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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말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이 말은 미국의 신부이며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존 포웰이 20세기 말(1990년대)에 출간한 대표적 에세이 책의 제목이도 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가? 이 책에서의 핵심주제는 ‘나는 왜 나 자신에게 대해 솔직하지 못한 것인가?’ 와 ‘너는 왜 너 자신을 드러내놓지 못하는가?’라는 질문과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와 너의 솔직한 대화는 소통의 지름길이다. 진정한 의문은 감동의 답을 얻을 수 있다. / ? → !
나는 나를 아는 만큼 남을 아는가? 나는 남을 아는 만큼 나를 아는가? 에 대하여 나는 지금 분명하게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시천주(侍天主)의 나는 진정 나인가? 나는 본연아(本然我/無窮我/不變의 나)에 있는 나인가? 현실아(現實我/日常的인 生活人/可變(變化無雙할 수 있는)에 있는 나에 머물러 있는 나인가?
敬語에서
귀하는 누구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누구냐?/누구인가?
平語에서
그대는 누구이십니까?/누구냐?/누구인가?
자네는 누구인가?/누구냐?
卑語에서
너는 누구냐?/누구인가?
야 너, 누구야?
이 묻는 말에서 말하는 사람의 상황에서의 진심(心情)은, 어디에 있을까? 너는 누구냐?/누구인가? 야 누구야? 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심(心情)은 중심(中心)이어야 하고 충심(忠心)이어야 한다. 중심의 중은 모든 것의 한 가운데로, 선오(善惡)가 어느 쪽에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無善無惡) 중용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충심의 충자는 입 구(口) 아래에 마음(心) 자를 놓고 입구자의 한 가운데를 내려그어 마음심에 깊이 닿게 한 글자이다. 이 글자의 의미는, 중심(中心)에서 나은 마음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중심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면, 충심(忠心)의 말이 아닌 것이므로 교언영색(巧言令色/다른 사람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해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고 표정을 그럴싸하게 지어 아첨(阿諂)하고 알랑거리는 태도를 말한다)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묻는 사람이 나라면 어떤 마음에서 저렇게 묻는 것일까? 그리고 이때의 묻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있기나 한 존재인가? 망상(妄想) 속에 있는 본연아인가? 참담(慘憺)하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하게 변동(變動)하는 현실 속에 있는 나인가? 내가 없는데 한울님을 어떻게 모실 수 있는가? 시천주의 나는 한울님을 모실 수 있는 진정한 나를 만들라는 것일까? 그러면 수운대신사가 동학론(東學論)에서 풀이한 시천주(侍天主)는 어떤 의미일까?
착한 사람, 욕심이 없는 사람을/원래는 성인을 말했다, 『孟子』에서 나온 말을,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인용한 말에서, ‘인개가이위요순(人皆可以爲堯舜)이라 했고, 수운대신사의 논학문에서 ’요순지세(堯舜之世)에는 민개위요순(民皆爲堯舜)’이라 하였으며, 권학가에서는 ‘자고급금 촌탁(忖度)하니 요순성세 그때라도 일천지하 많은사람 사람마다 요순일세’ 라고 하였는데, 인(人)과 민(民)이 어떻게 다른가? 동학과 천도교의 교의에 따른다면, 궁극적으로 개별성(個別性)과 집단성(集團性) 중에 어느 것이 우선(優先)이고 중시(重視)되는가?
모든 종교의 교인/도인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셋으로 나눌 수 있다.
眞性敎人/80-90%는 僞裝敎人.
在家敎人.
冷談者.
*眞性敎人의 分別基準 ? - 오관(五款)인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기도(祈禱), 성미(誠米)의 다섯 戒律의 실천여부→敎憑 持參與否.
天道敎의 4大 宗敎的 目標/目的 - 布德天下 ⇄ 廣濟蒼生 ⇄ 輔國(保國)安民 ⇄ 地上天國建設./총부보다는 전위단체의 목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 脫宗敎化時代 - 19세기말 인간성상실의 시대의 출발에서 인간성회복운동이 지속으로 계속되어 왔으나, 세계 1,2대전을 겪으면서 신의 부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탈 종교화시대가 가속화되어 재가교인과 냉담자가 양산되었다.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을 불러와 神聖의 추락과 종교의 이탈자가 생긴 이유는 삶의 현실적 문제를 교단이 답을 할 수 없게 되자 욕구불만과 행복한 삶의 위안을 종교대신 사회개조운동이 제공해주게 되었다. 서구에서는 종교의식이 사라져가고 기독교의 유산들이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기 시작하여 탈종교화 시대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7,80년대를 전후로 각 교단은 교인들이 이탈하고 신입교인이 줄어드는 탈종교화시대가 가속화되어 지속되기 시작하였다.
海月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수운의 시천주로서 먼저 기본적으로 실천요령으로 실천궁행(實踐躬行/어떤 일이든 실제로 몸소 실행하여야 한다)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인여천을 『禮記』 第 27章 哀公篇의 是故仁人之事親也如事天 事天如事親 此謂孝子成身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천(天)을 海月은 人是天(人/개벽운수에서), 人卽天이라 하였다.
義菴은 동학혁명이 청국과 일본의 참전(參戰)으로 인한 실패와 해월의 순도(殉道)이후 조선정부로부터 동학은 국금(國禁)의 대상이 되어 교도들이 동비(東匪)로 몰려 제대로 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는 희생을 당하게 되자, 의암은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두루 시대적 상황을 살피려 노력한 끝에, 종교가 시대적 조류(潮流)에 따라 국금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勘案)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를 하였다. 그리고 인내천(人乃天)을 종지(宗旨)로 정했다. 이후 급박(急迫)하게 변하는 사회변동에서 압축성장(壓縮成長/高度成長)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적인 지체현상이 일어나 교도들 중에는 인내천은 진정한 人乃天이 되지 못하고, 인내천(人乃賤) 수준의 신앙자가 있고, 심하게는 인내천(人乃蚕)의 사람으로 추락한 교도도 있게 되었다. 인내천(人乃賤)의 賤 字는 천할 천, 천박할 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貴 字의 상대어로 귀인(貴人/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반대되는 천민(賤民)을 가리키는 언어로, 불손(不遜)한 언행이나 신분이 낮은 비천(卑賤)한 사람, 또는 학문이나 생각 따위가 얕거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상스러운 천박(淺薄)한 사람을 의미하고, 인내천(人乃蚕)의 蚕 字는 지렁이 준/천, 누에 천/잠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人乃蚕은 버러지 같은 인간, 더 나아가서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註 000 ; 문화 지체(文化 遲滯, cultural lag, culture lag) - 문화지체란, 비물질 문화가 물질문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질문화'는 주로 과학기술의 발달을 말하는 것이고, '비물질 문화'는 사람의 생활 방식부터 제도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과학 > 기술 > 문화 > 제도 순으로 발달 속도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총체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내천(人乃天)에 있어서 사람과 한울은 어떤 관계인가? 한자의 사람 人 字의 형성과정을 설명 할 때, 상형문자에서 사람을 옆으로 보고 그린 그림으로 머리와 손과 발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때의 O 모양의 머리는 하늘을 의미한다. 하늘은 둥근 모양이라 하여 알이라 하기도 한다. 한자의 하늘 천(天)는 一과 大 字의 합자로 하나의 커다란 알은 하늘을 의미하여 크다는 한과 ᄋᆞᆯ이 모여 한ᄋᆞᆯ이 되고 연음이 되어 하ᄂᆞᆯ이 되었다고 언어학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고어에서 하다는 크다, 많다. 를 의미하고, ᄒᆞ다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하ᄂᆞᆶᄠᅳᆮ디시니, 계림유사 해제(鷄林類事解題)에서 天은 하ᄂᆞᆯ 텬이라 하였다.
윤노빈은 그의 저서 『新生哲學/1974년도판.PP.234-238』에서 ᄒᆞᄂᆞᆯ님으로 이해하여, 한울님을 어떤 행위를 하는 하는님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후에 알을 얼로 모음교체가 되기도 하여 한ᄋᆞᆯ이 한얼이 되어 대종교애서는 한얼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부경(天符經)의 이치로 설명하면, 一이 하늘, 二가 땅이 되고, 三이 사람이 된다. 그런데 二, 三은 하늘이 합친 글자이므로 이때의 하늘 천(天)은 天,地,人을 모두 담은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큰 대(大)는 상형문자에 있어서, 사람을 앞에서 보고 그린 글자이므로 이 또한 키가 큰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天)을 대우주(大宇宙/大我/makrokosmos)라 하고 한울님을 모신 사람(人)을 소우주(小宇宙/小我/自我/Mikrokosmos)라 한다.
천부경 사상이라는 것이 한국인의 고대사상이기도 하다. 천,지,인의 표기가 ‘一, 二, 三’이라는 글자로 셋이 되었지만, 그 글자들의 구성요소는 단 하나 ‘一’로 되어 있다. 이것은 ‘二’와 ‘三’으로 구분해서 쓰기는 하지만, 근본 바탕은 ‘一’이라는 의미이므로 ‘二’로 표시되는 ‘땅’은 ‘두 번째 하늘’이라는 뜻이고, ‘三’으로 표시되는 ‘인’은 ‘세 번째 하늘’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人’자는 단순히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인’과 관련하여 ‘세 번째 하늘’이란 의미로 생각해야 하며 ‘세 번째 하늘’이란 뜻에서 ‘하늘을 닮았다.’ 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다. ‘亻’자가 다른 글자들과 결합하여 ‘닮았다.’ 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내천은 사람이 한울이므로 사람이 한울이다. 라고 이해하면 올바른 이해가 된다. 교단에서 발행 배포한 영문 안내서에서 인내천을 ‘Man and God are one’ 또는 ‘HUMAN AND HEAVEN IS ONE’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공자는 『論語』에서 인(仁)을 강조하였는데, 인이란, ‘어질다./심성이 착하다.’는 뜻으로, 선(善)의 근원이 되고 행(行)의 기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설문/說文』에 따르면, 인은 ‘인(人)’과 ‘이(二)’의 두 글자가 합해서 된 것이며, ‘친(親)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자가 인을 실천 윤리의 기본 이념으로 삼으면서부터 그 의미는 일체의 덕목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라고 추론해보았다./同歸一體
동학과 천도교에서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평가는, ‘만물(萬物)의 최령자(最靈者)’라는 것이다. 이 말을 언어사회학적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만물 중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여 만물 중에서 가장 우월(優越)한 생명체로 인정하게 되는 근거는, 인간이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위하여 집단을 이루어 언어(말과 글)로서 서로간의 소통을 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닌 것처럼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닌 것이다. 화자(話者/筆者)의 대상이 되는 청자(聽者/讀者)가 화자의 말을 무시했다면, 그 청자에겐 화자의 말이, 말이 아닌 것이다. 말이 아니게 된 이유로는, 청자가 듣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 더 들을 필요가 없는 화제(話題)이거나, 무지(無知)하거나, 삶에 지쳐 만사(萬事)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어떤 이념과 사상, 그리고 어떤 경험(개인이나 소속된 집단)에 얽매여 있는 확증편향적(確證偏向的)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살아온 공간적, 시대적 조류(潮流)에 따라 변해왔고 변해갈 것이다.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 진리가 되는 시대가 있고, 진리가 진리 아닌 것이 되는 시대도 있게 마련이다. 아울러 우리들은 삶에 있어 생존경쟁에서 도태(淘汰)되지 않기 위하여 삶의 가치나 기준이 변동하는 사회조류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시비곡직(是非曲直)과는 상관관계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생사(生死)의 앞에서는, 사는 방법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도덕윤리와 양심과 진리라는 것들은, 그 모든 것이 생사(生死) 앞에서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나 영웅 그리고 성인들은, 옳은 것에 목숨을 걸어 삶을 마치므로 범인(凡人/大衆)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존숭(尊崇/존경하고 숭배함)이 오래도록 인류역사 속에서 이어져 오고 이어져 가게 되는 이치인 것이다.
천도교(天道敎)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울님의 이치를 찾아가는 방도(方道)를 가르쳐 주는 종교.
한울의 도(道學)를 찾아가는 방도(方道)를 가르쳐 주는 종교.
한울님을 모시는 방도/방법을(를) 가르쳐 주는 종교.
한울의 질서(숨겨진 질서/陰陽未分/無極大道)를 깨우쳐 주는 종교.
한울의 질서(生生之理)대로 살아가도록 깨우쳐 주는 종교.
한울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는 종교.
위에 대한 믿음의 마음가짐.
歎 道儒心急 /『天道敎經典』 개정 6판. PP.83-84.에서.
교도(교인 또는 도유)들의 마음이 조급함을 탄식함.(全文과 解說은 경전 참조)
山河大運 盡歸此道 其源極深 其理甚遠 固我心柱 乃知道味 一念在玆 萬事如意 消除濁氣 兒養淑氣 非徒心至 惟在正心 隱隱聰明 仙出自然 來頭百事 同歸一理 他人細過 勿論我心 我心小慧 以施於人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세상의 큰 운수가 다 이 도(무위이화하는 천도자연의 이치, 인간본성에로의 복귀, 새로운 세상의 시작/서양에서는 19세기 말을 ‘人間性喪失의 時代/非人間化’라 했다.)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 도의 바탕은 깊고 도의 이치(空間과 時間의 거리와 깊이)가 매우 깊고 먼 데 있다. 나의 마음의 줏대를(主體性) 굳건히 해야 도의 참맛(진정한 의미)을 알게 될 것이요, 한결같은 생각/마음이 이 도에 있으면 무위이화의 이치대로 모든 일이 뜻대로 될 것이다. 흐린 생명의 기운(욕심이 가득 찬 마음)을 깨끗이 씻고 어린아이와 같은 고운 마음씨(욕심이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를 길러라. 오직 마음을 닦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올곧게 갖는 데 있다. 그렇게 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총명함으로 자연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일은 한울의 이치와 함께 본원(本源/原始返本/本鄕回歸/陰陽未分이전으로 돌아감/無極大道)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잘못을 내 마음속에 새겨두고 시비하지 말고, 내 마음속의 작은 지혜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도록 하라. /절장보단(折/截/絶長補短,斷長補短)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이 글은 주간조선(2012년 9월 10日.字)에 게재된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에서 퍼온 글이다./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이전 생존 시에,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면서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해보기로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낸 글이다. 필자인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필자가 주간조선에서 김용규 글의 게재사유에 대한 글을 다시 정리하여 기술함.
종교의 역할은 본능에 따른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치중심적 삶’을 살도록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학 천도교의 교의에 따른 표현으로 한다면 各自爲心과 各知不移로 同歸一體라 할 수 있다.
“존 레넌의 노랫말처럼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1605년 영국 가톨릭교도가 계획한 제임스 1세 암살미수 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 ’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신은 당신이 거덜 날 때까지 기부하기를 원합니다.’)도 없다고 상상해 보라.”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상상해보라) 원문과 번역가사.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해보면 쉽지요.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요. 우리위에는 오직 하늘만이...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간다고..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도 없다고 상상해 봐요. 어렵지 않지요.
무엇을 위해 죽이거나 죽을 것이 없고, 종교도 물론 없고요.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생을 살아간다고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궁궁해요 당신이 할 수 있을까요? 욕심도, 배고품도 필요 없고, 형제같은 인류.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나누어가진다고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당신은 내가 몽상가라고 하겠죠.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세상은 하나로 살거예요.
요컨대 종교가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지겠느냐는 뜻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글은 옥스퍼드대학 석좌교수이자 세계적 과학대중서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의 서문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떤가? 이 글을 보면 종교만큼 나쁜 것도 세상에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글을 다시 살펴보면 그 안에는 위선적 기만과 폭력적 선동이 교묘히 숨어있다. 왜냐고? 그것은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이라는 문장에서 ‘종교’ 대신 다른 명사를 대입해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예컨대 ‘상상해 보라, 정부 없는 세상을’ 내지 ‘상상해 보라, 남자가 없는 세상을’ 또는 ‘상상해 보라, 이성이 없는 세상을’ 등과 같이 말이다. 정부가 없으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군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남자가 없으면 성차별도, 성폭행도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이성이 없었으면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로 상징되는 근대적 이성의 폭력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없다면, 남성이 없다면, 인간에게 이성이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지겠느냐는 식의 발언이 가능한가?
그래서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다. 이처럼 ‘상상해 보라, ---이 없는 세상을’ 이라는 어법은 그 자체가 기만적이고 선동적이기 쉽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사 대부분은 양면적이라서 어떤 것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가진 긍정적 기능들을 모두 무시한 채 간단히 없애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한번 상상해 보라, ‘과학’이 없는 세상을! 왜냐고?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 당시 최첨단 무기로 전쟁과 테러를 자행해 왔다. 그리고 그 첨단 무기들의 생산에는 항상 그 당시의 첨단 과학이 이용되었다. 그것이 돌도끼든, 칼이든, 총이든, 원자폭탄이든, 생화학무기든 불문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학을 없애버려야 할까? 또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도 함께 없어질까? 아마 아닐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도킨스의 발언은 필경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발상에서 나왔거나, 아니면 노회(老獪)한 정치가같이 교묘한 기만과 선동을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그가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학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후자가 옳을 것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라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도킨스의 발언을 우선 짚고 넘어가는 까닭은 오늘날 대중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기만적이고 선동적인 망상(이 용어는 도킨스가 종교에 대해 사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곧 종교가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지겠느냐는 그릇된 생각을 미리 떨쳐버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BC 106-43)는 그의 ‘신의 본성에 관하여’ 에서 종교를 뜻하는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가 ‘어떤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 ‘무엇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라는 의미를 가진 ‘렐레게레(releg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신들에게(또는 그들의 말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그로부터 약 350년 후 초기 기독교 신학자였던 락탄티우스(Lucius Caecilius Firmianus Lactantius/AC.240-20)는 ‘렐리기오’가 ‘결합하다’ ‘단단히 묶다’라는 뜻을 가진 ‘렐리가레(religare)’에서 나왔기 때문에 종교란 ‘신과 결합하는 것, 즉 신과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정의를 수용함으로써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의 의미로 굳어졌다.- 중략-
그런데 종교가 이끄는 ‘새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종교의 본질은 한마디로 ‘가치체험’과 ‘가치생활’이다. 따라서 종교가 이끄는 새로운 삶은 인간이 전보다 더 높은 단계의 가치를 체험하고 그럼으로써 전보다 더 가치 있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의 종류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럼에도 고급종교들이 지향하는 가치들은 진, 선, 미, 사랑, 자비, 인자함 등과 같이 인류 보편적 가치들인데, 이 가치들의 최고의 형태를 보통 ‘신성’ 또는 ‘성스러움’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종교란 ‘성스러운 가치를 체험하게 하고 그 가치에 의해 생활하게 하는 의례와 믿음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회장의 다음 질문이 종교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인데 이와 연관해 당신에게 소개하고 싶은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 사고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기인이자 20세기를 풍미한 천재 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1889-1951)를 소개한다. -중략-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 사유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가 ‘종교적 가르침’보다 ‘삶의 변화’를 종교의 본질이자 임무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드루리(M.O.C. Drury/비트겐슈타인의 친구로 대화상대자)는 이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변화가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무슨 소린지 조금 의아하다. 그런데 잠깐! 당신은 이 같은 말을 어디에서 한번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호에 소개했던 아우구스티누스(라틴어/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 430/敎父哲學의 대성자)의 교훈에서 이미 들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에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면서 자만이 모든 죄의 기원이라는 것과 자만을 버리고 신에게로 다시 돌아서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밝혔다. 멸망받을 죄인과 구원받을 의인의 차이가 그의 삶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의 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비트겐슈타인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종교의 임무는 삶의 방향 전환이다. 그런데 그 일은 교훈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도덕이 아닌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말을 훌륭한 가르침이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마치 의사의 처방처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고, 방향 전환이 되어야만 한다. 라고 했다. 그렇다! 종교가 하는 일은 결국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치를 좇아 사는 가치중심적 삶(기독교적 용어로는 ‘신중심적 삶’이라 한다)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이 끝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히 풀고 가고 싶은 의문이 하나 있다. 종교가 하는 일이 그리 바람직하다면,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거부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을까 하는 것이다. -중략-
첫댓글 天下尊貴莫大人
侍天主則人乃天
事人如天破天荒
無極大道闢後天
文字遊戲强作三綱領
老師一瞥可笑則幸甚
只為不熟漢同德
上作具備正格型
一點破格則如下
這個是拙作原形
天下尊貴莫大人
侍天主者乃天人
事人如天破荒天
無極大道闢後天
人과 民에 대한 어원적 斷想
人은 고금의 한문에서 계급을 초월하는 人類에 대한 범칭(泛稱)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春秋時代 이전에는 범칭 이외에도 民의 대칭(對稱)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때의 民이란 노예나 피통치자를 가리켰고, 人은 사회적으로 통치계급 또는 통치의 지위를 점하는 종족을 가리켰다. 人과 民을 상대적으로 거론할 때 그들 사이의 이러한 한계는 매우 분명하였다.
『論語 學而』 5장에서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쓰기를 절약하고서 백성人을 사랑(愛)하며, 백성民을 부림(使)에 때(농한기)로써 한다.)”에서 人에 대해서는 사랑(愛)를, 民에 대해서는 부림(使)을 사용하였다. 또 『論語 子路』 29장에서는 “善人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착한 사람人이 7년 동안 백성民을 가르치면 또한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 있다.”에서도 ‘人’은 敎化者이고, ‘民’은 敎化의 對象으로 한계가 정연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民의 고문자 형태를 보면 한쪽 눈(目)을 찔러(民) 애꾸눈으로 만들어 부리기 쉬운 노예나 피지배 민족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人과 民의 한계가 사라진 것은 노예제의 와해와 서로 맞물려 있다. 노예제가 파괴됨에 따라 허다한 노예주,
즉 “國人”들의 신분이 하강하여 “庶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人과 民을 사용할 때는 이러한 典故로 인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분하여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人과 民이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적인 어원에서 탄생한 말이 노예제의 와해 후 중세봉건과 근세시민사회를 거치면서 어쩌면 정반합의 변증법에 의해 人民이란 단어로 適者生存하였지만, 그 人民이란 단어도 북조선에서는 정권을 유지하는 강력한 呪文구호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개인의 안전을 위협받는 위험한 사상적 단어로 낙인찍혀 民衆神學과 마찬가지로 생명 부지도 힘든 상태에 있다. 그리고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民草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 것 같다.
民草는 국어 사전적으로는 “‘백성’을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이 民衆을 民草와 대비해보면 民衆은 수효에 중점을 둔 양적 개념이고, 民草는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민중에 대한 질적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人民大衆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는 民衆이란, 우리말로는 ‘백성의 무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면 人民大衆은 人과 民의 합성어인 人民이라는 양화된 질적 개념에 양적 개념인 大衆을 부가하여 그 의미를 확장하고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論語 顏淵』 19장에는 民草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季康子ㅣ 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하야 以就有道댄 何如하니잇고 孔子ㅣ 對曰 子ㅣ 爲政에 焉用殺이리오 子ㅣ 欲善이면 而民이 善矣리니(리라)
君子之德은 風이오 小人之德은 草ㅣ라(ㅣ니) 草上之風이면 必偃하나니라(이니라)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만일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서, 백성들을 도(道)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대는 정치를 하면서 어찌 사람을 죽이는 일로써 합니까? 그대가 선(善)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善)해질 것이니, 군자(君子)의 덕(德)은 바람이고, 소인(小人)의 덕(德)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집니다.”
필자는 民草의 어원이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물론 여기서의 군자와 소인은 모두 人이라고 할 수 있지만, 國人이 庶民으로 변화한 과정을 이해한다면, 여기서의 小人은 후대에 생겨난 그리고 요즘시대의 民草라고 해석해도 될 듯하다. 군자와 소인, 즉 민초는 바람과 풀로 상징되었기에, 이것은 계급인 人民과는 또 다른 質的인 개념 구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民衆이란 피지배 계급이요, 지배 계급에 의해 통치를 받으면서 施惠를 바라고, 시혜를 받는 계층을 지칭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勞動의 질곡(桎梏)에서 해방(解放)을 바랐던 서구(西歐) 산업혁명 시기의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트가 한자권의 民衆이요, 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말기 民亂의 시대에 기존의 天理와 天命을 뒤엎고 革命을 추구했던 東學徒들도 民衆이었으니, 민중의 반란이 民亂이요, 東學의 後天開闢, 다시개벽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논어의 공자와 맹자를 거쳐 士大夫가 중심인 조선시대에도 人이 중심이었지만, 水雲大神師는 人이 아닌 民도 모두 다 堯舜이 될 수 있는 侍天主의 新人間, 후천개벽시대를 연 것이리라.
# 얼마전 대화방에 올렸던 글을 약간 수정했는데, 발표문 형식의 문체를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