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해우(海隅)의 백합국어사랑방(신문사설&칼럼) 원문보기 글쓴이: 해우(海隅)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칼럼
* 일러두기 : 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편집한 것이며 상업적 목적은 일절 없습니다.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본인의 성향과는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
[한국일보 사설-20101023토] 아이들을 괴물로 기르는 가정과 사회
참으로 경악할 만한 사건이다. 이제 열세 살 된 중학교 2년생이 집에 불을 질러 부모와 동생 등 일가족 4명을 살해했다. 범행동기는 "공부하라"며 자주 학대하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었다. 경찰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골프채에 배를 찔리는 등 모욕적 대우를 받고 오랫동안 억눌려온 분노가 폭발,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버지만 없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던 아이는 엄청난 죄의식으로 인해 아마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극단적인 존속범죄가 무섭게 늘어나는 상황이다. 올 들어 9월까지만 해도 이미 예년 연간 범죄건수를 상회하는 50건 가까운 존속살해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 대부분이 10대 청소년들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의 가정은 유복한 중산층이었다. 겉으론 별 문제가 없어 보여도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돼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건을 예외적인 일탈성 범죄로만 보아서는 안될 이유다.
가장 큰 원인은 교육의 부재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본적 도덕률조차 배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오로지 사회적 성취를 위한 학과공부만 강요했을 뿐 아이의 정서적 도덕적 심성을 키우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다. 우리의 학교들도 이런 문제에 성의 있게 상담해줄 능력이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소통 없는 가정, 출구 없는 교육시스템이 책임의식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정서미숙 상태의 청소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사회는 급격한 외형적 성장을 겪으면서 기성세대와 자라나는 청소년 사이의 인식차가 유례없이 벌어져 있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들이 도처에 넘쳐난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에 관한 한 즉각적으로 유효한 처방이란 없다. 부모와 자녀세대 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공동참여 교육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학교와 지역사회에 청소년의 정신적 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나마 방법일 것이다. 결국 모두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남의 일 보듯 개탄만 하기에는 우리 사회, 우리 아이들이 너무 위험하다.
[한겨레신문 사설-20101023토] ‘야간집회 금지’ 시도, 명분도 근거도 없다
한나라당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개정하려는 뜻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어제는 개정안을 날치기로 상정하려다 야당 쪽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야당과 시민사회, 학계 등이 반대하는데도 막무가내다. 왜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개정 이유는 하나같이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야간 옥외집회가 불법 폭력시위로 번질 위험이 크다는 주장부터가 그렇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집시법 제10조(야간 옥외집회 금지) 규정이 효력을 상실한 지난 6월30일 이후 수백 건의 야간집회가 열렸지만 사회적 혼란이나 폭력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경찰 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다. 야간집회에 투입된 경찰 수도 일반 집회 때의 15%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평온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전체 집회·시위 가운데서도 폭력이나 불법으로 번진 비율은 다른 선진국에 견줘 많이 낮은 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집회문화가 폭력적이어서 야간집회 등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의도적 왜곡일 뿐이다.
야간집회로 사생활의 평온이 위협받는다는 주장도 머리와 꼬리를 뒤집었다. 7·8월에 열린 야간집회는 평균적으로 밤 10시 이전에 끝났고, 집회 장소도 주택가가 아니라 도심지였다. 수면권 등이 침해받을 상황은 아니다. 이를 핑계삼아 야간집회를 일률적으로 막으면 퇴근 뒤 늦은 시간에나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직장인 등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헌법상 권리에 대한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야간집회가 전면 허용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는데도 굳이 야간집회 금지 규정을 두려는 것은 기본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다. 위헌의 혐의를 피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야간이라고 해서 주간과 달리 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고 이미 판단했다. 그런 터에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로 된 옛 금지규정을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로 바꾼다고 해서 위헌성이 사라지진 않는다.
설령 야간집회에서 불법이 벌어지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촘촘한 집시법의 다른 규제조항으로 충분히 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야간집회 금지 규정을 두려는 데는 이명박 정권의 ‘촛불 알레르기’ 말고 다른 이유나 명분은 찾기 어렵다. ‘집시법 개악’은 며칠간 유보할 게 아니라 당장 멈춰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20101023토] “부모의 종교적 신념보다 자녀의 생명권이 중요하다"
서울동부지방법원 민사21부는 "부모가 자신들이 믿는 종교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녀의 수혈(輸血)을 거부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생명권은 헌법에 보장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로서 다른 기본권보다 우선돼야 한다"며 "부모는 자신들의 신앙에 반(反)하는 행위를 강요받지 않을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른 친권(親權) 행사가 자녀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친권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판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한 부부가 태어난 지 40일쯤 된 딸이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수술을 받게 됐으나 종교 교리를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병원은 수혈을 하고 수술을 하면 아이의 생명 유지 가능성이 30~50%이지만 수혈을 하지 않고 수술하면 5% 미만이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의 생존 가능 기간은 3~6개월 정도로 급박한 상황임을 부모에게 설명했다. 병원측은 부모가 끝내 수혈을 거부하자 법원에 강제 수혈을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걸 받아 법원은 이렇게 판결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 기본권 중 하나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누구든 믿고 싶은 종교를 믿고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생명의 권리와 충돌할 때는 어느 쪽을 더 우선해야 할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번 판결은 부모의 신앙의 자유와 판단 능력이 없는 자녀의 생명권이 부딪치는 경우엔 생명권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캐나다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14세 소녀가 장(臟) 출혈 치료를 위해 수혈을 받아야 했으나 이 소녀와 부모가 거부하자 병원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강제 수혈을 한 일이 있었다. 캐나다 대법원은 지난해 소녀의 부모가 "법원과 병원이 딸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낸 소송에서 "인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까지 종교의 자유를 우선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번 판결은 그 평범한 이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다.
[서울신문 사설-20101023토] 서울대 버핏 놓친 하버드대 교훈 삼아야
미국 최고 MBA로 꼽히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이 가장 통탄하는 일중의 하나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입학을 거부한 일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주식·투자에 관심을 가졌던 그를 낙방시킨 이는 다름 아닌 하버드대 출신 젊은 면접관이었다. 다른 응시생보다 2살이나 어린 그를 10분간 면접한 입학사정관은 그에게 몇년 뒤에 응시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리지 않고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입학 응시 기간도 지났고, 면접도 보지 않았지만 그는 합격했다.
그가 작성한 독창적인 자기 소개서를 본 경영대학원 부학장이자 재무학과 학과장이던 데이비드 도드가 그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버드대의 젊은 입학사정관 눈에는 버핏이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월 스트리트의 기존 관념을 무너뜨린 책을 펴낸 최고 전문가에다 인생의 깊이까지 더했던 도드 교수의 눈에는 버핏은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서울대가 혹여나 하버드대처럼 좋은 인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통계가 나왔다. 올해 서울대 입학사정관 3명 중 1명이 20대라고 한다. 사회경험이 1년 이하이거나 전무한 사정관도 전체의 37.5%나 된다고 한다. 나이가 젊다고 통찰력이 없고, 사회경험이 없다고 전문성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수험생들의 ‘창의력’ ‘잠재력’을 보는 입학사정관제의 취지를 제대로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전문성은 기본으로 하고 폭넓은 경험·연륜을 갖고 있다면 아무래도 미래의 ‘워런 버핏’을 찾는 안목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내신 성적에 얽매여 현재의 모습에서만 인재를 찾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혁신적으로 나갈 수 없다고 본다. 자기 대학 출신 조교·직원 등에서 사정관을 뽑을 것이 아니라 전문성과 식견을 갖춘 각계의 인사들을 쓰는 것도 검토해 보면 어떤가.
[한국경제신문 사설-20101023토] 되풀이되는 `국감무용론` 확실한 제도개선을
올해 국회 국정감사가 어제 끝났다. 20일 동안 516개 정부기관을 상대로 실시된 국감은 이번에도 역시 실망스럽고,이런 국감을 해서 뭐하느냐는 '무용론' 또한 비등하다. 정부 정책의 문제점과 사각지대를 찾아내 개선책을 마련토록 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감이 이렇게 겉돌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국회의원들의 준비 소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의 전략에 따라 4대강 사업이 거의 대부분 상임위원회의 단골메뉴가 돼버렸고 의원들은 이슈 발굴에 실패했다. 하지만 4대강 사업도 대운하의 전초사업이라는 구태의연한 주장과 공허한 정치 공방에 파묻히면서 심지어 배추값 폭등의 원인이라는 억지주장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국민의 실망감이 이만저만 크지 않다.
특히 이번 국감에서 일부 기관장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와 함께 증인 · 참고인의 불출석 내지 출석거부 등도 두드러졌다. 정치권에서는 국회 경시 풍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감사를 받는 장관과 기관장을 안하무인 격으로 호통을 치며 몰아붙이고 국감 사안과 별 관계없는 증인과 참고인을 무더기로 불러 세우려 하는 잘못된 관행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킨 결과가 아닌지부터 우선 자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에서 산적한 민생 · 경제 법안들을 제 때 처리하지 않는 바람에 국정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 여야 의원들이 자신의 1년 의정활동을 집약해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국감마저 부실해져서는 국민들의 시선이 더 따가워질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매년 국감이 끝날 때마다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지만 정작 정치권조차 반짝 논의에 그칠 뿐,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상시 국감제도만 해도 이미 수년 전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연중 수시로 국감이 열리는 데 따른 국정마비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로 인해 사실상 소멸됐는데도 이제껏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도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폭로성 한탕,재탕,삼탕 국감으로 아무도 설득할 수 없고 정부에 대한 견제도 어렵다"며 "국감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제도개선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두고볼 일이다.
정치권이 일하는 국회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면 국감제도부터 서둘러 정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같은 몰아치기 · 벼락치기 국감이 아니라 정책국감으로 정착할 수 있는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선진국들처럼 국회 상임위를 상설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서울경제신문 사설-20101023토] 삼성 사장단의 담합 근절 결의의 의미
삼성그룹 사장단이 공정거래 법령 및 법령 준수 의무에 관한 워크숍을 갖고 담합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공정거래 풍토조성에 앞장서기로 해 관심을 모은다.
최근 국내외에서 잇따라 발생한 담합사건과 관련해 준법경영을 다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삼성그룹의 위상에 비춰 공정거래 질서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담합은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라는 점에서 국정 화두인 '공정사회'는 물론 당국의 불공정행위 조사와도 맞물려 있다.
담합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이번 삼성 사장단의 결의는 담합행위의 위법성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인식이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이기도 하다. 공정거래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담합행위가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알게 모르게 담합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과거 고도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독과점적인 시장구조 때문에 담합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여건인데다 담합에 대한 경각심이 낮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이후 국제카르텔 단속에 걸려 벌금을 낸 10대 기업 가운데 국내 업체가 4곳에 이르고 이들이 미국에 낸 과징금만 1조5,000억원에 달한 것은 공정거래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수준이 얼마나 뒤져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담합행위가 설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소비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가로채고 자유시장경제의 근간을 해치는 담합행위에 대해 중범죄 행위로 간주해 엄벌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전세계 매출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물리고 있고 미국의 경우 벌금은 물론 실형에 처하는 형사범으로 다루고 있다.
담합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이득을 취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담합으로 입는 경제적 손실도 문제이지만 기업이미지는 물론 국가이미지가 실추되는 등 직간접적인 피해가 막대하다는 점에서 담합의 위험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담합근절을 위한 삼성 사장단의 결의가 실천돼 우리 경제의 공정거래 질서 확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 임직원들에 대한 교육과 학습 등을 통해 공정거래제도와 관련 법령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 교육 등을 통해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 오늘의 주요 칼럼 읽기
[동아일보 칼럼-오늘과 내일/박영균(논설위원)-20101023토] “원전 반대꾼들, 4대강 반대하러 갔다”
지난 주말 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발전소(원전) 입구의 고리스포츠문화센터 대강당에서는 지역주민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바로 옆 건물인 전시관의 원자력발전 원리를 보여주는 모형 앞에는 견학 나온 초등학생과 학부모들이 모여 있었다. 불과 몇백 m 떨어진 곳에서 방사능물질이 들어있는 원전이 돌아가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다.
* 원전 주변 주민들 평화롭게 산다
몇 년 전만 해도 원전은 평화의 상징물이 아니었다. 국내든 외국이든 원전에서 무슨 사고라도 발생하거나 가동 중단이라도 되면 반핵운동단체들은 원전 건설 중단을 외쳤다. 2003년 전북 부안에서는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을 유치하려던 군수가 폭행을 당했다. 이른바 반핵단체들이 원전에서 곧 사고가 날 것처럼 떠들고 다녔으니 원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했을지 짐작이 간다.
작년 말 한국이 아랍에미리트 원전 건설사업을 수주한 이후에는 반핵운동단체들의 원전 반대운동이 힘을 잃고 있다. 원전이 안전하지 못하다거나 원전 건설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원전이 사고 없이 잘 돌아가는 동안에는 적어도 반핵운동단체들이 설 땅은 없어 보인다. 아랍에미리트에 수출될 원전과 똑같은 신고리 한국형 원전이 고리 원전단지 안에 한창 건설 중이지만 시비를 거는 반핵단체는 없다.
반핵단체들의 퇴조는 자초한 것이다. ‘한국에 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리에 맞지 않은 왜곡된 주장을 해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렸다. 북한 핵실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문제 삼지 않다가 방폐장 반대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주민들의 외면을 받고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에게 쫓겨난 것도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원전 인근 지역에서 무뇌아가 나왔다든가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주민들은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반핵단체들이 설 땅을 잃게 된 근본 이유는 원전 안전성이 확보됐기 때문이다. 원자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수영과 헬스를 할 정도로 주민들은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원전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전 운전을 하는 기술자를 원전 조종사라고 부른다. 비행기보다 훨씬 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원전 운전은 비행기 조종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10명의 조종사가 작업하는 조종실은 마치 커다란 비행기나 선박의 조종실을 옮겨놓은 것처럼 계기반이 가득하다. 보통 다른 공장에서는 4조 3교대 방식이지만 원전에서는 안전을 위해 6조 3교대 방식이다. 안전을 최우선한 원전 운전은 반핵 시위대를 이기는 요인도 됐다.
* 안전한 원전처럼 ‘맑은 물’도 보여줘야
원전 건설을 반대하던 반핵운동단체 사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2003년 방폐장 반대가 극성일 때 그들을 봤던 고리 주민들은 그들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러 갔다고 말한다. 종교계나 시민사회단체 대표를 자처하면서 4대강 사업 중단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상당수가 몇 해 전에 원전 반대를 부르짖던 이들이다.
만약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에서 조그만 사고라도 발생했다면 원전 반대꾼들은 아랍에미리트까지 달려가 한국 원전이 위험하다고 소리쳤을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 4대강 사업장에서 강물이 오염된 사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이들은 배추값이 오르면 4대강 사업 때문이라고 우기다가 배추값이 내리면 먼 산을 쳐다볼지언정 자신들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대강 사업이 원전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물의 오염을 막고 더 맑은 물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외국에서 원전을 사러올 뿐 아니라 치수사업 성공모델을 배우러 올지도 모른다.
[중앙일보 칼럼-분수대/송원섭(JES 선임기자)-20101023토] 슈퍼스타K
대회가 스타를 만들까, 스타가 대회를 빛낼까. 1970년대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라면 단연 ‘대회’ 쪽에 무게가 실린다. 유럽방송연합 회원국 가수들이 국가 대항전을 펼치는 이 대회는 명실공히 스타의 산실(産室)이었다. 스웨덴의 무명 그룹이었던 아바(ABBA)도 74년 ‘워털루’로 우승한 뒤 곧바로 월드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80년대 이후 이 대회의 명성은 퇴색했다. 세계 팝 시장이 급속히 미국 중심으로 개편돼 버렸기 때문이다. 88년에는 캐나다 출신의 프랑스 여가수 셀린 디옹이 발군의 가창력을 뽐내며 우승했지만, 그가 세기의 디바(diva)로 성장한 것은 5년 뒤 영어로 ‘파워 오브 러브’를 발표하고 나서의 일이다. 사람들이 디옹의 프로필을 보고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기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23일 새벽 두 번째 우승자를 내놓은 노래자랑대회 ‘슈퍼스타 K’가 화제를 양산 중이다. 케이블TV로는 공전의 15%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신인 가수 선발대회가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30여 년 전 ‘대학가요제’를 연상시킨다. 77년 시작된 ‘MBC 대학가요제’도 활짝 핀 것은 2년째인 78년이었다. 1회 대회의 성공으로 수준 높은 참가자가 대거 몰렸고, 그들 중 배철수·노사연·임백천·심수봉 등이 80년대 대중문화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역시 78년 출범한 TBC ‘해변가요제’도 왕영은·주병진·구창모·이치현(벗님들) 등을 배출했다. 이후 다양한 대학생 가요제가 한국 방송·가요계의 등용문(登龍門)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90년대 이후 가요계는 개인의 재능보다 기획사의 육성 능력이 중시되는 쪽으로 변했다. 대학생 가요제는 빛을 잃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스타K’의 성공은 ‘만들어진 가수’에 대한 반발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대회가 앞으로 명성을 계속 유지할지도 결국 이 대회 출신의 신인들이 새로운 흐름을 이루며 가요계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참고로 수많은 ‘슈퍼스타K’ 도전자들이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심수봉이다. 대학생 가요제 출신의 숱한 스타들 가운데 최고의 가수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대회에서 아무 상도 받지 못했다. “너무 기성 가수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슈퍼스타K’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승자는 가려졌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경향신문 칼럼-여적/김택근(논설위원)-20101023토] 둘레길
온통 길뿐이다. 날마다 새 길이 생긴다. 산을 깎고, 숲을 뭉개고, 마을을 동강내어 길을 내고 있다. 직선의 길은 거침이 없다. 넓고 곧은 길은 이내 바퀴가 점령했다. 사람들은 바퀴 위에 앉아 있다. 타면 안전하고 걸으면 위험하다. 달리는 기계는 길 위의 인적을 지워버렸다. 길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 길손이 사라졌다. 사람의 말은 오간 데 없고 자동차의 굉음만 날아다닌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걷는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인간들은 잘 걷지 않았다. 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걷자고 한다. 걷기의 재발견이다.
걸음은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걷다 보면 가진 것이 무거워 짐이 되어버린다. 많이 지고 갈 수 없으니 가진 것을 풀어놓아야 한다. 우리네 걱정과 근심도 그렇게 풀어진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들도 걷다 보면 하찮게 여겨지고, 이내 슬그머니 버리게 된다.
도시나 지방 할 것 없이 모든 지자체가 나서서 둘레길을 내고 있다. 고을과 산하를 들춰서 옛이야기를 찾고, 사연을 수집하고, 사적(史蹟)들을 복원하고 있다. 둘레길은 옛사람들의 길이다. 둘레길은 앞서 걸어간 사람, 또 그 앞에 간 사람들이 밟아서 생겼다. 사람들의 삶이 곧 길이었다. 둘레길은 오래되어 새롭다. 큰 길은 차에 내주고 다시 사람만의 작은 길을 찾아내서 세월의 먼지를 쓸어냈다. 그 길들이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지리산과 북한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등이 몰려든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단다. 주말이면 등산복 차림의 현대인들이 일제히 옛길을 점령하는 형국이다. 길손이 되어보겠다는 낭만,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 옛것에 대한 향수 등이 겹쳐 사람들은 걷고 또 걷는다. 하지만 사람의 걸음은 실로 무섭다. 입장료가 없어진 국립공원 산들이 사람 발에 밟혀 뭉개지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애써 찾아낸 옛길의 정취들이 인파에 지워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둘레길에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그 옛날에도 없었을 것이다.
옛길을 찾아내고 그 위를 걸음이 ‘오래된 미래’ 같아 보인다. 걷다 보면 아마 둘레길에서 옛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길에서 길을 물어 볼 일이다. 왜 강들과 길들이 저토록 굽이굽이 휘었는지 꼭 한 번 물어 볼 일이다.
[매일경제신문 칼럼-기고/최진봉(텍사스주립대 교수)-2010102] 사이버세상에서 부모 역할
지난달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럿거스대학교에서 한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 신입생이었던 타일러 클레멘티의 자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갔고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 학생의 자살이 이처럼 미국과 전 세계에 충격을 준 까닭은 그의 자살 이유가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괴롭힘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거나 친구를 왕따시킨 경험이 있는 학생은 약 3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 만연한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활성화되면서 온라인에서의 집단 괴롬힘과 따돌림으로 발전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의 형태도 직접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에 글, 사진, 동영상을 올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의 특성으로 인해 사이버 세계에서 행해지는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의 강도는 현실 세계보다 훨씬 높다. 불특정 다수가 내용을 접할 수 있어 파급력도 크고 가해자가 죄책감을 덜 느껴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이러한 온라인 세상의 위험 요소와 범죄 요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사이버 세계의 위험ㆍ범죄 요소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먼저 아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온라인 세상에서 문자메시지 교환, 소셜 네트워킹 이용, 인터넷 서치 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자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괴롭히는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보낸 경험이라든가 문제가 있는 사진ㆍ동영상을 봤거나 받아본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자녀들이 온라인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자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녀들이 가입한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며칠에 한 번씩 자녀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 게재된 글과 사진, 동영상들을 살펴보며 자녀에게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의 올바른 사용방법을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녀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할 수 없다면 자녀와 친구맺기를 통해 자녀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 이용에 참여하면서 자녀가 온라인 세상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지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올해 18세의 스탠퍼드대학교 신입생 캐시 럼브라는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부모님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 이용에 대한 조언이 사이버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캐시의 어머니는 트위터에서 그녀의 폴로어로 등록해 캐시의 트위터 이용에 참여한다. 또 캐시의 남동생과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등록해 아들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과 사진, 동영상들을 즐기는 등 사이버 세상에서 자녀들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서 자녀들을 사이버 세상의 위험요소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사이버 세상에서 자녀들을 보호하는 것은 현실 세상에서 자녀들을 위험 요소와 범죄 요소로부터 보호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들이 사이버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부모들의 적극적인 사이버 세상 참여는 자녀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세상에서 청소년들을 노리는 범죄와 위험 요소를 감시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