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숙명전환의 선물'
조성윤, 김미정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과 ‘숙명전환의 선물’,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조성윤'박사가 쓴 ‘창가학회와 일본인’은 연구서(硏究書)였고, 좀 전 책장 덮은 김미정님의 ‘숙명전환의 선물’은 일종의 대담집(對談集)이었다. 학자의 연구서와 문학적 대담집. 두 권의 책은 당연히 다르게 읽혔다. ‘종교사회학’을 주(主)연구분야로 천착(穿鑿)하는 사회학자 조성윤교수가 많은 책(주로 연구서)을 출판하였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의 아내 김미정님은 저작물을 세상에 내 놓는 것이 처음인 전업주부이다. (前에 敎職에 있었다)
학자의 연구에는 귀납(歸納)과 연역(演繹)으로 자신의 가설을 도출하거나 입증하기 위한 많은 자료가 필요하였을 터. 조교수의 아내 김미정님은 대단한 독서가이고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책부족의 추장이기도)인지라 그런 아내를 자신의 연구조수로 활용하였다. 이들 부부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많은 ‘창가학회 회원’인 ‘재일 한국인’을 함께 면담하여 자료를 축적하였다. 동경, 오사카, 고베등을 다니면서 40여명을 심층 취재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확보한 녹음기록은 방대한 분량(한번에 서너시간씩 잡더라도)이었고, 그 녹취록의 작업은 온전히 아내 김미정에게 맡겨졌다.
재일한국인, 그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익숙한 일본어나 또는 서툰 한국어로 주저리 주저리 한맺힌 사연들을 쏟아냈다. 그들 삶의 역정에는 마디마디 눈물겨운 신산(辛酸)한 삶의 리얼리즘이 점철(點綴)되어 있었다. 그 많은 사연들 속에 학자가 필요로 하는 엑기스만 담겨 있었겠는가. <조교수도 책에서 썼거니와 그들의 사설(辭說)은 학자의 질문보다 ‘깊고 무거웠다’> 사회과학자의 명징한 분석적 틀 속에 가두기에는 그 삶의 표정이란 너무도 다양하였을 것이다. 깊게 내쉬는 한숨소리, 미묘한 어투에 스며있는 섬세한 감정의 결, 때로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그와 더불어 토해내는 가지가지 사연들... 그 리얼리즘을 무슨 수로 수치와 분류와 유형화의 통계 속에 담아 낼수 있으랴. 학자의 규격적 틀로부터 버림받은 것들은 온전히 김미정님의 몫이었다. 김미정님은 그것을 감동으로 수용하였고, 그리하여 또 한권의 책이 되었던 것이다. 조성윤교수의 연구서와 더불어 또 하나의 책이 출판되게 된 소이(所以)가 이러하다.
김미정의 후기. <재일한국인의 얘기를 세상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꿈을 꾸는 일은 행복의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꿈꾸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절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그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이었고 운명에 도전하였던 사람이었다는 것...> <그들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운명과 식민지의 국민이었기에 불리했던 인생을 변화시킬수 있었던 것은 자기 마음을 바꾸면서 사회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꿈을 꾸고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힘을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것을 인간혁명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성윤 교수님과 김미정님. 연구와 취재를 통하여 두 분이 쓴 일본종교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라는 주제의 얘기들. 두 분의 창가학회에 대한 호의(好意)는 매우 여실(如?)하였고 또한 매우 진지(眞摯)하였다. 허지만 조교수의 책은 사회과학자의 학문적 연구서이고, 김미정님의 책 또한 순전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어프로치한 책은 아니다. 부언(附言)하면 두 분의 종교는 창가학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 알거니와 조교수는 기독교인(종교학자의 리버럴함으로)이고 김미정님은 가톨릭이다.
나는 스스로, 비교적 일본이라는 나라에 익숙하고 일본문화에 친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책에서 일본의 종교와 재일한국인에 관한 새로운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일본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하였다. 두 책을 읽은 나의 생각들을 쓰려한다. (문장의 허술함이나 논조의 엉성한 비약은 오로지 내 것이다)
재일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본에서는 자이니치(在日), 조센징(朝鮮人-비하적 호칭)으로 불리는 그들을 우리는 흔히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호칭한다.
그들 1세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치하의 기간 수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살이의 시간들이 그 기간이라고 박제된 시간이었겠는가. 지사(志士)의 삶을 살았던 분들의 일생은 모르겠으되, 이 땅의 서민들 삶의 세월은 그대로 목숨살이의 시간들이었다. 그들이 살아 낸 내선일체(內鮮一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황국신민(皇國臣民). 그 ‘삶의 자리’를 폄훼해서는 안된다.
자의 타의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정착한 반도인(半島人)들은 대부분 돈도 빽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육체 품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였고, 노무자이거나 영세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일본인의 모순적 이중성.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뛰어나며 유순한 듯 하면서도 화가 나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며 성실하면서도 성실하지 않으며 용감하면서도 겁이 많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베네딕트 ‘국화와 칼’>
1945년 종전(終戰)이 되었다. 어제까지 ‘덴노헤이카반자이’, 옥쇄(玉碎)를 부르짖던 일본은 표변하였다.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는 자취없이 사라져 버리고 홀연 민주주의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히로히토는 온전하게 그대로 천황(天皇)이었다. 민주주의도 아미테라스의 자손들의 순혈주의를 훼하지 못하여, 혈연이데올로기의 단일민족국가론의 보수적 논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 우리나라의 쇼비니즘도 그닥 다르지 아니하다)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어디로 갔는가.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을 한반도로 몰아내기 위한 정책으로 일본국적을 빼앗아 버렸다.
지금도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않고서 일본인이 된다는 게(歸化) 가장 어려운 나라가 일본이라고 한다. <일본은 속지주의(屬地主義-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아이가 출생한 지역에 따라 국적을 정하는 주의)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쨌거나 60여만명의 조선인은 일본에 잔류하였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이나 공무원 교사등은 꿈도 꿀수 없었고, 여전히 일본사회의 하층민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갈수 밖에 없었다. (그들 1세대는 현재 10%도 생존해 있지 않다고 한다.) 1세대의 자손들과 밀항(密航)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 온 사람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밀항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일본으로 온 뉴 커머(New Comer).
그들 2세대와 3세대는 다르다. 극심한 차별은 그들에게는 피상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집을 빌릴때라던가 취직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지만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한반도가 고향(故鄕)이라는 감정도 그닥 있지 아니하고 민족적 자의식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피팍한 삶을 살아야 했던 1세대. 그들에게 조국(祖國)은 없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재외동포나 재외동포의 자녀 교육을 위한 지원과 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럴 겨를도 ㅇ벗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쪽에는 총련(朝總聯)이 있었다. (당시 북한의 지엔피는 남한보다 월등히 높았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총련(總聯)은 재일한국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곳곳에 조선학교(민족학교라고 하였다)을 설립하였고 한글과 한국문화를 보금할뿐더러 금융기관까지 설립하여 경제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총련에 속한 재일한국인들의 결속력과 민족적 자긍심은 드높았다. 여러 일본영화에 등장하는 총련에 속한 조선인들을 보라.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인학교 여학생들..일본인에게 조금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 조국 조선인민공화국을 향한 불타는 애국심.. 소명감..>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감은 결코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였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그들이 일본종교따위에 눈길 돌릴 이유는 호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작금에 이르러 총련은 형편없이 쇠(衰)하여 졌다.>
그러나 당시에 총련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민단(民團)은 버림받은 자식 취급이었다. 총련에 속하지 않은 그들은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 외로웁고 서럽지만 어디 기댈 곳이 없었다. 어쩌다 한국에 들어와도 반쪽발이라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었다.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그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이런 차별과 소외와 외로움이 오히려 민족정체성을 지키게 한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제사..명절..일본인에 비하여 친척들 간의 강한 유대.. 요리도 한접시 그득 담아 함께 먹는 문화..) 호적에 기재된 한국식 이름은 제쳐두고 보통은 통명(通名)인 일본식이름으로 불리던 그들. 디아스포라의 삶. <그들은 자식들에게 집착하여 언제나 실력을 키울 것을 강요하였다.>
작금에 이르러 재일한국인은 세가지 분류로 나뉘어 진다. 첫째, 한국국적을 지닌 사람. 둘째, 귀화해서 일본국적을 취득한 사람. (귀화 절차나 과정은 무척 힘들다. 보통 1-2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셋째, 이른바 조선적(朝鮮籍)을 갖고 있는 무국적자 (국적란에 조선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놓아두고 있지만, 총련에 소속되어 있어 북한국적을 취득하고 싶지만 국교가 없어 조선적을 북한국적으로 바꾸지 못한 사람)와 총련에서 탈퇴하였으나 한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
조교수의 '재일한국인 연구'와 '일본신종교 연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창가학회 얘기를 좀 하자.
나 사는 곳 부산시(釜山市) 영도구(影島區)는 인구 15만여명이 사는 자그마한 섬이지만 팡테옹(만신전)의 고장이다.(목사님의 비유적 설교에 의하면) 해발 300메터도 안되는 봉래산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이 들어서 있고, 많은 교회와 성당. 그리고 특히 일본종교가 가장 성한 곳이 영도가 아닌가 한다. 천리교의 우람하게 지어진 성전(大韓天理敎元南星敎會)이 30년도 넘게 버티고 있으며, 몇년 전 부터는 창가학회(創價學會)의 웅장한 석조건물이 <한국 SGI 영도희망문화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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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 우 원문보기 글쓴이: 동우
첫댓글 저의 블로그 친구 동우님께서 저희들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올려 주셨기에 이곳에다가 옮겨 왔습니다.저희 부부 책 자랑질이 되겠지만 독후감 글이 더 좋고 고마워서 여러분에게도 읽어주십사 보여드립니다.
사실 일본 창가학회는 한국사람들에게 아주 안좋게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하는 일이 바빠라서 아직 다 읽지 못햇지만....) 그러한 인식을 단숨에 불식시킨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담집 '숙명전환의 선물'은 재일동포들의 그동안 살아왔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