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고남산구간) 2010년 10월 16~17일, 무박
구간 ; 고기리(60번 군도)-수정봉(804.7m)-여원재(24국도,470m)-고남산(846,4m)-매요리(남원시 운봉읍,470m)
여원재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雲城大將軍 돌 장승이다.
가만 보니 전직 대통령을 좀 닮은것 같기도 한데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는지......많이 어려우실텐데.......
남원-함양을 연결하는 24번 국도이며 해발 470m의 고개같아 보이지 않는 고개이다.
고기리에서 이곳까지 약 세시간 거리다.
여원재란 이름의 유래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을 지날때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견하여 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는 하나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事實無根) 얘기고
1894년 (고종 31년)동학농민운동 초기 전봉준의 수하 김개남이 1300여 군사를 이끌고 남원을 점거한 후 영남으로 세를 확장하려고 운봉으로 진입하던중 관군을 피해 도망을 하다 12월 3일 태인에서 생포 전주감영에서 효수(梟首) 당했다고 한다.
장등재를 지나면서 직진해야 할 대간길이 사유지로 인해 우회하게 하는 곳이다.
마을길을 따르다 고개에서 대간길에 합류하며 바라본 조금 늦은 일출이다.
이번 구간은 야산지대도 많고 마을도 자주 지나는 구간이나
특히 우리의 토종 신토불이 소나무가 많아 상큼한 솔향과 함께 깨끗하고 맑은 피톤치드에 흠뻑 젖어보기도 한다.
눈이나 결빙기엔 많이도 쩔쩔매던 그런 곳이었는데 오늘은 쉽게 오른것 같다.
고남산 직전 이런 계단도 있어 좋은 전망과 함께 한숨 쉴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사진찍기도 좋은 곳이었다.
날씨가 좀 맑았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조금 흐리긴 해도 .......
지도상 관암재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바위가 탑 모양으로 볼거리가 부족한 이 구간에서는 제일 나은 그림인것 같다.
고남산(846.5m) 정상에 있는 국방부 대삼각점.
북쪽이란 글과 日平生이란글이 좀 웃긴다.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중계소.
아래에 있던 감시초소는 정상으로 올라가고 정작 정상에 있어야 할 정상석은 아래에 있다.
중계소에서 물도 얻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부 무인시스템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저렇게 잘 자라고 큰 소사목은 쉽게 보기 힘든 고목이다.
세멘길을 따르다 이곳에서 왼쪽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차곡차곡 세워 놓은듯한 소나무들이다.
제때에 숲관리를 해주어야 할 곳이다.
유치재 직전 길가에 있는 삼각점(573.2m), 자칫 하다간 확인도 못할뻔 했다.
옛날엔 서로 넘어 다니기도 했던 모양이나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는 곳이다.
이젠 매요마을도 다 온셈이다.
넘어 다니는 농로겸 마을길이다.
새로지은 매요 마을회관,
마당이 넓어 대형차도 주차할수 있고 정자와 보건소건물도 있어 다목적으로 이용하기 편리하였다.
회관 옆에는 지하수를 이용 씻을수 있게 편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신순남 할머니가 운영하는 매요 구판장.
아직도 건강하시어 반갑게 맞아주시는 할머니가 고마웠다.
우리 부부는 이집에서 두번이나 민박을 했기에 낯이 익은편이다.
집앞 나무엔 이렇게 지나간 대간쟁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나도 이번 7차종주 리번을 걸어두었다.
(산행후기)
가을은 석류의 계절이라 했다.
빨간 낱알이 터질 것만 같은 소복함에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계절이다.
오늘도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고기리에 4시 30분 도착을 했다.
도착하기 전 차안에서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친 나는 내리자마자 고촌마을을 향해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도로를 걷는다는 것은 어쩜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구간종주를 하며 이어가는 우리에겐 당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운천초등학교 삼거리까지는 차를 이용하려 했으나 내가 그렇게 하면 모두 따라 할 것만 같아 얄팍한 요령은 안 부리기로 했다.
줄을 지어 따라오는 랜턴불빛이 참으로 아름답다,
뒤 돌아보며 찍어 보기도 했지만 어둠속 사진은 하나도 건질 수 없어 모두 삭제를 했다.
마을로 들어선 우리는 노치샘에서 사진도 찍고 어떤 이는 물맛을 보려고 바가지로 물을 떠 보기도 한다.
우물 옆 감나무엔 감이 발갛게 익어 주렁주렁 달려있다.
곧 이어 堂山祭典이다,
커다란 소나무 노거수가 엄숙하게 지키고 있는 곳이다.
부락의 수호신이라고 믿는 이곳에 산신제를 지내려고 마련한 자리라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는(海松)어둠속이지만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아 거북등 같은 소나무를 한번 안아 보고는 솔숲으로 빨려 들어간다.
우리 부부는 맨 뒤에 섰다.
휩싸여 빨리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조단군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나라를 연 것이 삼천리금수강산 우리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어쩌다 南과 北으로 갈라져 흥부와 놀부처럼 살고는 있지만 얼마가지 않아 한 몸 한 덩어리가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우리 대간쟁이 들도 그 기대에 힘을 보태기위해 이 새벽부터 백두대간종주를 하는 것이라 자부 하지만 왜 한민족이면서 남과 북은 물과 기름같이 쉽게 섞이지 않는지 안타까운 생각만 들어갈 뿐이다.
계백장군이 백제군과 신라군이 이 공안리 일대 황산벌에서 격전을 벌였다고는 하나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볼 수도 느껴지지도 않는 조용한 시골풍경이고 희미한 불빛만 아롱거리는 새벽하늘엔 별빛만이 반짝이는 순간이다.
지도상 이 위치는 운봉을 둘러싼 수정봉과 고남산, 통안재, 유치재를 돌아 인월로 다시 나가게 되어있는 지리형태이다.
몇 차례 이곳을 지나기는 했지만 항시 낯설기만 하고 랜턴에 비춰지는 산길이 묘한 흥분을 일으키며 담력과 도전의식으로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수정봉으로 오른다.
감정적 경험과 의도적인 행위로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새벽을 맞는 여명의 기쁨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감정을 느끼지도 표현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형용할 수없는 경이로운 체험으로 희망과 기대에 찬 한 걸음 한걸음은 백두대간 무박종주가 아니면 겪어볼 수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경험일 것이다.
백두대간은 누구나 다 종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힘으로 하는 대간종주보다는 몸과 마음으로 하는 백두대간종주가 참되고 진실 된 종주라고 말 하고 싶다.
그 보람은 어려운 환경과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행복으로 열리게 될 것이니 말이다.
모든 대원이 수정봉에서 휴식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쉬지 않고 조용히 입망치(545m)를 향해 내려갔다.
무릎이 좋지 않기에 내려갈 때는 상당히 힘이 들고 고통스럽기도 해서 천천히 달래며 가야 하기에 먼저 이동을 하는 것이다.
다래넝쿨에 걸려있는 4차 종주 때의 시그널을 보니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옮겨 붙이고 나의 7차 시그널도 같이 걸어놓았다.
곧 이어 여원재다.
고기리에서 출발한지 약 3시간 만이다.
돌장승(운성대장군)과 동학군(농민혁명)이 지난 곳이란 안내석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친다.
소나무 숲에서는 아침식사를 하겠다며 자리를 잡았지만 우리부부는 그대로 직진 통과를 했다,
7시 20분이면 조금 이른 생각이 들어 합민성(641.1m)을 지나 먹으려는데 하하님도 따라 나선다.
장등재 묘지에서 내려서니 밭을 가로질러 가야하는 대간 길은 막아놓고 오른쪽으로 돌아 가겠금 유도하고 있어 우리도 그 길을 따랐다,
원칙으론 그 밭을 가로질러가야만 하는데 이해하자는 차원에서 마을길을 따라 고개에서 대간에 어프로치 했다.
알뜰살뜰 가꾸던 고추밭들이 많이도 묵어 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경지면적은 자꾸만 줄어드니 이것도 큰일이고 시골엔 노령 인구만 남아 있으니 그것도 이해는 되지만 배추 값이나 채소 값이 오르는 것도 충분히 감안해야할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드디어 고남산(846,5m)에 도착 했다. 9시 40분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래에 있던 감시탑이 정상에 있다는 것 말고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감시원이 산불조심이라고 바위에다 글을 새겨놓은 것을 보고는 내려섰다.
아래에 있는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는 모두 내려간 후 우리 부부도 천천히 내려간다.
통안재 못가 소사목 노거수 다섯 그루가 있는 곳에서 왼쪽 숲길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매요까지가 언제든지 대간꾼의 心身을어지럽게 하는 곳이다.
다 온 것 같으면서도 작은 언덕들이 자꾸 나타 나 힘을 있는 대로 앗아가는 곳이니 말이다.
유치재(573,2m)가 가까워지자 길가 삼각점(운봉 403 1981 재설)을 보고는 앞에 있는 노간주나무 가지에 시그널 하나 걸어놓고 유치재로 내려섰다.
중간 벌목지에선 길을 막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 많은 짜증을 내기도 했다.
백두대간 길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일부러 심술을 부린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매요 회관이다,
11시 25분 약 7시간 걸렸다.
회관 수도에서 대충 씻고는 구판장 신순남 할머니를 찾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할머니가 고마웠다.
과일을 내 오며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를 할머니가 소개를 한다,
이 양반부부는 해마다 백두대간을 한다며 말이다.
약간 으쓱해지는 기분이며 말들을 걸어온다.
그러자 자기도 고향이 남해 설천 옥동 마을 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젊은 아주머니도 만났다.
12시가 다 되어 가니 마지막 후미도 다 도착했다.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배낭털이를 하고는 1시 출발 귀경길에 올랐다,
이번 구간에서도 많은 회원의 성원 아래 즐겁게 종주를 마쳤다.
다음 봉화산 구간을 기대하며 산행 후기로 마감한다.
아름다운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