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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 목필균
나 여기 있어
등대로 서 있다
낮에도 길을 잃는 너
밝음 속에 어둠으로
길을 인도한다.
밤에도 야맹에 결려
날 찾지 못하는 너
파도 위에 갈매기 띄워
길을 연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붉은 빛 사랑초가
하얀 화분에 담겨
바람에 흔들린 채
고정되어 있다
네 시선을 피할 수 없어
못이 박힌 난
낮에도 밤에도
길을 잃는 널 위해
푸른 섬 안에
까만 별을 향해
배 한 척 띄운다
동백꽃에게 / 목필균
고맙다, 꽃아
네 맥박 소리에
들숨 날숨으로 피가 흐르고
고층 아파트 햇살로
봄을 끌어안는다
겨울 끝자락
베란다 가득 만발한 너
나비 한 마리
넘나들지 못하는 곳에서도
처절한 사랑을 했는지
넘지 못할 담을 넘은 몹쓸 사람처럼
그리 섧게 우는구나
꽃답게 피었다가
꽃답게 지는
선혈로 흐르는 그리움
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붉은 발자국 남겨 주어
고맙다. 꽃아
법흥사 적멸보궁 / 목필균
사자산 연화봉에
솔바람 분다
붉은 뼈 녹아 내리고
하얗게 탈색한 혈흔
물기 스러진 살점들
한 줌 재로 흩어진다
미망을 떠난 육신
구름으로 떠돈다
보이지 않는다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인다 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짓는 불당
적멸보궁(寂滅寶宮)
금강대좌 위에 없는
불상이 가슴으로
들어와 앉는다
푸른 솔로 피어나는
목탁소리
산이 깊을수록
오직 한마음이다
*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영암리 미륵불 / 목필균
나를 향해 올리던 기도가
나를 관통하고 사라진다
빙그레 웃는다
돌아가던 오솔길에
직진으로 아스팔트가 덮힌다
기도는 뚫고 지나갔지만
길은 밀치고 넘어뜨리지 않아
고맙다
비켜서다
떨어진 손가락 뼈
웃다가 일그러진 턱까지
숨차게 지나간 바람이
대웅전도 잃고
석탑도 잃고
먼 산빛 도량도 버리고
명암리 입구에 서성이며
그래도 감사해서
소리없이 웃는다
봄말 / 목필균
3월
분분히 내리는 눈바람에도
얼음새꽃
산수유
매화가
산등성이 넘는다
보이지 않게 번져오는
연둣빛 물오름 소리
툭툭 뿌리가 깊숙히
보습 날 박는다
꽃샘바람
시린 뼈로 스며들어도
날은 눈부신 봄이다
봄의 목소리 / 목필균
어느 시인이
보내온 편지 속에 접혀있는
산수유꽃 향기
겨우내 응고되었던
혈맥 풀어지고
산정수리에서
굵은 힘줄 도드라지게
기지개 펴는 바위산이
보인다고
잊고 있었던 비상금
오래된 책갈피에서 찾아내 듯
동면에서 깨어나는
여린 새싹들 숨소리 들린다고
환하게 열리는 품안으로
즐거운 발걸음 시작하라는
느낌표 가득한 편지에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
봄이다. 봄, 봄
그 꽃이 피면 / 목필균
쉽표없이
내게 전해줄 귓속말이
궁금하다
꼭 다문 입술
조금씩 깨어나더니
어느 새 모든 촉각
바짝 귀를 세우고
보이지 않은 더듬이로
바람도 없이 쌓이던 침묵
남김없이 보여주는 꽃
하얀 빛으로
분홍 빛으로
붉은 빛으로
쉼없이 피어나서
거실 가득 퍼지는
향기로운 몸짓
시클라멘, 시클라멘, 시클라멘
그 꽃 피면
가슴에 숨겨둔 사랑이
조금씩 고개를 든다
시클라멘 : 수선화과의 식물로 온실성 숙근 알뿌리 초화이다.
꽃말은 수줍은 사랑이다.
시간퇴행 / 목필균
열아홉살 때
공지천 흐르는 춘천엔 가지 말았어야 했나 봐
무시로 파고드는 그 허무한 날들이 아름다움이었다고
역설하지 않아도 될 첫사랑의 그림자밟기
새벽 안개비 속에도 홍수처럼 밀려들던 내 젊은 피
아, 연둣빛 물오름이 있던 강변의 봄날들
5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둘이 나누어 먹어도 부끄럽지 않고
막걸리 한 잔에 취하던 문학 지망생들의 건주정도
젖을수록 시퍼렇게 일어서는 스무 살 폴더 속에서
파닥파닥 생비늘을 턴다
기억보다 눈길로 자판을 두드리며
지천명을 엮어가는 오늘밤
누워버린 하현달이 시름의 관절을 구부리고 있지만
난 알 수 없는 영역에 도착된 미확인 비행물체
더 나아갈 수 없는 내일을 들여다본다
미확인을 확인으로 돌려놓으며 뒷걸음치는 날들
어지럽게 흔들리는 바람 따라
맨발로 달려간다
그 나무 / 목필균
그는
내 지천명 고개에 서 있는
당산나무
굵은 그의 팔뚝에 그림자를 얹으며
안으로 감겨둔 태엽을 푼다
출구가 막막한
긴 터널을 헤매던 유년기
방치하여 약시가 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친정어머니 없이 시집가던 날
무시로 내리던 소나기
옹이진 가슴팍의 눈물 속으로
두 톱니바퀴는 서로 등을 대며
풀어진다
허공을 잡고 길 여는
미세한 줄기세포까지
내게로 오는 길인 줄도 모르고
저 섬세한 핏줄의
태엽만 자꾸 풀고 있다
사람 사는 맛 - 생생한 증언 / 목필균
일본 정부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일본이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동해바다
3월이 가고
4월이 오는구나
일본의 야욕은 100년 전 그대로인데
자꾸 찢고 찢기는 나의 조국
일본은 또 무슨 생각으로 칼을 가는가
독도가 우리 땅인 줄 몰라서 다케시마라고 하는가
우리가 한국인인 줄 몰라서
우리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꿔놨던는가
그러고도 우리가 원했다고
넉살 좋은 사람들
말 못하는 독도를 위협하는 일본의 창시개명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또 언제 우리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꿔놓을지 모른다
동해바다
3월이면 떠오르는 불쾌한 먹구름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유민自由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동포여!
기다란 독립선언서를 읽기 전에
독도를 읽어라
독도는 낭만이 아니다
<독도는 낭만이 아니다> -이생진 시-
독도 문제에 요즘처럼 여론이 집중되고, 정치인들까지 동시에 한 목소리를 낸 적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거울같은 것이라 하겠다. 연일 계속 되는 일본 정치인들의 독도에 대한 망언은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가슴에 더욱 깊게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일본의 망언에 날카롭게 일격을 가해주고, 우리 정치인들에겐 안일함을 깨우쳐 주는 함성이라 하겠다.
이생진 시인은 3월 우이시낭송회와 인사동 시낭송회에서 위의 시를 격앙된 목소리로 낭송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를 깊이 연구한 일본 역사학자 나카스라 아키라가 쓴 '일본과 조선의 역사' 속에 창시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라북도 고창에 사는 설진영은 창시개명에 항거하여 우물에 투신자살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이 원해서 창시개명을 했다는 망언에 대한 양심적인 기록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심상소학교 3학년 때와 5학년 때 성적표를 손수 가져와서 일제시대의 암울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1939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65년 전 일제시대 때 교장 미나모리(皆森藤市)와 담임 하라다(原田登登喜)선생은 창시개명을 몇 년을 거쳐 매일매일 집요하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성만 일본어로 바꾸셨던 가슴 아픈 당신의 경험담을 울분의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누렇게 바랜 16절지 크기의 통신표는 네 칸으로 접혀있었다. 맨 위에 빨간 일장기가 박혀있고, ‘황국신민의 맹세’가 첫 면을 자리 잡고 있었다.
『황국신민의 맹세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해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3. 우리는 참고 다져서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매일 조회시간 마다 이 맹세를 암송하고 동쪽을(궁성宮城이 있는 ?) 향하여 절을 강요당했던 일제 강점기의 소학교의 어린이의 마음은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는데…….
아직도 정신 나간 친일파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철도를 놓아주어서 고마운 일도 했다고 한다던가? 더 기가막힌 것은 창시개명도 한국인이 원해서 한 것이란 망언을 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을 통탄해 했다.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일본을 강점하고, 일본 학교에 교사로 부임한다면 과연 당신은 일본 소학교 어린이에게 한국식 개명을 강요했겠는가? 를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로 그럴 수는 없었을 거라는 양심에 고하는 말씀을 남겼다. 일본은 이웃나라를 무시로 침탈하고도 반성도 하지 않은 채 또 다시 겁없이 망언으로 독도를 잠식하려는 그런 나라이다. 그렇게 뻔뻔한 나라이다.
하긴 옛날부터 우리나라 문물 받아들였던 섬나라가 어쩌다 강국이 되자 수시로 침략을 일삼았던 일을 잘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침략자의 후손들이라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이생진 시인이 소개하신 이야기 중에는 한국역사학자 쓴 역사책 속에는 일본 군인의 감독 아래 철도가 놓여질 때, 조선인들에게 강제 부역의 명이 떨어졌고, 결국 일곱 살 어린아이까지 동원했던 일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그리고 그 일곱살 아이가 실수로 몽둥이를 철길에 올려놓자, 어른들에게 주어서 일본에게 반항하려했다는 억지를 부리며, 그 자리에서 아이를 총살시켰다는 기록도 되어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그래도 우리나라를 위해 일본이 철도를 놓아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독도가 확실한 우리 땅임에도 매번 일본과 시비가 걸리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동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순전히 민간인 위주의 수비대나, 독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민족적 사명감에 불타는 몇몇 사람들만이 본적을 옮기고, 주민등록을 옮기는 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일본 우익파 정치인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연달은 망언 때문에 온 국민의 여론이 들끓고. 정치인들이 여론에 편승해서 국제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독도는 이제 인간의 고독 낚는 낭만의 섬이 아니다. 영토 분쟁의 씨앗을 끌어 안고 있는 현실의 섬인 것이다.
섬에 대한 시 한편을 쓰더라도 직접 발로 밟아보고 쓰고, 역사적인 인물을 소재로 시를 쓸 때에도 관련된 서적을 깊이 탐구해 보고 쓰는 이생진 시인의 생생한 증언 앞에 참석한 모든 시인과 독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막연한 심증만이 아닌 경험이 내포된 설득력 있는 자료로 증명된 이야기들……. 이래도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니란 말인가?
사람 사는 맛 -무한대 사랑 / 목필균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빼면 님이 되고,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붙이면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사랑,”이란 유행가로 흐르며 그렇게 쉽게 입에 오르는 것이 요즘 남녀 간의 사랑이며 이별이라는데…….
텔레비전에서 만난 이태석, 이명숙 부부 이야기는 요즘 보기 드문 부부 간의 깊은 사랑으로 보는 이에게 감동의 물결을 이루게 해주었다.
작은 구멍가게 주인 이테석씨는 22년 째 전신마비인 채로 장사를 하고 있다. 구석구석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설치하고, 마이크로 손님들에게 물건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며 장사하는 전신마비 가장의 목소리는 건강했다. 몸으로 움직이는 서비스는 못해도 반갑게 맞이하는 밝은 미소이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건을 파는 이태석씨. 동네 사람들은 셀프서비스가 조금은 불편해도, 대형마트가 생겨서 조금은 비싼 이태석씨 구멍가게를 꾸준히 이용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은 삭막하다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녹여 주었다.
그래,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조금 손해 보면 어떠랴. 온몸을 움직일 수 없어도 삶의 의지를 굳건히 하며 사는 이태석씨가 동네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더욱 큰 것이리라. 그 의미를 알고 찾아주는 동네 사람들, 그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이리라.
이십칠 년 전에 이태석, 이명숙씨는 결혼했다. 결혼 한지 6개월만에 과속하는 트럭에 받혀 이태석씨는 전신마비가 되었고, 그 당시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던 아내는 남편의 병 수발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6개월 만에 엄청난 불운의 파도는 그들을 덮쳤고,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도 정신만은 또렷한 태석씨는 어린 아들과 전신마비의 가장, 살길이 막막하고 꽃다운 아내의 삶이 애처로워서 자꾸 친정으로 돌아가기를 권했었다.
장애자가 된 남편과 백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헤어지느니 함께 죽자고, 어느 무덤가에 앉아 농약병을 꺼내들자 방글거리고 웃던 아기가 소스라치게 울어대었다는 그 날, 그 날 부부는 죽을 용기로 세 식구가 함께 살자고 맹세를 했었다고 한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아직도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는 아내 이명숙씨는 건장하게 잘 자라준 아들과. 누워서라도 장사를 할 수 있고, 입으로 볼펜을 물고 글도 쓸 수 있는 남편이 있어서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오늘까지 모든 어려움을 버티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주고, 아직도 관장으로 변을 보아야만 하는 남편의 뒷수발을 다해 온 사랑하는 아내를 마비된 손으로 끌어안지 못해도. 사랑하는 남편을 온몸으로 품어준 아내의 큰 사랑. 이 부부의 사랑의 크기는 무한대였다.
사랑보다 돈을 좆고, 이성적인 사랑보다는 본능적인 사랑에 빠져 쉽게 가정을 파괴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울려주는 진실한 사랑의 경종을 울려주었다..
“당신이 있어 내게 오늘이 있었으니. 그 고마운 마음이 늘 가슴에 있었습니다. 그 큰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입으로 표현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입으로 정성껏 쓴 편지를 써 방송국에 보냅니다. 이 편지가 27년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퍼준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남편 이태석씨의 사연이 라디오로 흘러나오자. 아내 이명숙씨 결국 격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 깊숙이 눌러둔 설움의 눈물, 남편의 진심을 말없이 지켜만 보아오다가 실제로 말로 듣게 되는 감동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남편의 손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주며 살아온 그녀의 뜨락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가득가득 피어난 것이다.
진심은 언제나 허구 속에서도 한 길로 흐른다. 봄빛 같던 신혼시절 해일로 덮쳤던 불운을 행복으로 가꾸어간 그 부부의 굽이굽이 넘어온 삶의 험난함을 어찌 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격언처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부부의 사랑이야기는 사람 사는 맛을 탈콤하고 향기롭게 그 농도를 짙게 해 주었다.
낙산사의 기도/ 목필균
어디서 날아온 불씨일까
불씨는 불덩이가 되고
계곡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천년사찰 낙산사가
화마에 스러진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올리는 간절한 기도
나무 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 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 관세음보살마하살!!!
잊혀졌던 독경소리
천지에 번진다
바다가 되고
강이 되고
계곡이 되고
불씨가 되고
어두운 세상 속에
불심을 밝히는
마지막 진신사리
명자꽃 / 목필균
붉은 립스틱 벅벅 그어대며
그 사람 근무하는 사무실 창에
사랑을 고백했다는
전설 속의 그녀
뜨거운 사랑의 몸짓
한 길로만 흐르는 아픔일까
겨우내 칭칭 동여매었던
가슴앓이 신음소리
딱딱하게 굳어진 가지에도
붉은 핏물이 방울방울 내비쳤다
길어진 햇살
남향 창가에 서 있는
명자가
전설의 그녀가
한 몸으로 불타고 있다
제동 백송나무 / 목필균
조각보 잇듯
육백년 이어온 바람들
살아있는 목장승이 그리 서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한 몸에 새기고
뜬금없는 천도설에
묵묵히 시위하고 있다
대를 잇는 까치집 하나 내려다본다
태조 때부터 내려온 청문관의 눈빛
광목 한 필 풀어내어 옹이진 상처들 싸매고
푸른 살점 깎아내고 하얗게 바랜 눈물
왕자의 난도 임진란도 일제치하도 한국전쟁도
묵묵히 바라보며 지켜온 응고된 침묵
안으로 쌓은 내공이다
허공에 길내며 넘어온 세월
허옇게 살비듬 털어낸 등걸도 늙어간다
꺾인 팔이며 잘려진 손가락에도 솔잎이 피어나듯
힘겨운 어깨 늘어뜨린 날들
뿌리 깊게 잡아채는 별빛으로
오늘을 내다보고 있다
*수령 600여년 된 재동 백송나무는 헌법재판소 안에 있다.
서울이 수도인 것은 법문에 없지만 육백년 넘게 지켜온 관습법이라는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판결보다. 진솔한 격문을 말없이 세우고 있다
미안하다 / 목필균
메마른 겨울 날
혼자서 오르는 산길
쨍하게 맑은 하늘 속에
저런 칼바람도 있었을까
떨어지지 못한 채 말라버린
나뭇잎들 서걱거리며
쫓아오는 길
미안하다
나 혼자 이 길을 가서
한 치 오차도 없이
평행선으로 흐르는 기찻길도
굽은 선은 있는데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사람
사랑하지 못해 미안하고
미워한다는 사람
미워할 수 없어 미안하다
사랑도 미움도 다
한 가지에 핀 꽃이라고
그래 그렇게 바람같이
스러지는 하루다
아름다운 얼굴- 차주일 시인 / 목필균
친구라고
다 그런가요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
젓가락으로 주워 담아
온전히 하루를 방으로만
들어앉히는 사람 손잡고
살비듬 털어주는 아름다운 이
굽혀지지 않는 다리
손가락 마디마디
뒤틀려 잡기도 어려운 사람
보기 싫다 외면하지 않고
더 아껴주고
더 찾아주며
부축해 일으켜 주는 사람
아픔을 같이하는 동행의 길
변함없이 환한 웃음소리
힘 있는 굵은 팔뚝
인격이 저장된 불룩한 배
포대화상의 눈빛이 담긴
그 사람 큰 얼굴
<시작노트>
북한산 시화제 때 차주일 시인이 심한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친구 김성수시인을 부축하여 시화제에 참석했다.
어렵게 어렵게 산길을 동행해준 차주일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잔인한 봄 / 목필균
삼월 끝자락까지
눈발이 분분하더니
늦은 꽃바람 흐드러지더라
베란다 창으로 굴절된 햇살
거실 깊숙이 들어서고
손바닥만한 화분에 사랑초도
늘어져 하품하는 오후
삼년 째 방안에서 벽을 쌓는
방울이 아범 빈주머니에 핀
백수곰팡이
잔술 얻어먹는 일도 시들어진지
오래 오래 오래다
빌어먹을 꽃은 무슨
빌어먹을 꽃은 무슨
늦은 꽃바람보다
일어서서 휘돌아다니며
밥벌이 할 곳이 더 급한데
몸은 늘어져 거실을 뒹군다
명자꽃 으스러지게 피어도
꽃타령은 무슨
꽃타령은 무슨
꽃비 눈부신날 / 목필균
강나루 벚꽃이
하얗게 흐르더라
굽이굽이 걸어온 길마다
눈 벚꽃 휘어지게 피었을텐데
내게 머물렀던 봄날은
왜 늘 절름발이였는지
거슬러 갈 수 없는
젊은 날 꽃숲에 숨겨둔
아프다 건드리지 않고
꼭꼭 눌러둔 딱지 진 상처
이제쯤
탈탈 털어낸 무수한 꽃잎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저 푸른 강물로 흐르더라
짝사랑 / 목필균
꽃잎 흐르던 봄날
공지천 이디오피아 찻집은
잘 있는지
궁금했던 안부로
접혀졌던 쪽수가 얼마였는지
지금은
주어도 안 먹을 신김치에
막걸리 한 사발
장난 섞인 고백도 못해본
그 놈의 사랑이야기
우우우 어디로 흘러갔는지
혼자서 앓는
봄날의 일기장
닳아빠진 지천명의 바퀴에
눌려서
눌려서
눌려서
흔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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