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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중반쯤 가족단위로 진주성구경하러 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진주를 다시 방문하면서 어언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네요!! 그 사이 진주성주변이 많이 변했겠다 추측하고 다시 와 보니 정말 완전 달라졌더군요^*^
아뭏든 역사탐방차 오랜만에 진주를 방문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탐방코스]
진주대첩역사공원 ~ 진주성
1.진주대첩역사공원(경남 진주시 논개로 7)
진주대첩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앞두고 2016년8월부터 2019년4월까지 총 18,284m2의 면적에 대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사결과 조선시대 진주성 외성벽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배수로, 고려시대의 토성 등 다양한
유구(옛날 토목건축구조와 양식을 알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가 발견되어 현장에서 학술자문회의와 국가
유산청 전문가 검토회의를 거친 후 조선시대 진주성 외성벽 유구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부는 복토하고
최종 축조된 상부성벽은 보존하여 전시하기로 했으며 고려시대 토성유구와 총일신라시대 배수로 유구는 복토한
후 그 발견된 상부에 복원하여 전시하였습니다.
1)진주대첩역사공원 종합안내도
2)조선시대 석성(石城))
길이 약 110m에 달하는 외성남쪽 체성(몸체가 되는 성), 추정 남문지(남쪽문의 터), 수구부(물을 흘려
내보내는 곳)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벽에서 내벽까지의 석축너비는 6~7m, 외벽에서 내벽 뒷채움까지
12m, 최대높이 6m정도가 남아있었고 성벽은 외벽의 기단부와 면석(외벽면을 구성하는 돌)에 사용된
석재의 가공상태와 축조방법에 따라 4개층으로 구성됩니다.
초기 축성단계에서는 장대석(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사용해 지대석(성의 몸체지면에 맞닿은 돌)을 눕혀
쌓고 그 위에 기단석(기초로 쌓는 돌)을 놓았는데 1차수축에서는 석재를 길이방향으로 눕혀 쌓았으며
2차수축 일부는 눕혀쌓고 일부는 세워 쌓았으며 3차수축에서는 모두 네모반듯하게 바른층 쌓기방식
으로 쌓아 거의 수직을 유지했고 면석은 정확하게 다듬어 접합부에 빈틈이 없도록 정밀하게 쌓았는데
이는 숙종30년(1704)부터 숙종37년(1711)까지 수축된 한양도성의 축조방식과 비슷한 석재를 사용해
최소한의 보수로 형태를 유지했고 체성상부와 앞부분은 잔디를 심어 마감했으며 추정 남문지에는 박석
(얇고 넙적한 돌)을 깔아 복원하였습니다.
3)고려시대 토성(土城)
안팎으로 기단을 석렬(줄지어 놓은 돌)로 구획하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석축기단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토성의 잔존길이는 15m, 너비는 6m, 판축높이는 0.9m 남아있었는데 토성은 풍화암반토와 사질점토를
2~5cm두께로 번갈아 다지면서 쌓은 판축법으로 축조되었습니다.
토성에서는 고려시재 전기부터 후기까지 사용된 기와가 출토되었고 하부 기반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수혈땅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과 주혈(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파 놓은 구멍)이 다수 확인되었고
현재는 토성의 원형을 따라 흙으로 형태를 복원하고 표토가 유실되지 않도록 잔디를 심었습니다.
토성과 석성사이에는 박석(얇고 넙적한 돌)과 면석(외벽면을 구성하는 돌)으로 연결된 모습을 표시했다.
4)통일신라시대 배수로(排水路)
동서방향으로 두개가 직선으로 나란히 노출되어, 남쪽의 1호배수로는 길이 49m, 북쪽의 2호배수로는
길이 41m로 확인되었으며 두 재수로사이 간격은 4~5m이고 배수로는 적갈색 사질점토를 깔아 인위적
으로 대지를 조성한 후 상부를 파고 뚫어 양쪽벽에 할석(깬돌)을 쌓아 면석을 3~5단으로 쌓고 뚜겅돌을
덮어 만든 구조로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알수 있지만 지상시설은 모두 유실
되어 구체적인 정황은 알수 없지만 출토된 기와를 통해 이 배수로의 제작연대는 통일신라시대8~9세기
로 추정되며 남쪽배수로 중간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었고 남쪽지점에서는 고려시대의 수혈도 확인되었
으며 현재는 배수로를 성토하고 발굴당시 배수로의 선형을 석재로 표시하였습니다.
2.진주성(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깊은 곳입니다.
고려말 우왕5년(1379)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원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
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고 조선 선조25년(1592)
10월 왜군 3만여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장군이 이끄는 3,800여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
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며,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관료,군인 등 7만여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했고 1979년부터 성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곽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안에는 촉석루,의기사,영남포정사,북장대,창렬사,
호국사,서장대,임진대첩 계사순의단,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진주성 개방시간 안내(**임의개방 출입행위를 금지합니다)
3월~10월 : 05:00~23:00
11월~2월 : 05:00~22:00
1)촉석문(矗石門)
진주성 동문으로 촉석루,의기사(논개사당),의암 등으로 갈수 있습니다.
2)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문화재자료 제8호)로 진주의 상징이며 영남제일의 명승으로 꼽힙니다.
고려 고종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8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고 전쟁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으며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 및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습니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있다고 하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 부르기도 하는데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광해군10년(1618) 병사 남이홍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지어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고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도비,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는 바,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으로는 평양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현재의 촉석루에는
하륜의 "촉석루기"를 비롯한 많은 글들이 걸려 있습니다.
#촉석루에서 내려다 본 진주 남강풍경
3)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조선 영조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후 수차례
고쳐 지었고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입니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 다산 정약용의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논개영정은 처음엔 김은호의 작품이 모셔져 있었으나 화가의 친일행적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2007년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된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4)진주의암사적비(晉州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53호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진주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로 조선 경종2년(1722)
세운 것으로 진주의 선비 정식이 비문을 지었는데,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사람들의 입으로 전승
되다가 1620년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인조7년(1629)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영조16년(1740) 사당인 의기사를 세웠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짓고 처마밑에 "義妓論介之門"이란 편액을 달았음.
5)진주 의암(義巖)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임진왜란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의기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로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으로
부르며 이전에는 주변에 물결이 거세어서 위험하다는 의미로 "위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습니다.
바위의 서쪽면에는 인조7년(1629) 진주고을 선비 정대륭이 새긴 "義巖"글자가 있고 남쪽면에도
진주고을 선비 한몽인이 썼다고 전하는 "義巖"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6)진주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제말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적을
함께 새긴 비석으로 한집안의 두 층신이라는 뜻에서 쌍충이라 하였는데, 제말은 의병을 일으켜 웅천
김해,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
하였고 조카 제홍록은 일찌기 과거에 급제했으나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숙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해,정암진,진양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1597년
정유재란때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는 바, 정조16년(1792) 촉석루옆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
는데 일제강점기에 헐려 방치된 것을 1961년 다시 원래의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었으며
서유린이 글을 짓고 이병모가 글씨를 썼으며 조윤형이 비문의 제목인 두전을 썼습니다.
7)진주성 포루에 설치되었던 3종의 화포
*천자총통(天字銃筒)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중 가장 큰 화포로 성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때는 성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했고, 수군의 거북선,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했는데 특히 진주성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화포는 동차에 장착하여 사용했는데 길이 2.3m의 대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
할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900보(1,136m)이며 현재 2점의 천자총통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1점이 보물 6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자총통(地字銃筒)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중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인데,
성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때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으며
수군의 거북선,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한 바, 특히 진주성전투
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기여를 하였는데, 이 포는 동차에 장착하여 사용되었고 길이
1.8m의 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200개를 발사할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800보(1,009m)
로 현재 3점의 지자총통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2점은 보물 862호,86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자총통(玄字銃筒)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중 천자총통,지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
이나 지자총통과 큰 차이가 없고 성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때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했으며, 수군의 거북선,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특히 진주성전투에서 승리를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포는 동차에 장착되어 사용하였는데
길이 1.5m의 차대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할수 있고 포의 사정거리는 800보(1,009m)
로 현재 5점의 현자총통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2점은 보물 885호,123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8)서장대(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이며 진주성 서쪽의 지휘장대로 장대란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말하는데, "여지도서"에는 '누의 이름은 회룡루이고 다락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건물이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1934년 진주의 서상필이 다시 지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진주성곽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진주시내 전경
9)호국사(護國寺)
전통사찰 제70호이며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하며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임진왜란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이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했다고 전해지며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조성된 것입니다.
*호국사입구(일주문)
*호국사 전경
10)창렬사(彰烈祠)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이며 임진왜란때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죽음을 죽음을 무릎쓰고
성을 지킨 인물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경상도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처음 세운뒤 선조40년(1607)
사액을 받았고 고종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민사에 모셨던
김시민장군을 비롯한 39명의 신위를 이곳에 모셨는데, 정사(正祠),동사(東祠),서사(西祠),경충당
(景忠堂),비각(碑閣) 등 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습니다.
*창렬사 전경
*동사와 서사 전경
11)진주성 포루(砲樓)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로 선조40년(1607) 병사 김태허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12좌가 설치
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의령,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단성,초계,거창,사천,함양,남해,합천 등 9읍소속'이라고
했으며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포루 1개소만 복원했습니다.
12)진주성 사랑나무(연리근/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몸통이 만나면 연리목)이라 하며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리는데, 연리나무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마음속에 바라는
소망(사랑,소원,희망,승진,건강,화합,우정,합격,성공 등)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서로 합쳐져 있는 진주성 사랑나무에서 꼭 소원성취하기를 바랍니다!!
13)청계서원(淸溪書院)
고려 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선생과 고려 공민왕13년(1364)
봄 이땅에 목화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오직 한알을 살려 크게 번성시키고 씨아,물레,베틀을 발명하여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선생을
모신 곳으로, 조선 순조33년(1833) 영호남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헌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해
사림 봉사해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1993년까지
정부의 지원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3월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청계서원
*경덕사(景德祠)
*숭은사(崇恩祠)
14)국립진주박물관
1984년 개관한 경남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 임진왜란 최대격전지중 하나인 진주성(사적 제118호)에
위치하며 개관당시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성장 발전하였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박물관
으로 출발했다가 1998년부터 경남 서부지역의 역사문화와 임진왜란을 전시중심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특성화박물관으로 거듭났습니다.
*운영시간 : 09:00~18:00(화~일)
*시설 : 본관/별관(기획전시실)/사무동/직원식당/박물관 광장/야외화장실/청경초소
(1층) 임진왜란실1/역사문화홀/두암실/기획전시실/3D입체영상관/실감채험관/아카이브자료실
(2층) 임진왜란실2/테마전시실/어린이 임진왜란체험실
#박물관 전경
#박물관 점자안내도
#박물관 1층 내부풍경
#박물관 1층에 전시된 화포복원 전시물
1)사전총통기 화차(四箭銃筒機 火車) : 화살200개를 동시에 쏠수 있는 화차
2)신기전기 화차(神機箭機 火車) 신기전 100개를 동시에 쏠수 있는 화차
15)진주성도(晉州城圖)
2013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회화식 군현지도로 진주성 내외의 지리적 형세와 풍광을
10폭의 연폭병풍에 담았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 읍성구조와 성안팎의 공공시설물과 지형지세를
회화기법으로 상세묘사했습니다.
16)운주헌터(運籌軒址)
*운주헌 안내문
*운주헌터
17)북장대(北將臺)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이며 진주성 북쪽의 지휘장대로 광해군10년(1618)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고쳐 짓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갗추었는데 진주성 북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어서
성의 안팎을 한눈에 살피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군사건물로서 후대 군사건물의
모범이 된 바, 마루아래 기둥은 돌로 낮게 세웠고 누각은 난간을 둘렀으며 군사건물의 특성상 지붕을
낮게 설치하였습니다. 북장대의 누각이름은 진남루(鎭南樓)입니다.
18)용다리 전설
지금의 동성동 212-1번지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바,
때는 고려초 진주의 한 마을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둘째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서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는데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으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 질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위
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을 보게 되었는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
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고, 그후 이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을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
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옆 골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는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둘려
왔는데 이느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것 같았고 그후부터 용다리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으며,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번 왔다갔다 하면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라도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6.25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 합니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안에 남아 있습니다.
19)진주성 비석군
조선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
효종10년(1656)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으로, 진주성 및 각 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입니다.
20)경절사(擎節祠)
고려의 충절신하 하공진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곳으로, 공은 현종원년(1010)
안으로는 왕실의 위난을 수호한 공을 세웠고 밖으로는 거란의 40만대군을 삼촌설(三寸舌)로 퇴각케
했을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 적국의 볼모가 되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를 좇아 신명을 버리신 분이니
나라에서는 문하시랑동평장사를 추증하고 영정을 기린각에 모시었고 공의 죽음은 위국충절의 상징이
되어 이곳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경절사
*충의당(忠義堂)와 수덕재(修德齋)
21)임진왜란때 진주 축석문으로 쳐들어오는 왜군과의 전투를 묘사한 조형물
22)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이며 조선시대 말엽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아인 영남포정사의
정문으로 광해군10년(1618)에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처음 세웠고 그후 전국의 행정체계가 변함에
따라 고종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이 되었고 고종33년(1896)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정문으로 사용되며 영남포정사 문루라고 불리고 있는데 출입문의 기능을 위해 누각의 아래기둥이
높게 설치되고 지붕을 낮게하여 출입자를 감시하고 외부침입을 대비한 조선중기 관아의 문루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문루의 편액인 망미루(望美樓)라는 글씨는 지중추부사 서영보가 썼고
미(美)는 미인의 준말로 임금을 뜻하므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23)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
24)진주성 석굴(石窟)
현존하는 2개소의 석굴은 암반을 뚫어만든 인공동굴로 우측 석굴은 1980년대 진주시 정화사업
이전까지 중영터 일원에 소재한 진주세무서의 연탄 및 갈탄저장소로 활용되었고, 좌측 석굴은
진주세무서 운영시 조성한 축대로 인해 입구가 막혀 있었으나 2022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됨.
석굴의 내부벽면에는 암반을 뚫은 천공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근현대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며 석굴의 비딕면은 평탄하게 조성하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수록 좁아
지는 형태로, 우측 석굴규모는 입구높이 약1.9m,내부높이 약1.3m,너비 약1.6m,길이 약1.5m
이고 좌측 석굴규모는 입구높이 약1.9m,내부높이 약1.5m,너비 약1.8m,길이 약2.6m정도임.
25)진주성 중영(中營)
중영은 조선시대 무관인 우후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우후는 각 지방의 군대를 관리하는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무관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이자 절도사 다음으로 막중한 업무를 지녀 진주성 중영은
경상우도 병무와 방어의 중점기지로서 진주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는 장소라 할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후 1603년당시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을 진주성으로 옮기면서 중영도 함께 설치
되었고 처음에는 지금의 북장대주변에 있던 건물을 고쳐 사용했다가 병영의 규모가 커지면서 중영을
새롭게 건립했는데 18세기이후 제작된 진주성도를 보면 당시 중영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당시 중영은 망일헌,진무청,배리청 등 다양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경상우병영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26)공북문(拱北門)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으로, 공북문은
17세기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진주성의 정문으로 나와 있으며 2002년5월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했는데 낮보다는 밤에 봐야 더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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