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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기술이 사회를 바꿀 것인가?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20세기가 정보기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생명기술의 시대라는 말처럼 생명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는 연일 신문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동물의 복제는 1면 기사거리도 안 되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복제인간도 곧 가능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복제인간이라는 화두로 시작되는 생명과학기술 논란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러 다양한 상황을 더 이상 허구가 아닌 가까운 현실로 고민하게 만든다. 혹자는 생명과학기술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한계인 질병과 죽음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하고 혹자는 파멸로 치닫는 시작일 것이라고 말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지난 2003년 7월 25일은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 브라운이 탄생한 지 25주년 되는 날이었다. 거의 모든 매체가 이날을 기념하면서 그동안 체외수정기술이 불임부부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선사했는가 그리고 이 기술이 오늘날 줄기세포 연구의 진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축사를 하는가 하면, 1978년 루이스가 태어났을 당시의 논란을 옛날일 얘기하듯이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 <핸드메이즈 테일>은 정반대로 생명과학기술을 통한 임신과 출산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재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상황도 비극적이려니와 소수의 여성들이 기술로 통해 오로지 임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재생산 기술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과학기술 일반은 상당히 암울하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여는 미래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혼재되어 있고 종종 이 논의는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정리된다. 즉, 기술을 잘못 사용하면 비극을 불러올 수 있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세포핵치환 기술의 경우 인간에게 적용하여 이른바 복제인간이 태어나면 혼란을 가져오겠지만 동물복제에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득―식량생산 혹은 대체장기생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잘만 사용하면?: 동물복제는 되고 인간복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도 복제로 불리는 세포핵치환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데에는 반대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복제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의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동일한 기술을 동물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반감이 없고 실제로 복제 양 돌리를 비롯해 소, 고양이, 원숭이, 말 등 여러 포유류에서 복제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와 같이 기술을 “좋게” 사용하는 것과 “악용”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과학기술과 가치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기술은 가치와 무관한 실험실에서 생산되고 그것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는가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개발되는 맥락으로부터 다국적 제약회사나 생명공학산업을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특히 현대로 올수록 고가의 실험장비 그 자체가 기술생산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세포핵치환 기술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물실험의 함의가 “인간에게 적용해도 무리없다”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동물실험이 인간 적용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실제로 특정 집단은 실험에 동원되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다카우 수용소의 유태인들, 1972년까지 40여년간 매독실험 대상이 된 미국 터스키지의 흑인들, 그리고 1998년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백신시험 대상이 된 영아원의 아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당대의 “정상” 기준에 들지 못했던 사람들은 실험대상이 되었다.
과학기술 결정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대비되는 두가지 반응은 사실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일방향적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이다.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을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여러 명의 아인슈타인과 히틀러 삽화는 이제 막 출발단계인 세포핵치환 기술이 곧바로 실현되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성급한 기술결정론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라는 상반된 미래상은 과학기술을 독립적인 변화요인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일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은 과학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수동적으로 설정하여 일방적으로 기술의 혜택 혹은 해악을 입는 존재로 그리고, 과학자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그래서 과학기술자는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자가 생명을 창조한다?
체외수정 기술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때 그것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대부분의 경우 과학자가 그 생명체를 안고 있는 사진이 대대적으로 실리고 간혹 체외수정의 상세한 묘사가 첨가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과학자가 생명체를 시험관에서 배양하여 탄생시킨 듯한 착각을 낳는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과학자들의 진술에서도 이런 재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 로버트 에드워즈(Robert Edwards)는 1983년 자신의 글에서 “우리의 배아”(our embryos)라고 쓰는가 하면, 영국의 불임 전문의인 로버트 윈스턴(Robert Winston)은 1986년 한 TV 프로그램에서 “나의 배아”(my embryos)라고 말하였다. 한국에서 보건복지부가 2002년 제안하고 2003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을 보면 불임클리닉을 일컬어 “배아생산의료기관”이라고 칭하고 있다.
마치 과학자가 생명을 창조하는 조물주인 것처럼 묘사되는 이러한 재현에서는, 여러 달 동안 생명체를 몸 속에서 키운 모체의 존재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단지 생명체를 잠시 보관한 인큐베이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의 몸은 관찰과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호주의 불임연구팀은 1981년의 한 논문에서 배란시점을 통제하는 약제의 이점을 “복강경의 날짜와 시간을 계획할 수 있고 무배란을 피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Fertility and Sterility 35권 5호 505쪽).
여성을 위해서?
이와 같이 여성은 한낱 인큐베이터일 뿐인 듯이 논의의 장에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논란이 되는 기술의 도입에서 중요한 명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 2002년 10월 9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체세포 핵치환과 이종(異種)간 세포핵치환 연구의 허용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자, 한 과학자는 “자기 아이 하나를 난치병으로 떠나보낸 저 여인은 여성이 아닙니까? 저분의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이 연구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라며 그 연구의 필요성을 강변한 바 있다.
영국의 왕립산부인과학회가 1983년에 발간한 보고서(Report of the RCOG Ethics Committee on In Vitro Fertilisation and Embryo Replacement or Transfer) 또한 당시 논란이 되는 몇가지 기술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예를들어 난자를 여러개 성숙시키는 과배란 약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쌍둥이 같은 다태임신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만 지적할 뿐 난소를 자극하여 여성의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이 없다. 실제로 호르몬제 과다투여로 인한 난소과자극은 체외수정기술이 개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성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때로는 난소과자극증후군(OHSS: ovarian hyper-stimulation syndrome)이라는 심각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여러개의 수정란을 한번에 넣는 것에 대해서는 “여성의 이해”를 들어 반박한다.
두 개 이상의 배아를 이식하면 한 개의 배아를 이식할 때보다 임신 성공률이 올라간다. 다태임신(이 유발할 수 있는) 위험성은, 체외수정 과정이 반복될 경우 복강경 시술 등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에 견주어서 평가되어야 한다. 즉, 임신이 실패할 경우 여성이 입게 될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상처와 비교해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워넉보고서(<참고 4> 참조)가 대리모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하자 의사들은, “왜 자궁절제 수술을 받은 아이없는 여성은 다른 여성의 도움으로 아이를 갖게 될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Nature 1984년 7월 26일자 269쪽) 대리모가 “여성을 위한”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과학기술은 보편적인가
일견 과학기술은 국경과 성별, 인종, 계급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갖는 것처럼 보여진다. 예를 들어 체외수정 기술은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성 모두에게 희망이 될 것이며 체세포 핵치환과 줄기세포 기술이 실용화되면 누구라도 필요한 장기를 거부반응 없이 이식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술은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토양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갖게 되고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다른 문제화 과정을 밟는다.
과학기술은 어떻게 “문제화”되는가
체외수정 기술을 예로 들면 그것을 최초로 출산으로 성공시킨 영국에서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이슈로 문제화되었다. 즉 이 기술이 대리모의 임신과 출산을 더 쉽게 하여 기존의 핵가족 규범을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래서 체외수정 기술에 대한 세계 최초의 가이드 라인인 워넉보고서가 발간되었을 때에도 그것을 소개하는 신문의 헤드라인은 “대리모 금지”였다(“Warnock wants to ban surrogate agencies” The Guardian 1984년 7월 19일 1면).
다른 한편, 이스라엘은 대리모를 세계 최초로 합법화하여 정부가 지정한 기구가 대리모 계약을 공식적으로 관할한다. 대리모뿐만 아니라 난자공여와 정자공여가 자유롭고 이것을 포함하여 체외수정 시술에 대해 국가건강보험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성은 종교나 결혼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는 비용에 신경쓰지 않고도 체외수정 기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의 출산주의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출산 기술에 대한 이런 파격적인 지원과는 대조적으로 가족계획 서비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국가지원이 없고 이미 1968년부터 출산장려기금을 지급해 왔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역사적 이유로(홀로 코스트 당시 죽은 수백만 유대인을 보충하기 위해서) 혹은 정치적 이유로(팔레스타인과 아랍의 출생률에 맞서기 위해서) 출산의 압력을 받고 있다. 유대인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이스라엘에서 대리모로서 압도적으로 유대인 여성이 선호된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서 이 기술이 민족의 이슈로 문제화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자, 그렇다면 한국에서 생명과학기술은 어떻게 문제화되는가?
과학기술과 “따라잡기” 신화
한국의 과학기술과 발전주의
현재 한국에서 생명과학기술은 무엇보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되고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국가의 경제발전과 결부된다. 그래서 어떤 규제이든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다른 연구자도 “21세기 국가의 최우선 연구과제인 생명공학의 경쟁력을 상실하고 기술 종속국으로 전락할 우리의 미래가 암담할 뿐”이라고 한탄했다. (김희원 “배아복제 더 엄격히 규제를/생명과학 포기나 마찬가지: ‘생명과학윤리’ 공청회 찬반 팽팽,” 『한국일보』 2000년 12월 7일자 18면)
한국에서 발전주의는 그 자체 선(善)이며 진보로 자리잡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규제에 “그럼 후진국이 되자는 말이냐”고 들이대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움찔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규제 법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정당화 논리는 소위 선진국의 사례이다.
흥미로운 점은 선진국의 예가 상당히 편의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예보다 훨씬 더 강경한 법안” 이라며 제시되는 대표적인 선진국의 예가 체세포 핵치환을 처음으로 허용했다는 영국의 경우인데, 허용했다는 것만 강조될 뿐 이 기술을 둘러싸고 다른 어떤 규제 장치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단지 허용이냐 금지냐 하는 파편적인 단서만 제기할 뿐이다.
사실, 영국의 경우 국가 수준의 배아기구(HFEA, <참고 4> 참조)가 있어 불임처치와 배아연구 모두를 관할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불임클리닉과 연구소들은 이 기구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야 진료와 연구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년에 한번씩 감사를 받아야 한다. 그 감사 수준은 매우 상세하여 이 기구의 연례보고서를 보면 영국에서 1년에 총 몇 개의 배아가 창출되었고 그 중 몇 개가 임신에 사용되고 냉동보관 되었는지, 그리고 몇 개가 연구에 사용되고 몇 개가 폐기되었는가가 한 개 단위까지 정확한 수치로 제시되어 있다. 만일, 한국의 불임클리닉과 배아연구소에 이러한 정도로 감사가 시행된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이 나올 것인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규제가 “족쇄”로 그리고 사회적․윤리적 고려가 “장애물”로 인지되는 상황은, 단지 과학기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그리고 과학자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따라잡기에 강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은 언제나 언급되지만 그것은 매우 선택적으로 강조된다.
그렇다면 과연 따라잡기는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일까?
“따라잡기” 전략에 대한 생태 여성주의의 충고
생태 여성주의자인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따라잡기식 개발”이 결코 만인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승리자에게 “진보와 해방”이 다른 쪽의 희생자에게는 자신의 삶의 기반이 파괴되는 것일 수 있다.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또한 인도의 개발 사례를 예로 들면서 단일 모델의 발전주의를 추종하는 “따라잡기” 전략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시바가 예로 든 것은 소위 선진국의 개발 전문가가 인도에 도입한 육종․낙농 기술이었다. 흔히 ‘녹색혁명’과 ‘백색혁명’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이것은 식량위기 타개라는 명분으로 더 많은 곡물과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하도록 한 기획으로 효율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내세웠다. 근대 과학지식에 기반한 이 프로그램은 종자 한 그루와 젖소 한 마리의 생산량을 증가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개량종은 토착종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여 그 프로그램이 얻고자 했던 효율성이라는 목표마저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물자원이 부족한 마을에서 개량된 젖소와 종자는 토착종보다 훨씬 많은 물을 소비했고 더 많은 관리 노동을 필요로 한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파괴된 자연은 현지인들의 삶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개발전문가는 소위 과학적 객관성에 기대어 자신을 유일하게 정당한 지식 담지자로 자처했으며 토착지역에서 수천년 살아온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적임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연과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파괴된 폭력적 결과 앞에서도 그 상황을 시행착오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전제를 반추하기보다는 다시금 또 다른 기술을 도입하려 하였다.
생태 여성주의의 “따라잡기”에 대한 경고는 한국에서 과학기술이 “선진국”으로 달려가는 지름길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을 건드리고 있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윤리적 고려가 기술대국을 꿈꾸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우리가 과연 무엇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지 그것은 이룰 수 있는 것이지 혹은 그 달성이 다른이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은 아닌지 분명 물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접근 가능성과 특허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이 실용화된다면 우리 모두는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대중매체에 나오는 것처럼 혹여 내가 장기 이식을 해야 할 때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나의 원래 장기와 똑같은 장기를 만들어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감쪽같이 치료받을 수 있을까.
새로운 생명과학기술 개발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이 “불치병 치료”이다. 그런데 실제로 치료 현장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술 자체의 실용화뿐만 아니라 접근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접근가능성에서 가장 큰 제약은 아마도 비용일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아이러니는 이 비용이라는 제약이야말로 한국의 기술개발이 경제적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데에서는 오히려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과학기술이 경제적 잠재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고비용의 상품이 되어야 하며, 실제로 한국의 많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곧이어 특허를 신청하고 이것은 “한국 과학기술의 쾌거”로 일간지에 대서특필된다.
백혈병 치료제와 에이즈 치료제
기술개발과 특허, 그리고 그로 인한 높은 비용으로 기술의 접근이 제한된 잘 알려진 예가 에이즈 치료제와 백혈병 치료제이다.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같은 경우는 2002년 한해 동안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가격을 글리벡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받아들이지 않는 과정에서, 특허권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공감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이 문제 해결에 동참한 연대기구의 명칭(<글리벡문제 해결과 의약품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도 ‘의약품의 공공성’이란 주장이 선명하게 나와 있다.
특허가 보장하는 독점판매 그리고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전세계에 동일하게 책정되는 높은 가격으로 제약회사의 이윤 창출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새로운 기술이 실용화되어 우리 곁에 올 때 아마도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될 장면일 것이다.
이처럼 글리벡의 문제를 겪으면서 이와 유사한 사례인 에이즈 치료제를 둘러싼 투쟁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소개되었다. 에이즈 환자의 70% 이상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은 이미 이 질병이 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2002년에 열린 세계 에이즈총회에 따르면 에이즈 확산이 특히 심각한 아프리카 7개국은 평균수명이 40세도 안되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어린이의 15%가 고아인데 이들 대부분이 에이즈로 부모를 잃었다고 한다. 대륙 전체가 이렇게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치료약제는 이미 특허로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지라 이를 합법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2003년 에이즈총회에 참석한 한 활동가는 “브룬디에는 감염자가 9만명이 넘지만 비싼 약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천명에 불과하다”며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비판하였다(『문화일보』 2003년 7월 14일자 9면).
그래서 아프리카의 시민단체들은 일찍부터 에이즈 치료제 가격인하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몇몇 국가들은 아예 특허권을 무시하고 카피약을 자체 생산하여 저가에 보급하고 있다. 에이즈의 경우 치료약의 특허와 높은 비용에 대한 싸움이 오랫동안 지속된 결과 세계적으로도 특허를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제약회사들이 별 다른 이의제기 없이 카피약 제조를 방치하고 있기도 하다.
“불치병 치료”와 특허
그러므로 한국에서 과학기술 개발을 정당화되는 두가지 주요한 논리인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얼마나 모순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1년 5월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생명윤리기본법> 공청회를 열었을 때 생명특허를 규제하는 법안에 대해서 관련 종사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연구에 많은 공공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그것이 공익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이루어지는 데 그 연구의 결과가 특허로 이어지고 그 혜택의 제약을 가져온다면 “인류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서”라는 정당성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는 충분한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이 도입되어 만일 의료의 현장에서 경험하게 된다면 바로 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만나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의료 현장에는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절차로서, 의료진에 비해 전문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일반인이 실질적인 동의 의사를 밝힐 수 있도록 하려는 장치이다. 동의를 구하는 의료진은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설명하고 일반인이 충분히 이해한 후 동의절차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동의서의 각 항은 “****에 대한 효과와 위험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었으며”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새로운 기술과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 누가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은 전문가도 아직 안정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그러한 새로운 기술의 적용이다.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가 하나의 절차로 자리잡은 후에는 새로운 기술이 적용될 때 마련되는 가이드라인에서 언제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사실, 의료 전문진도 알 수 없는 그러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기술의 경우는 일반인이 동의를 표하는 순간 미지의 가능성까지도 소롯이 책임을 떠 안는 상황이 발생한다.
즉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는 지식의 위계로 인한 권력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의료의 장에서 일반인을 보호하려는 장치였으나, 종종 특히 성급하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현장에서는 역설적으로 전문집단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한다. 즉 “이 기술을 도입할 때에는 물론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받을 것이다”는 식으로 그 적용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동의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도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불임처치를 받는 여성이 과배란 주사제로 여러개의 난자가 생성되고 그 중 일부를 의료진이 “과학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기증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여성이 그것에 동의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할 때 동의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연구의 내용을 상술하지는 않으며 사실 그것은 (아직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에)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동의한 사람은 어디까지 동의한 것일까? 그것으로 체세포 핵치환을 하여 배양을 한 후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였다면 “과학연구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그래서 난자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동의가 그 모든 단계의 연구까지도 다 포괄하는 것일까? 새로운 기술의 앞으로의 향방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장의 동의가 과연 어느 단계까지 효력을 갖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동의 주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가 보완되어야 하는 지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절차는 동의를 하는 주체를 추상적 개인으로 상정함으로써 동의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단순화시킨다. 동의라는 선택을 하게되는 장면에서 그 주체는 고립된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를 맺고 각자 다양한 삶의 여정에 있는 구체적 누구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 종교문화가 지배적인 남미의 가난한 농촌의 한 여성을 생각해보자. 이 여성에게는 임신을 하여도 기본적인 산전진료는 고사하고 일상적으로도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종교적 문화로 태아도 하나의 독립적 인간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태아에게 도움을 주는’ 임상시험이 제시되었을 때 이 여성들이 연구 대상이 되는 것 이외의 선택을 하리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며 이러한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는 그 여성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사장하는 한 결코 충분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 동의절차가 많은 경우 의료진과 클라이언트가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가족 중 누군가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면 아마도 수술동의서에 서명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 동의절차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현재와 같이 아무런 제도적 기반없이 새로운 기술이 도입된다면 그 때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상황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도 의료진도 아무런 중재하는 제도없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 사전사후 상담 및 교육의 어떤 기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관례적인 절차로 남기 쉬울 것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어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이 제시하는 미래상은 그것이 유토피아이든 디스토피아이든 과학기술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기보다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토양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체외수정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당장 동성 커플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을 가하는 사회적 환경이 개선되고 가족의 새로운 규범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야만 그들에게 과학기술을 통한 새로운 삶이 현실화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료가 이윤을 추구하는 장치로만 기능하는 한 그리고 전문진과 일반인을 중재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한 아무리 훌륭한 치료법이 개발되어도 그 기술의 혜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새로운 기술이 제기하는 “논란”은 많은 부분이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문제가 되기 시작한 이슈이다. 기존 핵가족 규범의 균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앞에서의 인간생명의 무력함, 한국사회의 따라잡기 강박증 등 이미 곳곳에 노정되어 있던 문제들이 새로운 기술을 기폭제로 하여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은 현실적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논쟁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기술이 또 다른 해방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기술을 둘러싼 사회제도가 그 잠재력 실현 토양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과학기술자를 비롯한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특히 기존 사회의 권력관계의 변화를 모색해 온 시민단체와 현 의료의 문제점을 경험하고 자발적으로 형성된 환우 커뮤니티 등 이미 과학기술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을 행하는 움직임들이 큰 힘이 될 것이다.
생각해볼 문제
1. 지난 2003년 12월 29일 보건복지부가 제안한 생명윤리법(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규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는가?
2. 게놈프로젝트로 불리는 유전체사업은 대부분 공공재정의 지원으로 연구가 이루어진다. 미국의 한 장애우 단체는 “장애아 출생을 예방하는” 연구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다른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반 시설 및 제도에 공공재정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학기술에 대해 공공지원은 어떻게 결정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겠는가?
3. 현재 한국의 의료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이 도입될 때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까와 연관지어서 생각해보자.
읽을꺼리
1. 『위기의 현대과학』(제3세계 네트워크 지음, 김명진․최형섭 옮김, 잉걸 2001)
『에코페미니즘』(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지음, 손덕수․이난아 옮김 2000)
『살아남기』(반다나 시바 지음, 강수영 옮김, 솔 1988)
이 책들은 모두 글로벌 시대의 과학기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다룬다. 과학기술이 기존의 불평등한 지배질서를 재강화하는 수단이 아닌 해방의 잠재력을 갖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선결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2. 『생명공학시대의 법과 윤리』(박은정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0)
『과학기술과 한국사회』(윤정로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0)
『과학기술과 인권』(유네스코한국위원회 편, 당대 2001)
『과학연구윤리』(유네스코한국위원회 편, 당대 2001)
이 책들은 한국에서 과학기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학기술을 다룰 때 어떠한 사회적․윤리적 고려를 해야 되는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한국의 사례에 중점을 두고 있어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