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명예졸업장
박양자
--명절도 제사도 아닌 날에 너희들이 웬일이냐?--
버선발로 마중 나오실 부모님 모습을 그리며 영전에 삼가 큰절을 올립니다.
저희들도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아버지께서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신 후, 평양으로 가서 의학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부끄럼인지 자랑인지도 모른 채 무덤덤하게 묻혀버린 아버지의 젊은 날을 회고해봅니다.
의사로써 아버지의 첫 부임지는 고흥 소록도였다고 합니다. 큰집에서 달랑 조선간장 한 병만 받아 들고 분가해서 시작한 두 분의 신접살림은 얼마나 옹색했을까요. 소록도에서 시작해서 함경도 성진을 거쳐 땅끝마을 해남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수많은 지역에서 때로는 개업의로, 군의관으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신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뿌리내리지 못하신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불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의사야말로 안정된 고수익이 보장되는 선망의 직종이지만 우리는 풍족함을 누리기는커녕 오래도록 온갖 결핍을 감내하며 자라야했지요.
어느 것 하나 ‘내 것’을 가져보지 못한 공유경제의 시절이었습니다. 8남매가 다 학교엘 다녔지만 변변한 책상은커녕 책꽂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차지하지 못해 울면서 학교에 갔던 기억도 납니다.
대학 진학도 적성이나 특기 대신 장학금을 보고 학과나 전공을 선택했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광주 천변의 헌책방을 뒤져 교재를 사야했지요. 때로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탓하며 자신의 미래만을 고민했을 뿐 부모님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한 불효를 고백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성장기인 50~60년대는 국민 소득이 세계 최하위권인 빈민국가였으니 가난은 비단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그 시절에 익힌 절제와 검약의 미덕은 훗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물려받은 정신력으로 키워낸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카들 중엔 공학박사도 있고 외교관도 있습니다, 대기업의 임원이나 변호사도 있네요. 금융인, 방송인, 성직자, 작가, 기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금년은 3.1운동 100주년,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열렸는데 우리에게도 희소식이 왔습니다. 3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른 사람으로 한정한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이 완화되어 5.18 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된 광주학생운동의 기록을 전수조사해서 묻혀 졌던 유공자를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단순한 퇴학생이 아니라 투철한 역사의식을 실천하신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후세에 오래 기억되실 것입니다.
지난 3월 4일, 광주일고의 입학식에서 숙자가 무려 90년 만에 아버지의 3회 명예졸업장을 받은 것입니다. 숙자도 울고 사진을 전송받은 다른 형제들도 각자 집에서 모두 울었습니다.
오늘은 그래서 슬프고도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모든 형제가 모여 부모님의 산소에서 졸업장을 낭독해드리는 행복한 날입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지난날들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피 끓는 청년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하셨고 또한 의사가 되어서 청진기 하나만으로 수많은 생명을 회생시키신 아버지의 일생을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사후에 지킨 약속
(윤선자를 추모하며)
박양자
그건 단순히 슬픈 소식이 아니었다. 나로썬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이었다.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든 중견화가 윤선자가 사우나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열흘간 투병하다가 끝내 숨졌다니… 한 줌의 재가 되어 인천 앞바다에 뿌려진 후에야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가 결코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소에 지병도 없었고 타고난 에너지가 넘치는 만년소녀였기에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구는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한 명승지를 찾아 스케치여행을 다니는 게 거의 일상이다시피 했고 해외여행도 잦은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만날 때 마다 꼭 뒤끝이 좋았던 건 아니다. 나는 선자의 그림을 좋아했고 친구는 내 수필을 사랑했지만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여서 티격태격하다가 토라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서두르듯 가려고 그랬는지 지난 가을엔 거금을 들여 대서양 연안을 유람하는 장기간의 크루즈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 턱을 내마고 해서 연신내의 작은 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했는데 친구는 몰라보게 살이 빠지고 얼굴이 피고 아름다워졌다.
“너 혹시 이번 여행길에서 로버트라도 만난 거 아냐?”
로버트는 오래 전에 개봉한 미국 영화-<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작중 이름이다.
우리는 가끔 영화 같은 불륜의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 메릴스트립이 되어서 클린트이스트우드가 나타나주기를 소망하는 철없는 노년이었다, 주책없는 망녕끼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은밀한 꿈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흔치는 않으리라.
서로가 쉽사리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아픈 가정사까지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리고 감출 필요도 없었다. 요즘도 문득 할 말이 많아서 전화를 돌리다가--(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하고 그녀의 딸인 수지와 통화를 하게 된다.
선자는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광주에 사는 내 동생 숙자가 서울 오거든 꼭 일영 집에 데려오라는 것이다.
그녀의 세 번째 전시회 무렵인가 50호 짜리 갈대그림을 숙자가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는 그 일을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림을 돈 주고 사려하지 않고 공짜로 얻으려고만 하는 세태 속에서 자기의 그림을 좋아하고 구입해서 소장해주는 데에 대한 감사로 화사한 꽃 그림 한 점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정작 화가는 떠났는데 그 말을 우연히 전해들은 딸 수지가 우리더러 그림을 가지러오라고 한다. 엄마가 하신 약속이면 당연히 자기가 지켜야하고 천상에 계신 엄마도 기뻐하실 거라며….
광주에서 일부러 올라온 동생과 나는 물안개처럼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천변을 달려 선자가 딸 내외와 함께 살았던 일영의 전원주택에 도착하였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친구가 쓰던 침대와 탁자와 찻잔 등 모든 소품이 주인을 잃은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실 벽을 따라 주욱 늘어놓은 그림까지도.
먼 길 오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며 수지는 다락방 창고에 보관했던 것까지 모조리 꺼내와 거실은 순식간에 화랑의 전시장이 되었다. 우리가 마당에서 흔히 보았던 맨드라미나 붓꽃도 화가의 손길을 거치면 명화로 탄생하는 모양이다.
선명한 원색이나 신비스런 파스텔톤의 꽃그림이 펼쳐 보이는 자연의 향연 속에서 우리는 잠시 넋을 잃었다.
미쳐 예상치 못한 그 자리는 분명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인을 추모하는 회고전이었고 추모전이었다.
동생은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골라서 무척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광주로 내려갔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의 여운 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친구여, 지금은 모든 애증을 다 잊고 주님 품안에서 평안하게 지내는지….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 나설까--
이제 머잖아 벚꽃도 꽃망울을 터뜨릴 텐데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노랫말이 더욱 더 가슴에 사무치는 봄날의 저녁이다.
첫댓글 주간님~^^ 두편 글 잘~읽었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훗 날 이라도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와서 아버님의 애국심과
당시의 가난과 싸우며 살아왔던 그 시절을
다시금 반추 할수 있는 이 시간을 갖게 됌에 아버님께 효도 하셨네요.
이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묻혀버릴 것을~~~~고맙습니다.
수필의 정석 먼 옛날의 추억 일지라도 가슴이 뜨겁습니다 .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선생님 좋은글 마음에 새겨봅니다. 홧팅입니다. ㅎ ㅎ ㅎ 좋아요