”는 말은 사탄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라는 진술과 부합합니다.
그래서 큰 음성으로 “되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되었다”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언하심과, 21:6절에서 “이루었도다”(21:6) 하심과 함께 구속사에서 한 획을 긋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상의 선언은 구속사역을 다 성취하심에 대한 선언이요, 마지막에서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하심은 구속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인데, “되었다” 하심은 심판이 완료되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여기서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⑤ “되었다”고 선언하시자, “번개와 음성들과 우뢰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18-20) 합니다.
심판이 “바벨론”의 멸망으로 종결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에게 밟히리라”(눅 21:24) 하셨는데,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방인의 때가 종결이 되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있어서도 “이제와, 전에와, 장차”라는 원리는 적용이 되는데, 전에 구약시대는 이방인의 종주국이 바벨론이었으나, 이제(요한 당시)는 로마요, 장차는 불신 세력의 총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⑥ 유사 이래 처음인 큰 지진이 일어나고 중수가 한 달란트(약 백 근)나 되는 우박이 하늘로부터 떨어졌다는 말씀은 마지막 재앙의 강도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21하)고 16장은 마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비방하다니, 이를 대하는 형제의 심정은 어떠하십니까?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5하)는 마음이 드시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