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과목이 있다. 교재를 개편하면서 방송대 TV 방송용 촬영도 다시하게 됐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2일부터 5일까지 ‘학살과 항쟁의 섬’ 제주도로 4.3항쟁 촬영을 갔다. 한창 성수기라 비행기표 구하기가 어렵다고 2일 오후에 가서 5일 오전에 왔다. 3박 4일이라지만 이틀은 가고 오는데 보냈고, 이틀 동안 관덕정, 4.3평화공원, 다랑쉬오름, 다랑쉬굴, 동광큰넓궤, 섯알오름, 백조일손지묘, 함덕해수욕장, 북촌 너븐숭이 역사현장을 찍었다.
바닷물에 발 한번 담글 시간 없이 보낸 빡빡한 일정이었다. 밤에는 촬영에 필요한 대본을 정리해야 했다. 이틀 동안 돌아본 현장 가운데 촬영에 참여한 아홉 명 일행 모두가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동광큰넓궤를 꼽았다.
1992년 여름 부산 동아대 사학과 학생들과 처음 제주 4.3역사기행을 했다. 제주도에 가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때는 동광큰넓궤 부근까지 갔다가 숲이 우거져서 굴을 못 찾고 돌아섰다. 1996년 8월 다시 동아대 학생들과 제주 역사기행을 했을 때 처음으로 동광큰넓궤에 들어갔다.

지금은 목장 안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나 있다. 앞쪽으로 똧내린 오름이 보인다.
동광큰넓궤 가는 길은 잔디밭 같은 왼쪽으로 희미하게 나 있다.
목장안으로 희미하게 난 길을 따라 가시덤불을 헤치고 돌담을 넘어 오른 쪽으로 도너리오름(돗내린 오름)이 가까이 보이는 굴 앞에 도착했다. 굴 입구가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엉금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10여미터쯤 들어가자 2-3미터 쯤 되는 절벽이 나왔다. 처음이라 발 디딜 곳도 찾기 힘들었다. 턱걸이하듯 바둥거리며 가까스로 내려갔다.

큰 방만한 공간 안 쪽으로 돌을 쌓아 턱을 만든 방호벽이 있었다.

그 안쪽 옆으로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흐트러져 있다.


굴이 급하게 좁아졌다.

오리걸음으로 걷다가 땅바닥에 배가 닿을 정도로 엎드려야 했다.

후래쉬도 준비하지 못한 채 라이타를 켰다껐다 하면서 앞장섰다. 다행히 군데군데 불을 켰던 초 동가리가 남아 있어 불을 붙였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낮은 포복으로 길 수도 없었다. 머리 위 바위는 용암이 흘러내려 뾰족뾰족했다.

조금만 일어서도 머리와 등이 긁혔다. 팔굽혀 펴기 자세로 엎드려 양팔로 몸을 끌어당기면서 나가야 했다. 뒤쪽에서는 학생들이 내뱉는 “끙끙” “휴” “아야”하는 신음과 비명이 이어졌다.
얼마큼 들어가야 허리를 펼 수 있을까, 이렇게 들어갔다 몸을 돌려나올 수는 있을까. 좁은 굴과 어둠이 무서워 진땀이 배어나왔다. 내색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 “머리 더 숙여요” “바짝 엎드려요, 더 바짝”하고 소리를 치며 나갔다.
얼마나 라이타를 켜댔던지 손가락이 노랗게 탔다. 심지가 없는 초 동강에 등산 손수건을 찢어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짝 몸을 낮춰야 하는 거리가 20여 미터도 채 안되는데, 처음에는 이삼백 미터도 더 되는 느낌이었다. 쪼그리고 앉을 만큼 굴이 넓어지니까 살 것 같았다.

굴 끝자락에 ‘광장’ 같은 넓은 공간이 있고, 굴에서 다시 굴이 뻗어나간 가지 굴도 있다. 다 올 때까지 기다려 모여 섰다.
모든 불을 껐다. 칠흙 같은 어둠이었다.

구름 짙은 그믐밤에도 시간이 지나면 주위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나는데 제주도 동광큰넓궤 자연 동굴 안에서는 무슨 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힘든 어둠만 계속되었다. 터럭만한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옆 사람 숨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도 어둠이 흡수해 버리는 듯했다.
옆 사람들 손을 잡았다. 어둠이 가로 막았던 고립감이 사라지며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렀다. 보이지 않아도 안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노래 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였다.
1948년 4.3항쟁 때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을 피해서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이 50-60여일 동안 이런 어둠속에서 숨어 지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더 부르고 돌아 나왔다. 동강이에 붙였던 촛불이 다 타버렸어도 나올 때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길 끝에 환한 낮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들어갈 때 보다는 좀 수월했다. 굴 밖 환한 세상으로 나왔다.


1997년 1월에는 역사와 산에서 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어른 36명, 아이들 7명 모두 43명이 참가하여 2박 3일 동안 제주 4.3역사기행을 하고 한라산에 올라갔다. 1998년 제주 4 3항쟁 50주년의 의의를 되새기고 널리 홍보하자는 뜻으로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제주4.3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에 '제주 4 3항쟁 50주년 기념 역사기행' 공동주최를 공식 제안하여 이루어진 역사기행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들렸던 곳도 동광큰넓궤였다. 사람들이 나중에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자마자 좁고 캄캄한 굴속으로 몰아넣었다”고 표현했다. 그렇게 시작부터 제주 4.3을 실감나게 체험했기 때문에 빡빡한 일정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기행으로 동공큰넓궤를 찾는 사람들은 어둠을 한번 체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한지 동광큰넓궤에 들어갔다 나오면 세상과 역사가 달리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동광리 사람들은 캄캄한 어둠을 찾아 들어가 어둠 같은 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으나 어둠 속에서 나와 살려고 간 길이 죽음의 길이었다.
1948년 12월 중순쯤 토벌대가 동광큰넓궤를 발견했다. 숨어 있던 주민들이 고춧가루와 이부자리를 태우면서 푸는체(키)로 부쳤다. 토벌대는 굴입구를 큰 돌덩이로 막고 철수했다. 가까이에 숨어 있던 마을 청년들이 돌덩이를 치웠다. 더 이상 굴에 머물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다시 살길을 찾아 15키로 쯤 떨어진 한라산 자락 영실 근처 볼래오름으로 숨었다. 토벌대가 추격해왔다. 끌려간 주민들은 그해 12월 정방폭포 위쪽에서 학살당했다.
1948년, 1949년 ‘탄압이면 항쟁이다’고 외치면서 1948년 5.10 총선을 반대하여 ‘단성단정’을 요구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을 바랐던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앞장섰던 사람들, 억울한 죽음을 피해 살려고 숨었던 사람들, 제주도 27만여명 주민들 가운데 9분의 1이나 되는 3만여 명이 그렇게 죽어갔다. 중산간마을 95% 이상에 불에 타 사라졌다.
학살의 지령자들과 토벌대 들은 유격대와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이름 붙여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냥의 대상과 같았다. 실제 빵갱이 사냥(레드 헌트)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사람이었다면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어떤 살아 있는 생명체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국정 ‘국사’ 교과서는 ‘제주 4.3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5.10 총선을 교란시키려고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서술해왔다. 그러한 ‘공식’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고 끈질기게 4.3의 진실을 밝히려 애를 썼다. 1999년 12월 26일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의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고, ‘국가폭력’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의 기념과 행사가 오히려 망각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닐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렀던 사람들이 지금도 그 가사를 그대로 기억하며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 살 뚫고 피어난 비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 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첫댓글 출처 :송찬섭의 우리역사찾기
글쓴이 : 박준성
오늘 다음 영화에서 "지슬- 끊나지 않은 세월"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화 역사의 현장을 찾아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