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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점례 첫 시집『버선 한 척』에 나타난 의식 세계
김우연
1.
백점례 시인의 첫 시조집 『버선 한 척』(만인사, 2014.)에는 68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연시조 58편(87%), 사설시조 5편(7%), 단시조 4편(6%)으로 연시조 위주로 창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설시조는 초장과 종장은 단시조형이며 중장이 길어진 형태로 되어 있다.
백점례 시인은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2011, 매일신문)에서 참신한 발상과 4수의 연시조를 주제를 향한 집중적인 시적형상화로 이미 절창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 기대되어 왔다.
시집을 첫머리부터 시인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시적 형상화와 개인의 의식면에서 두드러졌다. 이 시집에 나타난 시인의 의식 세계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시집의 구성에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시집 첫 머리에 실은 작품은「나무의 말」이며, 마지막 작품은「새」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세상에서 순수한 존재인 나무의 마음을 닮고자 하며 끝내는 새처럼 높이 훨훨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의식을 꿈꾸고 있다. 한 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치밀하게 시를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무가 지상의 세계라면 새는 천상의 존재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지상의 세계에서 완전함을 꿈꾸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의 시선을 가지는 것이며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향한 성찰을 보이고 있다.
바람 든 유월 숲에서 가는귀가 열린다
구름처럼 부푸는 나무의 말에 솔깃해져
음색이 푸른 입술에
내 귀바퀴 걸린다
나뭇잎의 허밍은 오래 들어도 신선하다
발라드풍의 선율이 공명으로 울리는 숲
잎맥에 적힌 가사도
되풀이해서 읽는다
-「나무의 말」전문
녹음이 짙은 유월의 숲에서 가는귀가 열린다고 하였다. 세속의 소음 속에서는 들을 수 없던 말들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숲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구름처럼 부푸는 나무의 말”에 이끌리고 나뭇잎의 소리까지 들린다. 그것은 아름다운 서정의 노래이며 사랑의 노래이다. 드디어 소리만이 아니라 잎맥에 적힌 가사까지도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 이 작품은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내적인 정신세계의 일대전환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발라드풍의 선율이 공명으로 울리는 숲”에는 그 어떤 분노의 함성이나 절망이 아니라 잔잔한 선율은 격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사회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소리들이 울려 퍼질 것이라는 전주곡이라고 하겠다.
2.
시집 곳곳에 현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감정을 억제하고서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시의 화자는 관찰자의 모습으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찬바람/ 들이치던
그 여자의/ 반지하 방
앙다문/ 살림살이
꽃대 숨겨/ 피우더니
드디어/ 이사했구나!
활짝 웃는/ 저 얼굴
-「민들레꽃」전문
반지하 방에 살면서 “앙다문 살림살이” 끝에 더 나은 곳으로 이사했다는 내용이다. “활짝 웃는 저 얼굴”은 민들레꽃으로 비유된 반지하 주인공 여인의 기쁨이면서 화자의 기쁨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만큼 시인은 이웃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따뜻한 사랑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민들레꽃 자체로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상징한 것이다. 생명의 존중이란 면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이나 동일시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서민들의 고통 중에는 가장 큰 것이 거주해야할 집인 것이다. 임대아파트에서 근심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도 희망을 기원하는 작품으로「중력」이 있다.
밤새 불빛 몇 개가 근심으로 흔들렸다
임대아파트 퀭한 창에 서둘러 내린 햇살
바닥 난 두멍 가득히 빛줄기를 부어준다
허름한 잠을 털고 눈을 뜨는 행성들 사이
퉁겨질 듯 위태로운 창가에 그림자 하나
허공에 붙들린 채로 먼 풍경을 탐색한다
자궁 같은 공중의 방은 그 어떤 힘이 있어
습관처럼 뜨는 발을 한사코 끌어당기나
닳도록 제자리 닦는 새 아침을 열고 있다
-「중력」전문
첫째 수에서는 임대아파트에 밤새 근심으로 잠 못 이루는 이웃을 생각한다. 그러나 물이 가득 담겨 있어야 곳에 바닥이 났다고 한다. 현실의 경제로 고통 받는 처지에 있는 이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두멍에는 햇살이 가득하다고 한다. 희망을 기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화자는 관찰의 대상자는 고층에서 바라본 이웃들도 서로 단절된 행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현실에서는 근심으로 가득한 곳일지라도 임대아파트는 ‘자궁 같은 공중의 방’이라고 하여 중력처럼 그곳을 떠날 수 없음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닳도록 제자리 닦는 새 아침을 열고 있다”며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뚜렷한 해결책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지만 이웃에 무관심한 요즘 세태에 이런 따뜻한 마음을 보내는 시들이야 말로 진실로 희망을 주는 빛이 아니겠는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웃을 멸시하거나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존재들이라고 무관심해진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시인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모순을 신의 입장에서 외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감정을 억제하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되 가슴 속에는 따뜻한 사랑을 품고 있다.
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그러나 생계의 수단은 변신할 수 없어 옛 방식대로 살아가는 소외자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 있다.
그의 등에는 언제나 짐이 매달려 있다
오일장 끄트머리에 좌판을 벌린 그 남자
풍랑에 미끄러져 온 발목이 단단하다
절여진 희망은 부패하지 않은 채로
바위라도 깰 입담으로 사람들을 붙잡지만
귀 밝은 바람과 햇살만 발등을 쓸고 간다
한물간 기다림은 차곡차곡 챙기는 내력
늘 버티려던 물결에 오롯이 몸을 맡겨
집이 된 든든한 짐을 짊어지는 또 하루
「소라게의 하루」전 문
이 작품은 등짐을 지고 다니는 오일장을 떠도는 장돌뱅이의 모습을 ‘소라게’에 비유한 것이 참신하다. 화자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하며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둘째 수와 셋째 수의 종장에서 화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시인의 시선은 불법체류자에게도 돌리고 있다.
먼 길에 낙오되어
저리 까맣게 외로울까
앙가슴에 심지는 아직 불꽃이 뜨거울까
공단길,
불법체류자 표류해온 저물 녘
또 한 번 낯선 둥지에 눈치껏 몸 붙인다
목 따가운 응어리쯤 삭히고 삼키는 밤
꽉 잡은 기계 소리가
저 멀리 지구를 돈다
내일을 조형하는 조각 다시 맞춰보며
어둠 속 한 시절에 불빛 환히 밝힌 시간
밤샘한
뻐근한 등을
달빛이 살짝, 껴안는다
「허천뱅이별의 밤」전 문
‘허천’이란 사전적인 뜻은 ‘몹시 굶주리거나 궁하여 체면 없이 함부로 먹거나 덤빔’이다. 첫째 수에서는 공단길 불법체류자를 보며 “앙가슴의 뜨거운 심지는 아직 불꽃이 뜨거울까”라며 그들이 뜨거운 희망을 잃지 않고 품고 있는 지에 대하여 화자는 쉽게 단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만큼 객관적인 시선을 놓지 않겠다는 시인의 시작 태도가 일관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목 따가운 응어리쯤 삭히고 삼키는 밤”이라 하여 그들이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나가는 것을 담담하게 나타낸다. “꽉 잡은 기계 소리가/ 저 멀리 지구를 돈다”고 하였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이곳이 하나의 새로운 별이다. 낯선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기에 ‘허천뱅이별’이라고 한 것 같다. 셋째 수에서는 밤샘하고 나오는 공단길 불법체류자의 등에 “달빛이 살짝, 껴안는다”고 하여 희망을 기원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연민의 마음이요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불황의 진눈깨비
마당에 쏟아진다
납품 상자 섬이 되어 묶여 있는 창고 앞엔
해체된 보도블록이 뿔을 세워 뒹글고
몇 해를 일을 찾아
자리 옮긴 그 남자 방
웅크린 보따리가 징검돌로 놓인 날들
사는 일 미끄러지며 젖은 발 또 말리며
일터에서 할인마트 약국 밟고 건너는 하루
제자리로 박히느라 시린 발 참아낸다
시절은 지금 공사 중
절룩이며 가는 길
-「공단길 르포」전문
시적형상화가 잘 되었다. 해체된 보도블록들이 제자리로 들어가야 길이 되듯이, 일을 찾아 떠도는 실업자를 보도블록에 비유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중장과 종장의 비유는 일품이다. 일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남자의 방에 있는 보따리를 징검돌로 비유한 것은 대단한 발상이다. 징검돌 건너다가 미끄러져서 젖은 발을 말린다는 이미지 연결이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었다.
셋째 수에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그곳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시린 발 참아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절룩이며 가는 길”인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리에 보도블록이 박히는 과정이기 때문에 곧 절룩이는 것은 낫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시인은 기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시조는 3장 6구인데 가급적 구라는 것은 두 음보를 한 묶음으로 해야 자연스럽다. 셋째 수 초장에서는 “일터에서 할인마트 약국밟고/ 건너는 하루”가 되어 구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일터’, ‘할인마트’, ‘약국’ 등이 하루하루 건너야 할 징검돌이라서 어쩔 수 없이 파격이 된 것이다. 이처럼 파격을 하더라도 시조를 살리는 파격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파격이 열린 시조이며 그것이 현대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남용하는 사례들도 종종 보이는 데 삼가야 할 일이라고 본다.
휩쓸고 간 감원바람에 내쳐져 떠돌던 길
갓 오십 저 아저씨 버려진 상자 거둔다
비바람 썩어가는 속 툭툭 털어 말리며
멍들고 어긋난 뼈 추스르는 손끝 너머
그 몸 다시 당당하게 조형할 날을 향해
재활용 수거 트럭이 덜컹덜컹 오고 있다
-「낮익은 상자」부분
세계는 자본주의로 재편성되었다. 그것을 떠날 수도 적대시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자본주의로 발달로 인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용의 불안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며, 양극화로 인한 그늘 인생도 나타나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무한 경쟁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농사짓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자유를 찾았지만 자유경쟁의 무거운 짐도 함께 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해를 신들이 사는 세계인 양 착각한다면 더 큰 불행이 일어난다. 분노, 투쟁, 절망, 공격 등의 부정적인 의식으로는 세계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그것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일 뿐이다. 다른 이보다 더 물질을 소유해야 한다는 오만한 인간들은 사회를 파괴시킨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남남 갈등의 핵심은 바로 물질을 더 가지려는 인간들이 민족이나 정의, 민주 등의 명분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물질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했으니 남들보다 물질을 더 가지려는 질투에서 나온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이러한 양면이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감원’이란 말은 노동자에게는 ‘칼날’에 살을 베이는 것과 같고 어쩌면 목숨을 잃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버려진 상자를 거두는 오십 대의 아저씨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넷째 수에서 “그 몸 다시 당당하게 조형할 날을 향해”라며 희망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다.
밤새껏 싸락눈 내린 요양병동 호숫가
얼어붙은 슬픔 녹아 흘러갈 날 짚어보며
몇 마리 물새들 모여 눈물샘 쪼고 있다
-「얼음 호수」부분
산업사회 이후 전통가정은 해체되어 왔다. 그래서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도 돈도 없고 병만 남은 노인 세대들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휘둘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은 요양병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취업, 실업문제가 생명줄이라면 요양병원은 죽음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서는 무한 리필의 물질적인 사랑을 보이고 있지만 시어른이나 부보님께는 관심이 대체로 부족한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시인은 저 병든 노인의 “얼어붙은 슬픔 녹아 흘러갈 날 짚어보며/ 몇 마리 물새들 모여 눈물샘 쪼고 있다”며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속마음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바라보면서도 겉으로는 객관화시켜서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용접공의 데인 하루 창문가에 접어놓고
막 끓은 저녁 밥상 웃음소리 팽창할 때
그 아내 만삭의 몸도
둥실 뜨는 초저녁
-「만월」전문
긍정은 희망을 낳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게 한다.「만월」은 시인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다. 백점례 시인은 연시조의 시인이라 할만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보면 단시조의 형상화 능력이 원숙함을 엿볼 수 있다.시조의 본령은 단시조라는 말이 있듯이 단시조에 대해서도 좀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상으로 몇 작품을 살펴보았다. 시인은 현실을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되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렵고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이 오기를 속으로 염원하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되 어떤 분노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잔잔하게 ‘나무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만큼 시인은 시적 대상에 함몰되어 일체화를 이루어 생소한 소리를 외치지도 않고, 전지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지도 않고 있다.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사회를 밝게 비추는 햇빛이라 할 것이다.
3.
사회를 바라볼 때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자신을 바라볼 때는 주로 자아성찰을 이루고 있다. 먼저 시인으로서의 각오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먼저 읽어본다.
너도 한 번
박차고 뛰어나가 보겠는가
대오의 끄트머리 못 벗어난 보폭의 한계
단번에 무너뜨리고
날아올라 보겠는가
겨냥한
과녁을 향해 표창을 던지듯이
쳇바퀴 저 밖으로 나를 떼미는 거다
발 앞의 돌멩이 하나도
새로 읽는 이즈음에
헐거워진
밑바닥을 거미줄 쳐 맴돈 시간
어느 날 쪼개질 듯 번갯불을 안는 순간
암팡진 날개가 되어 힘차게 나는 거다
반란은
꿈도 못 꿨던 따라지의 저린 오금
꺽지게 어깨를 펴고 삿대질도 한 번하고
중심에 화살촉 하나
결곡하게 박는 거다
-「돌멩이를 보면 차고 싶다」
전체적으로 상승적 이미지가 중심이 되고 있다. 시인으로서 좋은 시로써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보이는 시로 읽힌다. 돌멩이는 시인을 환치한 것이다. 돌멩이에게 대오의 끄트머리에서 벗어나 “단번에 날아올라 보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과녁을 향해 나아가듯이 자신의 목표를 확인하며 셋째 수에서는 “거미줄 쳐 맴돈 시간”이 헛된 시간이라면 “어느 날 쪼개질 듯 번갯불을 안는 순간”이라 하여 수도자들이 깨닫는 순간처럼 확실하게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라 하겠다. 그래서 마지막 수에 오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맞서겠다는 자신감마저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심에 화살촉 하나/ 결곡하게 박는 거다”라며 시를 향한 절차탁마의 각오와 실천 의지를 보인다. 앞으로 절창의 노래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작품「성냥개비」도 이 작품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나, 언젠가 한 번쯤은/ 뜨겁게 타올라서/ 발목 저린 가풀막에 벌건 노을 질러놓고/ 깃발이/ 휘날리듯이/ 저 협곡을 건너리”(첫째 수)
“벙그는 꿈을 꾸다/ 단단해진 붉은 피톨/ 그래, 꼭 한번은 번갯불에 뛰어들리/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뇌관하나 감춘 채로”(셋째 수)
‘나’라는 말을 분명히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보인다. 번갯불이 되어 세상에 번쩍이겠다는 것이다. 기대가 된다. 일단 각오가 단단해야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본다.
시인이 자신을 향한 내면의 구체적인 소리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사설시조라면 세상을 향한 비판의 소리나 서사적인 내용들을 담기에 적절하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백점례 시인은 사설시조를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몇 편에 지나지 않아서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사설시조의 새로운 지평이라면 지평이라 하겠다.
재활용 상자에 올라앉은 가방하나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중략) 늘 같은 사고와 행동을 거부한 낡은 가방처럼 나도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은 시간
깊어진 불면의 거리에 가로등도 골똘하다
-「낡은 가방의 꿈」부분
재활용 가방처럼 시인도 새로운 사고와 행동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깊어진 불면의 거리에 가로등도 골똘하다”는 것은 자신을 가로등에 감정이입을 시키고 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설시조 「아파트」에서는 “공평하게 주어진 상자 같은 저, 방 한 칸”이라며 방들마다 제각기 다른 맛이 풍겨 나오고 있음을 말한다. 종장에서 “난 지금 어떤 맛으로 채워 가고 있는지……” 라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돌아본다는 것은 삶을 향기롭게 하기 위한 준비과정일 것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밑바탕일 것이다.
말 한 마디
내게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말은
내 안의 숲을 어지럽혀 놓았다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가시 돋쳐 우거진 잡초들이 무성한 날
그 말이
평온한 풍경에 진눈깨비 뿌렸다
벼랑을 붙들고 있는 풀꽃이며 잎사귀
아득한 사람의 일도 울창한 숲이다
이쯤에
내 안에 박힌
너를 가만 품기로 한다.
-「어떤 말」전문
세상살이에서 말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말로써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고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는 ‘정구업진언’을 외우고 있고, 모든 종교나 성인들은 말에 대한 금언들을 당부하고 있다.
시인은 첫째 수에서 말로 인하여 ‘회오리바람’을 맞고 있다. 둘째 수에는 그 말은 결국 진눈깨비가 되어 세상을 질척질척하게 만든다. 시인이 얼마나 고통의 회오리바람을 거치고 질적질척한 땅을 밟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반응하는 양상들은 다양할 것이다. 분노, 절망, 불신, 배신감 등등으로 잠을 못 이룬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셋째 수에서 벼랑의 풀꽃들이나 사람의 일도 “울창한 숲들이다”며 대긍정의 자세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이쯤에/ 내 안에 박힌/ 너를 가만 품기로 한다”고 하였으니 세상을 품는 넉넉한 가슴을 느끼게 한다. 감정을 자제하고 비유로 시적형상화를 잘 이룬 작품이다. 이 한 작품은 백점례 시인의 인품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깊어진 그 눈동자 물끄러미 나를 본다
쌀의 힘이 키웠던가 사육당한 빗장뼈를
삼키고 배설하는 오늘 한 마리의 무엇인가
불현듯 눈길 잡힌 조그만 알갱이 앞에
투명하게 못 거르고 부풀린 욕망의 부피
몸 안에 감춰진 냄새 욕설처럼 꿈틀댄다
-「쌀 한 톨」
시인은 쌀 한 톨을 보면서 “삼키고 배설하는 오늘 하 마리의 무엇인가”라며 실존의 참모습을 찾고자 철저히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하여 몸 안에 감추어진 냄새를 디 비우고자 자신을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볍게 더 가볍게 비워가는 그의 속내
들끓던 시간을 삭혀 풀어낼 것을 펴고
절벽 끝 저 강 너머로
바람결에 몸을 푼다
-「억새꽃 언덕」부분
백점례 시인은 억새꽃을 보면서 자신도 억새꽃처럼 “가볍게 더 가볍게 비워가는 그의 속내”를 갖고자 한다.
닫힌 문 앞에 서면 내 속 또한 궁금해져
내소사 대웅보전 묵도로 더듬어 갈쯤
화들짝 깨어나는 꽃, 문살마다 만개했다
틈새마다 결연하게 어깨 서로 걸어주며
제 몸 깎아 꽃을 피운 나뭇결 짚어가자
안과 밖 보듬어주는 오래된 지문의 온기
소통의 창 못 틔우고 뒤척이며 살아온 날
언제쯤 조각의 손 끝 녹슨 문고리 풀어내고
꽃처럼 세상을 향해 활짝 필 수 있을까
가지런히 벌어나간 칼 끝의 빗살이파리
햇빛과 그림자의 말 아우어져 피어 있는
꽃살문 글을 읽으며 열어가는 내 안의 문
-「꽃살문 독후감」전문
시인은 이 시집에서 ‘문’이라는 말이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은 쉽사리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깊은 사유를 거쳐서 한발 한발 자신의 내면을 열어가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창살에 새겨진 꽃을 보면서 문득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셋째 수에서는 “소통의 창 못 틔우고 뒤척이며 살아온 날”이라며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꽃처럼 세상을 향해 활짝 필 수 있을까”라고 꽃을 피우고자 하는염원을 노래하였다. 넷째 수에서는 “햇빛과 그림자의 말 아우러져 피어있는/ 꽃살문 글을 읽으며”라며 세상은 밝음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그만큼 사유의 깊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한 쪽 면을 바라보기 쉽고 한 쪽 말을 듣기 쉽다. 그래서 장자는 “있는 그대로 인정(因是)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고 하였다. 백점례 시인의 세상보기는 바로 양극을 떠나 중도의 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내소사 꽃살문을 통해서 조화의 세계 그 자체인 화엄의 꽃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어가는 내 안의 문”이라 하여 성인들이 이룬 안목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백점례 시인의 내면세계는 이미 화엄의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절창이다.
이런 노래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사설시조「먹는 꽃」에서는 “기름기로 두꺼워진 창자 속 꽃잎은”이라고 초장을 뽑은 후에 중장에서 “속을 채우는 일도 사치일 수 있는 것, 아무리 먹어도 향기롭지 못한 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꽃잎마저도 속을 채우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다고 속을 비우고자 한 것이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이란
설익은 속을 끓여가는 것이라고
부글부글 끓이면서 익혀가는 것이라고
쏴 하게 내뿜는 김 속의 더운 날을 끌고 간다
안개 속의 간이역을 몇 번쯤 지났을까
활짝 핀 밥풀꽃이 턱 밑에서 웃고 있는
뜸들인 생각의 끝에 윤기가득 흐른다.
-「어둑새벽 압력밥솥」부분
생활 주변의 소재로써 이처럼 시로 형상화시키는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삶이란/ 설익은 속을 끓여가는 것이라고/ 부글부글 끓이면서 익혀가는 것이라고”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내적, 외적 갈등의 연속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뜸들인 생각의 끝에 윤기 가득 흐른다”며 끝내는 윤기 흐르는 밥이 되듯이 시인은 항상 세상을 바라보되 긍적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
남은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모습들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귓속에 박힌 돌」에서는 “지난날 스스럽게 던졌던 말 화살되어/ 사람의 일 돌고 돌아 내게로 꽂힌 걸까”라며 자신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시인이 어찌 남에게 모진 말을 했겠는가. 그러나 말이란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잘못 전달되는 수도 많으니 살펴보고 또 살펴보는 마음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백점례 시인은 삶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아주 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간단없이 에움길 돌아 가 보는 거다
서투른 보행으로 허위허위 오르는 일
한 세상 우렁잇속같이
꼬인 길을 푸는 거다
지친 무게 추스르며 삐걱대는 낡는 구두
치받이 흐르는 땀, 별이 드는 옥탑방으로
발목뼈 굵어지면서
돌고 돌는 길이 멀다
때로는 중심 잃고 기우는 몸을 버텨
어지럼도, 회오리도 힘차게 끌고 가는
달팽이 기어오르며
둥그렇게 껴안는 생
-「나선형 계단」전문
달팽이가 천천히 기어오르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이란 마치 앞이 보이지 않고 ‘우렁잇속같이 꼬인 길’일망정 그것을 풀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달팽이 자국」에서도 “수만 번 배밀이해서 물길 틀었구나”라고 한 것도 이 작품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시인의 시작도 그저 쉽게 되는 것이 아님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자신의 서정에 충만한 시들도 보인다. 「미루나무 수사학」에서는 “나 한 번 그대 곁에서/ 살아봤으면 싶었네”, “한 잎의 천진한 얼굴로 살아가고 싶었네”라며 순수한 낭만의 세계에서 해맑은 소녀같은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란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시적 형상화를 잘 이루고 있다.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일면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는 「아이 오는 날」이 있다. 두 수의 연시조인데 첫 수 초장에서 “적막으로 다물었던/ 문이 방긋 열립니다”라고 하였으며, 둘째 수 종장에서는 “햇살 든 둥지 속으로/ 웃음 물결 퍼집니다”라고 하면서 화자의 기쁜 마음은 슬쩍 뒤로 감추고 사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시집 전체를 일관하는 시인의 시적 형상화의 바탕을 이루는 시선이다.
4.
이상으로 「나무의 말」에서 시작된 시인의 눈길은 주변의 현실에 대한 시선과 자신의 내면에 대한 시선으로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외부로 향하는 시선에는 시적 대상에 함몰되어 대상과 일체를 이루지 않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자의 입장에 있다. 그만큼 감정을 억제하되 따뜻한 시선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백점례 시인의 특징이자 개성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을 향하는 것에도 감정을 쉽게 노출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관조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백점례 시인의 의식세계는 현실의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바탕이 되어 있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성찰하여 순수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여러 작품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내면 의식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생각하여 성숙시키고 있기 때문에 ‘화엄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시란 자칫하면 흔히 말하는 ‘뼈다귀의 시조’ 아니면 ‘껍데기의 시조’가 되기 쉽다. 그러나 비유를 거쳐서 시적 형상화를 잘 이룬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배어나오는 맛이 있다. 백점례 시인의 시는 시적 형상화를 잘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백점례 시인은 이제 걸림없이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시의 하늘을 날고 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 활활 날아다니기를 기원하면서 첫시집에 이어 계속 더 좋은 시집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시집 마지막 작품을 읽으면서 첫시집 발간을 거듭 축하한다.
바람처럼 솟구치는 모든 새는 상큼하다
떨어질 듯 처박힐 듯 바닥치고 날아올라
저 맨발 구름 난간을 홀로 가며 드높다
-「새」전문
백점례 시인은 지금도 구름 난간을 홀로 날고 있으리라. 앞으로는 더욱 높이 더욱 멀리 날아다닐 것이리라.
첫댓글 선생님,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또 이렇게 자세히 평을 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용기를 잃을까봐 부족한 점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생각 합니다. 복사해서 간직하겠습니다~~
평해 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첫 시집을 내신 분 축하 드립니다.
김우연 선생님의 작품집 평
참 대단한 관심과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