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공부산책 完. 팔조 7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사연 4조의 마지막은 우(愚), 어리석음이다. 정전에서는 ‘대소유무(大小有無)와 시비이해(是非利害)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리석음’의 일반 사전적 의미는 ‘이치나 사물에 어두워 지혜가 부족함’의 뜻이다. ‘슬기로움’ 또는 ‘지혜’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하여는 얼른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약간의 교리적 해석을 더해 이해를 도와보려고 한다.
‘대소유무’는 일원상 진리의 다른 표현이다. 앞서 학습한 대로 일원상 진리를 압축해 설명하면 ‘진공, 묘유, 조화’다. 진리의 체(体)와 상(相)과 용(用)의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대소유무’에 어리석다는 말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시비이해’에 어리석다는 말은 경계를 당해 나타나는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일을 당하면 진리에 바탕해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순간 떠오르는 자기 생각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판단의 실행이 장차 나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안다 할지라도 그 이로움이 영원한 이로움이 될지 아니면 처음에는 이로운 것 같다가도 훗날 변해 손해로 다가올지를 판단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대충 살면 혹은 맞고 혹은 틀리기가 십상인데 이런 삶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면 일을 당해서 확실하게 알지 못하므로 결과적으로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혹 결과가 좋으면 ‘운이 좋다’고 하고 결과가 나쁘면 ‘운이 나쁘다’고 하는데 이런 삶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을 우(愚)와 구분해 어리석을 치(痴)를 나눠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기서의 우(愚)는 우(愚)와 치(痴)를 합한 뜻으로 보는 것이 취지에 맞다고 생각한다. 우(愚)는 우치(愚痴)의 뜻이다.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거든 늘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평소 책을 통해서나 의견교환과 실제 경험을 통해서 필요한 분야에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생각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임을 알아서 평소 생각을 궁글리고 연마하는 생활이 필요하다. 책을 가까이하고 특히 진리를 다루는 경전을 가까이하면 좋다. 스승을 모시고, 도반과 문답하는 생활이 되면 금상첨화다. 공부를 하다 보면 안다는 상이 나를 가려 어리석어진다. 그래서 상(相)없는 공부, 상을 떼는 공부가 중요하다.
잘 여문 나락이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공부가 깊은 사람은 겸손해 자랑하지 않는다. 배우는 공부의 표본으로 나는 공자(孔子)을 닮고 싶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멀리서 벗이 찾아와 함께 차를 나누며 공부에 관해 문답하면 즐겁지 아니한가? 또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조차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현명한 사람이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정전공부산책’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다. 전서(全書)문제로 야기된 교단의 분란이 마음 아프다. 민망하고 송구할 뿐이다. 공부하는 교단이라야 세상의 광명이 된다. 후천개벽 만대의 원경(元經), 정전 마음공부로 세상의 행복을 빈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1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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